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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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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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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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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5쪽

15장-귀향歸鄕 (10)

DUMMY

순간, 손아귀의 아스트라가 형체를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큭! 이건 완전히 억누를 수 없어······!'

아스트라를 이루는 것은 칼라가스의 마력.

최초의 빙정령 중 하나인 야룬다라면 어느 정도 그 영향력을 뿌리칠 수는 있지만, 동시에 빙정령인 이상 칼라가스의 힘을 완전히 꺾는 것은 무리다.

대정령의 힘으로도 채 억누르지 못할만큼 짙은 마력이 마침내 만개했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가두려는 마력을 뚫고 꽃잎을 피운 새벽빛은, 이내 마력으로 만들어낸 대정령의 육신을 뜯어 삼키기 시작했다.

야룬다는 오래간만에 맛보는 아픔에 경악으로 젖은 눈을 들었다.

아스트라가 만들어낸 궤적.

마치 용이라도 휩쓸고 지나간 듯한 어마어마한 흉터가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시작점은, 아마 인간의 시야로는 서로의 모습을 인지할 수조차 없을 머나먼 거리.

야룬다의 눈에도 거의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 거의 빈사상태의 몸으로 활을 거두는 소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본래라면 이 일격만으로도 수많은 사상자를 만들어냈을 흉악한 한 발.

껍데기만 남긴 채 텅 비워버린 도시가 그녀의 족쇄를 풀어준 탓이리라.

아스트라를 쥐고있던 두 손은 순식간에 뼈가 드러나 살점이 너덜거렸다.

폭발한 마력 가운데 일부가 우연히 얼굴을 길게 스친 탓에 한쪽 뺨도 마찬가지로 붉게 물들어갔다.

이미 정점에 선 대정령에게는 낯선 감각, 고통.

잿빛 안개가 뭉클거리며 잃어버린 육체를 수복하고 있었지만, 이미 인간의 모습을 취한 이상 상처의 통증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야룬다는 곧 수복될 상처를 돌보는 대신, 아득하게 멀리 떨어진 티엘을 노려보았다.

먼 거리를 두고서도, 서로의 시선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서로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그렇게 다 죽어가는 몸으로 대체 어떻게······.'

그녀는 생령이 아니다.

심장석이 깨지거나 마력이 바닥나지 않는 한, 베이거나 찔리는, 혹은 아예 육신의 일부를 잃어버리는 일조차 손쉽게 회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급소를 살짝만 베여도 죽고, 살짝 긁힌 상처도 며칠이나 지나야 완전히 아무는 나약한 육신에 의지하는, 한 명의 인간일 뿐이다.

그런 주제에, 저렇게까지 너덜너덜하게 뜯겨나간 몸으로 어째서 일어서는가.

어째서 아직도 활을 쥐는가.

이미 야룬다의 눈에 보이는 소녀는 인간이라고 할 수조차 없었다.

망가진 몸을 얼음으로 묶어 억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을 조종하는 망령에 가까웠다.

그마저도 시시각각으로 혼을 깎아내고 있는 이상 오래 가지 않으리라.

인간도, 생령도, 죽음은 끝이 아니다.

하지만 혼을, 혹은 심장석을, 모조리 깎아내 불태워버린다면 그 뒤는 무(無).

사후의 안식조차 주어지지 않는 완전한 소멸을, 어째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 이유는 묻지 않겠습니다."

대정령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알고 있지 않았던가.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시체마저도 이상을 위한 발판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을.

그 의지가 꺾이지 않는다면, 이유따위는 이제와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제가 당신께 물을 것은 단 한 가지 뿐이었을테니까요."

야룬다는 손 안으로 마력을 모았다.

차곡차곡 쌓인 마력은 검푸른 안개로 일렁이다, 차차 한 줌의 액체가 되어 손 안에서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마력으로 물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액체의 형상을 취할 정도로 짙게 끌어모은, 단순한 마력 그 자체였다.

"당신이 이 곳을 지날 힘을 지니셨는지, 부디 그 활로 대답해주시길."

쥐고있던 마력이 손을 떠났다.

한 줌의 물을 쥐어 뿌리는 듯한 단순한 동작.

그러나 허공으로 떠오른 액체는 야룬다의 손을 떠나는 순간, 마치 억지로 좁은 그릇에 쑤셔넣었던 솜 뭉치처럼 폭발적으로 부풀어올랐다.

단숨에 끓어오른 마력은 대기에 녹아있거나, 지면으로 스며들어간, 혹은 그밖에 어딘가에 숨어있던 습기를 닥치는대로 긁어모았다.

모여든 습기는 개울이 되고, 다시 개울이 모여 격류가 되며, 격류는 이내 살아 움직이는 파도가 되어 지면을 파헤치며 달린다.

콰아아아아!

겨우 호흡 한 번 하는 사이, 홍수로 범람한 강을 연상시키는 미친 물길로 모여든 습기는 맹포한 포효를 내지르며 적을 향해 몰아쳤다.

물론, 도시에서는 제아무리 강한 파도라도 그 기세를 유지하기 어렵다. 빼곡하게 들어선 벽과 나무, 그리고 기둥 등 파도의 발목을 잡아채는 요소가 너무나 많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스트라가 남긴 거대한 상흔은 건물을 부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면에 말라붙은 새로운 물길을 파놓은 수준이었다.

불안정하게 걸음을 옮기던 티엘 역시 그 사실을 알아채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스트라 한두 발 정도로는 막을 수 없다.

단순히 마력만으로 만들어낸 안개와 파도조차도 그렇게 격렬했는데, 지금의 공격은 마력이 아닌 진짜 물을 매개로 삼은 파도다.

게다가 설령 파도의 일부를 얼릴 수 있다고 해도, 파도는 오히려 얼음을 공성추삼아 밀어붙여, 티엘의 전신을 단숨에 으깨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도약주문으로 피할 것인가?

티엘의 시선이 불안하게 허공을 더듬는 것을 눈치챈 야룬다는 어림 없다는 듯 손가락을 살짝 까딱였다.

실을 잣는 것은 티엘만의 기술이 아니다.

머리카락보다 가늘고, 투명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세한 실이 건물과 건물 사이에 조용히 걸렸다.

새의 깃털마저 제 무게만으로 잘려나갈 정도로 예리한 실의 감옥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 섣부르게 도약했다간, 후회할 시간도 없이 조각조각 베여 죽어버릴 것이다.

앞으로는 집채만한 파도.

주위에는 예리한 칼날의 결계.

도망치는 것 따위는 허락하지 않는 죽음의 감옥이다.

그러나 대정령과 싸운다는 것이 하나의 세계를 상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야룬다 또한 기억하고 있었어야 했다.

마법사란, 인간이란, 때때로 세계를 상대하면서도 물러서지 않을 정도로 당당하고, 오만한 존재라는 사실을.

티엘은 뜻밖에도 정면으로 달렸다.

맹렬한 기세로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파도를 향해, 스스로 몸을 던지듯이.

자포자기 한 것일까.

아니다.

파도에 닿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걸음을 멈춘 티엘은 몸을 틀며 우라실을 지면에 거칠게 찍었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 제동을 건 칼날이 바닥을 거칠게 긁으며 돌 위에 깊숙한 흉터를 남겼다.

우드득!

얼음으로 뒤덮인 팔이 기어이 망가지고 말았다.

관절이 부러지는 듯한 끔찍한 소리와 함께 얼음 사이로 시뻘건 핏덩이가 왈칵 쏟아졌다.

하지만 티엘은 부러진 팔 따위는 상관 없다는듯, 달려오던 기세를 살려 지면을 긁듯이 넓게 걷어찼다.

"천의 바람, 딛어라!"

발끝이 스친 흔적을 따라 새하얀 마력의 선이 그려졌다.

그리고 그 직후, 백색의 장막이 펼쳐쳐 미쳐 날뛰는 노도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제와서 방어계 주문을?'

야룬다는 순간적으로 경멸을 품었다.

수호의 주문이라고 해도, 점이나 선이 아닌 면 단위로 덮쳐드는 질량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무리다.

더군다나 자신을 둘러싸는 기본적인 형태도 아닌, 정면에만 방패처럼 펼치는 형태다.

파도를 벽으로 막은들, 옆으로 흘러간 물길은 다시 티엘의 주위를 감싸고 삼켜버릴 것이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헛수고라니, 자신이 티엘을 너무 과대평가 했던 것일까.

그러나 그 순간, 종잇장처럼 얇은 벽과 파도가 맞닿은 바로 그 지점에서 거대한 폭발과 함께 화려한 물기둥이 솟구쳤다.

단순히 충격으로 인한 물보라가 아니다.

그야말로 정면에서 폭약이라도 터뜨린 듯한 요란하고 거친 물보라가 어지럽게 비산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야룬다가 흘려보낸 파도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한 순간에 사방으로 흩어져 버린 상태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눈을 휘둥그렇게 뜬 야룬다는 남은 파도로 티엘을 삼켜버리기 위해 계속해서 마력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이미 기세만으로도 산을 가를 듯 했던 파도는 완전히 힘을 잃어, 대정령의 명령에도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릿하게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힘겹게 몸을 일으킨 티엘은 이제 막 다시 가속을 시작하는 파도를 비웃듯 몸을 굴렸다.

'어딜!'

티엘은 놀랍게도 파도를 가르며 야룬다를 향해 빠르게 파고들고 있었다.

그런 티엘을 겨누듯 한 손을 뻗은 야룬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하는 맑은 소리를 신호로, 다시 한 번 발목을 적신 파도가 몸을 뒤틀었다.

날카로운 가시나무 숲으로. 칼날을 품은 바람으로.

마치 얼음으로 이루어진 동굴처럼, 티엘의 머리 위로 둥글게 일어선 물결이 순식간에 날카로운 가시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안에 들어선 자의 전신을 동시에 꿰뚫어 죽이는 칼날 감옥.

그 순간, 티엘은 무언가를 끌어당기듯 거칠게 손을 저었다.

놀랍게도 조금 전 야룬다의 파도를 막아냈던 흰 벽은, 파도에 휩쓸린 후에도 아직 일부분이 남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저 부서진 얼음벽이라 생각해 흘려넘기고 말았던 잔해.

그저, 알 수 없는 주문으로 강화해 버텨냈으리라고만 생각해버린 티엘의 방패.

하지만 그 흰 벽은, 티엘이 손짓하는 순간 마치 꽃잎처럼 산산히 흩어졌다.

그리고 바람을 타듯, 혹은 물살을 타듯,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해 지면을 빠르게 미끄러졌다.

어느새 티엘의 주위로 모여든 꽃잎들은 마치 봄날의 바람에 휘말린 것처럼 그 주인의 몸을 에워싸며 빙그그르 춤을 추었다.

'원?'

윤무를 추는 것은, 꽃잎이 아니다.

순간 바람결에 흩날리듯 산산히 부서지는 모습 때문에 그렇게 착각했을 뿐,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자잘한 조각들은 제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들은 또다시 원을 그리는 모습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흰 벽으로 보인 것은, 단순히 그 것이 무수하게 겹쳐져 있었기 때문.

마치 사슬 갑옷처럼 겹겹이 둘러쳐진 그 것은 단순한 원조차도 아니었다.

미세한 문자와 도형으로 주문식을 새긴 마법진.

그것은 아마도, 티엘이 도약주문을 쓸 때마다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그제서야 야룬다는 티엘이 조금 전 파도를 막은 방식을, 그리고 지금 그 주문을 자신의 주위에 두른 이유를 깨닫고 탄식을 터뜨렸다.

"설마 도약주문을 겹쳐서 파도의 방향을 바꾼건가요!?"

티엘의 고유주문인 선풍의 질주는, 본질적으로 물체의 관성을 제어하고 특정한 방향으로 재차 가속시키는 단순한 주문이다.

평소에는 단순히 도약이나 빠른 이동을 위해 사용하지만, 그 단순함은 분명 다양한 상황에 응용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이를테면, 수십 수백 장의 도약진을 이용해 아스트라를 가속시켜 위력과 사거리를 극도로 끌어올리는 초장거리 저격술식으로.

이를테면, 휘몰아치는 파도의 방향을 꺾어, 파도 스스로가 자신의 힘에 부딪혀 힘을 잃게 만드는 반격 술식으로.

이를테면, 급소를 노리며 찔러들어오는 암기를 쳐내 공격을 차단하는 방어 술식으로.

한 번의 시전으로 펼쳐지는 것은 세 장의 마법진.

그 한 장의 마법진 만으로도 어지간한 투석기 이상의 추진력을 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런 마법진을 겹겹이 펼쳐, 수십에 달하는 수로 밀어붙인다면 어떨까.

공간 자체를 뒤틀거나, 아예 주문 째로 지워버리는 등 특별한 힘이 아닌 이상, 그 어떤 공격이라도 막거나, 흘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수십 개의 주문을 동시에 전개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일일 리 없다.

티엘은 부서질 듯 지끈거리는 머리와 심장을 연신 쥐어뜯으면서도, 품 안의 별의 서 만큼은 필사적으로 끌어당겼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선풍의 질주를 얼마쯤 기록해두긴 했지만, 그걸 이렇게 쓰게 될거라고는 그녀 자신도 모르고 있었다

. 별의 서 안에 남아있던 주문이 모자랐더라면 도박이 실패했을지도 모르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짓쳐들어오는 파도를 역으로 뒤집어버리며, 그 기세를 타고 야룬다와의 거리를 좁힌 것도 상당한 쾌거였다.

여러 면으로 운이 따라준 것이리라.

하지만 운은 언제까지고 이어지지 않는다.

아니, 운이 따라주더라도, 망가진 육신이 따라주질 못한다.

지금이라면 아스트라의 사거리가 닿을 수 있을텐데, 지금이라면 태세를 정비하기 전에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텐데, 몸은 더이상 움직여주질 않았다.

갑옷처럼 두른 얼음을 통해 억지로 마법서를 붙잡고 있던 팔이, 기어이 지면으로 떨어졌다.

더이상 마력을 제어할 기력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다.

부서져가는 몸을 감싼 얼음은 조각조각 갈라지며 떨어지고, 뼈가 부러져 근육만으로는 지탱할 수 없게 된 몸이 서서히 무너졌다.

'쓰러,지면······, 안······.'

마지막까지 버텨주던 한 팔이 꺾였다.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던 티엘은 그대로 지면에 얼굴을 쳐박으며 완전히 쓰러지고 말았다.

애초에 활을 당기기는 커녕 걸음을 딛는 것조차 무리인 몸이었다.

여기까지 움직인 것만으로도 기적이나 다름 없었으리라.

'움······여······.'

차가운 지면에 쓰러진 채 흐려지는 눈을 똑바로 뜨려 애를 썼다.

하지만 점점 어두워지는 시야로는, 어디에서 배어나온 것인지조차 모를 피가 바닥과 티엘 자신의 몸을 적셔가는 모습을 보는 것조차도 버거웠다.

의식마저 흐려지는 것이 두려웠던 티엘은, 어느새 몸이 움직이든 말든 상관 없이 마음 속으로 고함을 질러대고 있었다.

'움직······여······. 움직······여······. 제발······, 움직여줘······!'

이미 차갑게 식어버린 손가락은 경련조차 하지 않았다.

부러진 팔은, 이미 팔꿈치 아래로는 감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도중에 찢겨나갔더라도 알아채지 못했을 정도로.

게다가 팔이 부러진 것이 유일한 부상인 것도 아니었다.

무릎도, 어깨도, 녹슨 경첩처럼 삐걱이며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아프다.

늑골에는 금이라도 간 것인지, 숨을 쉴 때마다 찌르는 것처럼 아프다.

고통을 조금이라도 이기기 위해 몇 번이고 혀를 깨문 탓에 입 안은 온통 피로 가득 차 있고, 무리하게 도약을 계속하며 충격을 받아내던 허리도 끊어질 것처럼 아파왔다.

움직이지 않는 몸은, 그저 아프다는 말만 끝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피가 빠져나가서일까.

이미 움직이지도 않는 몸에 점점 추위가 찾아들었다.

춥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음속에 잠겨버린 것처럼, 지독하게 춥다.

아니, 어쩌면 정말 눈이나 얼음속에 파묻혀버린 것은 아닐까.

눈에는 더이상 무엇도 비치지 않고, 소리도 더이상 또렷하게 들려오질 않았다.

"괴롭지 않으신가요."

흐려진 눈 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야룬다는 티엘이 자신이 다가오는 것에 조금도 반응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이 티엘의 턱 아래를 찌르듯이 짚었다.

뜻밖에도 야룬다는 손톱을 세우지 않았다.

단숨에 목을 베어버리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텐데도, 그저 티엘의 상태를 확인해보려는 듯한 무덤덤한 촉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미 예민한 대정령의 감각으로도 쉽게 찾기 어려울만큼 약해진 맥박은, 그런 야룬다의 손가락을 두드리는 것조차도 힘겨워 하고 있었다.

"으······, 아······."

신음소리조차 되지 못하는, 그저 폐에서 짜내는 안타까운 숨소리.

그것이 티엘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이었다.

'부상보다는, 마력고갈로 인한 역류로 무너진 건가보군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으로 갉아먹힌 몸은 이미 살아가는 감각 자체가 대부분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전신의 출혈과 부상역시, 그 태반은 베이거나 맞아서 생긴 것이 아니다.

마력의 과부하로 인해 생령의 형태로 변질되려는 것을 거부한 결과 스스로 무너져내린 것이다.

야룬다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생명력이 이 정도로 희박해져있다면 오감중에 하나나 둘 정도는 이미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다.

산 채로 뼈를 모두 적출해버린다 해도, 그 죽음을 앞둔 희생자의 생명력조차 이 보다는 짙고, 강렬할 정도다.

이쯤 되면 차라리 감각이 무뎌진 것이 인도적인 상황이다.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이미 몇 번은 미쳐버릴 정도로 혹독한 고통에 시달렸을테니까.

"적어도 고통은 없도록······."

야룬다는 티엘의 가느다란 목을 감아쥐었다.

힘겹게 이어지던 호흡마저 차단되었다.

뿌리칠 힘도 없이, 티엘의 몸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갔다.

패자를 유린하는 것은 즐기지 않는다.

이대로 조금만 기다리면,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은 의식을 잃을 것이다.

목을 베거나, 심장을 터뜨리는 것은, 그 후에 해도 충분하다.

가늘게 이어지던 신음이 끊겼다.

몸을 가늘게 떠는 애처러운 저항조차 얼마 가지 못했다.

티엘이 어느새 잠들듯 움직임을 멈춰버린 것을 깨달은 야룬다는 문득 티엘의 곁에 떨어져있던 단검을 발견했다.

새벽빛 속에서 이슬을 모아 만들었다는 얼음의 검, 우라실.

공교롭게도 야룬다는 그 검을,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의 칼라가스가 만들어낸 녹지않는 얼음에, 야룬다 자신의 마력을 깃들게 한 뒤 벼려낸 칼.

어느새 재미있는 전설이 붙어 그 둘과의 연관성은 흐려지고 말았지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리라고는 그 누가 생각했으랴.

그렇다면 유수의 지배자 야룬다가 칼라가스의 계약자에게 최후를 내리기에는, 이처럼 어울리는 검도 없으리라.

수정처럼 투명한 칼날을 단단히 쥔 야룬다는 손을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잠들어버린 티엘의 심장을 향해 칼날을 내려쳤다.

야룬다의 가면 위로 새빨간 선혈이 점점이 흩뿌려졌다.

"······이런."

주르륵 흘러내린 피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마찬가지로 차게 식어있던 돌을 데우지는 못했다.

그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듯, 야룬다는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천천히 자신의 팔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 손에, 더이상 단검은 들려있지 않았다.

손목부터 아래로,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은 깨끗한 절단상.

대정령인 그녀의 육신을 단숨에 끊어버릴 수 있는 마력은, 그다지 없다.

야룬다는 스스로에게 변명하는 대신, 즉시 두 팔을 재생시키며 몸을 낮췄다.

그리고 동시에 단두대의 칼날을 떨어뜨리듯, 자신의 발을 내려찍었다.

그러나 검을 대신해 티엘의 심장을 으깨버리려던 구두 굽은, 순간 있을 수 없는 방향으로 꺾여나가며 애먼 지면을 후려쳤다.

부서진 포석이 억울한 비명을 지르며 박살나고, 그 파편이 머리 위로 튈 정도의 맹렬한 일격.

야룬다의 육체가 물리적으로 꺾인 것도 아니다.

공간계 마력으로 인한 왜곡현상.

야룬다는 뿌득 이를 갈며, 반사적으로 티엘을 방패삼듯 들어올렸다.

"솔페이람!"

하지만 그 순간, 이미 늦었다고 말하듯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갈라졌다.

공간의 틈새에서 머리를 들이민 것은 잿빛의 폭풍이었다.

겨우 재생되어가던 팔은 티엘의 목덜미를 움켜 쥐기도 전에 다시 갈가리 찢겨나갔다.

'폭풍의 날개!?'

그리 강한 마력은 아니지만, 공격력만큼은 이상하게 강하다.

하지만 파괴의 바람이라면, 근접한 티엘까지 휘말리는 것이 당연한 일.

인질을 내어줄 생각 따위는 없다는 것일까.

그러나 다음 순간 폭풍에 휘말려 허공에 내던져진 야룬다는, 조금 전의 공간왜곡으로 인해 폭풍이 티엘까지 삼켜버리지는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것이 의미하는 사실까지도.

늦었다.

겨우 몇 초.

대정령답지 않게 감상에 젖은 바람에 허비해버린, 그 몇 초의 시간이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서는 것이냐!"

눈 앞에서 방해를 받은 야룬다는 분노를 태우며 대기중에 자신의 마력을 뿌렸다.

다시 한 번 강제로 응결된 물방울들이 미친듯이 꿈틀거리며 형상을 갖춘다.

단순한 얼음 덩어리도, 형태를 갖춘 물 덩어리도 아니다. 고도로 물을 표면에서 고속으로 회전시키며 파괴력을 끌어올린 신기(神技).

순식간에 어지간한 망루의 높이에 비견될 정도로 거대한 창이 완성되었다.

이미 그 하나만으로도 성벽마저 무너뜨릴 수 있을 위협적인 공격이었지만, 그런 주제에 그런 창이 한 자루 뿐인 것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티엘과, 갑작스레 나타난 방해꾼을 지상에서 지워버리겠다는 것처럼, 수백 자루의 창은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동일한 순간 지상을 향해 떨어져내렸다.

"이번 만큼은 로셰, 그 놈과 황제의 밀회에 감사해야겠군. 희생자 없이 탈주기사 한 명을 찾을 수 있었으니."

그 순간, 야룬다의 시야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빗줄기처럼 쏟아지는 수백 개의 창 사이로 무어라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색의 선이 무수하게 겹쳐졌다.

공간절단.

공간이 찢겨지고, 다시 아물기까지의 찰나에 스쳐가는 특유의 상흔이다.

그리고 그 직후, 모든 것이 베였다.

하나 하나가 폭풍우를 담은 듯 소용돌이 치던 창들도, 창의 장막 바로 뒤에서 새로이 창을 만들기 위해 엉겨붙던 또다른 물방울들도, 그리고 그 무수한 것들이 내는 소리와, 그 소리가 울려야 할 공간도, 모조리 베였다.

시간이 멈춰버린 듯, 무참하게 찢겨진 공간 사이에서 무수하게 펼쳐진 심연이 흘러나와 형체 있는 것, 벨 수 없는 것을 모조리 참살한다.

공간계의 속성을 타고난 대정령들이나 손에 넣을 수 있는 힘이 공간단열이지만, 그것을 한정적으로나마 자유자재로 다루는 인간이 있다는 것은 야룬다 또한 알고 있었다.

아니, 어쩌면 공간계 마력을 눈치챈 순간부터 이런 결말을 예감하고 있었으리라.

야룬다는 공간을 찢으며 그 틈새에서 날아오르는 검은 폭풍의 이름을 읇조렸다.

"메이트리아크 카르날 오블리비언······. 검은 가지의 수장······."

그에 대답하듯, 한없이 연약해보이는 길고 가느다란 칼날이 맹수의 발톱처럼 허공을 찢었다.

예리한 칼날이 그려내는 궤적을 따라, 보이지 않는 거대한 또 한 마리의 맹수의 발톱이 다시 한 번 도시를 찢었다.

본능적으로 검의 궤적을 피했던 야룬다는 적의 머리 위에 직접 얼음의 비를 뿌렸다.

그러나 태도(太刀)의 검사는 거치적거릴 것이 분명한 그 거대한 검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수를 헤아릴 수조차 없을 얼음 바늘을 모조리 쳐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칼날의 그림자에서 또다른 그림자들이 튀어나와 야룬다가 놓쳐버린 인질을 향해 날아들었다.

"이, 이 멍청한 가출소녀가! 뭐하고 있어! 얼마나 걱정했는데, 여기서 잠이나 자고 있고!"

"진정할거 아니면 닥쳐요, 리아! 빨리 치료부터!"

한 순간에 도대체 몇 군데에서 마력이 응집되는 것일까.

막 그림자를 향해 안개의 칼날을 날리려던 야룬다의 시야 앞으로 몇 개나 되는 바위벽과 폭염이 거칠게 치솟으며, 동시에 그녀의 그림자로부터 솟구친 마력줄기가 발목을 잡아채려 들었다.

새로 나타난 자들은, 넷인가.

환각령의 영향인지, 마력의 응집은 느껴져도 기척은 알아채기 어렵다.

야룬다는 노호하며 다시 파도를 일으켰다.

수룡처럼 일어선 고압의 수류가 바위벽과 불꽃을 갈갈이 찢어버리고, 이어 태도의 검사까지 집어삼킬듯 몸을 뒤틀었다.

"이드칼!"

마치 기다렸다는듯, 그 순간 또다시 하나의 기척이 떠오르며 야룬다의 사각으로부터 검은 벼락이 솟구쳤다.

"꺄아아아악!"

뇌격계의 마력은 빙결이 아닌, 유수계 마력을 다룰 때 치명적이다.

물과의 친화력이 높은 이상, 한 번 스며든 뇌격계의 주문은 쉽게 떨쳐낼 수도 없이 지속적으로 고통을 가한다.

몸 안을 헤집는 이질적인 마력에 야룬다의 공세가 멈칫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붉은 머리를 지닌 남자가 환영을 벗고 튀어나오며 야룬다에게 힘껏 창을 내질렀다.

그 창날 끝에서 타오르는 것 역시, 또다른 빛의 벼락이었다.

같은 수에 두 번은 당하지 않으리라.

야룬다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물의 벽을 쳐 벼락을 휘감은 창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그 직후, 이번에는 그녀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든 거대한 참격이 물의 벽마저 가르며 쇄도해왔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꺾어 참격 자체는 피했지만, 동시에 잿빛의 아름다운 머리칼이 절반 가량이나 공간단열에 삼켜지며 볼품없이 끊어졌다.

'연계가 능숙해. 파고들기가 힘들어······!'

겨우 세 명을 상대로 하면서도, 얼마 안되는 사이 몇 군데나 상처를 입고 말았다.

야룬다는 잿가루를 휘감은 채 이를 드러내며 다섯 명의 새로운 적을 노려보았다.

난입자는 모두 합해 다섯 명.

전원이 밤하늘 같은 검은 옷으로 몸을 감싼 채, 은으로 된 가시나무와 까마귀의 각인을 품은 자들이다.

"마른 가시나무의 기사······. 피앙투스 검은 가지 기사단······."

최악이다.

제국에 들어와있던 자들 뿐만 아니라, 또다른 지원까지 합류하고 만 것인가.

'미안해요, 르비아. 결국 저는······.'

야룬다의 눈에서, 그녀가 만들어내지 않은 물방울이 안타까이 흘러내렸다.

떨어진 물방울은, 지면에조차 닿지 못한 채 바람결 속에서 스러지고 말았다.


작가의말

오로지 살아남는데만 적용되는 주인공 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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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 16장-시원의 새벽 (3) 19.11.23 66 3 30쪽
155 16장-시원의 새벽 (2) 19.11.22 64 3 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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