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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전쟁·밀리터리

필스너
작품등록일 :
2022.05.11 11:45
최근연재일 :
2022.06.11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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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5.26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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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쪽

<32화>

병자호란




DUMMY

 *           *           *


 디퍼슨을 출발했다는 퓨그군에 대한 첩보를 시간으로 계산해보면, 몇 시간 안에는 파로이강을 건너 코르군 진영으로 적이 들이닥칠 게 뻔했다.

 태풍이 오기 직전의 고요함이랄까...

 기온은 더 떨어졌지만 그렇게 세차게 불던 강풍 ‘보라’는 갑자기 잦아들었다. 육군의 출정과 함께 분명 적기가 출격할 환경을 호크런(Hawkrunn)이 마법으로 조성하고 있음은 당연한 이치였다.


 샤키(Sharky), 샤니(Shanny), 하멜(Hamel), 하이란(Hiran)...

 최전방에는 이제 이 네 사람만이 남았다. 휘레스왕과 에반을 비롯한 모든 코르군은 베니안 왕세자의 시신을 실은 마차와 함께 이미 퇴각의 길에 들어선 뒤였다.

 이들은 황량한 맨츠 벌판을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결전의 의지를 다졌다. 그러나 지난 여름 맨츠로 처음 잠입하기 위해 이스트 포인트의 격납고에서 모였을 때 보여주었던, 그 흥분과 각오를 이번에는 찾을 수 없었다.

 따지고 보니, 그때는 정찰을 위해 적군 몰래 맨츠로 넘어오는 게 임무였고, 이번에는 적군과의 본격적인 전투를 위해 공식적으로 출격하는 상황이었다.


 이미 인덤스 해전에서 수정 엔진의 성능이 탁월한 것을 확인한 뒤라 어느 정도의 자신감이 뒷받침되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적의 수도에서 직접 적군의 본진이 출정하는 그런 현실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항공모함에서 이착륙을 할 수 있도록 개조한 전투기와는 근본적인 성능에서 차이가 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황제인 호크런이 친히 매머드 군단을 앞세워 나타날 것이라는 차디찬 두려움도 서서히 밀려왔다.


 이들에겐 지금 단 한 가지의 목표만이 존재했다.

 시간을 끄는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정면승부로 적을 이길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그럴 만큼 많은 석궁과 폭탄을 실을 공간도 두 대의 전투기엔 존재하지 않았다.

 최대한 적군의 시선을 유도하고 시간을 끌어 진격 속도를 늦춰야만 했다. 후퇴하고 있는 코르군의 본진이 중간에 파르코 장군의 보급품 부대를 만나 기력을 회복한 뒤, 빨리 파로이강 하구에서 전함에 올라 본국으로 돌아갈... 그럴 시간적인 여유를 생도들이 만들어야만 했다.


 스페르베르(Sperwer)호와 보라(Bora)호 앞에 모인 네 사람은, 입술을 굳게 닫은 채 서로의 손을 다시 맞잡았다.

 침묵의 시간이었지만, 암묵의 결의였다. 그것도 최고로 당찬 각오로...


* * *


 두두두두두~~~

 하얀 벌판에서는 인위적으로 만든 거대한 눈보라가 서서히 달아올랐다. 말발굽 소리에 천지가 진동하고 있었고, 그 여진은 이제 이륙을 준비하는 생도들에게까지 느껴졌다.


 부우우우웅~~~

 생도들은 수정 엔진을 점화하여 곧장 맨츠의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하멜이 스페르베르호의 조종간을 잡았고, 하이란은 뒷자리에서 무기를 점검했다. 보라호는 샤키가 조종을 했고, 샤니도 역시 공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적의 기마부대가 눈보라를 헤치며 파로이강을 넘어 맨츠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들의 앞에는 거칠 것이 없었다. 그 뒤로는 수만 명의 보병이 뒤를 따르는 중이었다. 하늘에서 그 위용을 바라보던 생도들은, 침이 바싹 마르고 입이 타들어갔다. 샤니는 기가 질린다는 말부터 꺼냈다.

 그런데 아직 매머드는 보이지 않았다. 황금마차를 타고 이동한다는 황제의 행렬도 찾을 수 없었다.

하멜은 문득 한즈(Hanz)로 돌아가 부상을 치료하고 있을, 그리고 지금쯤은 많이 호전되었을, 아니 꼭 그래야만 하는... 얀스가 떠올랐다. 이번 전쟁에 호크런이 출정하지는 않을 것이며, 매머드의 존재에 대해서도 많은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던 얀스였다. 마지막으로 인덤스에서 잠깐 만났을 때 말했던 얀스의 예상이, 그대로 적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얀스를 생각하니 하멜은 갑자기 힘이 솟았다. 늘 자신을 위해 충성을 아끼지 않는 그였다. 그의 바람대로, 이번에 멋진 승리를 거두어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보이겠다는 의지가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제는 저 멀리서부터 반짝이는 게 몇 개 보였다. 적기 편대가 분명했다. 

 망원경으로 확인하니 5대씩 무리를 이루어 3개 편대가 날아오고 있었다. 총 15대의 적기를 어떻게 상대하느냐에 따라 이번 전투의 승리가 판가름 나는 것이었다. 적기를 모두 물리쳐야만 적 진영에 폭탄을 투하할 시간과 공간을 벌 수 있는 거였고, 그래야만 적군의 진격 속도를 늦출 수가 있을 것이었다.


 쓔우우우웅~~~

 적기들과 거리가 좁혀지자 하이란과 샤니는 즉시 석궁을 날렸고, 이는 적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적기가 가진 석궁의 성능 또한 만만치가 않았다.

 얀스가 새롭게 설계해서 하멜에게 그 제조 방법을 알려준 석궁과 산탄폭약을 장착한 화살은 사정거리나 그 폭발력에서 최강의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적군도 벌써 그와 비슷한 신무기를 만들었음이 분명했다.

그러니 하멜의 조종술과 하이란의 활솜씨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적에게 근접하여 일대일로 공중전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적기가 바로 뒤에서 공격을 한다면 스페르베르호나 보라호는 결코 무사하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선배! 작전을 바꾸자고요. 우리가 적기를 유인할 테니, 선배는 일단 구름 위로 올라가서 숨으세요. 그러다 급강하를 할 때 순식간에 나타나서 뒤에서 공격을 하세요!” 말을 마친 하멜은 적 진영을 향해 깊숙이 스페르베르호를 몰았다.

 “그래, 그게 좋겠어. 어쨌든 조심하고!” 보라호의 샤키는 하멜의 제안대로 곧장 구름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러자 적기 중 한 대는 보라호를 잡으려는 것인지 구름을 뚫고 올라왔고, 나머지는 즉시 하멜을 잡으려 달려들었다.

스페르베르호는 갑자기 급강하를 하였다. 적기들은 이내 한꺼번에 하멜을 쫓기 시작했다. 하멜은 이리저리 방향을 틀어가며 적기의 약을 올리며 유인했다.


 적들은 최대 출력으로 하멜을 쫓았으나, 스페르베르호의 새로운 엔진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조금 더 날아 저쯤의 아래에 적의 기마부대가 진군하는 모습이 가깝게 보였을 때, 하멜은 갑자기 급상승을 하였다. 그러자 적기들도 그대로 따라왔다. 그렇게 한참을 오른 하멜은 다시 급강하를 하였다. 이 순간에 적기들은 본격적으로 석궁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하멜이 이번에는 나선을 빙빙 그리면서 스페르베르호를 조종하여 따라오는 적기들이 흩어지지 않고 샤키의 사정권 안에 모두 모이게 하였다. 또한 하멜을 향해 쏘아대는 적기의 석궁 중에 빗나간 화살은 오히려 지상에서 이동을 하는 퓨그군에게 날아들어 이들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때 갑자기 구름 속에서부터 보라호가 나타났다. 이제는 보라호에서도 화살이 빗발쳤다.


 *           *           *


 국왕의 말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추위와 배고픔 속에 황량한 맨츠의 눈길을 철벅거리며 겨우 헤쳐나가느라, 이젠 진이 거의 다 빠지고 있었다. 그동안 신선한 여물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말로만 국왕이 타는 준마이지, 실제는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자기보다 왜소한 당나귀만큼의 힘도 못쓰는 것처럼 보였다.

 그 위에 올라타고 몸을 웅크린 국왕의 초췌함은 자신의 말보다도 훨씬 더 비참했다. 참모와 장군들에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지금 왕의 가슴은 이미 새까만 숯이 되어 있었다. 더 이상 흘릴 눈물도 남아있질 않았다.


 이번 전쟁은... 분명 섣부른 출정이었다.

적을 이길 결정적 한 방의 최첨단 무기가 아직 없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19년 전 퓨그 제국에게 당한 매머드에 대한 준비도 다 되었다고 에반이 보고하기는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에는 너무도 많은 변수가 있었다.

 유스토(Usto)항에서 양 국의 군사들 사이에 갈등과 무력충돌이 발생하여 국경 수비대가 퓨그군에게 몰살을 당했다고 했을 때, 또한 베니안까지도 처참하게 살해당했다는 보고가 들어왔을 때, 왕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잠시 접고 그때의 상황을 제대로 확인했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들이 죽었다는 소리에 순간 판단력을 잃었고, 결국은 에반이 부추기는 대로 그냥 따라가고야 말았다.


 어쨌든 최종적으로 선전포고와 함께 전면전에 대한 재가를 내린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할 수도, 탓할 수도 없었다. 못난 아비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그 꽃다운 나이에 저 세상으로 가버린 아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갈갈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맨츠의 추위 속에서 태어나 선천적으로 병약한 신체를 가졌고, 또 일찍 어머니를 여의어 마음의 상처가 큰 베니안이었다. 하지만 그런 결함이 있었음에도 온갖 병마와 처절히 싸워가며 그토록 바르고 당당하게 성장했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었는데... 왕은 갑자기 모든 꿈이 사라졌다는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솔루노픽스(Solunopeaks)’의 비밀을 풀었다면... 분명 그 병풍 안에 있을 사라진 ‘황제의 별’에 대한 단서를 생도들이 알아냈다면... 진즉에 별에 대한 지난 이야기를 생도들에게 풀어놓았다면... 수수께끼를 풀 시간이 좀 더 넉넉하게 있었다면... 이런 회한이 끝도 없이 왕에게 밀려왔다.


"지금의 이 솔루노픽스는 형수님이 친정으로 쫓겨간 다음에, 아마도 거기서 완성하신 것 같았다. 디퍼슨에서 자수를 뜨실 때는 붉은 소나무가 없었는데, 친정에서 그것을 더 그려 넣으시고는 독배를 마시기 전 사람을 시켜 시동생인 짐에게 몰래 전달하셨다. 짐은 이 병풍을 건네받는 순간, 이것은 형수님이 짐에게 남기는 마지막 유언이라고 생각했다. 형님과 형수님만이 알고 계셨던 퓨그를 이길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절대적인 힘의 원천, ‘황제의 별’을 찾을 수 있는 마지막 단서라고 확신했다. 아바마마께서 붕어하시고 짐이 국왕에 오른 후, 형수님의 친정 집터를 샅샅이 조사했지만 다른 보물이나 단서는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이 병풍에 얽힌 과거를 에반에게 얘기해봤자, 그는 형님과 형수님을 미워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이유를 들어 이것을 파괴하려 했을 것이다. 그래서 짐은 지금껏 이것을 숨겨왔다. 하지만 짐은 당시 형님 부부의 선택과 판단을 끝까지 믿고 있다. 그러나 모두 돌아가셨고... 그래서 이제부터 짐은...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을 한 번 믿어 보겠다. 분명 ‘황제의 별’의 존재를 두 분은 알고 계셨고, 또 그 단서를 어딘가에 남기셨을 것이다. 지금 퓨그가 요구하는 조공은 기한 내에 절대 맞출 수 없다. 아니 맞출 수 있다 하더라도 그만한 조공을 다시 바친다는 것은, 우리 코르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제 퓨그와의 전쟁은 점점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군사력으로는 결코 퓨그를 이길 수 없다. 결국 우리는 절대적인 힘의 원천을 찾아야만 한다! 허나 시간이 별로 없다! 그래서 짐이 여러분에게 이렇게 간곡히 부탁한다."



 휘레스왕은 징계를 받은 파르코와 생도들을 프로스궁으로 불러서 병풍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던 지난 여름의 그 순간이 떠오르고 또 떠올랐다. 붉은 소나무가 추가된 솔루노픽스를 보여주면서, 분명 이 안에 퓨그를 이길 수 있는 단서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었다. 생도들에게 그 비밀을 꼭 좀 찾아달라고 애원했었다.

 하지만 생도들은 아직도 그 비밀을 풀지 못하였고, 최소한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고 고개를 떨구었었다. 그랬는데도 전쟁을 개시했고, 이제 아들도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만신창이가 되어 후퇴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상태로 설령 안전하게 맨츠에서 탈출을 한다 한들... 한즈로 돌아가서 다시 힘을 충전해 호크런과 맞설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신의 대를 이을 자식도 없었다.

 언제 어떤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여 다시 아들을 보고, 또 그 아들이 언제 다시 커서 자신의 후계자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때까지 자신이 건강하게 버틸 수는 있을까?

 자기 가문의 시조이자 코르의 개국 군주인 콘스트라(Constra) 태조 이래로, 700여 년간 이어온 종묘사직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는 있을까? 

 한마디로 눈앞이 깜깜했다. 자신의 대에서 모든 것이 끝날 수도 있다는 차가운 절망만이 다가왔다. 그것은 맨츠의 이 추위와 배고픔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처절하고도 암흑 같은 절망이었다.


* * *


 코르군 본진은 휴식 같지도 않은 휴식을 위해 잠시 멈추었다.

 사방은 모두 자작나무 숲이었다. 하얀 나무의 껍질 위에는 더 하얀 눈이 잔뜩 붙어있었다. 그저 그걸 한 입 떠먹으면 당장의 갈증은 해결할 수 있었지만, 며칠째 굶어온 허기짐을 달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희망이 보이는 것은, 여기서 한나절만 더 가면 보급품을 실은 파르코 장군의 부대를 만날 것이라는 조류 통신의 보고였다. 이제 조금만 더 참으면 그토록 원하던 식량과 따뜻한 방한복을 얻을 수가 있었다. 

 왕도 잠시 말에서 내려 숨을 돌렸다.

 

 “그래, 이 자작나무가 겉도 단단한 게 속도 반질거리고... 나름대로 괜찮구먼.”

 “맞습니다. 이거면 보급품 부대를 만나기 전까지는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근데 워낙 추운 날에 꽁꽁 얼어서 껍질이 넓게는 잘 벗겨지지 않는데요. 이게... 잘 안되네. 어휴 힘들어...”

 문득 왕의 귀에 제법 밝은 목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살짝 들려왔다.


 “저들은 지금 쉬지를 않고 무엇을 더 하는 것이냐?” 왕이 참모를 불러 물었다. 그러자 그 장교는 부리나케 달려가 이유를 확인하고 돌아왔다.

 “네, 폐하. 사초를 적는 사관들인데, 자작나무의 껍질을 넓게 채취하고 있는 줄로 아뢰옵니다.”

 “자작나무의 껍질을? 아니 이렇게 힘든 행군 중에 그런 건 어디에다 쓰려고?” 왕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하며 물었다.

 “기록을 남길 초고(草稿)용 종이가 모두 바닥이 나서, 그 대용으로 나무의 껍질에라도 적는 것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참모가 공손히 대답했다.

 “이런 이런 갸륵한지고. 그래도 이제 조금만 있으면 보급품을 만나는데, 그런 건 그 이후에 정리해서 적어도 되는 것 아니더냐? 지금은 좀 쉬어야지... 어쨌든 저들을 이리 좀 불러오너라.” 왕은 그들의 수고를 안타까워하며 말했다.


 잠시 후, 사관 둘이 왕 앞에 불려왔다. 

 왕은 고생이 많다고 칭찬하면서도 이 추위에 나무껍질을 벗기는 일은 당장 급하지가 않으니 나중에 하라고 다정히 얘기했다. 그러나 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간절한 목소리로 대답하기 시작했다.

 “어인 말씀을요, 폐하. *소신들의 임무는 폐하와 관련된 일을 매 순간순간 빠짐없이 기록하는 것이옵니다. 종이가 없다면 나무껍질에다가도, 만약 그마저도 없다면 소신들의 몸뚱어리에다가도 적어야만 하옵니다. 잠시라도 시간을 늦춰 글을 쓴다면, 분명 그 기억에 착오나 오류가 생길 수도 있다고 선배 사관들에게 늘 가르침을 받아왔사옵니다. 그러니 부디 청하옵건대, 천천히 해도 된다는 명만은 거두어 주시옵소서.” 한 사관이 고개를 조아리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왕은 이들의 충정심에 목이 메었지만, 다시금 성대를 가다듬으며 그래도 잠시 동안이면 되니 이제는 좀 쉬라고 다시 한 번 그들을 다독였다. 그러나 다른 사관의 대답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폐하께서 그리 말씀을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망극하옵니다. 허나 지금 폐하께옵서 소신들에게 말씀하시는 것 또한 그대로 기록에 남겨야만 하는 것이 소신들의 임무이옵니다. 이는 콘스트라 태조 폐하 이래로 700여 년 동안 한 번도 어긋남이 없이 내려온 사관들의 소임이오니, 소신들은 그저 그 임무에 충실할 뿐이옵니다.”

 “그래, 그랬구나. 너희들의 수고가 참으로 크도다.” 왕은 찬찬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과찬의 말씀이시옵니다, 폐하. 사실 소신은 폐하께서 디퍼슨에 계셨을 때에도 늘 그 곁에서 폐하의 고뇌와 고생을 목격했사옵니다. 폐하의 형님이셨던 당시 브리젠(Brizenn) 세자 저하와 동생이신 폐하와, 두 형제분의 아름다운 우애를 보면서는 늘 존경의 마음이 앞섰었고, 두 분께서 디퍼슨으로 함께 끌려온 우리 백성의 세세한 부분까지 챙기시는 모습에는 언제나 감동할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분명 폐하께서는 디퍼슨에서의 그 힘든 시간도 잘 견디어 내셨으니, 이번의 위기도 다 극복하실 것이옵니다. 그러니 폐하, 소신들의 걱정일랑은 하지 마시옵고, 부디 폐하께서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옵소서.” 이들은 오히려 왕을 위로하며 격려의 말을 꺼냈다.

 “허허허...” 왕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지만, 이미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글썽이고 있었다. 그리고는 잠깐 한숨을 쉬더니 오랜 기억들을 떠올리느라 한동안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모두는 왕의 다음 말을 기다리느라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 조선시대의 실록은 세계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왕실에 대한 방대하고도 자세한 기록임.

 중국은 최초의 실록인 ‘명실록’에 명나라 294년의 역사를 기록했지만 황제가 마음대로 삭제하거나 파기하는 등, 공정한 실록으로서의 가치가 다소 떨어짐.

 일본의 경우, 실록이라는 명칭으로는 ‘삼대실록’이 있지만 고작 3대 왕의 재위 기간인 29년의 역사 기록물임. 그것도 당대에 실록을 편찬하는 제도가 없어서 후대에 정리를 했고, 그 때문에 중요한 기록들이 많이 빠져있음.

 이에 비해 조선왕조실록은 단일왕조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점 외에도 공정성과 객관성에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기록물임.

 왕의 곁에 사관을 두고 국사를 빠짐없이 기록했으며, 사관은 철저하게 공정성과 소신에 따라 역사를 기록했음. 또한 그 기록은 당대 왕이라 할지라도 열람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실록의 진실성과 객관성을 확보하였음.



 그런 분위기가 다소 어색했는지, 옆에 있던 스푸든 대령이 머뭇거리다 슬쩍 왕의 눈치를 보며 목을 한 번 가다듬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음... 그럼 여기의 사관님께서는 젊은 시절 **디퍼슨에서도 그렇게 폐하와 또 브리젠 세자 저하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일이 다 기록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스푸든 대령님? 그것이 당시 저에게 주어진 임무였고, 또 지금도 그대로 하고 있는 것이옵지요.” 사관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스푸든에게 대답했다.

 “그랬군요. 폐하 앞에서 제가 드릴 얘기치고는 좀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사관님께서는 참으로 지극한 충정심을 가지셨습니다.” 스푸든도 살짝 목례를 하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대령님. 저희는 그저 나라에서 시키신 아주 사소한 일만을 하고 있는 것인데요, 뭘. 대령님께서야말로 지난 ‘7일 전쟁’에서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오직 나라와 폐하께만 목숨 걸고 충성을 바치고 계시고, 이는 우리 코르의 웬만한 백성이라면 다 아는 사실인데, 저희의 행동이 어디 대령님의 그 충정심에야 비교가 되겠습니까?” 사관이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자 스푸든은 “아니, 무슨 그런 말씀을...”이라고 가볍게 답하며 연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 디퍼슨... 디퍼슨에서의 그 한 맺힌 시간들... 그땐 정말 힘들었었지. 형님께서도 참으로 힘들다고 말씀을 많이 하셨고, 짐도 많이 힘들었고... 또 그 누구보다도 힘없이 끌려온 우리 백성들... 그 모든 백성이 참으로 고생을 많이도 했었구나... 그곳에서 끝내 견디지 못하고 눈을 감은 백성들만 생각하면 지금도 짐의 마음은... 후...” 왕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소신은 모두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폐하. 늘 백성을 먼저 생각하시던 브리젠 세자 저하와 폐하의 그 어지신 마음과 거동을... 단 한 순간도 소신은 감사하는 마음을 잊은 적이 없사옵니다. 모두 기억하였고... 또 모두 세세히 글로써 기록하였사옵니다.”

 “그래, 그랬구나. 디퍼슨... 그러고 보니 형님이 먼저 코르로 귀국을 하시기 전날 저녁에 짐과 함께 나누었던 때도 생각이 나는구나. 그게 형님을 보는 마지막 순간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그때 했던 그 대화가 참으로 아련하게 다가온다... 형님이 짐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었지....... 세상은... 세상은... 뭐라고 말씀하셨을 때... 당시에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감이 잡히질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혹시... 그게... 잠깐, 디퍼슨! 그래, 지금 디퍼슨에서의 짐과 형님의 모든 대화나 행동을 전부 기록하였다고 했느냐?” 왕은 갑자기 번뜩하는 생각이 들어 말했다.

 “네, 폐하. 소신과 다른 사관이 늘 곁에서 붙어 다녔고, 당연히 기록할 수 있는 두 분의 모든 언행을 글로써 다 기록하였사옵니다. 그게 소신의 임무였는지라...”

 “그럼 그 기록도... 지금 거기에 있다는 말이더냐?!” 왕은 대단한 것을 발견이라도 한 표정을 지으며, 큰 목소리로 물었다.

 “네? 무슨 기록의 어디를 말씀하시는 것이온지...”


 ** ‘소현세자 심양일기’를 모델로 함.



24. 은혜 갚음


 슉~~~ 팡! 빠바박~!!!

 “한 대 잡았어!” 석궁을 날린 샤니가 신나게 소리쳤다.

 “감이 아주 좋은데?! 자, 이번엔 이쪽으로 방향을 바꿀 테니, 저 앞에 있는 큰 놈도 잡아!” 샤키가 조종간을 비틀며 크게 말했다.

​ 슉~ 슉~ 슉~~~ 팡팡팡! 빠바바바박!!!

 “맞았어, 오빠! 저놈의 꼬리날개를 봐봐!” 샤니가 또 소리쳤다.

 “그래! 진짜 잘 했어!!” 샤니가 발사한 화살의 산탄에 맞아 갑자기 동체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추락하고 있는 적기를 가리키며, 샤키가 환호성을 질렀다.


 하멜이 나선형을 그리며 급강하를 하여, 자신을 따라오는 적기들이 모두 한 군데로 모이도록 만들자 샤니는 즉시 석궁을 날렸고, 쌩~ 하고 창공을 날아간 화살들은 적기의 근처에서 산탄으로 폭발했다. 이 파편에 날개나 몸통을 맞은 적기는 갑자기 방향을 잃었고, 공기의 저항이 급격하게 올라가자 그 충격으로 날개가 꺾인 어떤 적기는 공중에서 그대로 폭발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적기는 석궁을 피하려다 자기들끼리 부딪혀 기체가 박살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오늘 샤니의 석궁솜씨는 그야말로 신이 들린 듯했다. 순식간에 열 대도 넘는 적기를 기가막히게 제압하고 있었다. 

 “마지막 한 대만 남았어!” 샤키가 소리쳤다. 그러자 더 이상 하강하면 적의 대공포에 격추될 수 있을 고도에까지 가까워진 하멜은, 다시 한 번 스페르베르호를 급상승시켰다. 이번에도 역시 적기는 그대로 따라왔다. 하멜은 적기가 포기하지 않고 계속 따라오도록 꼭 필요한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며 달아났다.


 충분한 고도만큼 올라온 하멜은 적기가 거의 다 따라붙었다는 판단이 서자 다시 급강하를 하였다. 그리고는 샤니가 목표를 조준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주려고 이쪽저쪽으로 급격하게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마지막 남은 적기를 유인했다.

 ‘죽어라 이 나쁜 놈아! 이 한 방은 승하하신 세자 저하에 대한 나의 복수니라~!!’ 샤니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과녁을 겨냥했다.

 그런데 앞서 날고 있는 적기 조종사의 실력도 보통은 아니었나 보다. 하멜에게 계속 석궁을 날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뒤따르는 보라(Bora)호의 시선을 어지간히 흩트리며 날았기 때문이었다. 이 바람에 샤니는 적기의 움직임을 제대로 따라잡기가 무척 어려웠다.


 자신의 조준점에 적기가 보였다가는 곧바로 옆으로 비껴나기 일쑤였다. 그래서 막상 석궁을 날리려 하면 지금까지 목표지점에 있었던 적기는 사라지고, 오히려 더 앞의 스페르베르호가 그 자리를 대신하곤 했다.

만약 샤니의 화살이 적기를 맞추지 못하고 그대로 계속 날아가서 폭발한다면, 오히려 스페르베르호에 치명상을 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샤니는 마지막 한 발을 날리는 것에 계속 갈등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적기를 그냥 놔둘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 그래~ 조금만 더~ 더~’ 샤니는 몇 번이고 조준을 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때 급강하하던 스페르베르호가 갑자기 흔들렸다. 놀란 하멜과 하이란이 옆을 살피니 한 쪽 날개의 일부가 빠른 속도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약간 파열된 것이 보였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속도도 느려졌고 조종도 잘 되지 않았다.


 “아! 저기가 또 말썽이야!” 하멜은 크게 한탄을 했다.

 “왜 저렇게 되었지?” 하이란도 긴장감이 앞서 큰 소리로 물었다.

 “저긴 인덤스 해전에서 적함의 대공포 산탄에 살짝 파손되었던 부분이야. 항모의 갑판에서 나름대로 수리를 잘 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또 말썽이네?” 하멜은 따라오는 적기를 확인하며 빨리 말하고는 즉시 방향을 틀었다.

 

 슈욱~~~~ 쾅!!!

 “아!!!”

 이번에는 적기가 쏜 화살이 스페르베르호 근처에서 폭발하며 그 파편에 뒷날개가 크게 찢어졌다.

 “어떡해, 하멜?! 큰일 났어!” 하이란이 소리를 질었다.

 “나도 알아!” 하멜도 위기를 넘기려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샤니! 빨리 좀 적기를 없애줘! 왜 아직도 석궁을 안 날리는 거야?!” 하이란은 무작정 크게 말했다.

 

 ‘기다려. 나도 하고 있어...’ 샤니는 혼자서 계속 중얼거리며 적기를 조준했다. 과녁에는 적기와 스페르베르호가 수시로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뭐 해, 샤니야!!!” 적기가 더 가까이 오자 하이란이 또 소리를 쳤다.

 ‘알았다고 이 계집애야! 누군 지금 놀고 있는 줄 아냐?’ 샤니도 피가 말랐다.

 “샤니? 아직도 멀었어?!” 초조한 하멜도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알았다니까? 아주 둘이 쌍으로 나를 잘도 들들 볶는구나...’ 샤니는 계속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말했다.


 쾅! 쾅! 쾅!

 스페르베르호 근처에서는 계속 산탄이 터졌다.

 “살려줘!!!” 이제 하이란은 비명을 질렀다.

 ‘그래! 지금이야!!’ 샤니는 순간 힘차게 석궁을 날렸다.

  피융~~~ 쉬익~~~ 슈우~~~

  그런데...

  화살은 적기를 맞추지도 근처에서 터지지도 않고... 그냥 그대로 더 날아가고야 말았다.


 쾅!!!

 “으악~!!!”

 이런!

 샤니가 쏜 화살은 오히려 스페르베르호의 꽁무니를 정통으로 맞추고야 말았다. 즉시 동체에 불이 붙으며 연기가 뒤로 솟구쳤고, 스페르베르호는 완전히 통제력을 잃고 거머리가 몸부림을 치듯 비비꼬며 급격하게 수직으로 추락해갔다.

 “야 이년아! 너 미쳤어?!!!” 하이란은 절규를 하며 샤니에게 소리쳤다.

 

 스페르베르호를 더 공격하지 않아도 추락이 기정사실이라는 것을 판단한 적기는, 이제는 자신을 쫓고 있는 보라호와 대결을 하려 방향을 급하게 틀기 시작했다.

 그런데 샤키와 샤니가 이 순간만큼은 놓치지 않았다. 샤키는 그대로 적기를 향해 최고의 출력으로 돌진했고, 더 이상 두 개의 조준점 사이에서 갈등할 필요가 없어진 샤니는 자신의 화살에 하멜과 하이란이 위험하게 되었다는 생각은 잠시 접어둔 채, 적기를 향해 집중적으로 남은 석궁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그리고 그 위력은 곧바로 나타났다.

 

 콰과과과광!!!

 연속적으로 터진 산탄은 적기의 동체에 깊숙이 박혔고, 적기 또한 스페르베르호처럼 조종이 불가하게 되어 하루살이가 방황하듯, 허공에서 그저 심하게 흔들리며 불길과 매연만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적기의 추락을 확인한 샤키는 즉시 스페르베르호 근처로 다시 접근하기 시작했다.

 

 “하멜, 즉시 탈출해서 낙하산을 펼쳐! 빨리 스페르베르호를 버리지 않으면 곧 폭발하겠어!” 샤키가 소리쳤다. 그러나 하멜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동원하여 조종을 하려 했고, 또한 기체를 수평으로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여기서 낙하산을 펼치면 저 아래의 적군에게 바로 잡혀요! 그럼 죽는 거나 마찬가지라고요!” 하멜은 소리쳤다.

 “지금은 방법이 없어. 일단은 폭발부터 피해야 해! 탈출해서 낙하산을 바로 펴 봐. 내가 속도를 줄여 볼 테니, 어떻게든 보라호의 날개에 올라타봐!” 샤키도 소리쳤다.

 “하멜, 샤키 선배 말이 맞아! 당장 탈출하자!” 하이란도 소리쳤다.

 “시간이 없어! 어서 빨리 탈출해!” 샤니도 크게 외쳤다.

​ 

 펑!

 이젠 엔진도 과열되어 폭발하며 불이 붙었고 조종석에도 연기가 끓어올랐다. 더 이상 지체를 할 수 없었던 하멜과 하이란은 즉시 비행기 밖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바로 낙하산을 펼쳤다.


 확~~~​!!

 “휴~” 일단 제대로 펴진 낙하산을 올려다보며 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잘했어. 이젠 내가 가까이 다가가볼게.” 말을 마친 샤키는 속도를 최대한 줄여서 내려오는 하멜과 하이란이 보라호의 날개를 잡을 수 있게 하려고 그 밑으로 다가갔다.


 위이이이잉~

 그런데 아무리 속도를 줄여도 다가오는 기체의 날개를 잡기에는 불가능할 만큼, 하멜과 하이란에게는 보라호가 너무 빨랐다. 그래서 보라호는 위에서 아래로, 또 아래에서 위로 방향을 바꾸어가며 하멜과 하이란을 잡아보려 했지만, 오히려 보라호가 하늘에서 공기를 휘젓는 바람에 낙하산만 흔들려 하멜과 하이란은 크게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아, 안 돼!!!” 네 사람은 모두 탄식을 했다.

 그러면서 낙하산은 계속 아래로 내려갔고, 이제는 이를 확인한 적군이 쏘아대는 대공포가 근처에서 터지며, 이의 파편에 하멜과 하이란의 몸이 공중에서 산산조각이 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아, 제발~~~” 모두가 할 수 있는 것은 이제 이 간절한 말과 함께, 저승에 가서는 편하게 살게 해달라고 신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 밖에는 없어 보였다.

 꽝! 꽝! 꽝!

 적의 대공포는 생도들의 처절한 절규와는 상관없이 계속 터졌다.

 “살려줘~~~!!!” 하이란의 날카로운 비명은 맨츠의 창공을 가르며 마지막으로 길게 퍼져나갔다.


 *           *           *


 베니안의 시신을 담은 관을 마차에 싣고 후퇴하는 코르군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주위에는 먹을 것이 하나도 없어 모두가 며칠째 쫄쫄 굶은 상태였다. 몸을 녹일 땔감조차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근처가 전부 자작나무의 숲이기는 하였지만, 맨츠의 추위와 눈 때문에 나무껍질 사이사이에는 모두 얼음이 붙어있어 당장 땔감으로 쓸 수 있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았고, 또 그럴 시간도 없었다. 그러니 모든 것이 절망적이었다.

 추위와 허기짐에 병사들은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휘레스왕과 에반을 비롯한 여러 장군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마디로 코르군은 처참할 정도로 완전히 지쳐버렸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은 아직 남아있었다. 

 일단은 바람이 약간 잦아들었고, 이런 속도라도 계속 더 행군을 한다면, 오늘 중으로는 보급품 부대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보고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후로 접어들 무렵, 마지막으로 넘으면 되는 길고 좁은 언덕을 눈앞에 두고 하늘에서는 갑자기 폭설이 쏟아졌다. 바람도 더욱 강하게 불어 눈보라 속에 체감온도는 급격하게 떨어졌다. 종착점이 바로 저 앞인데, 여기저기 탈진하여 고꾸라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더는 견딜 수 없다며 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병사도 있었다.

 절규로 범벅이 된 이 아수라장... 

 하지만 코르군의 총사령관인 에반(Evan)은 병사들의 고통이 빤히 보이는데도 정작 본인은 별다른 느낌조차 없어 보였다. 그저 큰 돈이 걸린 도박에서 손해를 좀 본 장사치의 표정과도 별 차이가 없었다.

 총사령관의 태도가 저 모양이니, 왕은 더 이상 에반에게 기대할 것이 없었다. 계속되는 병사들의 고통을 왕마저 에반의 식으로 외면할 수는 없었다.


 왕은 잠시 행군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라고 말하며 말에서 내렸다.

 그러자 에반과 측근들은 적군에게 따라잡히기 전에 빨리 보급품 부대를 만나야 한다며, 계속 전진을 하자고 왕에게 거듭 재촉했다. 그러나 왕은 이들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파르코 장군의 부대를 만나기도 전에 쓰러질 만큼, 상황이 심각한 군사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왕은 지금 당장 불을 준비하라고 근엄하게 명령을 내렸다.

 아들을 잃었으니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체념과 한탄이 앞섰기 때문이었을까? 솔직히 왕은 이제 군대를 지휘함에 있어 까닭 모를 자신감마저 생겼다.


 아까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사관들과 나누었던 대화에서 무엇인가 얻은 면도 크게 작용했다. 생도들에게 부탁했었지만 아직도 그 해답을 듣지 못한 솔루노픽스(SolunOpeaks) 병풍에 담긴 비밀. 그 비밀에 대해 왕은 결정적인 실마리를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반은 이처럼 온통 하얀 벌판에서 짙은 연기가 나면 따라오는 적에게 위치가 노출될 수도 있다고 말하며 왕의 행동을 끝까지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왕은 이제부터 에반을 총사령관으로 대접하고 싶지도 않았다. 상황이 너무 급박한지라 공식적으로 지금 그를 해임할 수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이미 왕의 마음속에 에반이란 작자는 양 국이 붙는 전면전에서 가장 중요한 작전을 어이없는 실패로 만들어버린 패장이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그러고도 수치심조차 전혀 없는, 한낮 소인배라는 평가도 왕의 가슴 속에 굳게 자리를 잡았다.


 한즈(Hanz)에 돌아가면 분명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에반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추종 세력을 모두 소탕하겠다는 결심도 굳혔다. 이스트 포인트 출신들로만 이루어진, 에반을 우두머리로 하는 거대한 사조직의 실체를 낱낱이 파헤치고, 그들의 부패와 위선, 국왕에 대한 불충에 대해 모든 죄를 끄집어내고 물어, 결국은 모두에게 ‘죽음’이란 판결을 내리겠다는 각오도 생겼다.

 외아들 베니안을 잃은 가장 처참한 고통을 지금 자신이 당하고 있으니, 에반과 그 일파에게는 그보다 훨씬 더한 괴로움을 내려야 마땅하다는 심정이었다. 가문의 모든 구성원을 제거해버리는 ‘멸문지화’라는 최악의 형벌로써 그들의 씨를 코르땅 안에서 완전히 말려버리겠다는 증오심도 거칠게 타올랐다. 

 왕의 눈에는 이제 두려울 게 하나도 없었다.


 “관을 실은 마차에 불을 붙여라. 천을 덮은 저 안쪽과 밑바닥은 그나마 덜 젖었으니, 그쪽부터는 불이 좀 붙을 수 있을 것이다. 그 불의 열기로 병사들의 몸을 당장 녹여주어라. 그리고 지금부터는 짐도 걷겠다. 다른 장군들도 모두 걸으라 하고 남아있는 말은 전부 잡아 그 고기를 구워 즉시 병사들에게 배식을 하여라. 다만... 마차가 다 탄 뒤 세자의 유골은 잘 거두어 짐이 이곳 맨츠의 대지에 뿌릴 수 있게만 해다오.” 왕은 마지막으로 울분을 삼키며 말했다.


 왕의 이러한 결단은 병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금방 전해졌다. 이를 들은 병사들은 왕에게 감격하였다. 죽을 만큼 힘들지만 백성과 군사를 이토록 사랑하는 국왕이 있으니, 꼭 살아서 함께 돌아가자며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였다.

 하지만 에반과 그 일파는, 보급품을 받은 이후 다시 반격을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자신들의 말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버린 왕을 조롱하며 에반은 혼잣말로 이처럼 지껄였다.

 “진작 그럴 것이지.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할 약골 하나가 일찍 죽은 것뿐인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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