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화광 님의 서재입니다.

파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완결

화광
작품등록일 :
2021.06.08 04:12
최근연재일 :
2021.06.19 17:00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4,959
추천수 :
294
글자수 :
72,424

작성
21.06.16 17:00
조회
184
추천
15
글자
10쪽

파사 (17)

DUMMY

그리고 그해 겨울 영조는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다.


아무런 예견도 조짐도 없었다.

겨우 열 살 된 아이가 별안간 병에 들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곧 죽어갔다.


어린 아들은 죽음 앞에 살려 달라 울부짖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천하의 주인인 임금이라 할지라도 죽음의 행로를 막을 수는 없었다.


“아바마마, 소자의 불효를 용서해주십시오.”


고작 열 살배기가 죽기 전 제 아비를 걱정하는 마음에 내뱉은 마지막 말이었다.

영조는 그런 영특한 아들의 손을 꼭 쥐고, 애달픈 마음에 연신 꼭 쥔 조막손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렇게 왕세자는 며칠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참으로 허망한 죽음이었다.


자식 잃은 아비의 심정을 무엇으로 비할 수 있으랴.

임금이라 하여 그 가슴이 바위일 수 있겠는가, 바위였다 한들 부서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결국 내장을 다 도려낸 것 같은 비통함에 못 이겨 영조는 그만 살아가는 모든 일에 염증을 느끼고 말았다.


‘어차피 이 한 몸 썩어 문드러지면 만사가 끝인 것을...’


잠이 들어도 잠든 것이 아니고, 깨어 있어도 깨어 있는 것이 아닌 나날들.

먹는 밥은 모두 흙과 같았고, 아무리 물을 마셔도 갈증은 가시질 않았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영조는 문득 보고 싶은 얼굴이 떠올랐다.

홀린 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편전을 나선 임금은 휘청휘청 발걸음을 옮겼다.


‘밤이로구나.’


그간 낮과 밤을 잊고 살았다.

비로소 밤인 줄 알았다 한들 달은 떴는지 별들이 어느 자리에 빛나고 있는지 관심조차 가지 않았다.

그저 보고 싶은 얼굴이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작고 허름한 처소 앞에 서 있었다.


‘......’


아들이 죽어가던 며칠 동안 영조는 몇 번이나 고민했었다.


‘점사로 아들의 목숨을 살려봄이 어떨까?’


하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군왕으로서 사사로운 감정으로 점사에 의지한다는 것을 영조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다.


‘차라리 왕이 아니었다면...’


몇 번이나 망설이고 말았던 자신이 한스러웠다.

하지만 결국 다른 선택을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늦은 밤이었다.

모든 처소가 까맣게 어두웠으나 작은 방 한 곳만은 여전히 등불을 밝히고 있었다.

영조는 손을 들어 뒤따른 궁인들을 조용히 뒤로 물렸다.

그리고 말없이 노란 창호 너머 보이는 한 선비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저깟 게 무엇이건데 잠조차 잊고 저리 열성일꼬?”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영조는 한동안 물끄러미 방안을 들여다보더니 이윽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자정도 넘은 시간 궁궐 서고에 등불이 밝혀졌다.

임금은 홀로 서고에 들었다.

그리고 새로이 필사된 서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이까짓 책 따위 천 권을 읽어봐야 제 아들 목숨 하나 건사 못하는 반푼이나 되고 말 것을...”


영조는 거칠게 첫 장을 홱 넘겼다.

그리고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 다음 장을 넘겼다.

그리고 천천히 글자들을 읽어나갔다.


‘마치 그림자를 읽는 것 같구나.’


힘을 들인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휘갈겨 쓴 것도 아닌 무심하게 놓아진 듯 종이 위를 물들인 검은 선들의 조합.

오롯이 뜻을 담는 데 충실함이 가득 차다 넘쳐 형태는 사라지고 담은 뜻만이 떠올라 비추는 듯했다.


그에 영조는 곧 글자는 잊고 오로지 뜻을 읽어 헤아리느라 고요 속에 멈춰 있었다.


고요.


쉬지 않고 귓가를 어지럽히던 잡념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안개가 걷히듯 머릿속이 고요로 차올랐다.

그리고 한 문장의 끝에서 예전 술에 취한 밤 나눴던 그의 말들이 떠올랐다.


‘원한다면 세상 어떤 재물도 주겠다는데 하필 그 일을 부탁하는 이유가 뭔가? 고작 낡은 서책을 필사하는 일이라니?’

‘세상에 끝이 있는 이야기는 없는 법이옵니다. 다만...’


“잊었기에 끝이라 여기고 새로이 시작이라 여길 따름이다.”


달빛이 눈썹 끝에 아른거렸다.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하늘을 보자 밤 한가운데 반쪽 달이 웃고 있었다.

차올랐던 달이 저물어가나 그것은 끝이 아니요, 차오르는 달 또한 시작이 아니었다.

주르륵 눈물이 수염을 적셨다.

달빛과 등불 사이 고요 속에서 한 아버지가 울고 있었다.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그리고 용서할 수 없었기에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결국 흐르고 말았다.


“내 너를 잊지 않으마.”


아리수 낙양 강물 넘실대듯 시간은 흘러갔다.

산 자들의 아우성과 죽은 자들의 침묵을 묻고 시간은 누구에게도 아랑곳없이 흘러가 버릴 뿐이었다.

움켜잡으려 해도 쥘 바 없고 멈추려 해도 막을 바 없이 우리보다 만 년을 더 늙었고 우리보다 만 년을 더 젊어질 시간은 그저 흘러갈 따름이었다.


훅.

공파사는 한숨으로 호롱의 불을 껐다.

그리고 어둠 속에 조용히 잠겨 있었다.


어느덧 시간은 칠 년이나 흘러갔다.

그 세월 동안 낮과 밤을 잊은 채 오로지 필사에만 전념하여 일흔아홉 권의 내용들을 보전할 수 있었다.

흐려져 가던 지식들이 새로이 생명을 얻어 싱그러워진 것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세월이 늙고 닳도록 숨을 옮겨준 값이었다.


불 꺼진 호롱은 식어버렸고 겨울의 밤은 깊고 메마른 채 흘러가고 있었다.

텅 빈 서고에 남아 어둠 속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낡은 서책을 새 책자 위로 옮겨 적던 중이었다.

곧 여든 번째 필사의 마지막 장에 접어들 참이었다.


‘저 원서들은 소임을 다 했으니 이제 서고 깊숙한 곳에서 고이 낡아갈 수 있겠구나.’


상념에 잠겼으나 곧 마음을 정돈하고 새삼 붓을 잡았다.

그리고 달빛조차 들지 않는 어둠 속에서 다시 글자들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더 편하군.’


필사에 전념하느라 너무 혹사했던 탓일까?

조금 흐릿하던 눈이 이제는 글자를 알아보기 힘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나마 그간의 글공부가 헛되지 않았는지 어슴푸레한 형상만으로도 구별은 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하지만 계속 나빠지고 있었으니 곧 그조차 어려울 것이었다.

필사를 위한 원서야 만전을 기하려 골백번을 읽고 또 읽었으니 그 내용이 머릿속에 적혀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제 더는 새로운 서책을 읽을 수조차 없을 것이었다.


“떠나야 할 때가 된 거야.”


듣는 이 없었으나 공파사는 마치 누군가에게 전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고요했다.

작은 바람 소리조차 없는 적막함.

달은 가득 차 하늘을 비췄으나 기울어질 시간이 왔음에 노랗게 빛을 바랬다.


“공 내관 안에 있는가?”


다음날 이른 저녁 서고의 문이 비거덕 열리고 박문수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그에 필사본을 정리 중이던 공파사는 급히 손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부르시지 않고 어찌 이리 직접 행차를 하셨습니까, 참판 영감?”

“허허, 자네와 나 사이에 무슨... 자네가 긴히 날 찾았다 하기에 입궐하자마자 이리 찾아왔네. 여간 반가워야지. 허허허.”

“저야 항상 이 서고에 있으니 평소처럼 부르시면 될 것을요.”

“나야 항시 그러고 싶지. 한데 전하께서 귀한 일 하는 사람 자꾸 불러내서 귀찮게 하지 말라고 어찌나 핀잔을 주시는지 원. 서고 근처에 얼쩡거리지 말라고도 하시고... 자네도 잘 알다시피 내가 이 서고를 얼마나 공들여 이루어놨는가. 그 공을 잊으신 듯해 여간 서운한 맘이 드는 게 아니네.”


공파사는 그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이런 차에 자네가 날 찾는다니 내 안 와볼 수 있겠나. 한데 무슨 일이신가?”


‘오늘 밤 궐을 떠날까 하옵니다.’


이미 떠날 채비는 마쳐 놓았다.

채비라 해봐야 작은 봇짐 하나가 전부긴 하지만.

모든 사정을 말한다면 결코 보내주지 않을 것이었다.

그렇더라도 그동안 살펴준 박문수와 임금에게 고별의 예도 갖추지 못한 채 떠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몰랐다.


“예... 실은...”


우물쭈물하는 사이 박문수는 슬쩍 공파사의 곁을 봤다.

그가 늘 붙잡고 쓰던 붓과 벼루가 깨끗하게 씻겨 있었다.


“참, 만식이라고 기억하나?”

“기억하다마다요. 제가 궐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오월이와 혼례를 올렸다 전해주신 것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만식이가 마침 어젯밤 아들을 얻었네.”

“참으로 잘 되었습니다. 기쁜 소식 전해주시어 고맙습니다, 참판 영감.”


공파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허허, 그러게 말이네. 영 철부지 노릇이나 할 줄 알았는데 어언간 의젓하게 사내 구실 하는 걸 보면 참 신통하단 말이지. 만식이가 자네에게 큰절 한 번 올리고 싶다고 성화지 뭔가. 내 전하께 간청을 드려 볼 터이니 조만간 말미를 얻어 내 집에서 푹 쉬다 가시게.”

“......”

“그렇게 하세나...”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예, 참판 영감.”

“그래, 고맙네.”


박문수는 공파사의 어깨를 지그시 도닥였다.

공파사는 하고 싶은 말들을 꾹 누르고 그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6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파사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공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12 21.06.19 180 0 -
21 파사 (20) 21.06.19 162 15 13쪽
20 파사 (19) 21.06.18 140 12 7쪽
19 파사 (18) 21.06.17 155 12 7쪽
» 파사 (17) +6 21.06.16 185 15 10쪽
17 파사 (16) +8 21.06.15 198 16 10쪽
16 파사 (15) +1 21.06.14 180 14 10쪽
15 파사 (14) 21.06.13 176 14 9쪽
14 파사 (13) +2 21.06.12 190 12 8쪽
13 파사 (12) 21.06.12 198 9 9쪽
12 파사 (11) +1 21.06.11 191 13 7쪽
11 파사 (10) 21.06.11 194 12 7쪽
10 파사 (09) +1 21.06.10 200 10 7쪽
9 파사 (08) +1 21.06.10 203 12 7쪽
8 파사 (07) 21.06.09 219 10 7쪽
7 파사 (06) +2 21.06.09 244 15 7쪽
6 파사 (05) +1 21.06.08 262 19 10쪽
5 파사 (04) 21.06.08 254 14 7쪽
4 파사 (03) +2 21.06.08 296 15 7쪽
3 파사 (02) +5 21.06.08 320 16 7쪽
2 파사 (01) 21.06.08 436 16 7쪽
1 파사 (00) 21.06.08 552 23 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