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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광 님의 서재입니다.

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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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화광
작품등록일 :
2021.06.08 04:12
최근연재일 :
2021.06.19 17:00
연재수 :
21 회
조회수 :
4,961
추천수 :
294
글자수 :
72,424

작성
21.06.09 06:00
조회
244
추천
15
글자
7쪽

파사 (06)

DUMMY

“이제 장례도 끝났으니 저는 먼저 마을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며칠 새 공파사의 얼굴은 부쩍 수척해 있었다.

계순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공파사를 만류했다.


“선비님, 언니도 이곳을 치우고 곧 저와 함께 까막마을로 가기로 정했습니다. 그때까지 여기 머물며 저희가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저희와 함께 돌아가시지요.”

“마음은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두고 온 제 집이 변변치 않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어차피 마을로 오시면 다시 보게 될 터이니 그리하시지요.”


이상하게도 공파사의 부드러운 목소리는 거부를 할 수가 없게 만들었다.

공파사가 온 후로 마을 사람 모두 몇 번이나 은혜를 입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공파사는 언제나 조그만 보답조차 사양했다.

그저 콩 몇 알 받는 것으로 기뻐할 따름이었다.


공파사는 장터에 나간 삼순이 돌아오기 전 서둘러 까막마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뽀드득뽀드득.

며칠 사이 더욱 쌓인 눈이 무릎까지 닿았다.

한 발 한 발 깊은 눈을 지르밟으며 나아가야 하는 걸음걸이가 여간 벅찬 게 아니었다.

하얀 입김은 더욱 하얀 눈벌에 묻혀 흩어졌다.

공파사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천천히 산길을 올랐다.


돌이켜보면 참 신기한 일이었다.

이런 깊고 깊은 산중에 마을이 있으리라고 공파사는 생각지 못했었다.

덕분에 그는 다시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었다.


달이 밝았다.

해가 저문 지는 벌써 오래였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달빛은 소복한 눈과 어울려 밤을 하얗게 빛내고 있었다.


‘지금 즈음이면 올빼미 바위가 나와야 하는데...’


눈이 하도 쌓인 탓에 길을 헤매고 있는 듯했다.

몇 년 만에 오르는 길에 눈까지 쌓여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공파사는 저 멀리 산의 왼쪽 소나무 숲에서 누군가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깊이 쌓인 눈 위를 자세 하나 흐트러짐 없이 내려오고 있는 그 누군가는 가녀린 여인이었다.

하얗고 앳되어 보이는 그녀는 분명 공파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산중에 그것도 한밤중 달빛 아래 정체 모를 여인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당장 두려움에 도망칠 생각부터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도저히 그 여인의 걸음보다 빠를 수가 없었다.

결국 그는 포기한 채 눈벌 한가운데 갇혀 묘령의 여인이 다가오는 것을 기다려야 했다.


“......”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겠느냐?”

“선녀겠지요.”

“어째서인가?”


‘仙’ (신선 선)


“여기서 보고 있자니 ‘亻’ (사람 인) 사람이 ‘山’ (뫼 산) 산의 왼쪽 길에서 내려왔으니 ‘仙’ (신선 선) 신선이실 테고, 아무리 봐도 여인인 듯하니 선녀가 맞지 않겠습니까?”


여인은 알 수 없는, 하지만 도저히 사람이 지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그윽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내가 왜 네 앞에 나타났는지도 알고 있으렷다?”

“......”


공파사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말이 없었다.


“네가 살린 그 여인은 원래 남편을 찾아 헤매다 아무도 모르는 산중에서 죽었어야 했다.”


공파사는 가슴속에 치받아 오르는 감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하늘의 뜻이 어찌 그리 가혹하오?”

“네가 감히 하늘의 뜻을 헤아려보려는 것이냐?”

“나는 그저 글이 좋아 학문에 뜻을 뒀을 뿐이오. 세상일을 보는 것 따위 바란 적도 없소.”

“아니. 너는 말하지 않을 수 있었다. 너는 네 의지로 하늘이 정한 길들을 몇 번이나 비틀어버린 것이다.”

“......”

“상제께서 큰 벌을 내렸음에도 너는 달라지지 않았구나.”

“그 벌로 인해 이제 내가 두려울 것이 있을 것 같소?”


공파사의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물이 고였다.

그 눈물은 빨갛게 비쳐 마치 피와 같았다.


“작은 산골 마을 하나 따위야 쌓인 눈을 쓸어 묻어버리면 그만인 것을.”

“어흐흑...”


공파사는 풀썩 주저앉았다.

그는 눈 속에 파묻혀 서럽게 울어댔다.


“차라리 날 죽이시오. 제발 날 죽여주시오.”

“말해 보거라. 정녕 죽고 싶으냐?”

“어찌 이리 잔인하시오. 어찌도 이리 잔인하시오. 살고 싶소. 나는 살고 싶소! 하지만 이런 내가 어찌 살아야 하오?”

“네놈이 살 방도를 알려주마.”


공파사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두려운 마음에 그는 급히 물어야만 했다.


“부디 마을 사람들은 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지금 당장 마을을 떠나거라.”


공파사는 가슴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겠나이다.”


선녀의 목소리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이어졌다.


“이 길로 한양으로 가거라. 거기 남산 아래 거지 소굴이 있을 터이니 그곳에서 네 알량한 재주로 널 찾아오는 이들을 돕거라.”


공파사는 말없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명심해야 할 것이 오로지 두 가지다. 첫째, 어떤 도움도 거절하지 말 것. 그리고 둘째...”


갑자기 선녀는 말을 멈추고 공파사를 바라보았다.

그에 공파사도 고개를 들어 선녀를 바라보았다.

공파사와 눈이 마주치자 선녀는 다시 말을 이었다.


“둘째, 하나의 일로 두 번의 점을 보지 말 것.”


공파사는 엎드린 채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려 뜻을 받들었다.


“명심하여라. 이를 어기면 네가 겪게 될 고통은 가늠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공파사는 엎드린 채 소리 없이 흐느꼈다.


소복소복 함박눈이 내렸다.

빛나는 달빛 아래 바람 한 점 없이 쌓여가는 눈벌 가운데, 울고 있는 공파사의 모습이 하얗게 사라져갔다.


찾아온 그해 가을은 유달리도 콩이 풍년이었다.

까막산 아래 산골 마을은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포개고 포개어 맺힌 콩꼬투리를 따느라 쉴 틈이 없었다.

이 많은 콩을 내다 팔면 올해 군포도 밀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차고 넘치는 콩이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이 쓸 양만을 두고는 나머지를 모두 까막산 중턱 낡은 초가집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옆에 토굴을 넓게 파고 차곡차곡 콩을 쟁였다.


“어르신은 다리도 불편하니 올라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닐세. 내가 가서 봐야지. 내 손으로 콩 한 줌이라도 넣어둬야지.”


공실아범의 만류에도 황영감은 한사코 산길을 올랐다.

그 마음을 아는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황영감을 말리지 않았다.


“언니, 뭘 그리 많이 졌어? 언니보다 가마니가 더 크다.”

“걱정 말아. 하나도 안 무거워.”


자기 몸보다 족히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콩 가마니를 이고 오르는 삼순은 비틀대던 걸음걸이가 제법 돌아와 있었다.

아직 흉터들이 남아 있었지만 유달리 작고 하얀 그녀의 얼굴은 참으로 고왔다.

은은히 옥빛처럼 스민 밝은 표정에 더욱 그리 보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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