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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 님의 서재입니다.

파사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대체역사

완결

화광
작품등록일 :
2021.06.08 04:12
최근연재일 :
2021.06.19 17:00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4,960
추천수 :
294
글자수 :
72,424

작성
21.06.13 17:00
조회
176
추천
14
글자
9쪽

파사 (14)

DUMMY

“공 내관은 오늘 일찍 처소에 들도록 하게나.”


사서는 오늘따라 어쩐 일인지 일찍 업무를 마치도록 지시했다.


“예, 나리.”


요 며칠 공파사는 임금을 뵙지 못했다.

해결해야 할 여러 정무 때문이라 들었지만 실은 고질병인 두통이 도졌기 때문임을 공파사는 알고 있었다.

영조는 아프다는 사실조차 알리기가 조심스러워 어의조차 임금의 두통을 알지 못했다.


‘얼른 나으셔야 할 텐데...’


근심이 생겨서일까?

공파사는 문득 생각이 많아졌다.

언제나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왔다.

아무리 많은 생각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는가.

남는 생각은 근심으로 변해버릴 뿐 결국 세상 모든 일은 생각과는 무관하게 흘러갔다.


‘생각하지 않아도 생각은 한다. 그러니 더할 필요는 없겠지.’


생각을 떨치려 공파사는 하늘을 바라봤다.

금방 해가 저문 하늘에는 오늘따라 달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담아둘 바 없었다.

달은 반드시 다시 떠오르기 마련이니까.


‘보지 않아도 원치 않아도.’


공파사는 예의 꼿꼿한 걸음으로 어두워진 궁궐의 한 구석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그의 처소는 가장 멀고 깊숙이 후미진 곳에 있었다.

그곳은 궁궐과는 어울리지 않게 작고 허름한 건물이었다.

때로 궁에 들어오게 되는 천한 인력들을 임시로 재우는 데 사용되곤 했는데, 그마저도 낡아 허물 예정이던 곳이었다.

작은 책상 하나와 반닫이 하나 그리고 겨우 몸을 누일 수 있는 비좁은 방이 그에게 마련된 거처였다.

하지만 요와 이불만은 고관대작들이 부럽지 않을 두터운 솜이불이었다.

박문수는 공파사에게 남들의 눈을 경계해야 한다며 궐의 처소에 머물러 줄 것을 부탁해놓고는, 몰래 자신의 사람을 시켜 황소만 한 그 솜이불을 방안에 들여놓은 것이다.

처소로 향할 때마다 공파사는 그 생각이 떠올라 혼자 싱겁게 웃고는 했다.


오늘도 그렇게 돌아와 방문을 연 공파사는, 순간 섬뜩함을 느끼며 방 앞에 멈춰 섰다.


“이 수많은 글자들이 단 한 자도 그 뜻이 이어지지 않으니 그 안배가 실로 놀랍군.”


생전 처음 보는 새하얀 얼굴의 선비가 방 안에 앉아 있었다.

그자는 너무나도 평온한 표정으로 책상을 놓고 반닫이에 고이 넣어두었던 한자책을 꺼내서 읽고 있었다.


그곳은 궁궐이었다.

결코 아무나 함부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한데 이 자는 의관을 갖추지도 않은 채 심지어 보란 듯이 옥색 비단 도포에 큰 갓까지 쓴 채로 궁궐 가장 깊숙한 곳, 부르는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그 처소 안에 태연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필경 그의 처소인 것을 알고 그가 돌아올 시간까지 알고 있었음이라.


“마치 붓이 제 홀로 춤추어 노닌 흔적 같구먼.”


새하얀 선비는 가지런히 책을 덮고 공파사를 바라봤다.

그에 공파사는 조용히 문을 닫고 그의 앞에 꼿꼿이 마주 앉았다.


“어찌 오셨소이까?”

“혹 남산 밑에서 천인들에게 점사를 봐주지 않았는가?”


공파사는 깜빡이듯 잠시 눈을 감았다.


‘보지 않아도 원치 않아도.’


머릿속을 비운 공파사는 이내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맞소이다.”


그 대답에 선비의 얇은 입술에 살짝 미소가 앉았다.


“이름이 어찌 되는가?”

“본 이름은 아니나 공파사라 불리고 있소.”


선비는 살피듯 공파사를 바라보았다.

공파사는 여전히 꼿꼿한 채 선비의 시선을 마주 보았다.

그렇게 묘한 침묵이 방안을 감쌌다.


“......”

“......”

“어찌 내가 누군지 묻지 않나?”


이윽고 선비가 입을 열었다.

공파사가 답했다.


“...다른 이의 신변을 물을 처지가 되지 못하오.”

“이인좌라 하네.”


공파사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그에 답했다.


“긴히 알고 싶은 바가 있어 이리 찾아왔네.”

“말씀하시오.”


이인좌는 잠시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공파사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곧 행하려는 큰일이 있어 그 일에 점사를 볼 수 있겠나?”


공파사는 호흡을 가다듬고 더욱 자세를 갖추어 말했다.


“미약하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한 번 봐봅시다.”


‘온전히 진심이다.’


“혹 떠오르는 글자가 있으시오? 아니면 앞에 그 책자를 살펴보고 마음이 가는 글자를 정해도 좋소.”

“길을 오기 전 크게 떠오른 글자가 있어 미리 적어왔네.”


이인좌는 품 안에서 글자를 담은 봉투를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공파사는 천천히 일어나 두 걸음을 걸어 책상 앞에 가까이 앉았다.

이인좌는 그런 공파사를 가는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에도, 조그만 몸가짐조차 빈틈이 없구나.’


공파사는 공순한 손길로 봉투를 열어 그 안에 접힌 종이를 꺼내 책상 위에 펼쳐보았다.

종이에는 세찬 붓놀림으로 큼지막하게 써놓은 한 글자가 새겨 있었다.


‘田’ (밭 전)


공파사는 그 글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한숨 섞인 투로 말하였다.


“이미 ‘口’ (입 구) 입속에 ‘十’ (열 십) 열 가지 말이 있으니 내가 무엇을 보고 얘기한들 당신은 어떻게든 변명이나 논리를 펼쳐 결국 그 일을 하고야 말 것이오. 그러니 내가 그 일을 볼 수도 볼 필요도 없소.”


‘저 말은 알고 하는 소리인가, 진정 모르고 하는 소리인가?’


하지만 문답의 주도권을 놓지 않으려 이인좌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 결과라도 알 수 있겠나?”

“나는 다만 당신이 그 일을 하지 않기를 바라오.”

“왜지? 그대가 보기에 뜻에 어긋나서?”

“그건 모르겠고 그 일의 결과가 당신에게 좋지 않기 때문이오.”

“자네는 내가 하려는 일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앞서 말했다시피 그 일이 무엇인지 난 알 수 없소. 그게 하늘의 뜻인 듯싶소.”


이인좌는 피식 웃었다.


“엉터리로구먼. 보지도 못한 일을 갖고 그 결과를 논하다니.”

“허나 당신이 그 글자를 선택한 품은 마음은 알 수 있소.”


그 말에 순간 이인좌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마음? 감히 너 따위가 내 마음을 헤아리려는 것이냐? 모멸당하고 조롱당한 나와 내 가문을! 잊을 수 없는 그 치욕을 네놈 따위가!’


하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다듬고 이인좌는 조용히 물었다.


“말해 보거라. 네가 입에 담은 내 마음이 무엇인지.”

“구덩이에 빠진 짐승이 헤어 나오지 못한 듯, 가슴 속 품은 ‘凶’ (흉할 흉) 흉한 상처 ‘一’ (한 일) 하나에 뒤덮인 마음의 모양이 마치 ‘口’ (입 구) 사방에 갇혀 ‘乂’ (징계할 애) 벌을 받듯 괴로웠을 광경이오. 그렇게 스스로 갇혀 신음하고 비틀리다 못해 결국 메말라 갈라진 ‘田’ (밭 전) 밭과 같이 척박해져 버린 형국이니, 그 침통함을 내가 어찌 헤아리겠소. 하지만 그렇게 벌인 일의 결과가 참담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것이오.”


이인좌는 괴괴한 눈길로 공파사를 노려봤다.


‘이 자는 점을 보라 했더니 진정 내 속마음을 보았구나.’


얇은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이 없던 이인좌는 이윽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가 본 그 결과가 무엇인가?”

“몸통만 남을 것이오.”

“그게 무슨 뜻인가?”

“당신의 마음이 ‘水’ (물 수) 물속에 잠긴 ‘畓’ (논 답) 논과 같아야 하나 물 없이 메마른 ‘田’ (밭 전) 밭과 같이 되고 말았듯이, 당신이 하려는 그 일 역시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서는 것과 같소. 그러니 ‘魚’ (물고기 어) 물 밖에 나온 물고기 신세가 결국에는 ‘勹’ (쌀 포) 머리가 잘리고 ‘灬’ (불 화) 팔다리가 뜯겨나가고 말 듯... ‘田’ (밭 전) 몸통만 남게 될 것이오.”


이인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자는 점을 보는 것이 아니었다.

왜 이금이 이자를 곁에 두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오늘 밤 내가 여기 왔다는 걸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아주게.”


이인좌는 그 말을 내뱉고 스스로 깜짝 놀랐다.

생전 누구에게도 부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목이 날아갈지언정 자신을 낮추는 언사 따위는 할 수 없었다.


“그리하겠소.”


공파사의 대답을 뒤로 하고 이인좌는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가 궁궐을 가로질러 떠나는 동안 앞을 막는 자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 발걸음은 물고기가 허공을 짚듯 허둥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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