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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 님의 서재입니다.

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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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화광
작품등록일 :
2021.06.08 04:12
최근연재일 :
2021.06.19 17:00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4,957
추천수 :
294
글자수 :
72,424

작성
21.06.09 18:00
조회
218
추천
10
글자
7쪽

파사 (07)

DUMMY

“만식아!”


자신을 부르는 나리의 목소리에 마당쇠 만식은 어딘가로 숨고만 싶었다.

하지만 종살이가 어찌 마음대로겠는가.


“예에, 나으리.”


만식은 종종걸음으로 나리 앞에 섰다.


“부르셨습니까?”

“너 못 들은 척하려다 온 게지?”

“아닙니다, 나리. 제가 어찌 감히..”

“너 이놈, 몸은 언제 씻었느냐?”

“나리 분부대로 매일 씻고 있습니다.”

“그래? 그럼 그 옷 좀 벗어보아라.”

“예? ...예에?”

“저 저 못 들은 척하는 것 좀 보게! 냉큼 방 안으로 들어와 옷을 벗거라.”


집안의 다른 종들은 살금살금 모여들어 그 광경을 훔쳐보고 낄낄거렸다.

나리께서 만식을 부를 때마다 벌어지는 재미난 구경거리를 놓칠 수는 없었다.

만식은 푸욱 한숨을 쉬고는 대청마루로 올라가 나리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나리가 만식의 무명옷을 걸쳐 입고는 성큼성큼 나와 큰소리로 외쳤다.


“오월아, 와서 만식이놈 갓 좀 매어주거라.”


구경하던 오월과 어린 사월이, 영산댁과 행랑아범은 나리의 추레한 행색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고 비단 명주 외출복에 도포까지 차려입고 뒤따라 나오는 만식의 모습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만식의 표정은 십 년 묵은 김치 쪼가리처럼 썩어 있었다.


“나리, 마님께서 이 모습을 보시면 저는 정말 죽은 목숨입니다..”


나리는 만식에게 엽전 주머니를 휙 던져주었다.


“그러니까 걸리지 않게 저잣거리에 나가 사람들 얘기나 듣고 오라는 거 아니냐. 행랑아범, 못 본 척 말고 행랑채에 가서 봇짐 하나만 챙겨오게.”

“예.. 예, 나리.”


나리는 만식의 짚신을 신고는 성큼성큼 대문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리고 행랑아범이 서둘러 챙겨 나온 괴나리봇짐을 척 받아들고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대문 밖을 나서며 한 마디를 더 외쳤다.


“사나흘 걸릴 것이네.”


그렇게 나리는 가버렸다.


만식은 앞이 캄캄했다.

돌처럼 굳어 꿈쩍도 하지 못하는 만식의 곁으로 빼빼 마른 오월이 다가왔다.

그리고 갓끈을 매어 주며 슬며시 웃음을 흘렸다.


“만식이 너, 이렇게 차려입으니 진짜 양반집 도련님 같다?”


오월이의 말에 만식의 두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갑자기 자신감이 불끈 솟아올랐다.

만식의 오른손에는 나리가 주신 엽전 주머니가 있었다.

그 돈이면 예쁜 오월이에게 고운 참빗 하나 선물해주기에는 충분했다.


“내 다녀오겠네. 밤에 보세. 어흠.”


오월은 어울리지 않게 양반네 말투를 흉내 내는 만식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밉지 않았다.

만식은 뒷짐을 척 지고는 어설픈 양반걸음으로 대문 밖을 나섰다.


“양반 나리, 이것 좀 보고 가시지요. 좋은 물건이 있습니다요.”


난전의 수많은 가게를 지날 때마다 여기저기 상인들이 공손한 말투로 만식을 불러댔다.


“거 되었네. 어흠.”


‘이런 기분이었구나. 양반이 된다는 건 이런 기분이었구나.’


평생 종살이만 해왔던 만식은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주고, 환심을 사려 애쓰는 모습에 그만 자신의 본 처지를 완전히 잊고 말았다.


‘잊은들 어떠랴. 오늘 나는 양반인 것을.’


용기를 내어 평소 기웃거려 보기만 했던 큰 주막에 들러볼 참이었다.

만식은 허리춤에 찬 엽전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기방에 갈 돈이야 못 돼도 주막에서라면 나라님이 부럽지 않을 터였다.


“여보시게. 여기 국밥이랑 탁주 한 병 내오시게나.”

“예, 나리.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저 콧대 높은 주모가 굽실거리며 나한테 미소를 지어 보이다니. 나 만식일세. 정육품 사서 나리 집 종살이하는 만식이란 말이오.’


하지만 주모는 만식을 알아보지 못했다.

기분 좋게 탁주 한 사발을 턱 비워내자 만식은 거나하게 취해버렸다.

종놈 신분으로 남의 눈치를 봐가며 마시던 때와는 술맛이 너무나도 달랐다.

그렇게 만식은 앉은 자리에서 탁주를 세 병이나 비우고 말았다.


“여 얼마요?”

“예, 나리. 스무 푼이옵니다.”


만식은 주섬주섬 엽전 주머니를 뒤졌다.

비쌌다.

하지만 만식은 별거 아니라는 듯 스무 푼을 주모에게 척 내주었다.


비척거리며 저잣거리를 헤매던 만식은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때 냇가 돌다리 밑에서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술이 깨고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오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오월이 참빗 하나 사줘야 하는데...”


대문을 나서기 전 작정이 떠오른 만식은 허리춤에 찬 엽전 주머니를 더듬거렸다.

그러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둑했던 주머니에 엽전 한 푼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얼마였는지는 모르지만 제법 많았던 돈이 술 취한 반나절 사이 모조리 사라진 것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오월이의 빗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 돈으로 저잣거리 여기저기를 다니며 사람들이 무슨 소리들을 하는지 듣고 오너라.’


나리의 분부였다.

그런 돈을 술 처먹고 취해서 제멋대로 뿌리고 다닌 것이다.


‘큰일 났다!’


기억나는 거라고는 주모의 누렁 뻐드렁니뿐이었다.

만식은 돌다리 기둥에 쭈그려 앉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그 점쟁이가 그리 용하다며?”

“아무렴. 칠석이 처가 아기가 거꾸로 들어선 것까지 맞춰서 살려냈다 하잖아.”

“그런데 그런 용한 양반이 왜 거지 소굴에서 지낸대?”

“그거야 모르지. 복채는 일절 받지를 않으니. 콩이나 식은 밥 한두 덩이 말고는 아예 받으려고 하지를 않는다고.”


만식은 귀가 번쩍 뜨였다.

고개를 들어보자 냇가 맞은편 다리 밑에 오줌 누러 내려와 여담을 나누는 거지들이 보였다.


“여보시게.”


만식의 부르는 소리에 돌아본 거지들은 화들짝 놀라 바지춤을 올리고 조아렸다.


“예, 나리. 부르셨습니까?”

“......”

“말씀하시지요.”

“어? 아, 그래. 지금 한 말이 무슨 얘기인가?”

“예? 아.. 저 남산 밑 큰 거지 소굴에 있는 점쟁이 얘기이옵니다.”

“거 소상히 말해보게나.”


만식의 발걸음이 바빠졌다.


‘이거다. 이거면 나리께 전할 얘깃거리가 생길 테지? 나리였다면 이런 얘기 절대 듣지 못했을 거야.’


남산까지 가려면 한참이 걸렸다.

하지만 만식은 반드시 가야만 했다.


해가 지고 달이 떠서야 만식은 남산 밑에 당도했다.

입구에서부터 썩은 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래도 마당쇠 노릇이 거지 노릇보다야 나은 건 분명했다.


“여기 용하다는 점쟁이가 있다던데. 어디 있는지 아는가?”

“예, 나리. 움막들 가운데 큰길로 쭉 가시면 그 끝에 제일 허름한 움막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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