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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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분이는 공파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장작 불길에 비친 공파사의 깊은 눈빛이 어쩐지 그녀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그녀는 작은 나뭇가지를 집어 들고 선 하나를 찍 그었다.
‘一’ (한 일)
“제가 아는 한 개밖에 없는 글자에요.”
그러자 공파사는 씨익 웃더니 자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달수야, 얼른 군포 포대기 지고 떠나라. 춘분네는 횃대로 쓸 천 쪼가리나 작대기 충분히 챙기시고.”
공파사의 자신 있는 외침에 마을 사람들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산군님 큰 병 나셨소. 올 때도 소바위산 가운데 길로 당당히 와도 될 터이니 걱정들 마시오.”
황영감은 조심스레 공파사에게 다가갔다.
“어찌 그리 아는가?”
공파사는 웃으며 마당 한가운데 크게 ‘一’ (한 일) 한 일 자를 쭉 긋고 말했다.
“보시오. 연분이가 쓴 글자가 ‘一’ (한 일) 한 일 이지요? 이 글자를 가운데 놓고 위로는 ‘生’ (살 생) 살 생, 아래로는 ‘死’ (죽을 사) 죽을 사 이니 지금 삶과 죽음 한가운데 처했다는 뜻입니다. 자기 앞을 지나가는 토끼 한 마리 잡을 힘도 없을 터이니 오늘 내일은 안심하고 저 산길로 다녀와도 괜찮습니다.”
공파사의 당당한 목소리에 달수의 안색이 확 밝아졌다.
죽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었다.
연분이한테 장가도 못 가고 죽을까 그게 서러워 눈물이 나려는 걸 참고 있던 것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채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연분이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난 같은 점괘 풀이 한 마디에 덥석 달수와 춘분 엄니의 목숨을 맡기다니.’
그런 연분이에게 어느샌가 커다란 봇짐을 진 달수가 다가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연분아, 내 냉큼 다녀올 테니 걱정 말고 있어. 내일도 저 소바위 산길로 가로질러 얼른 올 테야.”
안절부절못하던 마음이 달수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탁 하고 놓였다.
연분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렁이는 장작 불길 너머로 주근깨투성이 춘분 엄니가 험한 산길을 오르려 치맛자락을 단단히 올려 메고 있는 모습.
그 모습이 여느 남정네 못지않게 듬직했다.
마을 어른들은 모두 달수와 춘분 엄니를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에게서도 걱정하는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달수는 뭐가 그리 기쁜지 싱글벙글하기까지 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아주 어릴 적 엄니가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파사 어르신 덕에 우리 연분이 살아났으니 뵐 때마다 인사 잘 올려야 한다, 연분아.’
마른 장작개비 타는 탁탁 소리가 연분이의 귓가에 노닐었다.
들뜬 불길이 빨갛게 익은 두 볼 위로 춤을 췄다.
큰 봇짐에 가린 횃불이 출렁출렁 어둠 속으로 멀어져 갔다.
마을 사람들은 모여 서서 둘의 뒷모습이 멀리 멀리 소바위산 깊은 형세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하지만 황영감만은 낡은 곰방대에 불을 붙인 채로 툭툭 꺼져가는 싸리 장작의 불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르신, 이제 안심하시고 들어가 주무십시오. 날이 찹니다.”
공파사가 황영감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미안하네...”
황영감은 새어 나오듯 갈라진 목소리를 내뱉었다.
“괜찮습니다. 이게 어디 남의 일입니까?”
소란이 잦아들고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공파사는 밤이 늦어 촌장 집의 작은 방에서 자고 가게 됐다.
괜찮다는 공파사를 땅딸보 촌장 부인이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고요 속에 풀벌레들의 바스락거림이 지근거렸다.
올빼미의 울음소리마저 길게 들려왔다.
초가을의 쌀쌀한 바람이 어둠에 잠긴 산골 마을을 감싸 너울거렸다.
다음 날 공파사가 눈을 떴을 때에는 해가 이미 하늘 꼭지에 올라 있었다.
“해가 중천이네. 나 혼자서 팔자 좋구나.”
공파사는 옷고름을 여미고 방을 나섰다.
그러자 그 앞에는 온 마을의 남은 사람들이 두 손을 모으고 그가 깨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밤새 잘 주무셨는가?”
“네, 황영감님. 촌장님 댁 이불 중에 제일로 두터운 놈으로 덮고 푹 잤습니다. 귀한 장작을 얼마나 때 주셨는지 바닥이 불입니다, 불. 하하하.”
“시장할 텐데 밥 한 술 뜨고 가게나. 또 그냥 가지 말고.”
그제야 공파사는 고개를 돌려 툇마루를 보았다.
거기에는 작고 단정한 교자상 위로 구수한 쌀밥이 한 그릇 수북이 올려 있었다.
놀란 공파사를 보며 마을 사람들은 말없이 깊은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전했다.
그리고는 수줍은 듯 저마다의 집으로 밭으로 돌아갔다.
“꼭 드시고 가시게. 마을 사람들이 십시일반 거두어 차린 상이니 사양 말고.”
공파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황영감의 손을 꼭 잡았다.
“어르신, 이 귀한 쌀밥을 제가 어찌 먹습니까. 이 밥 먹어야 할 사람 둘 곧 옵니다. 따뜻한 물 올리시고 저 쌀밥 나누어 담아 이불 밑에 두십시오.”
순간 황영감은 울컥 눈물이 솟아오르는 걸 주체하지 못했다.
“저야 나중에 콩 한두 줌이면 됩니다. 그래야 제가 또 살고요.”
황영감은 공파사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고맙네, 고맙네... 그리고 언제나 미안하네.”
공파사는 황영감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짚신을 챙겨 신었다.
부엌에서 뚝뚝 눈물을 훔치던 촌장 부인은 그제야 부랴부랴 말린 콩 석 줌을 챙겨 떠나는 선비의 손에 쥐어 주었다.
공파사는 이번에는 사양하지 않고 콩을 품에 안은 채 꾸벅 인사를 했다.
그렇게 그는 조용히 마을 뒷길을 지나 자신의 초가집이 있는 뒷산 오솔길로 돌아갔다.
까막산 아래 산골 마을의 그날 오후는 유달리 조용했다.
하루를 일해야 하루를 먹고 사는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입을 열지 않은 채 산에서 들에서 콩밭에서 묵묵히 허리 굽혀 일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짬짬이 소바위 산길을 확인하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오후도 다 가고 해가 산 위로 내려앉을 때, 저 멀리 소바위산 한가운데 산길 언저리에서 손톱처럼 조그맣게 달수와 춘분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달수가 돌아온다!”
혹부리 아재의 외침에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연분이는 벌써부터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이었다.
정말 공파사의 말대로 그 무시무시한 산군이 살고 있는 소바위 산길을 아무 탈 없이 갔다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데 그 뒤로 낯익은 두 명의 남정네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아무리 멀리 있어도, 아무리 비쩍 말랐어도 마을 사람들은 그 둘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있었다.
이른 봄 노역에 끌려갔던 덕제와 영득이었다.
달수와 춘분네는 군포를 바치고 때마침 그 둘을 마을로 데려올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황영감의 주름진 눈에서 도토리만 한 눈물들이 왈칵왈칵 쏟아져 내렸다.
멀리 그런 황영감을 알아본 영득이가 쉬어서 갈라진 황영감을 닮아버린 목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아부지! 아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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