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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 님의 서재입니다.

파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완결

화광
작품등록일 :
2021.06.08 04:12
최근연재일 :
2021.06.19 17:00
연재수 :
21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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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6
추천수 :
294
글자수 :
72,424

작성
21.06.15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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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파사 (16)

DUMMY

느닷없이 정변이 일었다고 한다.

우리 고을 대대로 만석꾼인 대감마님께서 지금 임금이 가짜 임금이라며 봉기를 일으키셨단다.

이제 곧 봄 농사를 지어야 할 텐데 큰일이다.


대감마님의 군대가 관아를 습격해 관군을 무찔렀다고 한다.

고을 곳곳에 깃발이 서고 창칼을 든 군졸들이 북쪽 길로 우르르 몰려가는 광경을 몇 번이나 봤다.

옆집 재봉이도 군역을 치르러 갔다가 휩쓸려 대감마님의 병졸이 됐다.

재봉이 말고 동무 몇 놈도 같이 끌려갔는데 난 다리를 절어 군포로 대신 하느라 빠지게 됐다.

재봉이 처 말로는 청주성도 벌써 대감마님 것이 됐고, 곧 한양으로 갈 거라고 재봉이가 말했단다.

재봉이 처는 며칠째 밥도 안 먹고 엉엉 울고만 있으니 큰일이다.


대감마님의 군대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사방팔방에서 들려와 온 고을이 떠들썩하다.

점령한 관아마다 관곡을 풀어 마을 사람들을 먹여 살려주신다고 한다.

떠버리 삼식 아범 말로는 가짜 임금이 대감마님이 무서워 벌써 청국으로 달아났다고 한다.

참말로 세상이 바뀌긴 바뀔라나 보다.

그나저나 당장 모판 만들어야 하는데 손이 부족해 큰일이다.


재봉이가 돌아왔다.

피투성이에 몰골이 아주 말이 아니었다.

한양 가는 길목에서 임금님의 군대와 맞닥뜨렸는데 힘 한 번 못 써보고 졌다고 한다.

거기서 다들 뿔뿔이 흩어지고, 재봉이도 겨우 목숨만 건져 돌아온 거라고 했다.

손가락도 두 개나 잘려서 재봉이 처는 또 밥도 안 먹고 엉엉 울기만 한다.

그래도 엄지랑 검지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오늘 문수를 다시 봤다.

작년 봄이었던가?

마을 입구에서 거지꼴로 빌빌대는 걸 집에 데려와 밥도 먹이고, 두 밤이나 재워주기도 했었다.

그런데 오늘 보니 용마루 같은 말 위에 앉아 번쩍이는 갑옷에 큰 칼까지 차고는 임금님의 군대를 이끌고 우리 고을로 돌아왔다.

나는 어찌 된 영문인가 어리둥절했는데 고을 사람들 말로는 문수가 무슨 어사또였다고 한다.

막 반말도 하고 새끼 못 꼰다고 구박까지 했었는데 큰일이다.


재봉이가 관아에서 곤장을 열 대나 맞았다.

대감마님께 치도곤을 맞을까 봐 어쩔 수 없이 끌려갔을 뿐인데 대짜 곤장 열 대라니.

하지만 재봉이 처랑 재봉이 아버지는 재봉이를 살려주셔서 감사하다고 문수에게 절을 스무 번도 넘게 했다.

사람들이 죄다 말하기를 문수가 아니었으면 우리 고을 남정네들은 모두 목이 잘렸을 거라고 한다.

어찌 됐든 올해 농사는 겨우 지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다.

하지만 재봉이랑 같이 갔던 동무들이 아직 반도 안 돌아와 큰일이다.


참, 대감마님은 결국 달아나다 붙잡혀서 한양으로 끌려가셨다고 한다.


“자네들 그 얘기 들었는가?”

“무슨 얘기?”

“요번에 붙잡혀 끌려온 그 역적 괴수 얘기 말이여.”

“들었다 뿐인가? 난 그날 거기 있었네그려.”

“그럼 그 소문이 사실인가?”

“말도 말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니까.”

“그러지 말고 여 막걸리 한 사발 꿀떡 들이켜고 쭉 풀어놔 봐.”

“그려. 우리도 그 얘기 좀 들어보자고.”

“후우... 그 역적 괴수 놈을 능지처참한다고 온 한양에 소문이 난 날 아니었나. 그러니 구경꾼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지. 마침 나도 그날 일이 비어서 일찍 아침부터 자리 잡고 앉아 있었는데, 곧 그놈이 오랏줄에 묶여 형장으로 끌려 나오더라고. 한데 그 낯빛이 반성 커녕 독기가 올라 시뻘겋게 눈알을 부라리고 있더라니까.”

“세상에나...”

“저런 찢어 죽일 놈!”

“들어봐. 그래서 그놈 사지를 찢으려고 수레 네 개에다가 팔다리를 하나씩 묶지 않았겠어? 그런데, 우리 임금님 성품이 또 얼마나 인자하신가. 머리부터 잘라 고통을 덜어주시기로 했다 하잖아.”

“아이고, 그런 놈은 천천히 찢어 죽였어야지..!”

“아, 들어보라니까. 그래서 그랬는지 그날따라 망나니가 칼춤도 안 추고 대번에 댕강 목을 잘라 버리더라고.”

“허, 그놈 복 받았네.”

“그런데 소름 끼치는 건 그 다음이었어. 하필이면 똑 떨어진 그 모가지가 내 쪽으로 떼구루루 굴러온 거야. 그런데 이 떨어진 모가지가 죽지도 않고 악착같이 눈알을 굴려 자기 몸통을 찾고 있더라고 글쎄.”

“오메, 오메!”

“그 흉측한 모습에 사람들이 죄다 기겁을 했는데, 그러든가 말든가 이 모가지는 지 몸통에서 팔다리가 뜯기는 모습을 끝까지 노려보더라고. 그러더니 죄다 뜯겨나가서 몸통만 덩그러니 남으니까... 그때서야 스르륵 눈을 감는 거야.”

“어우, 소름 돋아.”

“소문이 다 사실이었네, 사실이었어!”

“세상에 별 해괴한 일도 다 있네그려.”

“그런데 참 묘한 건... 그 독기 뻗친 얼굴이 다 잘려 나간 지 몸통을 보더니 세상에 더할 미련이 없다는 것마냥 편안하게 미소까지 짓는 것 같더라고.”


조르륵.

영조의 잔에 맑은 감로주가 차올랐다.

공파사는 떨리는 손길로 조심스레 임금의 잔을 채우고 있었다.


술이 차자 영조는 기분 좋게 첫 잔을 쭉 들이켰다.

그에 공파사도 고개를 돌리고 세 번에 나눠 잔을 비웠다.


“그래, 박문수에게 듣자니 관직도 싫다 재물도 싫다 전답도 싫다 하였다지?”


공파사의 얼굴이 귀까지 빨갛게 확 달아올랐다.

그리고는 어려운 마음에 겨우겨우 말을 이었다.


“송구하옵나이다, 전하. 소신은 재물을 가져서도 탐해서도 아니 되는 몸이오라 감히 전하의 하사를 받지 못하였나이다. 게다가 소신은 그런 황송한 하사를 받을 만한 일을 한 적도 없는지라 더욱 받지 못하였사옵나이다. 부디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영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것을 묻고, 듣고 싶었다.

그러나 묻지 않았다.

그것이 또한 윗사람이 지켜야 할 예의였기에.

그의 충정을 어찌 모르겠는가.

아무런 대가도 바람 없이 오로지 순정을 다 하고자 애쓰는 그의 마음가짐을 어찌 모르겠는가.

그렇기에 임금도 그 신실함에 예를 갖춰야만 했다.


하지만 응당 받아야 할 포상조차 받지 못하고 게다가 받지 못함에 죄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무구한 모습을 보자 영조는 괜스레 심술이 났다.


“그래. 그럼 내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 자네에게 임금 노릇 할 필요도 없겠구먼. 가만 보니 자네는 사람도 아닌 신선 같으니 내 아무리 임금이라 하나 신선에게까지 임금일 수 있겠는가?”

“전하, 어찌 그리 면구스러운 말씀을 하시옵니까? 소신의 불충을 꾸짖어 주시옵소서.”

“에이, 이것도 재미없구먼. 영 틈이 있어야지.”

“......”

“내 자네에게 숨길 게 뭐 있겠나? 임금이라 해봐야 허울이지, 마음 터놓고 지낼 벗조차 가지기 어려운 처지 아니겠는가?”

“하오나 박문수는 충심으로 전하의 마음을 헤아리는 자가 아니옵니까?”

“그자는 좋은 신하이자 또한 유일한 내 친우이기도 하지. 한데 요상한 구석으로 꽉 막힌 데가 있단 말이야. 예전에 함께 야행을 나갔다가 마침 주막에 들러 둘이 송절주 한 잔 나누지 않았겠나. 거기서 편하게 이런저런 속 얘기를 터놓았는데, 하마터면 먹던 조기 꼬리를 그자 면상에 집어 던질 뻔했네. 아주 고집불통이야, 고집불통!”


배시시.

생각지도 못한 임금의 투덜대는 모습에 공파사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곧바로 화들짝 놀라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영조가 그런 공파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영조는 이내 슥 미소를 지었다.


“영 신선인 줄 알았더니 그리 웃을 줄도 아는구먼. 그럼, 신선 선생. 기왕 사람 모습 보인 김에 뭐든 좋으니 나한테 부탁 하나 해보시게. 나도 사내인데 자네한텐 항상 빚진 마음이 들어 영 편치가 않으이.”


공파사는 어찌 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했다.

임금이 저리도 얘길 하는데 거절하는 것 또한 예의에 어긋나는 노릇이었다.


“하오면...”

“그래그래.”


영조의 눈이 반짝였다.


“서고를 정리하다 보니.. 더없이 귀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수백 년도 더 되어 세월에 낡아버린 서책들이 있사옵니다. 미약한 필력이나 윤허하여 주신다면 그 서책들을 필사하여 남기고 싶사옵니다.”

“......”

“......”

“겨우 그건가? 그건 부탁이라기보다는 일감인 것 같은데?”


공파사는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걸 느꼈다.

이후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이 사내는 평생 남의 부탁만 듣고 살아왔구나.’


어쩐지 다음 잔에 채워질 술이 몹시도 달 것 같았다.

하지만 임금은 그저 피식 웃었다.


“어련하시겠나. 이슬이랑 먹물만 드시는 신선님이시니..”

“송구하옵나이다.”

“어쨌든 내가 자네 소원을 들어준 것이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전하.”


공파사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영조가 보기에 그 모습이 꼭 박꽃 같았다.

화려하지도 귀하지도 않지만 아무런 스스럼없이 환하게 핀 하얀 꽃.


“천하일색은 색도 모양도 없어 그리기 어렵다더니 그게 이런 뜻이었군.”


공파사는 영조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영조는 말없이 빈 술잔을 내밀었다.

그에 공파사는 서둘러 다시 임금의 잔에 감로주를 채웠다.


구름 한 점 없이 휘영청 달빛 아래 밤이 깊어갔다.

이슬과 같은 감로주라 할지라도 결코 석 잔 이상 마시지 않던 임금이 그날 밤은 몇 잔이나 술을 비웠는지 기억조차 못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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