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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 님의 서재입니다.

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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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화광
작품등록일 :
2021.06.08 04:12
최근연재일 :
2021.06.19 17:00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5,011
추천수 :
294
글자수 :
72,424

작성
21.06.11 19:00
조회
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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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글자
7쪽

파사 (11)

DUMMY

“당분간 별채에 머물 손님이 계시니 정성들을 다해 모시도록 하게나.”

“예, 나리.”


박문수의 집에 별안간 식객이 생겼다.

집안 하인들은 나리께서 생전 처음 들이는 식객이 누군지 무척 궁금했다.

하지만 나리는 손님에 대해 일절 말을 아꼈다.


며칠이 지나도 새로 온 손님은 방 밖을 잘 나서지 않았다.

게다가 손님의 모든 접대는 오월이가 맡고 있었다.

때문에 나리와 오월을 제외하고 누구도 손님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오월아, 가서 이 옷가지들을 손님께 전해드리거라.”

“예, 나리.”


오월은 기분이 좋았다.

처음에는 비위 맞출 걱정에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손님을 보러 갈 생각에 하루하루가 설레었다.


‘그렇게 하얗고 고운 사내가 또 있을까?’


얼굴만 고운 것이 아니었다.

조심스러운 말투며 행동거지, 티 내지 않는 세심한 배려까지.

종살이하면서, 아니 여태껏 어느 남정네에게서도 그런 예의와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었다.

별채로 향하는 오월의 마른 발걸음이 어느새 사뿐사뿐 가벼워져 있었다.


“오월아, 잠깐만.”


오월의 발걸음을 턱 막아서는 만식이었다.


“왜, 만식아?”

“그 옷 내가 가져다주면 안 될까? 손님 얼굴 한 번 보고 싶어서 온몸이 근질근질하다.”


‘흥! 내가 네 속을 모를 줄 알고?’


오월이의 부모는 평민이었다.

수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던 오월이네 가족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오월이의 아비에게는 지독한 의처증이 있었다.

매일 같이 술만 마시면 엄니를 의심하여 쥐 잡듯이 들들 볶고 두들겨 패기가 일쑤였다.

가장이 그 모양이니 가세는 점차 기울고, 어려서부터 그 꼴을 보고 자란 오월은 결국 아홉 살에 남의 집 종살이 신세로 팔려 오게 된 것이었다.

어린 오월은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고 온 엄니 생각에 매일 저녁 아궁이 앞에 앉아 몰래 눈물을 훔쳐야 했다.

다행히 아비는 몇 해 전 술병을 앓다 죽어버렸다.

하지만 몇 년 동안 그런 남편 병수발까지 들던 엄니마저 그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오월은 남정네들의 치기 어린 질투심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너무너무 싫었다.


“싫은데. 나리께서 내게 시키신 일이란 말이야.”

“그 옷 나한테 넘겨주면 내가 나중에 장날에 엿가락 두 개 사다 너 줄게.”

“참말이야?”

“그럼, 참말이지. 내가 너한테 거짓말하는 거 봤어?”


오월은 만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만식이 싫지는 않았다.

좀 바보 같고 허풍이 심해서 그렇지 심성은 순하고 착해빠졌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엄니처럼 살기는 싫었다.

혼례 후에 남정네 속이 어떻게 변할지 누가 알겠는가.


“이래 봬도 나 탐내는 데가 한양에 스무 집도 넘는다. 우리 주인 나리도 나 싫다면 억지로 아무하고나 혼례 시키시지 않는다고.”


‘만식이 너! 나 실망시키면 안 돼!’


“갑자기 뭔 국밥 마는 소리여?”

“여서 기다릴 테니까 가서 얼른 전해드리고 벗으신 옷가지까지 받아와야 해, 알았지?”

“알았어, 알았어.”


만식은 오월의 품에서 하얀 옷가지를 냉큼 집어 들었다.

그리고 덩실덩실 손님이 머무는 별채를 향해 걸어갔다.


만식의 속은 오월이 걱정하던 그대로였다.

아무리 주인 나리의 손님이라지만 오월이 매일 수시로 남자 혼자 있는 별채에 드나드는 게 영 싫었다.

가서 싫은 티 팍팍 내고 구린 방귀라도 대차게 뀌고 나올 심산이었다.


“선비님, 주인 나리께서 전해드리라는 옷가지입니다.”

“고맙소. 잠시만 기다려주시오.”


‘나리의 손님이 하인에게 존댓말이라니.’


만식은 손님이 뭔가 어설픈 것 같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손님이 얼굴을 내비쳤다.


‘이때다!’


찌부러진 메주 마냥 오만 인상을 팍 쓰며 험상궂게 얼굴을 들이밀던 찰나.

만식은 숨이 턱 멎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그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멀끔히 수염을 밀었으나 어찌 저 눈빛과 저 꼿꼿한 몸가짐을 잊을 수 있겠는가.


“괜찮으시오?”

“괘 괜찮습니다요..”


만식은 절을 올리고는 허겁지겁 그곳을 빠져나오려 했다.

하지만 문득 뭔가 이상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어 다시 손님의 얼굴을 슬며시 바라보았다.


‘날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하지만 아무리 행색이 바뀌었다고는 하나 어떻게 이리도?’


“선비님, 혹시 눈이..?”


공파사는 만식의 물음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이긴 하나 조금 흐릿하오.”

“..송구하옵니다요.”

“괜찮소. 그런데 어찌 눈치채셨소?”

“그게...”

“눈썰미가 좋으신 게로구먼. 난 눈치가 없단 얘기를 자주 들어왔던 터라..”

“선비님께서요? 그럴 리가요!”

“하하하. 다행히 내 인상이 그리 보이지는 않나 보오?”

“도깨비인 줄 알았습니다요.”

“도깨비? 하하하.”


‘무슨 웃음소리가 이리도 아이처럼 해맑을 수 있지?’


그 웃음소리에 만식의 잔뜩 오그라들었던 맘이 탁 풀렸다.


“하하하하.”

“허허.. 허허허허.”

“고맙소. 덕분에 몇 년 만에 이리 웃어보는지 모르겠소.”


고맙다.

이 한 마디가 만식의 가슴 속에 깊이 박혔다.

종놈 팔자에 고맙다는 말을 언제 들어봤겠는가.


담벼락 뒤에 쪼그려 기다리던 오월은 뜬금없는 웃음소리에 발딱 일어나 별채 안을 빼꼼히 들여다봤다.

그러자 이게 무슨 광경인가?

만식과 손님이 뭐가 그리 즐거운지 서로 깔깔대며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저 고고한 선비님이 만식이랑?’


잠시 후 만식은 손님이 옷을 갈아입으러 방 안으로 들어간 동안 그 앞에서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묵묵히 기다렸다.

그리고 벗은 옷가지를 받아서는 깍듯이 인사를 올리고 종종걸음으로 별채에서 걸어 나왔다.


“무슨 얘기가 그리 재미지던?”


오월은 폴짝 만식 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런 오월에게 옷가지를 건네며 만식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월아, 선비님 잘 모셔드려. 귀한 손님이시다.”


만식의 뜻밖의 모습에 오월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듬직하고 어른스러웠다.

쓸데없이 질투나 하고 허풍이나 떠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남을 우러를 줄도 알았다니.


“흥, 그럼 엿가락 말고 더 좋은 걸 사줘야지!”


오월은 홱 돌아서 치마를 살랑거렸다.

그 교태에 만식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오월은 만식이 자신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지 않은 채 살랑살랑 부엌으로 숨어버렸다.


“요번 장날에는 꼭 고운 참빗 하나 사줘야겠다.”


만식은 넋을 잃은 채 오월이 사라진 부엌 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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