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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 님의 서재입니다.

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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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화광
작품등록일 :
2021.06.08 04:12
최근연재일 :
2021.06.19 17:0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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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8
추천수 :
294
글자수 :
72,424

작성
21.06.1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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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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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글자
7쪽

파사 (08)

DUMMY

거지들은 벌벌 떨며 만식에게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비단 도포에 가죽 신발까지 차려입은 양반이 이런 거지 소굴에 찾아오다니, 혹여 어떤 호통이라도 들을까 무서워 모두들 움막으로 숨기 바빴다.

그런 거지들의 모습을 보며 만식은 다시 우쭐해졌다.

여기서는 돈 한 푼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 나는 아직 양반이다.’


길을 따라 조금 걸어 올라가자 정말 유난히도 허름한 움막이 하나 보였다.


“이리 오너라.”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머쓱해진 만식이 다시 부를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허름한 움막의 거적을 열고 수염이 덥수룩한 작고 마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누구시오?”

“자네가 용하다는 점쟁이인가?”

“용하지는 않고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점을 봐주기는 합니다.”

“거 나도 점 한 번 보세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사내는 나뭇가지를 하나 들고 내려가 중간에서 불씨를 옮겨 올라왔다.

그 걸음걸이가 무척 꼿꼿했다.

불씨를 가져온 사내가 다시 들어가고 만식은 귀한 갓이 망가질까 조심스럽게 따라 들어갔다.


움막 안은 제법 아늑했다.

땅을 얕게 파내서 천장이 그리 낮지 않았고, 안에는 어디서 났는지 작은 호롱도 있었다.

익숙한 듯 호롱에 불을 붙인 사내가 자리에 앉아 말을 건넸다.


“기름이 귀해 오랜 시간 봐 드리긴 어렵습니다. 어떤 사정을 봐달라는 것입니까?”

“내 신변이 앞으로 어떻게 풀릴지 알 수 있겠는가?”

“혹시 떠오르는 글자가 있으십니까? 아니시면 제가 갖고 있는 책자가 있는데 거기에서 한 번 글자를 골라보시겠습니까?”

“됐네.”


만식의 말에 사내는 호롱불이 비치는 바닥의 흙을 손으로 쓸어 평평히 하고 불씨를 옮겼던 나뭇가지를 건넸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나리 옆에서 먹을 갈며 어깨너머로 익힌 글자가 한두 자 있었다.

복잡한 글자는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 알맞은 단순한 글자가 떠올랐다.

만식은 자신 있게 흙 위에 글자를 적었다.


‘卜’ (점 복)


사내는 잠시 그 글자를 보더니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의 집 종살이하는 팔자가 달라질 게 뭐가 있겠습니까?”


순간 만식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난데없이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이놈! 종이라니!”

“여기 보니 ‘卜’ (점 복) 서 있는 허리춤에 종 하나가 달려 있지 않습니까?”

“어허, 이 비단 도포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는가?”

“그러고 보니 오늘은 종 대신에 허리춤에 빈 엽전 주머니를 달고 오셨군요?”


노발하던 만식은 그만 뒤로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호롱불에 비쳐 보이는 점쟁이와 눈이 마주치자 덜컥 겁이 났다.


‘이 사람은 속일 수 없다.’


그 눈빛이 너무나도 고요했다.

어떤 미움도 비뚤어진 마음도 없었다.


만식은 혼비백산 뒤돌아 움막을 뛰쳐나갔다.

그리고 마구 달렸다.

가죽 신발은 정말 훌륭했다.

짚신이었으면 벌써 비탈길을 몇 번이고 뒹굴었을 것이다.

만식은 웃고 있는 초승달 아래 저잣거리를 도깨비에 쫓기듯 정신없이 달리고 또 달렸다.


“얘 왜 이러니?”

“모르겠습니다. 나리가 떠나신 그날 밤늦게 돌아오고부터는 계속 저 지경입니다.”


만식은 장독대 옆 돌담에 쪼그려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리는 돌아오자마자 몸을 씻고 의복을 갈아입고는 만식을 찾았다.

하지만 아무리 불러도 만식은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여느 양반집이었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치도곤을 당했으리라.


“오월아, 가서 물 한 바가지 퍼 와서 뿌리거라.”


오월이는 잽싸게도 퍼 와서 차가운 물을 만식의 얼굴에 냅다 뿌려버렸다.

촥.

그제야 깜짝 놀라 만식은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나리를 알아보고는 화들짝 일어나 인사를 올렸다.


“나리, 오셨습니까요?”

“진즉 왔다. 방으로 따라 들어오너라.”


만식은 나리를 따라 털레털레 방으로 들어갔다.


“그게 다 사실이렷다?”

“예, 나리. 죽을죄를 지었습니다요.”


만식은 그날 자신이 겪었던 일을 하나도 숨김없이 나리에게 고했다.

오월이에게 참빗을 사주려던 작심.

주막에서 스무 푼이나 탁주를 사서 마신 일이며, 흥청망청 돈을 쓰고 빈털터리가 돼서 돌다리 밑에 쭈그려 앉았던 사연.

그러다 듣게 된 거지들의 얘기.

그리고 도깨비보다 무서웠던 점쟁이와의 일들까지.

나리에게 혼쭐이 날까 조마조마했지만, 슬그머니 올려다본 나리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반짝거렸다.


“네가 썼던 글자가 ‘卜’ (점 복) 점 복 자라 이거지?”

“예, 나리.”

“그래, 알았다. 물러가거라.”

“저.. 혼을 내시지는 않습니까?”

“네가 빗이라도 사 왔으면 내년 봄에는 오월이와 혼례를 치러줄까 했는데 그게 물 건너갔구나.”


만식은 축 풀이 죽어 나리의 방을 나갔다.


“오월아, 아까 벗어놓은 만식이 옷 빨지 말고 이리 가져오너라.”


누가 봐도 딱 거지꼴이었다.

며칠을 빨지 않았는지 여기저기 닳아빠진 옷에서는 군내가 진동을 하고, 머리 꼬락서니도 얼굴 꼬락서니도 꾀죄죄한 것이 거지가 아니라고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그 증거로 만식이 말해준 이 거지 소굴 사이를 거닐어도 누구 하나 신경을 쓰지 않았다.

혹시 몰라 해가 저물 때 즈음에 맞춰 남산 밑에 당도한 나리는 구부정하게 자세를 고치고 찬찬히 주위를 살피며 길을 올랐다.


그렇게 구불구불한 끝에 다다를 즈음.


‘찾았다.’


희한하게도 유독 허름한 움막이었다.

나리는 일부러 입구 거적때기를 휙 들어 올리고 무작정 들어갔다.


“여그가 점쟁이 있는 곳이 맞지라?”


불쑥 무례하게 들이닥친 나리의 눈앞에 얇은 거적 위에 웅크려 누워 있는 수염이 덥수룩한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사내는 조금도 놀라거나 기분 나쁜 구석이 없이 나리를 맞았다.


“맞소. 어찌 찾아오셨소?”


나리는 철퍼덕 주저앉으며 다짜고짜 언성을 높였다.


“나가 시골서 빌어먹다 굶어 뒤질까 봐 한양에를 안 올라왔소? 근디 여서도 빌어먹는 팔자 똑같더란 말이시!”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겠소?”

“나 팔자 고칠 방법 좀 알려주소.”


사내는 진지한 표정으로 자세를 고쳐 앉고는 나리에게 말했다.


“내가 미약해서 그런 방법까지 알 수는 없으나 혹 앞으로 어찌하면 나아질지 한 번 봅시다.”


나리는 사내의 태도에 적잖이 놀랐다.

고쳐 앉은 자세의 고고함이나 이런 무례에도 조금의 흐트러짐 없는 진심에 마음이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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