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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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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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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28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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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16장-시원의 새벽 (8)

DUMMY

어느새 두 사람은 싸늘하게 식어버린 연회장으로 돌아와 있었다.

하늘을 비추던 만월도, 끝없이 펼쳐진 설원도, 더이상은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한 순간의 백일몽처럼, 사라진 것들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사라진 것은 마력으로 빚어낸 것들 뿐.

휘몰아치던 꿈 속에서 입었던 상처는, 그것이 꿈이 아니었다고 외치듯 여전히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렸다.

"어처구니 없는 결과로구나."

르비아는 발치에 떨어진 돌을 보며 조금 씁쓸하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흑색의 돌.

한때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켰던 검은 용이 남긴, 유일한 것이었다.

시원의 용의 심장은 그 무엇으로도 부술 수 없기에, 그란드리아의 심장석은 소멸의 권능을 품은 아스트라를 정면으로 맞고도 바스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다시 눈을 뜰 정도로 미약한 상처를 입었다고는 할 수 없다.

산산조각으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타격을 입어버린 심장석은 단지 부서지지만 않았을 뿐이다.

이미 마력조차 새어나오지 않는 심장석은 서서히 제 빛을 잃고 탁한 잿빛으로 물들어갔다.

아마도 곧 저 검은 돌은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눈을 뜰 때 까지 세계의 틈 사이에서 긴 잠을 이룰 것이다.

백 년일까. 천 년일까.

어쩌면 이 성이 사라진 후에서야 눈을 뜰지도 모르는 검은 돌은, 마침내 소멸을 받아들이듯, 스스로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그 때까지 용의 심장만을 응시하던 르비아는 그제서야 느릿한 시선을 돌려 자신의 상처를 살폈다.

출혈은, 생각만큼 심하지 않았다.

그 팔에 박힌 화살이 상처를 어느 정도 막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스트라가 아닌 평범한 화살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스트라에 비해서는 평범한 화살에 가까운 물건이다.

르비아는 팔을 뚫고 나와 피로 얼룩진 화살촉 부분을 살짝 어루만졌다.

우윳빛의 얼룩이 번진, 마력을 머금고 증폭시키는 마법 금속.

엘드리안의 파편, 우룬의 사슬로 만들어진 화살촉이다.

문득, 르비아는 화살촉의 중심부에 패인 마름모꼴의 구멍 안에서 짧은 글귀를 발견했다.

-그 화살 끝에 실린 무게를 잊지 말라.

바늘 끝으로 새겨넣은 듯한 글자는, 피를 머금어 더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과거가 직접 건네는 듯한 경고의 말.

르비아의 입꼬리가 한결 더 짙은 웃음을 품고 말았다.

"······그렇군. 이것이 내가 끊어버린 것들의 무게인 건가······."

이 화살이야말로, 놀라울 정도로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아스트라의 정체였을 것이다.

화살에 남겨진 마력은 칼라가스의 것 뿐이 아니었다.

몇 겹으로, 중첩해서 주문을 쌓아올린 흔적이 아직 남아있었다.

아마도 그란드리아의 숨결을 막기 위해 쏘았던 아스트라는, 이미 이 화살을 머금고 있었으리라.

겉을 둘러싼 소멸의 숨결은 그란드리아의 숨결을 찢고, 아슬아슬하게 그의 심장을 빗나가며 그 힘을 다했다.

하지만, 그 아스트라의 안쪽에 소멸의 권능으로 둘러싸인 또 하나의 화살이 잠들어 있었다면 어땠을까.

몇 번이나 거듭해서 중첩시킨 도약주문으로 허공에 묶어둔 채, 가장 치명적인 일격을 노리기 위해 숨을 죽이지 않았을까.

감탄할 정도로 놀라운 정신력이다.

당장 눈앞으로 몰려드는 죽음을 직시하면서도, 완전히 승리를 확신한 르비아가 빈틈을 보일 그 순간을 노리며 냉정하게 기회를 살폈다.

심지어 스스로 쌓아올린 세계가 통째로 무너져가는 상황에서조차 단 한 번의 역전을 노렸다.

자신의 목숨마저도 거침없이 미끼로 삼는 그 얼음장같은 정신이, 결국 지금의 기적같은 역전을 만들어낸 것이리라.

'놀라울 정도로 성장해버렸어.'

르비아는 솔직하게 경탄하며 단단히 화살을 움켜쥐었다.

악문 이 사이로 숨 막히는 신음소리가 새어나오며 탁한 핏줄기가 팍 튀어올랐다.

하지만 르비아는 화살을 팽개치는 대신, 조용히 자신의 곁에 내려두었다.

화살로 인한 상처는 치명상은 아니다.

당장 팔을 쓰는 것은 어려워도, 최소한 목숨을 좌우지 할 정도의 상처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르비아'에게는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을 그 상처는, '흑천의 날개'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치명상이었다.

고통에 젖은 르비아의 시선이 팔을 더듬었다.

화살이 꿰뚫어버린 것은 다름아닌 그의 영핵.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두 번째 심장이라고 해도 좋을 급소가, 예리한 화살에 의해 깨끗하게 지워져 있었다.

영핵이 사라지며 팔을 뒤덮었던 '흑천의 날개'의 각인과, 그와 겹쳐져있던 '제 7마'의 각인 역시 씻어낸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아직 마력은 남아있지만, 혈액에 남아있는 한 줌의 마력마저 흩어져버린 뒤에는 완전한 끝.

더이상 그가 마력을 손에 쥘 일은 없을 것이다.

신언으로 세상을 뒤흔드는 일도, 용의 포효로 하나의 나라를 불태우는 것도 불가능하며, 하다못해 이 상처를 치료하는 것 조차도 할 수 없으리라.

완패다.

르비아는 순순히 패배를 인정했다.

그러자, 동시에 큭큭 웃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쩐지 홀가분해진 기분을 억누르기 힘들었던 그는 시원스레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젖혀 반쯤 무너진 기둥에 몸을 기댔다.

"결국 너도 카르티치스로구나. 피어나는 것이 늦었을 뿐, 이토록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났으니."

이젠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미련따윈 남아있지 않은 시선이 느긋하게 연회장을 훑었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떨어져 있던 티엘에게서 조용히 멈춰섰다.

"하지만 너도 무리하고 있구나. 그렇게나 장시간 강령상태를 유지한다면, 설령 침식되지 않더라도 몸을 깎아먹는건 어쩔 수 없었을텐데."

티엘은 말없이 르비아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그 시선은 익숙한 자수정의 빛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과연 미노스티야가 이 광경을 보았다면, 무어라고 말했을 것인가.

그토록 하찮게 업신여겼던, 그저 도구에 불과했던 티엘이, 그토록 자신감 넘쳤던 자신을 꺾은 르비아를 넘어선 광경을 본다면.

'언젠가 내 목을 찌를 비수가 되고, 내 소망을 독살할 독약이 되리라고 했던가.'

공교롭게도, 그의 예언은 맞지도, 틀리지도 않았다.

르비아를 쓰러뜨린 것은 미노스티야의 꼭두각시 인형이었던 소녀가 아니라, 스스로 시원에 닿은 새벽별의 마법사였으니까.

하지만 티엘 역시도 그리 당당한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내색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면서도, 역시 당장이라도 꺾일 듯 후들거리는 무릎은 미처 숨기지 못했다.

엘드리안의 축복 덕분인지, 아니면 티엘과 칼라가스가 함께 모든 제약을 끊고 크게 성장한 덕분인지, 적어도 침식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잃어버렸던 기억도 모두 되돌아왔고, 희미해졌던 자의식의 경계도 분명해졌다.

하지만 침식되지 않는다고 해도, 시원의 용처럼 거대한 영체를 몸에 완전히 담아두고 있었으니 몸이 성할 리 없다.

쓰러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의 한계는 넘어섰다고 할 수 있으리라.

르비아의 예상대로, 오래지 않아 티엘에게도 한계가 찾아왔다.

끝까지 버티던 티엘의 자세가 기어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티엘은 그 상태로도 여전히 한 무릎을 세우며 팔로 몸을 지탱했다.

스스로를 채찍질하듯 힘껏 깨문 입술에서 어느새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치 더이상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겠다는 것일까.

르비아가 눈을 뜨고 있는 한, 경계를 풀 수는 없다는 것일까.

"깨끗하게 심장을 노렸다면 경계할 것도 없었을텐데."

르비아는 마치 어린 동생에게 조언하듯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던졌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 말을 무시할 줄 알았던 티엘은 서늘한 시선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죽어서 도망치는걸 허락할거라 생각해요?"

죽는 것보다 괴로운 일은, 얼마든지 있다.

티엘 스스로도 몇 번이나 죽음을 넘나들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단언할 수 있었다.

"죽이지 않겠다? 역시 무르지 않느냐."

그러나 르비아는 오히려 그 점을 찌르며 웃었다.

죗값을 치를 수는 없을지라도, 또다른 악행을 완전하게 막기 위해서는 죽음처럼 확실한 것이 없다고.

티엘도 알고 있었다.

아직 르비아에게는 야룬다와 유라칼드, 히펠라 등 계약한 생령들이 남아있었다.

물론 영핵이 사라진 지금, 한 줌도 안되는 마력밖에 남지 않은 르비아로서는 계약을 유지할 수 없다.

아니, 야룬다 수준의 강력한 생령을 거느리는 이상, 그들과의 계약 자체가 끊기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고위 생령일수록, 자신들을 괴롭히는 한없는 허기와 갈증은 피할 수 없는 법.

대령결계 내부에 있는 한 생령들에게 먹히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을테지만, 대신 생령들은 르비아에게 남은 생명력을 바닥까지 갉아먹으려 들 것이다.

신전에라도 들어가 치료를 받는다면 모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평생 폐인을 겨우 면하는 수준으로 연명하는게 고작이다.

즉, 마법사로서의 르비아는 이미 죽었다.

하지만 단순한 보복만이라면 어떨까.

조금 전까지 몸에 흐르던 잔여마력은 아직 흩어지지 않았고, '흑천의 날개'로서 마지막 적을 상대할 정도는 된다.

적에게 완전한 승리를 건네주려는 제국인은 없다.

설령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더라도, 적의 빛나는 승리에 씻기 어려운 상처를 하나라도 더 남기는 자들이 이 땅의 지배자들이다.

그러나 티엘은 르비아를 향해 재차 활을 들어올리지 않았다.

조금 전만 해도 시룡을 노리며 르비아의 목숨까지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의 아스트라는 르비아의 심장을 향하지 않았다.

어째서?

아마 이유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마지막 순간, 선택을 할 시간따위는 애초부터 없었고, 마음 가는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하지만 굳이 이유를 댄다면, 그것은······.

가슴을 움켜쥔 티엘은, 한결 부드러워진 시선을 조용히 떨구며 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대답했다.

"이 활을 든 이유는······, 당신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요."

언젠가, 메이트리아크는 말했었다.

죽이는 것과 지키는 것.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이냐고.

비록 결과는 같은 모습을 취할지 몰라도, 활을 드는 순간 마음에 품은 것이야말로 중요한 것이라고.

티엘의 싸움은 어디까지나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잃고 싶지 않기에, 또다시 잃지 않기 위해, 겁쟁이로서 활을 쥐고, 시위를 당겼을 뿐이다.

그러니 목적은 이미 이루어졌고, 더이상 활을 들 필요는 없다.

원망스럽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적어도 자신이 이곳까지 달려온 목적을 혼동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를 죽여 복수한다고 해봐야, 결국 얻는 것은 그의 시체와 엉망으로 망가져버린 자신의 마음 뿐.

여기까지 자신을 받쳐준 사람들의 헌신과 희생을, 그런 것들로 의미없이 바꿔버릴 수는 없다.

티엘은 숨을 길게 삼켰다.

찬 바람으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듯, 차분히 가슴 속에 머금은 뒤, 다시 내뱉는다.

순간, 한 줄기의 예리한 섬광이 어두운 연회장을 갈랐다.

다시금 가슴 속으로 차오르려는 원망과 울분을 가득 담은 아스트라는, 마치 자신이 담은 감정들이 그러하듯, 무의미한 상처만을 남긴 채 덧없이 부서져 흩날렸다.

그것이, 경계선이다.

이 선을 넘는다면, 아마 티엘은 또다시 자신을 잃고 망가질 것이다.

자신이 해야할 것들에 명확히 선을 그은 티엘은 이를 악물고, 르비아를 노려보면서도, 떨리는 손을 움직여 단검을 뽑았다.

티이잉!

싸늘한 칼날이 미련과 함께 시위를, 끊었다.

활을 쥔 손을 늘어뜨린 채 검을 되돌린 티엘은,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라는 듯 르비아를 똑바로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의 꿈은 부서졌고, 그 꿈을 꿀 기회마저도 부숴졌어요. 하지만 그 목숨은 빼앗지 않을거에요. 그러니까, 어디 한번 살아봐요. 그 공허한 삶이 끝날 때까지, 영영 채워지지 않을 갈망을 품고 괴로워해요. 한 때 이상을 추구했던 그 잘난 머리로, 더이상 날아오를 수 없는 바닥에서 몸부림치며, 그렇게 살아가요. 가능한 오래, 오랫동안."

눈보라가 몰아치는 듯한 싸늘한 기운이 르비아를 휘감았다.

마력을 휘두르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몇 마디의 말은, 강대한 시원의 마력으로도 끊을 수 없었던 무언가를 서슴없이 끊어내고 있었다.

"······그게, 그게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벌이니까."

직접 손을 쓰지 않는 대신, 마지막으로 원망을 불태우는 말.

말 그대로 한 마디 한 마디를 씹어뱉는 저주와도 같은 목소리에는, 더이상 슬픔의 흔적 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큭크크크, 크하하하하하! 멋진 대답이야."

허탈하면서도, 시원스러운 웃음소리가 버려진 홀을 울렸다.

상처를 지혈할 생각도 없이 부러진 기둥에 등을 기댄 르비아는 어째서인지 만족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마치 이 상황이야말로, 그가 무엇보다도 바라던 일이라 생각될 만큼.

이를 악물며 저주를 퍼부은 티엘이 오히려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볼 만큼.

"앞으로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피에 젖은 손이 티엘을 향했다.

손이 닿을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르비아는 마치 멀리 떨어진 티엘의 얼굴을 쓰다듬는 것처럼 부드럽게 손끝을 움직였다.

"네 뜻대로, 너는 동료들을 지켜내는데 성공했지. 스스로의 안전도 손에 넣었고, 원한다면 이 나라의 주인이 되어 피로 물든 제국의 항쟁을 뿌리채로 뽑아낼 수 있을지도 몰라. 후세에 성군으로 이름을 남길 위대한 대공이 될 수도 있을테고, 음지로 숨어야만 했던 흑마법사들에게 새로운 빛이 되어줄지도 모르지."

그러나 문득, 르비아는 엄지손가락으로 허공을 더듬었다.

마치,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처럼.

"하지만 내게는, 아첼을 잃고 연인마저 잃어버린, 너의 눈물밖에는 보이지 않는구나."

"잃게 한 사람이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마!"

억누르고 있던 상처에 물이 튄 순간, 굳었던 피가 다시 흘렀다.

가슴을 찢어내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절절하게 울렸다.

마지막 싸움에서 이긴 것은 티엘이지만, 결국 두 사람의 결투에 승자는 없었다.

둘 다, 서로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잃고 말았으니.

가슴에서 흔들리던 목걸이를 힘껏 움켜쥔 티엘은 절뚝거리면서도 힘겹게 등을 돌렸다.

"절대로······, 절대로 당신이 저지른 짓은, 잊지 않을테니까······!"

무겁고, 불규칙한 발걸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린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문은, 지나치게 멀리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다가오지 않을 것처럼.

다친 다리를 끌고 위태롭게 딛는 걸음이라지만, 너무나 멀었다.

하지만 티엘은 고집스레, 한 걸음도 멈춰서지 않은 채 비틀거리는 걸음을 이어갔다.

마침내, 그녀의 손이 문에 도달했다.

문을 열 체력은 없지만, 다행히 마력은 약간 여유가 남아있다.

티엘은 마지막 남은 마력을 긁어모아 문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영창도 없이, 그저 그 작은 움직임 만으로 마력이 움직였다.

문의 틈새에서 자라난 얼음이 억지로 무거운 문을 비틀어 열었다.

티엘은 마치 도망치듯, 겨우 열린 틈으로 몸을 구겨넣으며 서둘러 문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렇게 문을 나선 순간, 그녀는 다시 허물어지듯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끌어안은 어깨는, 이미 억누를 수 없을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춥다.

가슴 속이 얼어버린 것처럼, 뼈마디 하나 하나가 모두 얼어버린 것처럼, 지독한 추위가 몸을 감쌌다.

하지만 그 추위를 막아줄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래서일까.

미칠듯한 오한 속에서, 문득 뜨거운 기운이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가슴에서, 눈꺼풀 안쪽에서, 목 안쪽에서, 전신을 태워버릴 것만 같은 뜨거운 기운이 산불처럼 거칠게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다.

그 열기로도 추위를 몰아낼 수는 없었다.

오히려 그 열기는 더더욱 추위를 부채질하며, 이성을 유지하던 둑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아아.

문득, 티엘은 깨달았다.

이제는, 울어도 된다는 것을.

지금이라면, 떠나간 자들을 그리워하며, 슬퍼해도 좋다는 것을.

"으······우우으······, 우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필사적으로 억눌러왔던 울음이, 뒤늦게나마 터져나왔다.

이젠, 어떻게 해야할까.

이제서야 모든 일이 다 끝나 돌아갈 수 있게 되었는데, 그런데 정작 그녀가 돌아가야 할 곳은 절반이나 사라져버렸다.

닳아 없어져버렸던, 목숨만큼이나 중요했던 추억들은 모두 되돌아왔지만, 이제는 그 추억을 함께 나누어야 할 사람이 사라져버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어디로 가야, 누구와 이야기를 해야 그 그리움을 달랠 수 있을까.

떨림이 멈추질 않는다.

목놓아 울고, 소리쳐도, 가슴의 떨림은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이 뜨거운 만큼 남아있던 온기가 흘러나가는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추위 속에 그저 흐느낌만이 끝없이 맴돌았다.

"우으, 나, 나셀······! 미안해, 미안해애! 나 때문에, 전부 나 때문에, 항상······! 으흑, 흐으윽! 미안······!"

달그락.

오열하며 웅크리는 티엘의 가슴에서 목걸이가 흘러내려 바닥에 부딪혔다.

티엘은 잃어버린 온기를 찾으려는 것처럼 그 목걸이를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언젠가 아첼에게 선물했던, 그 주인의 가슴에서 단 하루조차 머물지 못했던 목걸이.

오랜 시간이 지나, 마침내 상처가 아문 자리에 새로 들어온 연인에게 건넸건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또다시 그녀의 손으로 되돌아와버린다.

이 얼마나 얄궂은 일일까.

이 상처가 아물려면, 또다시 얼마나 되는 시간이 지나야 하는걸까.

함께 거닐었던 길도, 마주보며 웃었던 거리도 그대로인데, 곁에 있었던 한 사람이 사라져버린 이상, 추억이 뿌리내린 그 거리들은 대륙의 어떤 땅보다도 더 춥고, 낯선 땅으로 변해버렸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과연 자신이 견딜 수 있을까.

아니, 견뎌야 한다.

티엘이 슬퍼하길 바랄 녀석은, 결코 아니니까.

그러니 언젠가는 다시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아첼을 잃고 시들었던 그녀가, 다시 미소지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저, 다시 한 번 찢어진 가슴이 아물기까지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의 상냥함이, 그의 온기가, 마치 독약처럼 깊숙히 뿌리를 내리고 말았으니.

오열하던 티엘의 울음소리가 겨우 잦아들기 시작했다.

'······안녕. 잊지, 않을게······.'

티엘은 두 손으로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감싸쥐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득 티엘은 낯선 기분을 느꼈다.

뭔가 달랐다.

익숙하지만, 어딘가가, 무엇인가가 다르다.

흐릿한 위화감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그녀의 가슴을 찔렀다.

"아······?"

그 순간, 티엘의 눈에 경악의 빛이 스쳤다.

뜨겁지만 동시에 차가운, 이상한 느낌이다.

게다가 이상할 정도로 추웠다.

조금 전까지 몸을 뒤흔들던 오한과 열기와는 또 다른, 잔혹할 정도로 단단한 현실감이 가슴을 찌르고 있었다.

"거짓······, 말······."

티엘의 손에 들려있던 목걸이가 힘없이 떨어져, 다시 가슴께에서 찰랑거렸다.

사슬과 금속이 부딪히는 듣기 싫은 소리가 몇 번이나 귀를 간지럽혔다.

듣기 싫은 소리다.

무심결에 목걸이를 손으로 잡아 멈추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가 팔을 누르는 것일까.

눈 앞을 가린 눈물 때문에, 무엇 하나 제대로 보이질 않았다.

눈을 깜빡여, 시야를 가리던 눈물을 짜낸 티엘은 뻣뻣한 목 대신 눈동자를 내려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가슴에서 솟아난 얇고, 가느다란, 그리고 예리한 금속.

칼이다.

칼날이, 어째서, 자신의 가슴에서 튀어나와 있는가.

그것은 에칼레의 흉흉한 붉은 검신과는 다른, 악몽처럼 시커먼 칼날이었다.

칼날이 솟구친 각도로 보면 그 검은 분명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칼날에는 피가 묻어있지 않았다.

마치, 칼날이 피마저 빨아 마신 것처럼.

콜록, 기침이 터져나왔다.

머릿속이 안개가 가득 찬 것처럼 몽롱해진다.

칼이 박혀있는 건 좋지 않다.

뽑는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그 검을 뽑을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말했지 않느냐. 무르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적이 살아있는 한, 마음을 놓아선 안됀다. 그걸 잊는 순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지."

무언가가 뜨거운 것이 가슴 속을 가득 채우고 목을 꽉 틀어막았다.

말은 커녕 숨조차 쉴 수가 없다.

윤기 하나 없는 칠흑빛의 칼날이 남긴 것은 가슴 중앙을 꿰뚫는 치명상이다.

애처롭게 여닫히던 입에서 다시 한 번 콜록, 기침이 터졌다.

하지만 그 것은, 조금 전의 기침에 비하면 그저 한 번의 경련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약해져 있다.

가슴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그러나 가슴을 찌른 검은 가차없이 비틀려, 이미 충분히 치명적인 상처를 또다시 벌려놓았다.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리고, 얼어붙는 것 같은 오한이 등에서부터 가슴을 관통하는 상처를 통해 스며들었다.

그러나 티엘이 아직까지 상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게도 자신을 찌른 검에 몸을 기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칼이 빠져나간 직후, 티엘의 몸이 실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푹 쓰러졌다.

상처와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조용히 계단을 타고 흘러내렸다.

쓰러진 티엘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벌써 흐려진 눈이 가까스로 자신을 찌른 자를 바라보았다.

왼손에 비스듬히 검을 든 르비아가 어두운 얼굴로 그녀를 내려보고 있었다.

"다시 만날 일은 아마 없겠지······."

지나치게 어두워서 무슨 표정인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티엘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겨우 한 줌밖에 안되는 신음 뿐이었다.

어느새 새 손발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시야도 빠른 속도로 어두워져가고, 점차 호흡도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럼······, 작별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티엘은 계속해서 의문을 품고 있었다.

어째서 검을 휘두르고서도, 저렇듯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것일까.

어째서 저렇게 안타까운 목소리로 작별을 말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째서······.

'르비······아······.'

아픔이 점차 희미해졌다.

그리고 마치 잠에 빠지는 것처럼, 의식도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손바닥을 뒤집듯, 깊고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은 그렇게 한 순간만에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비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황급하게 달려오는, 그러나 알 수 없는 사람.

한 번만, 그 이름을 불러보고 싶었는데도······.

티엘은 끝을 알 수 없이 깊은 잠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슬픔도, 아픔도 모두 잊은 채, 그렇게 망각의 강을 건넜다.




만일,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다면

나는 가슴에 박힌 가시를 뽑아내리라.

만일,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있다면

나는 가슴을 태우는 불길을 삼켰으리라.


허나 이루지 못할 애틋함이여

그 아픔을 노래하고

그 고통을 노래하고

그 미련을 노래하고서야

비로소 깨달을 것을


운명이란 그토록 잔혹한 장난일지니

용은 노래하고 천사가 바라보는 거짓된 기적을

나 버리고 이제 돌아가네.

보라, 이 손에는 그 무엇도 남지 않았노라.


은의 기사, 검을 잊고

악기의 현, 노래를 잊어

모든 것이 의미를 잃은

비틀린 무도회가 끝을 맞이하는 새벽의 때



새기었다.

흐느끼며 새기었다.

닿지 못할 내 기도를,

끝맺지 못할 내 노래를,

한없이 이 가슴 속에, 새기었다.



"좋은 꿈 꾸거라, 사랑하는 이스티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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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16장-시원의 새벽 (10) 19.11.30 77 3 26쪽
162 16장-시원의 새벽 (9) 19.11.29 58 3 32쪽
» 16장-시원의 새벽 (8) 19.11.28 66 3 24쪽
160 16장-시원의 새벽 (7) 19.11.27 95 3 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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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16장-시원의 새벽 (3) 19.11.23 65 3 30쪽
155 16장-시원의 새벽 (2) 19.11.22 64 3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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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15장-귀향歸鄕 (6) 19.11.15 64 4 24쪽
147 15장-귀향歸鄕 (5) 19.11.14 81 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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