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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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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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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1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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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1쪽

16장-시원의 새벽 (11)

DUMMY

순간적으로 리아의 손가락이 움츠러들며, 더 이야기하지 말라는 듯 린델을 향해 조금 사나운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린델은 오히려 쉬쉬하려는 것이 나쁘다는 것처럼 그 시선을 깨끗하게 무시했다.

바짝 붙어있던 위치에서 티엘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거리를 벌린 린델은 티엘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단장님이랑 이야기하던거, 그 이야기였던거지? 게다가 그 사람, 피할 방법이 있는데도 괜히 나쁜 이야기를 꺼내는 성격은 아니야. 그렇다면-"

"린!"

기어이 열기를 띤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워. 마음의 준비는 필요하잖아!"

"입다문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잖아요, 다들?"

틀린 말을 하는 것도 아닌데 말 허리가 잘려버린 것이, 조금은 기분이 상했던 것일까.

린델 역시 눈초리를 흘기며 리아에게 몸을 돌렸다.

리아가 가슴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린델은 그보다는 조금 냉정한 시선으로 선을 긋는 경향이 강하다.

"마음의 준비라는데 다 괜찮아질거라며 있지도 않을 기적에 매달려 낙관하고 있는걸 말하는거라면, 그런건 필요 없어요. 그런 헛짓거리로 시간 보내느니, 차라리 현실을 인정하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보내는게 낫지 않아요?"

"······언제나 당연하다는듯이 맞는 말만 하는 네 그 쌀쌀맞은 혓바닥, 이런 때는 정말 싫어······."

리아의 얼굴에 걸려있던 장난스러운 미소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물론 말을 꺼낸 린델이라고 밝은 얼굴을 한 것은 아니다.

조금씩 힘을 잃고 떨어지던 시선이 마침내 바닥으로 향해버린 그녀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렸다.

"티엘이랑 같이 일 년을 보낸 건, 리아만이 아니에요. 저도 마찬가지라구요······."

일 년.

티엘이 그들과 함께한지 어느새 그만큼이나 지났다.

짧으면 새로 얼굴을 익힌지 몇 달도 채 되지 않아 다시 사라져버리는 얼굴도 있는 기사단에서, 일 년이란 시간은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그 긴 시간에 걸쳐 가족처럼 어울려 지냈는데, 이제와서, 누구도 바라지 않았던 방식으로 그 인연을 딱 끊어내야 한다면, 과연 그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린델은 티엘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비어있던 나머지 한 손을 맞잡았다.

선뜻 다가오지 못했던 아드란과 올로비스도 티엘의 침대 주위로 다가왔다.

"문 밖에, 듣고 있죠? 당신도 들어와요. 따로 우리 배려해줄 필요 없으니까."

그 때 문득 린델이 문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잠시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은 채 침묵하던 문은, 결국 그 제안을 이기지 못하고 천천히 안으로 열렸다.

방금 돌아온 듯, 외출용으로 두르던 녹색 옷을 그대로 입고있는 나셀이 애매하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게 안 겁니까?"

"호위용으로 작은 인형을 붙여놨으니까요. 갑자기 어디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티엘도 다시 쓰러져버릴테니까."

조금 전 메이트리아크가 언급한 것이 저 것일까.

린델은 조금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나셀을 향해 살짝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그의 등 뒤에 숨어있던 조그만 나비가 파르륵 날개를 떨치며 그녀의 손 안으로 되돌아왔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티엘도 두 번 입에 담기 싫을거에요. 굳이 힘들게 만들지 말고, 여기서 같이 듣고 끝내자고요."

린델이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티엘에게 더이상 뒤로 물러날 곳은 없었다.

스스로 말을 꺼내고서도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던 티엘은 짧은 한숨을 삼키며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차분히 말을 골라냈다.

망설이는 사람의 등을 떠밀어주는 것.

때로는 부담스럽게 여겨지지만, 린델이 누군가를 배려할 때는 보통 그런 방식을 취한다.

"······돌려 말할 필요는 없겠죠."

잠시 후, 마음을 다잡은 티엘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설명은 그리 길지 않았다.

담담한 심정을 연기하기 위해서인지, 그저 필요한 말 만을 짧게 잘라 전달하는, 무미건조한 보고에 가까웠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그녀를 대신해 작위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그로 인해 공화국으로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현실을 바꾸는 것도, 지금 당장은 불가능하다는 것.

티엘은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덮었다.

옷깃에 가려진 각인은 마력을 사용하지 않는데도 어슴푸레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미 '폐하'가 가지고 있을 혈위종속계약은 저를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마 곧 대령결계도 저를 계약자 삼아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겠죠."

그걸로 끝이다.

티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다른 계승자를 찾지 못한다면 그 오래된 주문들은 티엘을 비어있는 권좌의 서른 네 번째 주인으로 인식할 것이다.

그 결과를 피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 즉 또다른 대공가의 혈육을 찾는 것도 무리.

역대 대공이 숨겨둔 사생아라도 나타나지 않는 한, 정상적인 계승 범위 내에는 단 한 사람도 찾을 수 없다.

결국 티엘은 더이상 공화국의 기사가 아닌 레가야 공 카르티치스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웃어넘겼던 현실이 이런 식으로 그들 사이를 갈라놓으리라고, 과연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다들 예상은 했을테지만, 역시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하는 것은 무게가 달랐다.

무거운 침묵이 방 안을 에워쌌다.

"음, 정치같은 건 제대로 배운 적도 없는데, 이거 어떻게 하죠?"

지나치게 무거워진 분위기가 거북했던 티엘이 일부러 너스레를 떨며, 아무도 웃지 않는 가운데 혼자서나마 애써 웃으며 밝은 얼굴을 보였다.

"저기, 다들 너무 심각하게 그러지 말아요. 아직 시간은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동안 조금이라도 더 즐겁게-"

"무리하지 마, 멍청아. 지금 네 얼굴, 억지로 웃고있는거 뻔히 보여."

아드란은 혀를 차며 티엘의 머리를 아프지 않게 쥐어박았다.

"린델 말마따나, 괴롭다고 눈 돌려봐야 별 효과도 없잖아. 차라리 불평이라도 해."

"······란 말이 맞아. 어차피 듣는 귀는 우리들밖에 없어. 푸념을 들어주는 것밖에 못하지만, 달리 말하면 네 이야기는 얼마든지 들어주고, 받아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잖아?"

리아 역시 조금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입을 열었다.

"죽도록 이 악물고 달린 결과가 이것밖에 안돼냐며 울어도 돼. 왜 나만 손해를 보냐며 얼마든지 짜증을 부려도 좋아. 그 정도 불평은, 인간적으로 누구나 할 수 있는거니까."

티엘의 속내를 하나하나 살펴본 것처럼, 그녀의 심정을 정확하게 찌르는 말들이다.

내심으로는,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며 분노를 터뜨리고 싶었으니까.

대공.

그야 물론, 대공이라는 자리가 하찮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번쩍이는 금이라도, 누군가에게는 그저 무거운 짐덩이일 뿐.

제국의 최고위 귀족이라 해도, 그 자리를 원치 않는 사람에게는 그저 휘황찬란한 사슬에 불과하다.

황제의 앞에서 계승권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당당하게 외쳤던 것도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도, 정작 티엘이 원했던 것들은 또다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려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달가울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동료들의 위로를 들은 티엘은 오히려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오히려 쓸데없는 말로 그들에게 무력감을 더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함께 하며 지낼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을 울며 한탄하는걸로 물들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대신 웃을게요. 꿈에서라도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게. 그러니까 여러분도 웃어주지 않을래요?"

티엘의 미소는 아름다웠다.

꺼져가는 촛불처럼 마지막으로 밝게 타오르는 것일까?

하지만 마지막 불꽃이라기에는 그 빛이 너무나 밝다.

자포자기한 사람은 저런 행복한 얼굴을 하지 않는다.

설령 마지막이 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에서 눈을 돌리지는 않는다.

지금의 저 미소는, 그런 자세에서 비로소 빛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쁘네. 언제부터 저렇게 예쁘게 웃을 줄 알았던 건지."

잠시 그 얼굴에 경도되어 있었던 리아는 입술을 깨물며 눈가를 매만졌다.

하지만 명확히 잘라 말하기 어려운 얼굴로 몇 번이나 안색을 바꾸던 리아는 갑자기 티엘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그래도 마지막이라고 말하게 두진 않을거야. 린델, 그거 가져왔지?"

"말하지 않아도 가져왔을거에요. 그래도, 리아도 가끔은 생각이란걸 하더군요. 때마침 같은 생각을 할 줄이야."

피식 웃은 린델은 무언가를 꺼내 티엘의 손에 쥐어준 뒤, 두 손으로 재빨리 그 손을 꼭 감싸쥐었다.

순간 티엘의 손바닥 안에 들어온 것은 매끄럽고 단단한 무언가였다.

짙고, 강한 마력으로 둘러싸인, 아이의 주먹만한 크기의 둥그런 물체.

"이건 설마?"

오래지 않아 티엘은 그 물건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생령의 심장.

언젠가 티엘에게 내일을 약속하며 스러졌던, 어느 시공간을 방랑하던 대정령이 남긴 유산.

"작별인사따윈 듣지 않을거야. 레가야의 주인은 대륙 최강의 흑마법사잖아? 바다 정도는 뛰어넘어. 그 정도쯤은 할 수 있지?"

티엘은 눈을 크게 뜬 채 린델을 돌아보았다.

물론 공간계 대정령의 힘을 빌린다고 해도, 인간의 육체를 지닌 이상 대양을 단숨에 가로지르는 일 따위는 당연히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을까.

불가능을 알면서도 도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하지만, 기적은 바로 그런 어리석은 자들의 손에서 태어난다.

린델이 건넨 것은 단지 생령의 심장이 아니었다.

다시 만나자는, 재회의 약속이었다.

심장석을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물론, 이에요······."



* * *



기사단원들이 머무를 수 있었던 시간은 그 후로 일 주일 뿐이었다.

피앙투스 전역에 출몰하는 마령과 불법 흑마법사는 일반병인 황금가지 기사단으로는 대응하기 힘들며, 공식적으로는 법황청에 소속된 성기사단 '흰 계곡의 순례자'는 일반적으로 전투보다는 의료 및 후방지원을 담당하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결국 스무 명 남짓한 기사들만이 흉폭한 마령들과 직접 검을 맞대며, 그나마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이기위해 그 얼마 안되는 인원에서도 어떻게든 일정을 쪼개 순차적으로 휴식을 취해야 한다.

단장인 메이트리아크를 제외하더라도, 그런 전투원의 4분의 일이라는 대인원이 빠진 이상 본국에 남아있는 기사들의 부담은 이루 말할 수도 없을 만큼 극심한 상태일 것이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티엘은, 어느새 다가온 마지막 하루의 시간을 온종일 동료들의 곁에서 보냈다.

뭔가 극적인 이야깃거리는 없었다.

이제 막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정도로 회복된 몸으로도 고집을 부리며 방을 나선 주제에, 어제 그랬듯이, 그리고 내일도 그럴 것처럼, 지극히 평범한 하루였다.

서재에 파묻혀있던 린델과 잠시 떠들기도 했고, 주저앉은 건물을 복구하는 것을 돕는 리아에게 새참을 가져다주며, 올로비스와 아드란이 심심풀이 삼아 꺼내온 장기에 훈수를 두다 아예 두 사람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는 등, 굳이 나열하기도 나른할 정도로 시시하고 평범한 일 뿐이었다.

단지 배경만 레가야의 성일 뿐, 기사단에서 보내는 휴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하아,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랬는데도. 벌써 이렇게까지 지쳤잖아."

굳이 또 한 가지 다른 것을 찾자면, 티엘 자신의 체력이 약해졌다는 사실이다.

그늘에 앉은 티엘에게 찬 물에 적신 손수건이 내밀어졌다.

티엘은 생긋 웃는 것으로 감사 인사를 대신하며 땀에 젖은 이마를 물수건으로 식혔다.

그리 격렬하게 움직인 것도 아니고, 잠깐 산책에 가까울 정도로 가볍게 걸어다니기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티엘은 그런 가벼운 움직임만으로도 녹초가 됄 만큼 쉽게 지쳐버렸다.

며칠간 푹 쉬었는데도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얼굴이나 손 등은 아직도 눈에 띌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

생명력이 고갈되었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할 힘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음식을 먹어도 제대로 기력를 찾을 수 없고, 상처도 잘 아물지 않으며, 때로는 몸의 일부가 기능을 멈추기까지 한다.

반 년간 요양해야 한다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티엘은 난처하다는 듯한 얼굴을 하면서도 그리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나셀에게 그런 말은 하지 말라는 듯한 다소 원망스러운 눈길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렇게 꽁꽁 싸매려는 건 그만둬 줘. 답답하단말야."

"다리는 어쩌고?"

"괜찮아. 이제 그럭저럭 걸어다닐 정도는 나았어."

장난스레 발목을 이리저리 돌려보이는 모습이 제법 발랄했다.

죽음속성의 마력에 묶인 상태에서 거의 발목을 바깥방향으로 거칠게 꺾여버린 상처는, 어설프게 치료했다간 뼈가 잘못 붙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급하게 손을 쓰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다행히 치료가 늦지는 않았던 것인지, 아직 달리는 것은 무리더라도 걷는 것 정도로는 별로 아프지 않은 듯 했다.

덕분에 티엘은 늦봄과 여름의 경계가 만들어낸 화창한 하늘을 마음껏 만끽할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있으면 따가워질 햇볕이 아깝다는 듯 온 몸을 햇살에 맡긴 티엘은 드물게도 흐물흐물 녹아내릴 정도로 나른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게으른 고양이같은 만족감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덕에, 곁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하아······. 나온 것까지는 좋지만, 그래도 좀 더 특별한 건 필요 없는거야? 기껏 힘들게 나와놓고선, 너무 평범하게 보내는 거 같은데."

"이게 좋아. 모두가 특별해서 좋아하는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가 좋은거니까. 그러니까 이대로가 좋아."

말이나 못하면 얄밉지나 않을 텐데.

나셀은 속으로 졌다고 생각하며, 티엘이 톡톡 두드리기 시작한 옆자리에 앉았다.

하지만 가까이서 본 티엘의 안색은 생각보다 더 나빴다.

아직 열기를 띤 얼굴은 감기에라도 걸린 것처럼 발그스름하게 달아있었고, 눈빛 역시 조금은 몽롱한 상태다.

역시 무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티엘의 고집을 꺾고 방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할 수 없었다.

평소만 해도 그녀의 뜻을 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오늘만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나셀 역시도 오늘 저녁 피앙투스로 떠나는 배에 탈 예정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자신의 욕심을 위해 나셀을 낯선 땅에 잡아둘 수는 없다며, 티엘 스스로가 나셀에게 부탁한 일이었다.

아마도 레가야에서 아무런 기반도 없는 이방인인 그가 대공인 티엘의 곁에 있을 경우 받게 될 온갖 독살스러운 간계에서 그를 지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받는 사람에게는 쓰디 쓴 배려일테지만, 그 선택을 내린 본인 역시도 가슴앓이를 했으리라는 것을 아는 나셀은 잠자코 그 부탁을 받아들였다.

다행히 그는 어디에도 묶여있지 않았다.

원한다면, 언제라도 그녀를 찾아올 수 있다.

설령 신분의 차이가 벌어졌더라도, 티엘이라면 분명 그에게 문을 열어줄테니.

"하지만······. 네 말도 맞아. 뭔가 특별한 추억 한 가지 정도는 욕심이 나."

어디서 날아온 것인지 알 수 없는, 조그만 나뭇잎 몇 개가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나셀은 손을 뻗어 티엘의 머리위에 내려앉은 나뭇잎을 집어들었다.

엄지손톱만한 크기에 월계수 잎처럼 갸름한 모양새를 한 그 나뭇잎은 늦봄에 피어나는 꽃나무, 히니에의 잎이었다.

슬슬 히니에 꽃이 질 무렵이었지만, 이파리만큼은 여전히 싱그러움을 품고 있었다.

"히니에지?"

눈을 지그시 감고 있으면서도 용케도 알아챘다.

"응. 꽃은 시들어가도, 잎은 아직 생생하네."

만져보고 싶다는 듯 펼쳐진 손 위로 조용히 풀잎이 내려앉았다.

나셀이 건네준 잎을 만지작거리던 티엘의 얼굴이 문득 잔잔한 그리움에 젖었다.

조금 망설이던 그녀는 옷 안쪽으로 걸고 있던 목걸이를 하나 끄집어냈다.

길고 흰 목에 걸려있는 것은 곧 대공이 될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삼끈이었다.

게다가 그 끝에 매달린 것 역시 색이 바래고 상처투성이인, 낡아빠진 모습을 한 초라한 열쇠였다.

세 자매의 집에서 나셀이 건네주었던 그 열쇠였다. 나셀은 갑자기 그 열쇠는 왜 꺼낸 것인지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여는 것보다 먼저, 티엘의 나머지 한 손이 그 열쇠 옆에 옷소매 안쪽에서 어느새 뽑아든 또 하나의 열쇠를 겹쳐놓았다.

똑같은 틀로 찍어낸 듯한 두 개의 열쇠는 오래간만에 만난 형제가 그리웠다는 것처럼 조금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리며 한 손에 쥐어졌다.

"역시 열어봤구나. 그 꾸러미."

"왠지 모르게 알 것 같더라. 혹시나가 역시나였어."

티엘은 빙그레 웃으며 손 안에서 열쇠를 몇 번 섞었다.

물론 똑같이 생기긴 했지만 녹이 슨 모양은 조금씩 달랐고, 더군다나 하나는 티엘의 목에 걸린 끈에 연결되어있으니 착각할 일은 없다.

단순한 손장난이었다.

"아까 이야기 취소할게. 나랑 같이 가줬으면 하는 곳이 생각났어."

"그 열쇠가 필요한 방이야?"

"응."

아직 궁인들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어느새 성에 뿌리내린 술식들이 티엘을 주인으로 맞이하며 어지간한 문은 열쇠 없이도 드나들 수 있다.

하지만 몇 개의 비밀스러운 문들은, 티엘조차도 직접 열쇠를 사용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었다.

이 열쇠는, 그 중에서도 한결 더 특별한 것이었다.

"비밀정원이 있어. 이 성의 모든 곳을 소유했던 아버지조차도 들어갈 수 없었던, 말 그대로의 비밀정원."

"······대공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고?"

성의 주인이자 레가야의 주인이었던 미노스티야 대공이지만, 그런 그가 이 땅에서 유일하게 가질 수 없었던 땅.

티엘의 손에 쥐어진 두 개의 녹슨 쇳조각만이, 그 작은 정원으로 통하는 유일한 열쇠였다.

슬쩍 몸을 일으킨 티엘은 나셀의 부축을 받아가며 동쪽의 별궁으로 향했다.

별궁은, 본성에 비해서도 유난히 쌀쌀할 만큼 인기척이 드물었다.

"오랫동안 아무도 쓰지 않았으니까."

나셀의 감상을 읽은 티엘이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아무도 거주하지 않은지 오래된 별궁이 마지막으로 받아들였던 사람은 티엘의 어머니였던 메르비아 대공비였다.

아르미스 백작령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있고 싶었던 것일까.

대공가의 안주인이면서도 별궁의 수인으로 살았던 메르비아 로인 아르야.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은 티엘이 그 그림자라도 느낄 수 있는 곳은 이 곳 뿐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대공비가 썼던 방으로 향하는 대신, 한쪽 구석에 마련된 낡은 창고 근처로 나셀을 이끌었다.

"여기야."

아직 더 들어가야 하는걸까, 하는 생각을 막 떠올렸을 때였다.

갑자기 티엘은 문 하나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 곳에 서있는 문은 평범한, 아니, 그보다도 못한 작은 쪽문이었다.

그리 체격이 크지 않은 티엘조차 허리를 숙이지 않고서는 드나들 수 없고, 아드란처럼 덩치가 조금 큰 사람이라면 드나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작은 문.

적막하긴 해도 깨끗하게 유지되는 별궁의 다른 곳과는 달리, 오로지 이 문만이 세월에 노출된 듯 늙아 있었다.

가장자리는 놋쇠장식으로 제법 고풍스럽게 장식을 해 두었지만, 그마저도 시간에 깎이고 녹에 덮여 뿌옇게 흐려져있었다.

문 손잡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때는 반짝반짝 빛났을 손잡이는 먼지에 뒤덮여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티엘을 조금 물러나게 한 나셀은 조심스럽게 입김을 불어 먼지를 날려보냈다.

풀썩 피어오른 먼지구름이 흩어지길 기다린 나셀은 문득 문고리 위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메르······, 로, 르야. 하얀······바람?"

"메르비아 로인 아르야, 순백의 신부에게 고향의 바람을. 그렇게 적혀있어."

서툰 제국어 실력으로 더듬더듬 글을 읽는 나셀을 대신해, 그의 곁으로 다가온 티엘이 하나하나의 글자를 손으로 짚어가며 직접 읽어주었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자신이 직접 문을 여는 대신, 나셀에게 열쇠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나셀은 의문을 품으면서도 순순히 열쇠를 받아 문고리에 밀어넣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안맞는데?"

하지만 열쇠는 아예 구멍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열쇠구멍과 열쇠 날이 완전히 달라 끄트머리를 밀어넣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 때 다시 티엘이 손을 움직여, 물러나려는 나셀의 손을 문고리에 잡아두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손으로 쥔 열쇠를 가볍게 '메르비아'라는 이름 위에 가져다 댔다.

순간, 헛돌기만 하던 열쇠가 거짓말처럼 덜컥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찰칵.

무심결에 열쇠를 돌리자 잔뜩 녹이 슬어 열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잠금쇠마저 놀라울 정도로 부드럽게 열렸다.

"어라?"

"이 문은 원래 열쇠 두 개가 모두 모여야만 열려. 한쪽만 가지고 있어봐야, 이 문은 열리지 않아."

티엘의 목소리를 반주삼아 문의 모습이 변해갔다.

거칠게 녹이 슬었던 금속 표면이 맑은 빛을 되찾는다.

흐릿해졌던 글귀 역시 무른 금속 위에 날카로운 펜으로 새긴 것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자세히 구경할 시간은 없었다.

티엘은 잠금쇠가 풀린 문을 여는 대신 나셀을 끌고, 문으로부터 한 걸음 정도 떨어진 위치로 재빨리 움직였다.

"자, 이제 조금 흔들릴거야. 넘어지지 않게 꼭 잡아. 알았지?"

"······어딜 어떻게 잡으라는거야."

"날 꼭 안아주면 돼잖아."

"너, 은근히 뻔뻔해졌어."

티엘은 간만에 쿡쿡 웃으며 나셀의 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문으로부터 터져나온 강렬한 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몸이 타버리는 것은 아닐지 걱정할만큼 강한 빛은 다행히도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에 신음을 흘리던 나셀은 어느새 귓가에 몇 번이고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티엘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눈을 떴다.

낙원.

눈을 뜬 나셀이 무의식적으로 가장 처음 떠올린 단어였다.

저물어가듯 따스한 주홍빛으로 물들어있는 하늘 아래,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몽환적인 숲이 펼쳐져 있었다.

하늘까지 뻗어올라가는 듯한 훤칠한 나무들이 바다를 이룰 정도로 먼 곳까지 늘어서며 모였다가 흩어지고, 넓게 공간을 내어주다가 다시 합쳐지며 복잡한 색의 문양을 그려낸다.

빛과 그림자를 따라 시선을 내리면, 이번에는 나무뿌리 근처에 자리잡은 작은 관목이나 풀꽃들이 풍성한 잎과 가지로 시선을 끌었다.

그 가운데 가장 많이 피어있는 것은 히니에 꽃이었다.

그야말로 흐드러지도록, 초라한 풀꽃이라는 인식을 완전히 지워버릴 만큼 한가득 피어난 히니에 꽃들은 몇 년만에 맞이하는 손님을 향해 그 귀여운 꽃잎을 아낌없이 흔들고 있었다.

"난 어머님의 얼굴도 알지 못해. 하지만 레가야의 오랜 귀족가 아르야의 영애라는건 알고있어."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마치 자장가처럼 귓가에 울렸다.

이미 이 풍경을 알고 있었던, 하지만 오랫동안 단지 그리워하기만 했던 티엘은, 나셀과 마찬가지로 꿈 꾸는 듯한 얼굴로 정원의 풍경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이 정원은 본래 아르야의 영지에 속해있는 땅이었다고 해. 말하자면 어머님의 향수를 달래기 위한 작은 모형정원인 셈이지."

쏴아아아아.

깊은 숲의 냄새가 바람을 따라 흘러왔다.

티엘은 손을 내밀어 바람을 타고 날아온 꽃잎을 하나 받았다.

"어머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나와 그 사람만을 위한 비밀스러운 공간이 됐어. 아, 그래도 가끔은 아첼이랑도 들어왔었지, 참. 후후후후······. 여긴, 현실에는 없는 땅이야. 공간의 틈새를 벌려, 무수한 이공간이 겹쳐지고 부서지는 곳에 고정시켜둔, 지금은 사라져버린 어떤 장소의 모습이라고 해. 그것도 모르고, 어린 시절엔 이 꽃을 한아름 따서 가져나가려다 전부 없어져버린 바람에 울적해하기도 했는데."

숲도, 하늘도, 꽃도 모두 환상.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이 숲도, 조금 걷다보면 갑자기 짙은 안개같은 것으로 막혀 더이상 지나갈 수 없게 된다.

이 정원의 경계선은, 바로 그 안개다.

억지로 고정시켜둔 이공간을 안정화시킬 수 있는 것은 그리 넓은 범위가 아니기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불확정면은 차단해둔 것 뿐이다.

하지만 그런 인위적인 손길이 있어도, 이 비밀정원이 품은 아름다움은 바래지 않았다.

나셀은 티엘이 눈여겨보던 꽃을 몇 송이 꺾었다.

얇고 보드라운 보라색의 잎을 지닌, 추억을 기억하는 꽃, 히니에.

"수많은 히니에 꽃은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뜻을 품는다고 하지. 이 정원, 사실은 고향을 그리워하는게 아니라, 곁에 없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만들어진 거지?"

"글쎄······. 그걸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없는걸······."

거짓말이다.

그저,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나셀은 굳이 그 씁쓸한 거짓말을 지적하는 대신, 그저 티엘의 손을 잡아 끌었다.

정원의 중심는 커다란 나무가 자리잡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동시에 그 나무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나무 아래에는 정원을 거니는 사람들이 잠시 쉬어가라는 것처럼 길다란 의자가 하나, 둥치에 등을 기댄 채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 위.

티엘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들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갖춰진 한 쌍의 유리잔과 밀봉된 병 하나, 그리고 짧은 쪽지 한 장.

-그 날의 추억을 위해.

익숙한 필체다.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

티엘은 조금 굳어진 얼굴로 병을 열었다.

달콤한 과일향이 감도는 푸른 빛의 맑은 액체가 병 안에서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키리아주였다.

익숙한 향기를 맡은 티엘은 놀랍게도 화를 내는 대신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망설임없이 병을 기울여 두 개의 잔에 술을 채웠다.

"마실거야?"

"······내겐 어지간한 독은 들지 않아. 고위 마법독이라면 몰라도. 게다가······."

자르륵.

티엘의 손아귀에서 목걸이 하나가 떨어져내리며 찰랑거렸다.

지금도 나셀의 목에 걸려있는 티엘의 목걸이와 똑같이 생긴, 르비아가 남긴 목걸이였다.

"지금 네가 가진 목걸이, 그건 처음 성을 나와서 아첼이랑 살던 때 산 거야. 하지만 원래 내가 사려고 했던 건 이 쪽······. 그러니까 그는, 날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다는 거야. 그런데도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어. 웃기지도 않아. 나는 그렇게나, 그렇게나······."

티엘은 미처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언가를 억누르기 위해, 있는 힘껏 입술을 깨물며 버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더 견딜 수 없었던 것인지, 그녀는 이내 들고있던 잔을 단숨에 비웠다.

달콤한 향기와, 미묘한 쓴 맛이 한숨 사이로 젖어들었다.

순간 티엘의 몸이 가볍게 흔들렸다.

"괜찮아?"

"아, 응······. 조금, 술기운이······."

쇄약해진 몸에는, 아무리 가벼운 술이라도 버거웠던 것이다.

갑작스러운 술기운으로 올라온 열기에 조금 힘겨워하던 티엘은 이내 얼굴을 감싸며 의자 위로 털썩 무너져내렸다.

"하아······. 뭘까. 정말 뭐였을까. 그 사람은 정말, 뭘 하고 싶었던 걸까. 차라리 모든걸 말해줬더라면. 아니, 차라리 완전한 악당으로 남아있었더라면. 추억으로 묻어두기엔 너무나 미운데, 마음놓고 증오하기에는 아직도 죄책감이 남아. 대체 뭘 어떻게 해야할 지 알 수가 없잖아!"

정말, 그 한 잔에 취해버린 것일까.

아니면 술을 변명삼아, 다 삭히지 못한 감정을 털어놓고 싶었던 것일까.

얼굴을 감싼채 중얼거리던 티엘의 목소리는 점점 격앙되며 날카로운 기세를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과연 그가 모든 것을 이야기해 주었을까.

오랜 세월 뒤엉킨 애증이란 몇 마디 말로 간단히 풀릴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는 변명조차 들을 수 없는 사람은 과연 그 질척거리는 감정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그저 삼키고 삼켜, 가슴에 앙금으로 가라앉아 단단한 돌이 될 때까지, 기다리기만을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

차라리 울고, 눈물을 흘렸더라면 좋았으리라.

눈물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씻어낸다.

슬픔이나 괴로움 뿐만 아니라, 분노나 증오같은 쉽게 떨어지지 않는 탁한 감정들까지도 조금은 희석시켜준다.

그러나 티엘은 괴로워하면서도, 끝내 르비아를 향한 눈물만은 보이지 않았다.

나셀은 입술을 깨물며 티엘의 등을 다독였다.

아직 티엘에게 말하지 않은 한 가지 진실.

르비아가 남긴 또다른 하나의 잔.

아직은 그것이 최후에 남긴 독일지, 아픔을 달랠 약일지 판단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겨우 말없이 등을 두드려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미안해······."

한참 후, 슬쩍 고개를 들어올린 티엘이 힘겹게 미소지으며 뜬금없이 사과했다.

"갑자기 왜 그래. 사과할 일이 뭐 있었다고?"

"그냥······, 원래는 그냥 너랑 추억어린 장소를 돌아보고 싶었어. 예전엔 이런 일도 있었구나······, 그렇게 추억을 나누고, 그렇게 또 하나의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어. 그런데······. 미안. 나란 애는 정말······. 같이 와달라고 해놓고서는, 옆에 세워둔 채 딴 사람 생각에 잠기고······."

오래간만에 마신 술은, 정말로 티엘을 취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조금 횡설수설 하는 말에 진짜 미안한 것이 누구인지, 이래서야 나셀 스스로도 알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티엘."

"응."

"들으면 후회할지도 모르는 이야기가 있어. 들으면 지금보다 훨씬 괴로울지도 몰라. 그래도, 듣고싶어?"

그것은 티엘에게 하는 말이자, 동시에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비겁한 짓이다.

자신이 선택해야만 하는 것을, 아무것도 모르는 티엘에게 떠넘겨버리는 짓이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눈을 둥그렇게 떴던 티엘은 이내 부드럽게 웃으며 나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신경써줘서 고마워. 나 때문에, 너도 계속 힘들었던거지? 괜찮아. 난, 괜찮아. 들려줘, 나셀."

부디 이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길.

나셀은 누군가에게 하는지 모를 기도를 올리며,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아마도 그 스스로는 영원히 닿을 수 없었을, 누군가의 고해를 들려주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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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16장-시원의 새벽 (3) 19.11.23 66 3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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