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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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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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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10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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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4쪽

Sub Stream / 이른 바람의 이야기 (5)

DUMMY

"이를렌. 엄마 곁에서 떨어지 마."

티엘은 막 반가워하다가도 딸을 등 뒤로 숨기며 조금 전 내던졌던 활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란데의 날개는 주인의 부름에 스스로 떠올라 빨려들듯 티엘의 손아귀로 날아들었다.

활을 감아쥐는 손은 그리겐을 상대할 때보다도 더욱 긴장한 채 신중히 움직이고 있었다.

"하, 할아버지······?"

"가면 안돼!"

티엘은 마른 침을 삼키며 막 등 뒤를 벗어나려는 딸을 재차 말렸다.

이미 그녀의 활 끝은 점차 다가오는 노인을 겨누고 있었다.

무력한 노인에게 무기를 향한다는 죄책감 따위는, 조금도 없다.

노인이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마치 육중한 망치로 갑판을 내려찍는 것처럼 나무들이 바스라지고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으니까.

그의 무게 때문에?

아니, 배가 인간의 체중조차 버티지 못할리 없다.

게다가 나무가 바스라진 형태는 압착되었다기보다는 무언가로 힘껏 파헤친 듯한 형상이다.

티엘이 지면에 손을 대고, 전력으로 마력을 뿜어낸다면 비슷하게 흉내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한 점에 집중했을 때의 이야기지, 지금의 노인처럼 걷는 도중 자연스레 할 수 있는 짓은 아니다.

흉흉한 기세로 한참이나 걸어나온 노인은 마치 해골을 연상시킬 정도로 퀭해진 눈을 번득이며 노인은 티엘과 린델을 번갈아 노려보았다.

좀 더 정확히는, 그 두 사람에게 가려진 레니와 그리겐을 노려보고 있었다.

"하아······."

끓어오르는 열기를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내뱉은 한숨이 하얗게 흩어졌다.

추위 속이라면 모를까, 지금같은 날씨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은 차라리 철판 위에 떨어진 물방울의 비명에 가까웠다.

순간 노인의 주위로 이상한 바람이 맴돌기 시작했다.

마력을 머금은 바람이 불길하게 요동치며 갑판 위를 할퀴고 있었다.

티엘과 린델은 즉각 마력을 끌어올려 바람에 맞섰지만, 산들바람처럼 시작되었던 바람은 순식간에 흐린 폭풍이 되어 그런 두 사람을 뒤흔들었다.

"감히······, 이 바다에 저주를 흩뿌리는가?"

이상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하늘과 바다가 함께 분노하는 것처럼, 혹은 깊은 동굴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토해내는 것처럼, 인간의 목으로는 낼 수 없는 크고 무거운 울림이 대기를 흔든다.

맑게 개어있던 하늘도 탁한 잿빛으로 물들며 불길하게 회전을 시작했다.

"그 더러운 저주로 이 바다를 물들이려는 발칙한 것들이 내 바다에 들어왔던 것이냐!"

노인의 일갈성이 갑판 위를, 그리고 일렁이는 물결을 휩쓸었다.

그와 동시에, 겨우 뱃전을 적시는 수준이었던 파도가 일순간 거대한 물기둥이 되어 폭발해 갑판을 흠뻑 적셨다.

순간 티엘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티끌처럼 작은 물방울 하나조차도, 사람 한 명을 벌레처럼 짓눌러버릴 듯 어마어마한 마력이 억지로 뭉쳐있다.

"칼라가스! 겨울의 성채여, 성역을 지켜라!"

비명처럼 생령의 이름을 부르며 시위를 튕기자 넓은 얼음이 벽처럼 펼쳐졌다.

그러나 그리겐의 총탄조차도 막아내던 얼음벽은, 고작 몇 방울의 물방울이 뿌려진 것만으로도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며 방패로서의 역할을 마치고 말았다.

'······싸우기엔 좋지 않아. 우선 오해를······!'

티엘은 신음을 삼키며 곧바로 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미 분노하여 그들을 노려보던 노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더군다나, 배를 노리는 파도는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조금 전의 파도는 단순한 전조일 뿐이다.

차분히 노인을 다시 찾을 틈 따위는, 이미 없었다.

"새벽의 창이여!"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시 쏘아보낸 아스트라가 바다를 가르고, 그 궤적을 따라 배를 뒤덮을 정도로 거대한 빙산이 솟구쳤다.

또다시 밀려드는 파도를 막기 위한 방파제였지만, 놀랍게도 그 뒤에서 몰려오는 것은 그 거대한 빙산의 크기를 두 배는 넘길듯한 무지막지한 크기의 파도였다.

콰르르르르!

용이 직접 꼬리로 후려치기라도 한 것은 아닐까 싶은 어마어마한 충격에 빙룡의 마력으로 짜올린 빙산이 단숨에 부스러졌다.

"리온스나크!"

린델은 곧바로 빙산을 향해 왼팔을 뻗었다.

'우자의 지혜'에 잠들어있던 마력이 한 덩어리로 뭉쳐 그 손 안에 깃들고, 이내 수 많은 가지가 뻗어나 허공을 수놓았다.

"이건 리아의 전공인데!"

이를 악문 린델은 속박의 속성을 지닌 마력으로 막 허물어지던 빙산의 조각들을 하나 하나 붙들어 원래의 형태로 옭아맸다.

신음을 삼키던 티엘도 부서진 조각들 사이로 다시 얼음을 채워 망가진 벽을 한 덩어리로 수복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휘몰아치는 돌풍 속에서도 흩어지긴 커녕 오히려 점점 짙어지는 물안개로 인해 시야를 확보하는 것조차도 너무나 어려웠다.

게다가 막아야 할 것은 미쳐 날뛰는 바다 뿐만이 아니었다.

"파드마, 실리안!"

파도를 막던 빙산이 갑자기 그 육중한 몸을 뒤틀었다.

남은 마력을 모조리 써버릴 생각인 것처럼, 빙산 윗부분의 얼음을 길게 늘려 펼친 티엘은 그 얼음에 수호령과 공간령의 마력을 한껏 밀어넣었다.

겹겹이 쌓아올린 주문은 그야말로 하나의 성채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견고한 방패를 이루었다.

티엘 자신조차도, 소멸의 권능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칼라가스의 마력을 빌리더라도 이 벽을 단숨에 부수기는 어려울거라 자신할 정도다.

'충분할까?'

그러나 티엘은 불안하게 입술을 깨물며 한층 더 정교한 방벽을 펼치기 위해 끝없이 마력을 움직였다.

과거와는 달리, 이미 티엘의 마력은 별의 서 없이도 최상위권 마법사에 걸맞을 정도로 충만하다.

칼라가스가 완전히 성체로 각성하며 더이상 그 육신을 재수복할 필요도, 동시에 티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마력을 묶어둘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티엘조차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소모를 버거워할 정도로 막대한 마력을 빠르게 불태우고 있었다.

자기 혼자만을 지키는 것은 쉽지만, 배 전체를 감싸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티엘과 가까운 사람들이라면 이미 익숙해졌을, 방대한 마력이 한 점에 집중되는 특유의 감각을 눈치챈 이상, 그 어떤 방어도 지나치다 말할 수는 없을테니까.

"캬아아아아아아!"

순간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포효가 바람소리를 갈갈이 찢으며 하늘 끝까지 솟았다.

'온다!'

린델과 티엘은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이를 악문 채 한계까지 빙벽에 마력을 밀어넣었다.

그런 두 사람의 노력을 비웃듯, 격노한 용의 분노가 몇 번이고 강화한 빙벽 위로 용서없이 내려꽂혔다.

뜨겁게 백열하는 벼락과 싸늘하게 얼어붙는 폭풍.

바다를 뒤엎는 폭풍을 하나의 선으로 응축한 듯한 숨결은 순식간에 그 거대한 빙산을 거침없이 찢어발기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가장 바깥 면의 방패가 부서지기 까지는 겨우 몇 초.

차라리 칼라가스의 숨결로 받아쳐야 했을까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눈앞이 아찔하게 물드는 것을 느끼면서도, 혀를 깨물어가며 애써 의식을 붙든 티엘은 온 힘을 다해 빙벽의 방향을 틀었다.

분노로 눈이 먼 탓에 제대로 제어를 할 여력은 없었던 것일까.

아슬아슬하게 빗면을 만들고 공간을 살짝 비틀어준 순간, 미쳐 날뛰던 마력의 격류는 실리안의 마력을 타고 가까스로 방향을 꺾어주었다.

겨우 빗겨낸 마력은 마치 거대한 채찍처럼 바다를 후려치며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장대한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으로 그 위력을 과시했다.

"크흐악!"

가까스로 배에 직접 공격이 닿는 것은 막았지만, 그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이미 주위의 바다는 시커멓게 물든 채 맹렬하게 끓고 있었고, 마력의 응집과 반발로 모여든 습기는 구름을 이루어 장대같은 폭우를 퍼부었다.

과장도, 비유도 아닌 말 그대로의 재앙.

바다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단신으로 폭풍과도 같은 재앙을 일으키는 자.

"숨이 막힐 정도로 짙은 저 마력······. 압도적인 파괴력을 담은 숨결······. 그리고 인간의 모습을 취할 필요도 없는, 자유롭게 성장하는 생령. 저건, 용이네."

내지르는 포효는 우레가 되고, 분노는 격노가 되며, 마구잡이로 내려치는 꼬리조차 낙뢰가 된다.

격노한 생령이 흩뿌린 마력은 제대로 응집조차 되지 않은 상태로도 린델이 쏘아올린 방어용 인형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린델이 이를 악물며 뿌득거리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하지만 어째서 저렇게 화를 내는거죠!? 마령화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레니를 감싸안은 티엘이 신음을 흘렸다.

인간의 영역을 피하는 생령이라고 해도, 단순히 영역에 들어선 것 만으로는 그토록 화를 내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 항로는 실레마유 섬으로 향하는 가장 대표적인 길이다.

겨우 영역에 발을 들인 것 만으로도 이토록 격노한다면, 이제까지 저 생령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부터 말이 되지 않는 일.

그러나 린델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운이 없었어."

린델의 시선은 의식을 잃은 그리겐과, 그가 떨어뜨린 핏자국을 가리켰다.

동시에 씹어뱉듯 뜨거운 숨결이 분노를 머금은 채 터져나왔다.

"그 칼을 쳐낼 때 저 자식이 흘린 피. 그게 아무래도 바다로 튄 것 같아······."

생령에게 있어, 마력을 품은 피는 그 무엇보다도 자극적인 독약이다.

가장 달콤한 꿀처럼 유혹하며, 가장 진귀한 술처럼 취하게 만들지만, 그 대가로 혼과 육을 썩어들어가게 만드는 가장 지독한 독.

물론, 강대한 생령이라면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쌓아올린 그 지성으로 유혹을 억누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자신의 영역을 지닌 생령 가운데는 영지에 인간의 피를 뿌리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경우가 있다.

마령화를 피해 일부러 깊은 바다 속에 거처를 마련한 용이라면 마럭을 띤 인간의 피는 한 방울만으로도 강력한 도발이었으리라.

특히나 그리겐처럼 상당한 힘을 지닌 마법사의 피라면 더더욱.

난데없이 몰아치기 시작한 폭풍우와 격랑의 틈으로 용의 모습이 언뜻 언뜻 눈에 들어왔다.

희미하게 비취빛을 띠는 잿빛의 비늘로 뒤덮인, 강줄기처럼 길게 구불거리는 거대한 몸뚱아리.

그 거체의 절반 이상은 물 아래 감춰져 있었지만, 물 위로 드러난 부분만 해도 이미 배와 비슷한 체적이었다.

머리 앞을 향해 길게 휘어진 한 쌍의 뿔에서는 벼락불로 보이는 빛이 이따금씩 번뜩이고 있었다.

세 쌍의 눈동자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은색.

마령화하며 몸이 붕궤한 듯한 흔적은 없었지만, 머리 끝까지 분노한 탓에 이성의 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이쪽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으리라.

어금니를 깨문 티엘은 재빨리 자신의 안에서 대정령의 기척을 찾았다.

"······실리안. 해명같은걸 해 줄 수 있겠어?"

인간의 모습으로 분령을 만들었을 때와는 달리, 용의 본체로 돌아간 이상 인간의 말은 할 수 없다.

더군다나 분노에 미쳐 이 쪽의 목소리를 들어주지도 않는다면 서로 주고받는 '대화'는 이루어지기 어렵다.

인간계에서 인간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다루며, 생령의 언어 역시 다룰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대정령 뿐.

그러나 지금 일행이 부를 수 있는 유일한 대정령은 부정적인 의사를 표했다.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을겁니다. 이미 몇 차례 말을 걸어봤지만 이쪽을 인식조차 하지 않는군요.

"그래······."

제 정신을 차리도록 할 수 있을까.

티엘은 자신의 활을 꽉 움켜쥐었다.

어디까지 짐작이지만, 마력의 농도로 추정하면 어림잡아 천 년 이상 살아온 고룡이다.

물론 저 용을 죽이는 것 자체는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잘못이 없는 생령을 죽이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는 것과, 그 이상으로 저 용을 죽일 경우 폭풍의 용이 아닌, 칼라가스와 티엘로 인해 배가 가라앉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땅 위에서와는 달리, 바다 위에서는 칼라가스의 마력을 강하게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주위의 바다가 얼어붙어 배를 부숴버릴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리아와 연락이 닿는다면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통신 범위를 벗어난지 오래이니 의미가 없다.

'파드마로 배를 보호하면서 실리안의 마력으로 장벽을 치면······.'

티엘은 손끝으로 별의 서를 넘기며 뒷말을 삼켰다.

이미 남은 마력으로는 터무니없이 모자라다.

몇 개의 인형을 불러내 용의 시선을 끌며 공격을 흩어놓는 린델도 사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우자의 지혜는 별의 서에 비해서 저장폭도, 보존성능도 떨어지는 영장이다.

장기전에 취약하기로는 예전의 티엘과 크게 다르지 않은 린델이니 이미 남은 마력도 그리 넉넉하지 않을 터였다.

결국 선택지는 너무나 좁았다.

또다시 생명을 깎아내 다른 사람들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단 한 번의 공격에 모든 것을 걸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홀로 떠날 것인가, 아니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 것인가.

"엄마······."

그때 갑자기 그녀의 품 안에 안겨있던 레니가 티엘의 가슴을 두드렸다.

"괜찮아. 엄마가 꼭 지켜줄게. 그러니까-"

티엘은 겁을 먹은 아이를 달래려 조심스레 등을 토닥였다.

하지만 레니는 고개를 저으며 용이 있는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할아버지, 조금 화 풀린 것 같아."

할아버지라면, 저 용을 말하는 걸까.

레니의 말에 고개를 든 티엘은 바다는 미친 폭풍에 끓어오르고 있어도 용 본체는 공격을 멈춘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인지 광분하던 용의 시선은 그들이 아닌, 조금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고요한 기도 산들바람의 노래

따스한 미소 별하늘의 반짝임

갈피를 잃은 마음 달래고 위로할지니


아련한 숨결 이 가슴에 담고서

아득한 꿈길 그 어디로 가는가

갈댓잎 꺾어 타고 네 안으로 들어가리


순간, 찢어지는 바람소리 사이로 가느다랗게 퍼지는 노랫소리가 있었다.

현의 울림은 들리지도 않는다.

폭풍을 뚫는 것만으로도 이미 온 힘을 짜내고 있을테지만, 그마저도 파도가 뱃전을 두드릴 때마다 속절없이 파묻혀버릴 정도로 약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부드러운 노랫소리는, 강철 벽처럼 단단한 바람을 가르며 또다시 고요한 기적을 이뤄내고 있었다.

"나셀······."

옅은 레몬빛의 머리칼을 묶었던 끈은 잿빛 바람이 앗아간 것일까.

바람결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흩날리는 음유시인은 폭풍을 일으키는 용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조금씩 티엘과 레니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시릿한 가슴 긴 파도에 실어

널 위한 마음 이 바람을 담아

갈 곳을 잃은 슬픔 어루만져 잠재우리라


귓가를 울리는 주가는 탁해진 가슴을 잔잔한 물결처럼 위로하듯 부드러운 음색을 담고 있었다.

지나친 슬픔으로 몸을 상하게 하는 자를 달래고, 넘쳐나는 분노로 주위의 모든 것을 망가뜨리는 자를 위로하여, 평화로운 잠을 이루도록 다독이는 자장가.

물론, 다른 승객들이 공황상태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목적도 있으리라.

하지만 나셀이라면 누군가가 자신을 잊을 정도로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달래기 위해 노래를 부르는 것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음유시인은 노래로 슬픔과 아픔을 다독이는 자. 그런 의미에서, 나셀은 그 누구보다도 음유시인의 본질에 가까울테니까.

그때 갑자기 갑판에 펼쳐져있던 은사에 불그스름한 빛이 어렸다.

그것이 스펠글로스의 마력이라는 것을 알아 본 린델은 재빨리 은사를 집어들며 티엘의 손에도 실을 걸쳐주었다.

"리아? 어디에요?"

-객실 이층!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안그래도 배 밑창에 구멍 뚫려서 막느라 진땀 뺐는데! 망할! 너무 멀어서 연락도 안돼고, 얼마나 답답했는지 알기나 해?

배에 물이 새고 있었다고?

얼마나 큰 구멍인지는 모르지만, 리아가 이제껏 밑창에서 움직이지 못한 이유는 단번에 이해된다.

"내버려두고 올라와도 괜찮은거에요?"

-어······. 그, 우리가 호위하던 추기경씨 있잖아······. 음, 대충 무슨 말인지 알겠지?

호위 대상에게 손을 빌리다니, 확실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다.

린델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 어쨌건 결과적으로 어지간히 날뛰어도 배는 무사할거야, 티엘. 간만에 한 번 실력 발휘 해 보라고. 추기경씨가 배는 지켜주겠대.

"결국 이번에도 제 이름 팔아서 협력을 구한건가요. 하아······. 나중에 이야기좀 해요, 리아."

티엘은 쓴웃음과 함께 은사를 내던졌다.

그리고 곁에 다가와 레니를 꼭 끌어안는 나셀을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아빠 옆에 꼭 붙어 있으렴."

그렇게 말한 티엘은 갑자기 겉옷을 벗어 레니에게 덮어주고, 그걸로도 모자라다는 듯 조금 떨어진 곳에 버려져있던 어스름의 천개까지 들고 와 레니에게 걸쳐주었다.

순식간에 옷에 둘러쌓여 도롱이처럼 변해버린 레니는 눈을 깜빡이며 불편하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자 티엘은 레니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며 가볍게 이마를 맞댔다.

"지금부터는 조금 추워질거야. 불편해도 잠깐만 참자?"

"응······."

"린델. 린델도 최대한 마력저항 올려주세요. 나셀이랑 레니, 감기라도 걸릴지도 모르니까."

농담 치고는 꽤 살벌한 말이다.

린델이 레니의 곁에 바짝 붙어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을 본 티엘은 조금 당당해진 걸음으로 뱃전에 다가섰다.

그리고 들끓는 바다를 뛰어내리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칼라가스, 현현(顯現)."

속삭이는 듯한 호명. 그리고 강림.

하지만 그 조용한 부름이 끝난 순간, 배 주위로는 세상이 통째로 뒤바뀌는 듯한 격렬한 이변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피어난 것은 눈부신 하얀 빛.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배를 휩쓰는, 얼어붙을 듯 싸늘한 혹한의 바람.

눈을 찌르는 빛이, 사실은 하얗게 피어난 빙무라는 것을 알아챈 사람이 있었을까.

짜자자자작!

순간 자욱한 빙무 사이로 물살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배를 중심으로, 광활한 바다마저도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단숨에 시야 거리의 절반 정도까지 내달린 얼음 위로, 쏟아지던 폭우가 허공에서 얼어붙으며 어느새 새하얀 눈송이가 소리없이 쌓이고 있었다.

겨울의 심장을 이 바다에 펼치기라도 한 것일까.

이제껏 귓청을 찢어버릴 듯 광란의 연주를 이어가던 폭풍조차도 완전히 얼어붙은 지독한 적막 가운데, 티엘이 얼음 위로 내려서며 들린 작은 발소리만이 유난히도 크게 울려퍼졌다.

"길게 이야기를 나눌 여유는 없지만······."

태연하게, 얼어붙은 바다 위를 걷는 티엘의 등 뒤로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길어진 흰 머리칼이 우아하게 나부꼈다.

조금 전까지 그래왔던, 한 순간으로 끝나는 짧은 강령이 아니다.

어떤 제약도 없는, 완전한 '설원의 새벽'.

단지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은 대기중의 수분이 반짝이는 그 모습은, 그 이름대로 별이 사그라드는 새벽하늘을 연상시켰다.

"샤아아아악!"

얼음에 휩싸인 것은 포효하던 용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길다란 몸의 절반 가량이 얼음 사이에 끼어버린 잿빛의 용은 뼛속으로 파고드는 한기에 몸부림치며 두 팔로 얼음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체 얼마나 두껍게 얼어붙은 것인지, 커다란 바위도 단숨에 으깨버릴 수 있을 용의 완력으로도 순식간에 얼어버린 바다는 긁혀나가는 정도밖에 부서지지 않았다.

몇 번이나 헛손질을 하던 용은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티엘을 노려보았다.

그와 동시에 갑자기 허공이 찢어지며 새하얀 벼락줄기가 몇 갈래나 티엘에게 날아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티엘의 주위에서도 마찬가지로 십여 개의 얼음이 방패처럼 나타나며 날아드는 뇌격을 가로막았다.

멀리서 보고 있던 레니는 순간적으로 털썩 주저앉았지만, 정작 공격을 받아낸 티엘은 눈썹 하나 꿈틀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짧교 기묘한 휘파람을 불었다.

주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약식 영창이었지만, 잿빛 용을 둘러싼 얼음층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말하듯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한층 더 안쪽으로 조여들었다.

"끄그극, 크우우우우!"

고통을 이기지 못한 용이 찢어지는 비명을 질르며 미친듯이 얼음을 두드렸다.

이제는 마력으로 짜올린 육신마저 버티지 못할만큼 힘을 담은 것인지, 얼음을 향해 휘두르는 팔은 충돌의 순간마자 바스라졌다 재생하기를 반복하며 더 큰 비명과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제 분노를 이기지 못한 용은, 다시 한 번 폭풍을 불러 쓸어버리겠다는 듯 티엘을 향해 그 커다란 턱을 쩍 벌렸다.

"아직도 눈 앞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보이지 않는건가?"

다시 한 번 폭풍의 숨결로 이 바다를 쓸어버릴 생각이라면, 그 대응도 하나로 정해져있다.

티엘은 발끝으로 지면을 톡 건드려 마법진을 설치한 뒤, 도약주문의 힘으로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도약의 정점에 오르자 순간적으로 반투명한 날개의 형상이 그녀를 감싸며 자세를 안정시켰다.

빙그레 웃은 티엘은 이제껏 느슨하게 쥐고 있었던 활을 똑바로 고쳐쥐었다.

영장이 티엘의 뜻에 호응하며 새하얀 활 몸 위로 은청색의 날카로운 문양들이 불꽃처럼 떠올랐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녀의 손 끝이 주위의 마력을 남김없이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새벽의 창이여."

하늘과 바다, 두 지점에서 용들이 마력을 끌어모으며 순간적으로 대기중의 마력이 바짝 메말랐다.

한껏 마력을 빨아들인 아스트라는 평소의 배 이상으로 강렬한 빛을 뿌리며 벌써부터 찬 기운을 흩뿌리고 있었다.

소중한 딸을 위험하게 만들어서일까.

어쩐지 아스트라의 기세가 범상치 않다.

칼라가스에게 그 점을 지적당한 것인지, 문득 티엘이 멋쩍게 웃으며 짧은 혼잣말을 흘렸다.

"응. 그러네. 혼내줄때 혼내주더라도, 지나치면 안되겠지. 알았어. 맡길게."

작은 속삼을 뒤로 한 채, 마침내 두 개의 재앙이 서로를 향해 완전히 해방되었다.

하늘로 오르는 폭풍은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듯한 회오리바람의 모습으로, 바다를 향해 던져지는 한파는 한 자루의 가느다란 창이 되어.

폭풍 앞에 너무나 가늘어보이던 한 발의 아스트라는 그런 것이 뭐 어쨌냐고 외치듯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폭풍을 찢었다.

처음부터 힘의 격차는 의미가 없다.

설사 천 년을 살아온 고룡이라고 해도 시원의 용이 지닌 신성(神性)에는 닿을 수 없고, 그 숨결에 깃든 엘드리안의 권능을 넘어서는 것도 할 수 없기에.

드높은 창공에서부터 하나의 선을 그리며 내려꽂힌 아스트라는 숨결을 내뱉은 뒤 어떻게 대응할 시간조차 갖출 수 없었던 잿빛 용에게 날아들었다.

"캬아아아아아악!"

몸이 묶인 이상, 회피조차도 불가능.

몸부림 치는 용의 발악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폭발조차 하지 않은 아스트라는 소리 없이 용의 뿔 하나를 꺾어버린 뒤 깊은 바다 아래로 파고들어버렸다.

그 사이, 자신을 향해 몰아치던 폭풍의 잔재로 손을 뻗은 티엘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 마력을 손 안에 거두어, 움켜쥐는 것으로 모두 흩어버리고 말았다.

놀라울 정도로 거대한, 하지만 조용했던 공방.

티엘은 아무 일도 없이, 그저 산들바람을 맞았다는 듯 조용히 다시 지면으로 내려섰다.

"조금은, 정신이 들었나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잿빛 용을 향했다.

사슴의 잘린 뿔에서 솟는 피처럼, 용의 부러진 뿔에서는 잿빛의 마력이 연기처럼 뭉클거리며 흘러나왔다.

제정신을 차리고 육체를 수복한다면 마력이 새어나갈 일도 없겠지만, 지금의 저 용에겐 그 정도의 판단력조차도 남아있지 않은 것일까.

티엘은 씁쓸하게 활을 내리며 빈 손을 들어올렸다.

"크르르르르······."

다행히도 티엘을 바라보는 용의 눈에는 어느 정도 초점이 되돌아와 있었다.

머리를 흔들며 다시 고개를 든 잿빛 용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릴 뿐, 공격 의사를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조금 놀랐다는 듯한 시선에 가깝다는 것을 눈치챈 티엘은 가까스로 가슴을 쓸어내리면 다시 몇 걸음 더 용에게 접근했다.

-흰 용······. 그리고 그 계약자인가?

특수한 공간이나 영장의 힘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인간의 것과는 이질적인 목소리.

그러나 몸에 깃든 칼라가스의 덕분에, 본래라면 들을 수 없을 용의 목소리는 티엘에게도 선명하게 들렸다.

"무슨 일로 그렇게까지 화를 내신건가요."

신음을 흘리는 용에게 다가간 티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잿빛의 용은 머리를 감싸쥐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하지만 티엘은 그것이 위협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람으로 치면 얼굴을 찡그리는 정도의 가벼운 움직임이다.

-나는······, 무엇을······. 그래, 피······. 감히 이 바다를 저주로 물들이려 한 자들을······!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믿어주시겠어요?"

티엘은 다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 용의 마력은 아마도 물과 바람의 이중속성.

바람의 성질을 지닌 생령은 이따금씩 광증과 비슷한 폭주를 일으키는 경향이 있다.

특히나 숨결에 뇌격까지 섞이는 것을 보면 단순한 바람속성이 아닌, 그 중에서도 특히 난폭하고 거친 속성.

올로비스의 생령 솔페이람과 같은 '폭풍의 날개' 같은 일부 속성은 강하면 강할수록 더더욱 미쳐 날뛰며 마력의 주인인조차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눈앞의 폭풍룡이 다시 발작을 시작한다면 다시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기회는 없어질지도 모른다.

-고의가, 아니라고?

"저희들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이 바다에 피를 흩뿌리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고였어요. 믿을 수 없으시다면, 제가 아닌, 제 안의 생령들의 말을 믿어주실 수는 없으신가요?"

크르르르, 마치 고양이처럼 목을 울리는 소리가 났다.

티엘과 배를 번갈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는 것일까.

"물론 고의가 아니었다고 해도 당신의 영토를 어지럽힌 것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주시길······."

티엘은 두 손을 모으며 머리를 깊숙히 조아렸다.

한참이나 말이 없던 용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는 인세의 일은 알지 못한다. 무의미한 싸움으로 무익한 피를 흘리는 것을 참을 수 없기에, 이 대양을 영지로 삼았지. 고의가 아니라고 하나, 유혹을 떨치기 위해 이 바다를 찾은 내게는 용서하기 힘든 무례라는 것을, 그대도 알 것이야.

"제발······."

티엘은 입술을 깨물며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생령의 힘을 원하는 인간도, 인간의 육을 탐하는 생령도 모두 파멸했지. 그런 굴레를 벗어난 성좌의 주인이 그리도 양보해준다면, 이 늙은이로서도 한 발 물러날 수밖에.

"그럼······?"

티엘은 희망어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용은, 조금 전보다 한결 더 부드러워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날 소멸시키는 편이 더욱 쉬웠을 그대가 그토록 몸을 숙일 필요도 없었을 터. 끝끝내 고집을 부려본들 서로간에 웃을 일은 없겠지.

"감사합니다, 오랜 용이여."

강령 시간이 길어지며 슬슬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티엘은 빙판을 거두며 배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하지만 문득 다시 몸을 돌린 티엘은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에서, 깊숙히 허리를 숙였다.

"저희 아이를 돌봐주셨다고 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아이······. 이엔이라고 했는가. 그렇군. 이 늙은이가 어리석어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군. 피를 흘린 것이 그 아이인 것 같은데, 혹시 다치지는 않았는가?

"네?"

그러나 용은, 티엘이 미처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내고 말았다.


* * *


대륙 북부의 설원지대를 연상케 하던 얼어붙은 바다는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고, 부글부글 끓어오른 바다거품만이 그 흔적을 대신했다.

중간까진 달리다, 마지막에는 헤엄을 쳐서 배까지 다가온 티엘은 바닷물에 흠뻑 젖은 채로 린델이 내려보내준 줄사다리를 잡고 뱃전에 올랐다.

그러나 정작 갑판으로 오른 티엘은 온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짜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매서운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머리칼에서 흘러내리는 물방울이 다시 얼어붙는 것은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싸늘한 시선이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녀가 찾는 사람은 얼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레니는 어디있어요?"

"저기."

옆에서 팔짱을 낀 채 이죽거리던 린델은 엄지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오늘 어머니의 가슴을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난리를 쳤던 작은 꼬마는 태평하게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몰아치던 폭풍이 자신을 향했었다는 것을 알고는 있는걸까.

그리고 지금부터 또다른 폭풍이 다시 그녀를 향한다는 것도 알고 있는걸까.

머리를 쓸어넘기며 화를 조금이라도 식히려던 티엘은 그것이 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딸아이를 향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섰다.

"이를렌 카르티체 아윌로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좀처럼 부르지 않는, 레니에게 있어 가장 권위있는 이름.

제국식의 작명법에 따라 어머니의 옛 성이 '카르티치스'라는 것을 의미하기에, 평소에는 거의 쓸 일이 없는 이름이다.

그렇기에 일반적으로 티엘이 이 이름을 입에 담는 것은 딸아이의 잘못을 바로잡을 때 뿐이다.

그 이름에 실린 무게 때문일까.

아직 잠에서 깨지도 안은 레니는, 단지 그 이름을 들은 것만으로도 무의식중에 움찔거리며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티엘은 곧장 아이를 깨울 생각으로 레니의 어깨를 움켜쥐려 했다.

"잠깐 진정하는게 어때?"

순간, 레니를 품에 안고있던 나셀이 그런 티엘을 가로막았다.

딸의 일이라면 더더욱 너그러워지니, 어떤 의미에서는 레니의 말괄량이 기질에 크게 기여하는 남자다.

때문에 티엘은 그런 나셀을 향해 의미심장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너무 어리광 받아줘도 좋지 않아."

웬만한 일에서는 나셀의 말을 받아주는 티엘도 이번 일만큼은 양보할 수 없었다.

늙은 용에게 들은 이야기는 티엘에게도 상당히 중요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마력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괜찮다.

티엘이 유달리 마력을 늦게 깨우쳤을 뿐, 열 살도 안되어 마력을 깨닫는 것은 마법명문가인 카르티치스 가문에서는 제법 흔한 일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혼자서는 위험하다고 그렇게나 말했는데도 몰래 생령이랑 계약까지 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진정할 일은 아니라고 보는데."

티엘이 화를 내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최근들어 마령의 발생도 줄고, 흑마법사의 부담도 가벼워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생령과 계약하는 것을 권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방금 잠들었는걸. 비셀리온 추기경도 잠깐 다녀갔어. 아이가 많이 놀라고 지쳤을테니, 한동안 자게 해 주는게 좋다고."

"······이 말썽쟁이를 어쩐다······."

순간 티엘의 기세가 살짝 꺾였다.

마력고갈로 잠들었다면, 체력적으로도 상당한 부담을 겪고 있다는 소리다.

지금 야단을 치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처사가 아닐까.

티엘이 흔들리는 것을 눈치챈 나셀은, 은근히 웃으며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푸훗, 어쩔 수 없지 않을까? 누구랑 꼭 닮았는데."

"너-"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눈을 슬쩍 흘기며 반사적으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그 말을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 자신도, 과거 아첼이 그렇게나 말리는데도 기어이 애냐와 몰래 계약을 맺고 말았으니, 이제 와서 레니에게 큰 소리를 칠 입장은 아니다.

나셀은 굳이 자세한 이야기까지는 꺼내지 않았지만, 대신 은근한 미소로 그 사실을 상기시켜 자연스레 티엘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화를 낼 명분을 잃은 티엘의 품에 레니를 답싹 안겨주었다.

얼떨결에 아이를 받아안은 티엘은 어느새 완전히 잠들어 웅얼거리는 레니의 얼굴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무심결에 품을 파고들며 이마를 부비는 아이를 차마 깨울 수가 없었다.

결국 어느새 아이를 꼭 끌어안은 채 머리를 쓰다듬던 티엘은 문득 레니의 뺨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리 깊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피가 흘러나왔던 뺨에는 아무런 상처도 남아있지 않았다.

추기경이 치유주문이라도 써 준 것이리라.

예전처럼, 흑마법사라는 이유만으로 막연히 배척받는 일은, 조금이나마 줄어든 것일까.

"하긴, 그것도 그렇네. 그럼······, 이 아이도 좋은 친구를 만나길 바랄 수밖에."

어머니의 그 이른 바람, 언젠가 알아주려나.

순간, 레니는 잠결에도 무심코 그녀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듯 조용히 티엘을 부르며 어머니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그 작은 손짓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던 티엘은 결국 화를 내던 것도 잊은 채 조용히 딸아이와 이마를 맞댔다.

말없이 애정을 나누는 모녀를 지켜보던 나셀도 일어나 그런 두 사람을 감싸안았다.


* * *


예상 외의 사고로 한참이나 발이 묶였던 배가 뒤늦게 다시 돛을 펼쳤다.

다행히 다시 배 아래로 내려갔던 리아가 망가진 부분을 수리하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불어오는 바람도 무언가를 부수기 위한 어지럽게 불던 조금 전과는 달리 매끄러운 순풍으로 변해 한껏 부풀어오른 돛을 밀어붙였다.

잔물결, 그리고 흰 물거품.

실레마유 섬으로 향하는 배, '별의 아이' 호는 그 가슴에 또 하나의 작은 별을 태운 채, 다시금 잔잔하게 잦아든 바다에서 조용히 물살을 가르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자아, 이것으로 티엘의 이야기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앞으로 또다른 이야기에서 혹시라도 얼굴이 비칠지도 모르지만, 더이상 주역으로 서는 일은 없겠지요.


여기까지 함께 해 주신 모든 분들께, 조금 이르지만 즐거운 새 해가 다가오길 바라겠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언젠가, 또 만나 뵈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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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15장-귀향歸鄕 (7) 19.11.16 61 2 34쪽
148 15장-귀향歸鄕 (6) 19.11.15 65 4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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