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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 님의 서재입니다.

파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완결

화광
작품등록일 :
2021.06.08 04:12
최근연재일 :
2021.06.19 17:0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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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5
추천수 :
294
글자수 :
72,424

작성
21.06.08 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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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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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글자
10쪽

파사 (05)

DUMMY

“남편께서는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삼순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마치 옷을 홀딱 벗겨내는 것만 같은 한 마디.

이미 누더기가 된 옷가지를 빼앗기지 않으려 발버둥 치듯 그녀는 부정하려 했다.

아니라고.

말도 안 된다고.

하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공파사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이 글자로 ‘藥’ (약 약) 풀어보면 남편께서는 ‘艹’ (풀 초) 머리를 풀처럼 풀어 헤치고, ‘白’ (흰 백) 하얗게 된 몸을 ‘丝’ (실 사) 명주실로 칭칭 감은 채 ‘木’ (나무 목) 나무 위에 누워 있습니다. 그러니 이미 숨을 거둔 것이겠지요. 다만 객사가 아닌 누군가 염을 해둔 상태이니 명을 달리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은 듯합니다. 그것을 단서로 서두른다면 시신만이라도 찾을 수가 있을 겁니다.”

“끄윽끄윽..”


주저앉아 있는 삼순의 앙상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말라버린 울음이 새어 나왔다.

삼순은 울음을 토해내고 싶어 시커멓게 변해버린 조막손으로 마구 가슴을 두드렸다.

춘분네는 참고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황영감은 그저 천장을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서두릅시다. 남편의 운수를 찾았으니 곧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공파사는 일어나 겉옷을 챙겨 입었다.

그러자 삼순도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 애를 썼다.


“자네까지 직접 가려는 겐가?”

“이 여인들만 모진 산길을 내려가게 할 수는 없잖습니까.”


황영감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옷을 챙겨 입은 공파사와 삼순계순 자매는 떠날 채비를 마치고 집 밖을 나섰다.

황영감은 공파사의 낡은 초가집 문 앞에 서서 셋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르신..”


춘분네가 머뭇머뭇 황영감에게 말을 걸었다.


“걱정 말고 다녀오게나. 춘분이는 우리 내외가 잘 돌볼 터이니.”


삼순계순 자매는 황영감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다.

끄덕끄덕 인사를 받은 황영감은 공파사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 마을 밖을 나서는 건 들어온 이후로 처음이었다.

황영감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도저히 염치가 없어 입 밖에 낼 수가 없었다.

그런 마음을 헤아린 공파사가 먼저 황영감에게 다가갔다.


“어르신, 괘념치 마십시오. 하셔야 할 일을 하신 겁니다.”

“꼭 돌아오게나.”


공파사는 미소를 보이며 황영감에게 인사를 했다.


사각사각.

쌓인 눈을 밟는 소리가 어둑한 마을길을 가로질렀다.

밤새 멈출 것 같지 않던 성난 바람은 싹둑 자른 것처럼 끊겨 어딘가로 사라져버렸다.

고요한 산골 너머로 멀어지는 세 사람의 모습이 초승달 아래 비친 눈벌 위에 반짝거렸다.


“임자, 참으로 묘한 일이오.”

“뭣이 말이요?”

“여기서 한양 가는 길로 쭉 올라가다 보면 삼척산이라고 아는가?”

“거기 큰 장터 마을이 있는 곳 아니오?”

“내 지금 거길 다녀와야겠소.”

“아니, 자다 말고 일어나서 이 밤중에 그 먼 데는 왜 가시오?”

“엊그제 죽은 그 사람이 방금 꿈에 나왔소.”

“뭐랍디까? 자기 이름이라도 말해줍디까?”

“아니... 자기 각시가 삼척산 아래서 자길 기다리고 있다는구먼.”


공파사는 삼순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저 작은 여인네가 어찌나 억척스러운지 걸음걸이를 따라잡기조차 힘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 걸음걸이가 심상치 않았다.


“일단 살던 장터 마을로 돌아가 거서부터 다시 한양 가는 마을들을 찾아봐야겠어.”


삼순은 믿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죽었다니.’


죽은 사람들 소식을 죄다 뒤져서 남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고야 말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불안한 마음에 자꾸만 가슴이 조여들었다.

그런 초조함에 밤새 쉬지도 않고 꼬박 하루를 걸어 벌써 장터 마을에 이르고야 말았다.


“춘분네, 잠시만..”


공파사는 조용히 삼순과 나란히 걷고 있던 계순을 불렀다.


“아무래도 언니분의 걸음걸이가 불안합니다. 확인을 해 봐야 할 듯싶습니다.”


그제야 계순은 삼순의 걸음을 살펴보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이 땅을 제대로 딛지 못하고 있었다.


“언니, 잠깐만.”

“응? 왜?”


계순은 삼순을 우악스럽게 붙잡아 길가로 끌고 갔다.

곁에는 마을 입구를 지키는 서낭당 나무가 우뚝 서 있었다.

그 곁으로 걸터앉기 좋은 너럭바위 위에 작은 언니를 앉히고 다짜고짜 낡은 짚신과 버선을 벗겨냈다.

그러자 울컥 눈물이 치솟았다.


“언니!”


콩꼬투리 속 콩알들만 한 발가락들이 죄다 얼어붙어 시꺼멓게 썩어가고 있었다.

그 광경에 계순은 화가 나고 속이 상해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괜찮아. 이거 금세 나아. 이럴 시간 없어. 얼른 가자.”

“뭐가 괜찮아! 하나도 안 괜찮아. 아무것도 안 괜찮다고!”


춘분네는 아니, 계순은 언니 앞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너무 가슴이 아팠다.

자신들의 처지가 너무도 기가 막혔다.

세상에 둘뿐인 자매는 젊은 나이 둘 다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것이다.

그런 언니가 자기 발이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온갖 데를 헤매어 다니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동생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했다.


“마을에 다 도착했으니 제가 약방을 찾아 고약이랑 감쌀 헝겊을 받아오겠습니다. 남편을 찾으려면 그 발부터 치료해야 합니다.”


삼순은 싫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목 놓아 울고 있는 동생의 모습에 차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공파사는 삼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서둘러 약방을 찾아 마을 안으로 뛰어 가버렸다.


삼척산 아래 서낭당 나무 곁에 나란히 앉아 삼순과 계순은 공파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훌쩍이는 계순은 입을 꾹 다문 채 언니의 손을 꼭 쥐고 놓지 않았다.

두 자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죽은 남편을, 죽은 형부의 시신을 찾아야 하는 이 기구한 상황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으랴.

하지만 둘은 이제 혼자가 아니었다.

그게 그녀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몰랐다.

늦은 밤 적막한 길가에는 작은 바람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저벅저벅.

잠시 후 마을 큰길로부터 누군가가 그녀들을 향해 다가왔다.

처음에는 공파사가 돌아오는 건가 싶었지만 걸음 소리가 달랐다.

이윽고 풍채가 좋고 우락부락한 시커먼 사내가 둘 앞에 다가와 섰다.

삼순과 계순은 불현듯 맞닥뜨린 낯선 사내에 적잖이 당황했다.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달아날 처지도 못 됐다.

자매가 나란히 올빼미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올려다보자 그 사내가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임자들 중에 남편을 기다리는 색시가 누구요?”


그 소리에 삼순이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쳐 현기증이 나는 것만 같았다.


“제.. 제가 남편을 찾고 있습니다.”

“허허... 시상에나.. 맞구먼, 맞았어!”


삼순은 떨리는 입술을 앙다물고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남편을 아십니까?”

“그게... 죽은 그이가 어젯밤 꿈에 나와서 자기 각시를 데려와 달라고 하더라고.”

“흑흑흑...”


복숭아만 한 얼굴을 새까만 두 손으로 감싼 삼순의 어깨가 물결처럼 흔들렸다.

곁에 앉아 있던 계순도 눈물을 참지 못해 흐느끼고 있었다.

사내는 그 모습이 딱하고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때마침 약과 헝겊을 얻어 온 공파사는 먼발치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삼순은 다소곳이 무릎을 꿇고 앉아 남편의 차가워진 손을 잡았다.

풀어 헤쳐진 남편의 머릿결을 한없이 쓰다듬으며 뚝 뚝 눈물방울을 떨구는 삼순의 모습은 너무나도 고적하여 마치 붓질이 마르지 않은 한 폭의 수묵화 같았다.

그런 그녀의 한 손에는 조그만 비단 꾸러미가 쥐어져 있었다.


“이거 남편이 죽을 때까지 손에 꼭 쥐고 있던 거요. 아무래도 임자에게 주려고 했던 것 같구먼.”


들어와 남편의 시신을 확인했을 때 사내는 비단으로 감싼 남편의 유품을 그녀에게 건넸다.

삼순은 곱게 접은 비단을 풀어냈다.

그러자 새하얀 은비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갈하게 세공된 그 은비녀에는 남쪽 지방 유명한 장인의 표식이 새겨 있었다.


달포 전 사내는 가슴을 움켜쥔 채 길가에 쓰러져 있던 남편을 발견하게 됐다고 한다.

급히 집으로 옮긴 사내는 마침 남편의 소지품에 큰돈이 있는 것을 보고 여러 의원을 불러 어떻게든 살려보려 애썼다.

하지만 의식을 잃은 채 시름시름 앓기만 하던 남편은 결국 사흘 전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사내도 여러 방면으로 남편의 가족을 수소문했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 낯선 이의 장례까지 치러야 할 난감한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그런 찰나 기적처럼 삼순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삼순은 조용히 남편의 손을 놓고 일어났다.

그리고 조심조심 정성을 다해 걸어 공파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두 손을 모아 내려 공손히 절을 올렸다.

공파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여 삼순의 절을 받았다.


달구지를 빌려 남편의 시신을 삼척산에 묻기로 했다.

삼순은 감사를 표하며 사내와 그 아내에게 남편의 남은 돈을 모두 주려 했다.

하지만 부부는 한사코 거절했다.

하지만 삼순은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베푼 그들에게 보답하기를 남편도 바랄 것이라며 부부를 설득했다.

부부는 애도하며 삼순의 앞날을 위해 기원했다.

남편의 시신을 실은 채 고향으로 돌아가는 삼순의 품에는 새하얀 은비녀가 꼭 쥐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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