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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일반소설

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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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2,473,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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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02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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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쪽

16장-시원의 새벽 (12)

DUMMY

마법사가 직접 움직인다고 해도, 조그만 조각배 하나에 의지해 레가야로 향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바다를 가르고, 강을 거슬러오른다.

어느 대인가의 겁 많은 대공이 설치해뒀을 함정 주문이, 배를 이끄는 마력에 반응해 뛰쳐오르는 일도 있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은 약해빠진 나무 배가 무사히 카제린 대하 아래에 도착한 것은, 그야말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러나 나셀은 배가 뭍에 닿자마자 육지로 뛰어올랐다.

"조심하는게 좋을거야! 한바탕 싸우는 것 같은데."

막 배를 돌리던 사공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양 편의 절벽을 두리번거렸다.

"성에서도, 시가지 쪽에서도, 마력이 위험할 정도로 요동치고 있어. 데려다 달래서 데려다 주긴 했지만, 솔직히 올라가는건 자살행위야."

"······충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나셀은 사공이 다시 삿대를 움직이기도 전에 몸을 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제린 대교를 사이에 둔 두 개의 마력폭풍은, 그를 이루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마법사도 아닌 나셀을 찾아낼 여유를 가질 수 없을 만큼 다급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둘러, 가까스로 위로 올라갈 수 있을만한 위치를 찾아낸 나셀은 그 빈틈을 타고 재빨리 성으로 향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성에 들어서기까지는 단순히 물리적인 길을 찾기 어려울 뿐이었지만, 안으로 들어선 후에는 아무런 흔적도 없이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레가야 성은 단순히 사람을 찾아 돌아다니에는 지나칠 정도로 넓었다.

그는 사공이나 검은 가지의 기사들 처럼 마력의 흐름을 느끼는 법은 알지 못한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빗나간 주문이 무언가를 부수는 난폭한 소리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

결국 나셀은 어찌 할 방법도 없이 막연히 성 안을 달리기 시작했다.

매 순간 내딛는 발걸음은 순전히 운에 맡긴다.

이미 무너질 것만 같은 다리는 바닥을 딛는 감각조차 잃어가고 있었지만, 나셀은 가슴을 쥐어짜내면서도 걸음을 늦추지 못했다.

"으······우우으······, 우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순간, 얼마나 헤맸는지도 생각나지 않는 가운데 가까운 곳에서 비통에 가득 찬 절규가 들렸다.

"티엘!?"

머리보다 몸이 번저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아득한 메아리처럼 흐려지는, 하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저릿할 정도로 무거운 슬픔이 진하게 배어나오는 통곡.

마치 하나의 세상이 목 놓아 우는 듯한 비통한 절규.

나셀은 급히 방향을 틀었다.

계단을 단숨에 절반가량이나 뛰어넘고, 모퉁이마다 몸을 들이받다시피 하며 거칠게 달렸다.

촉박한 마음은 시간을 뒤튼다.

분명히 한 걸음을 내딛는 시간은 찰나에 가까울 정도로 짧을텐데도, 그 짧은 시간이 마치 영원처럼 길게 늘어진다.

"티엘!"

몇 번째인지 모를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마침내 나셀은 자신이 그토록 찾던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커다란 문 앞에,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몸을 내던진 한 명의 소녀가 있었다.

떨어져 있던 시간은 고작해야 며칠 뿐.

아무리 어둡더라도, 눈동자에 새겨져버린 검은 머리의 소녀를 잘못 볼 리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향해 막 달려가려던 심장은 재회의 기쁨으로 뛸 수 없었다.

오히려 차디찬 절망에 젖어 싸늘하게 얼어붙으며 나셀의 가슴을 뻐근하게 만들었다.

이상할정도로 길고 가느다란, 그리고 새카만 칼날에 찔린 채 움직임을 멈춰버린 가련한 인형.

움직임은 없다.

살아있다면 결코 멈추지 않을 가슴의 오르내림조차도 완전히 멈춰있었다.

"그래서 말했지 않느냐. 무르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적이 살아있는 한, 마음을 놓아선 안됀다. 그걸 잊는 순간······, 이런 일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지."

그리고 그런 티엘의 등 뒤에는 처형인처럼 냉혹한 얼굴로 서 있는 또다른 한 사람이 쓰러진 소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엇을, 속삭이고 있는 것일까.

마치 이불을 덮어주며, 좋은 꿈 꾸라는 듯 무언가를 속삭인 남자는 그제서야 눈을 들어 나셀을 바라보았다.

"늦었군요. 애석하게도."

남자는 쓰러진 소녀의 가슴에서 뽑아낸 검을 조용히 들어올렸다.

그의 지휘를 따르듯, 우연히도 달을 가리던 구름이 걷히며 한 줌의 빛이 새어들어왔다.

창문으로 스며든 달빛이 인형의 얼굴을 조용히 비추었다.

그러나 언제나 맑게 빛나던 보석같은 눈동자는 여전히 탁하게 풀린 채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니다.

저것은 티엘이 아니다.

단지 인형일 뿐이다.

나셀은 스스로에게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현실을 부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어느새 말아쥔 주먹이 떨렸다.

싸움을 모르는 그 손이 처음으로 적의를 품었다.

피가, 머릿속이 뜨거워질 정도로 끓어오르며 순간적으로 시야를 가로막았다.

나셀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빠르게 상대에게 달려갔다.

그런 가운데 르비아는 검을 늘어뜨리며, 오히려 그런 나셀을 환영한다는 듯 두 팔을 벌렸다.

덕분에 나셀은, 아무런 경계조차 하지 않는 르비아의 뺨을 있는 힘껏 후려갈길 수 있었다.

퍼어억!

뜻밖에도, 당연히 빗겨나가리라 생각했던 주먹은 그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게 르비아의 뺨에 꽂혔다.

처음부터 피할 생각 따위는 없었다는 듯, 르비아는 나셀의 주먹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싸움에 익숙치 않더라도, 체중을 실은 주먹은 결코 가벼운 위력이 아니다.

르비아는 단숨에 균형을 잃고 쓰러지며 조금 전 자신이 걸어나온 문턱에 강하게 부딪혔다.

휘두르지도 않은 검이 칼자루부터 바닥으로 떨어져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뜻밖의 기적은, 그것으로 그치고 말았다.

"그런 약해빠진 주먹으로 여기까지 온 겁니까. 아니, 당신은 싸우는 자가 아니었지요. 당신의 무기는 그 주먹이 아니라 팔현금의 현이었을텐데."

르비아는 터진 입안에서 흐른 피를 뱉어내면서도 조용히 웃었다.

죽고 죽이는 것이 당연한 이 땅에서, 나셀의 일격은 웃어버릴 정도로 가벼운 것이다.

하다못해 단검으로 찌르던가, 검을 빼앗아 목을 치려는 노력조차도 하지 않는 것인가.

그러나 나셀은 그에게는 더이상 시선도 주지 않은 채 황급히 티엘을 안아 일으켰다.

가슴 한복판의 관통상이라면 설령 심장을 피했다고 하더라도 치명상이다.

조금이라도 치료가 늦으면 돌이킬 수 없다.

아무리 분노로 눈이 흐려졌다고 해도, 나셀은 당장 무엇이 급한지 잊을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흔들리는 마음으로 주가를 부르는 것이 그리 쉬울 리는 없었다.

아무리 간절한 소망이 있더라도 그것을 가지런히 모으지 않으면 주가는 제 힘을 발휘할 수 없다.

자꾸만 흐트러지려는 집중력을 애써 끌어모으며 필사적으로 기원을 읇조렸지만, 오히려 주가가 효과가 없다는 것에 솟아난 초조감과 조바심이 또다시 빗장이 되어, 더더욱 주가의 힘을 가로막고 말았다.

'어째서······. 어째서 낫질 않는거야······. 이렇게나 간절히 바라는데, 어째서!'

상처는 낫지 않는다.

상처에서 흐르는 피도 멈추지 않고, 상처를 손으로 틀어막아도 오히려 터진 둑처럼 쉴새없이 피가 흘러나온다.

"소용 없습니다. 대천사 사라엘이 직접 강림하더라도, 그 상처를 낫게 할 수는 없을테니까요."

웃음기를 거둔 르비아가 나직하게 선언했다.

그의 말처럼 이미 티엘에게서 생명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호흡은 멎은지 오래고, 맥박도 느껴지지 않는다.

출혈 역시, 심장이 뿜어낸다기보다는 눈물처럼 조용히 흐르는 것에 가까웠다.

애초에 체온조차도 식어가고 있었다.

마치 잠든 것처럼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지만, 달빛에 젖은 그 얼굴은 다시는 눈뜨지 않을 것처럼 창백하기만 했다.

죽음. 누구나 언젠가는 겪는 마지막 종착지.

르비아의 선언처럼, 이미 죽어버린 사람이라면 생명과 치유의 대천사가 강림하더라도 되살릴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사람이 그 어디 있을까.

나셀은 서투르게나마 기억을 떠올려 티엘의 식어버린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그리고 살짝 부풀어오르는 가슴을 힘껏 누른다.

숨을 불어넣고, 가슴을 압박한 뒤, 다시 숨을 불어넣었다.

죽음을 부정하듯, 자신의 생명을 나누어 주려는 듯, 필사적으로 몇 번이나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하지만 숨을 불어넣을 때마다 점점 온기는 식어가고, 비릿한 혈향만이 가슴을 찢어놓았다.

아무리 반복해도 더이상 의미는 없었다.

그 심장은, 되살아나지 않았다.

"소용 없다고, 말했지 않습니까."

어금니가 부서지도록 이를 악문 나셀이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어째서입니까."

머리가 뜨거웠다.

"어째서, 티엘이 죽어야만 했습니까."

목 안쪽도, 가슴도, 아니, 몸 전체가 타버릴 것처럼 뜨거웠다.

납득할 수 없는, 납득해서는 안되는 거대한 분노가 불길처럼 그의 전신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티엘은 이 땅으로 돌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단지 지금 있는 곳을 지키고 싶었을 뿐인데, 왜 기어이 이런 결말을 맺은겁니까!"

"내게 없는 것을, 그 아이가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울분을 터뜨리는 뜨거운 목소리를 차갑게 끊어버리는 영혼없는 말.

마치 목석처럼 생기없는 눈이 나셀을 마주 바라보았다.

"당신은 검을 들고 싸우는 대신 승자의 영광과 패자의 슬픔을 기억하고 노래하기로 맹세한 음유시인이었지요. 하지만 지금도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눈앞에서 연인을 잃은 그 아픔으로, 그녀의 피를 받아낸 나를 노려보며, 과연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나셀의 눈에 원망과 살의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러자 르비아는 뜻밖에도 바닥에 뒹굴던 자신의 검을 찾아 쥐더니, 갑자기 그것을 돌려쥐고 나셀에게 던졌다.

티엘을 찔렀던 흑인검(黑刃劍)이 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며 나셀의 손 바로 옆까지 다가왔다.

"만일 노래가 아닌 복수를 택하시겠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이미 바닥까지 소모돼버린 용서할 수 없는 적이 눈앞에 있지 않습니까. 검을 다뤄본 적 없는 당신이라도 쉽게 목숨을 거둘 수 있을테지요. 목을 베어도, 심장을 찔러도, 더이상 저항조차 할 수 없는 몸이니까요."

마치 유혹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독이 든 과실을 권하듯 달콤하게 스며드는 제안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었다.

그러나 나셀의 손길은 그 거부감을 뿌리치며 천천히 칼자루로 향했다.

무게조차 거의 느껴지지 않는 얇고 긴 칼날이 르비아를 향해 세워졌다.

생각처럼 무겁지는 않았다.

검의 무게에 익숙치 않은 손에서도, 그 새카만 칼날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빛조차 삼켜버리는, 마치 그림자를 잘라내 만든 듯한 칼날에는 얼굴마저도 비치지 않았다.

"복수······."

나셀은 검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르비아에게 칼날이 닿을 수 있을 거리까지 고집스레 침묵을 지키며 다가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것은 원한을 풀기 위한 검이라기보다는 그저 의무적으로 목숨을 거두어가려는 처형자의 모습에 가까웠다.

분노에 찬 고함도, 증오에 찬 따가운 시선도, 어느새 얼어붙은 침묵속으로 사라져 있었다.

적막의 칼날이 이내 하늘 위로 치솟아올랐지만, 여전하 나셀의 얼굴은 잿빛 그대로였다.

"당신이 말하는 복수란, 대체 무엇이죠?"

뜬금없는 질문에 르비아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하늘 높이 세워졌던 검이 빠르게 돌아섰다.

땅을 향해 똑바로 선 칼날은 이윽고 나셀의 손에서 휙 떨어져내렸다.

"무슨 짓을······!?"

그러나 그 검신이 향한 곳은 르비아의 심장이 아니었다.

맥없이 허공을 가른 얇은 칼날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단단한 돌로 이루어진 바닥을 꿰뚫었다.

칼끝이 지면과 부딪히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토록 가벼웠던 검은, 검신의 끄트머리까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파고들었다.

쨍강, 하며 비명을 울린 것은 양 날개처럼 펼쳐진 코등이였다.

그리고 그 직후, 더이상 자세를 잡아줄 손도 없이 지면에 떨어진 검은 옆으로 기울어져, 바닥에 완전히 몸을 눕히고 말았다.

바닥 깊숙히 파고들었을 검신은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움직임.

마침내 움직임을 멈춘 검은 긁힌 자국조차 남아있지 않은 바닥 위에 웃기지도 않는 장난처럼 오도카니 누워있었다.

"어떻게······?"

"검신. 그리고 당신의 소맷자락. 사람을 찌른 칼날과 그 검을 쥐고있던 팔의 소매가 그렇게 깨끗할리 없죠."

피로 흠뻑 젖었어야 할 칼날은 지나칠 정도로 깨끗했다.

르비아의 옷에 묻은 피 역시 오른팔의 상처에서 흐른 것이 대부분이었고, 오히려 티엘을 찔렀을 왼쪽 소매에는 핏방울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금 전 르비아가 검을 놓쳤을 때 들린 금속음은 단 한 번 뿐.

아무리 칼자루부터 바닥에 떨어졌다고 해도 검신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리는 없다.

단순한 실수.

하지만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방패 위에 새겨진 단 하나의 흠집은, 아무리 얕고 가벼운 것이라도 눈길을 끄는 법이다.

"저 검은, 환영으로 이루어진 거군요."

르비아는 나셀의 말에 짧게 탄식하며 허탈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인간의 오감을 속일 정도로 강력하면서도, 영구적으로 각인된 환영.

칼날이 살을 파고드는 감각도, 상처에서 터져나온 선혈도, 모두가 정교하게 짜여진 그림자일 뿐이다.

만일 나셀이 검을 휘둘렀다면 바닥이나 돌에 부딪히는 감각조차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단지 부딪혔다는 감각을 느끼고, 반사적으로 검을 물리며, 그저 칼날이 벽에 부딪혔기 때문이라 속아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검 자체가 물리적인 형체를 갖춘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검을 휘두르며 '속아줄' 주인이 없는 상태에서는, 그 무엇과 부딪힌다고 해도 튕겨나올 일이 없었다.

"눈치 채버린겁니까. 후후후후······. 마지막에, 어설펐군요."

"······거짓말이었습니까? 그 모든 것이?"

르비아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다.

진실을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보았을 뿐.

환영의 검으로 찔렀으니 상처따위는 없고, 그러니 대천사가 직접 강림하더라도 치유할 수 있을리 없다.

없는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니.

복수를 마칠 수 있다는 것도 거짓은 아니다.

이미 중상을 입은 그가 티엘과 마찬가지로 의식을 잃어버린다면 분명 오래지 않아 출혈로 죽음에 이를테니.

그러나 거짓 아닌 거짓이 깨어진 이상, 그것은 이제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르비아는 바닥을 뒹구는 검을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티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됍니다. 당장은 가사상태에 빠진 것 뿐, 며칠 뒤면 자연스레 깨어나겠지요. 그 아이에게는, 조금쯤 휴식이 필요할테니까요."

죽음을 삼키는 칼날.

불어넣은 속성은 환각과 죽음.

그 칼날에 상처입은 자는 일시적으로 가사상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그 뿐이다.

오래 전부터 티엘을 위해 만들어온 그 검은 죽음의 속성을 품었으면서도, 역설적으로 적을 완전히 죽음으로 이끌만한 힘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던겁니까."

그러자 르비아는 문득 나셀에게 무언가를 던졌다.

잡아채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손을 펼친 나셀은 그 위에 놓인 물건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언젠가 팔람에서 르비아가 그에게 맡겼던 것과 동일한 형태의 열쇠.

본래 티엘과 르비아, 두 사람이 나누어 가졌던 열쇠였다.

"처음부터 제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핏기 하나 없는 창백한 얼굴에서, 뜻밖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어느새 그 얼굴은, 어린 줄로만 알았던 동생이 보여준 뜻밖의 성장에 기뻐하는 오라비의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벽에 기대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 초라한 모습인데도 행복하게까지 보이는 이유는 바로 저 미소 때문이리라.

"저는 약해빠진 사람입니다. 상처로 남아버린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과거로 돌아가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의 긍지를 짓밟더라도 상관 없다고, 그 과정에 희생되는 이들이 있을지언정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면 모두 괜찮을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그렇게 달리기만 했습니다."

이미 각인이 사라진 오른팔을 들어보이며, 마법사는 묵혀온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할 수만 있다면 책의 첫머리로 돌아가듯, 모든 것을 되짚고만 싶습니다. 그런데 티엘은 달랐습니다. 그건 좋았던 과거에만 매달리는 행동이라며. 누군가를 희생시켰다는 사실만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그렇게 일침을 가하더군요. 그렇게 말할 수 있을만큼 성장했다는 것이 너무나 부러우면서도 기뻤습니다."

티엘이라고 해도 과거를 잊은 것은 아니다.

아첼을 잃은 순간을 지금도 잊을 수 없기에 누군가를 잃는 것을 그렇게나 두려워하며, 르비아에 대한 애증을 완전히 끊어낼 수 없었기에 마지막 선을 넘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과거를 가슴에 품고도, 그녀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기쁨도, 아픔도, 모두 한 사람의 삶을 이루는 문양이라고 받아들이며.

과거에만 얽매여 아무 것도 보지 못했던 못난 오라비와는 달리, 티엘은 가시밭길을 걸어가면서도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기뻤다.

자신과 다르기 때문에. 르비아 자신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 아이는 스스로 받아들였지만, 어리석은 저는 끝까지 깨닫지 못했던 것······. 그건 삶을 살아가는 법이었겠지요."

"살아가는 법······."

"그렇습니다. 저는 신을 불러, 안타까운 과거를 바꿔보려 했습니다. 슬픈 일은 지우고, 혹은 오지 않게 만들고, 즐거운 일은 남기거나 혹은 끌어당기려 했습니다. 자애로운 창세신이라면 이 아픔, 이 고뇌를 알아줄거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아윌로스. 백마법의 근간이 되는 신앙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이넬라가 뜻한 바에 따라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이야기를 묻는 것은 아닐것이다.

때문에 나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르비아는 씁쓸하게 웃으며,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숨겨진 이야기를 살며시 열어보였다.

그 질문의 답은 단순했다.

아이넬라는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녀가 창조한 원초의 형태를 벗어나 끝없이 변화해가는 세계를 보며, 창조의 순간 품었던 애정은 빠르게 식어간다.

하지만 이러한 세상을 멸해야 할 엘드리안은 오히려 끝없이 변화해가는 세계를 사랑한다.

이에 창세신 아이넬라는 세계의 종말을 끌어당기려 하고, 두 신의 갈등은 오늘날 아이넬리아누스, 창세신화의 한 자락으로 왜곡돼어 전해진다.

얄궂은 이야기다.

창세신은 멸망 이후의 세계에 자신이 사랑하는 모습을 새로 새겨넣기 위해 세계의 죽음을 기다린다.

소멸신은 세계가 스스로의 혼돈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늦추기 위해 스스로를 잠재운다.

질서의 신은 질서를 사랑하기에 혼돈을 만들어내고, 혼돈의 신은 혼돈을 보살피기 위해 현세의 질서를 유지한다.

어쩌면 그 모순된 양면성이야말로 그들이 신인 이유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들이 만들어낸 이 세계가 그토록 모순으로 가득차있지 않을테니까.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나셀은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눈치채고 신음을 삼켰다.

이 세상을 만들어낸 신조차도 이미 변화해버린 세상을 되돌리는 대신, 모든 것이 사라진 후에 새로이 시작할 수밖에 없다는 것.

"예. 시간을 되돌린다는 것은 신들조차도 불가능한 일이라더군요."

이 얼마나, 추악한 이야기였던가.

아이넬라가 이 세상에 신언을 허락한 것 역시, 단순히 세계의 수명을 깎아내기 위한 우스꽝스러운 광대놀음에 불과한 것이다.

백마법의 근간이 되는 신앙이란 아이넬라를 따라 하나의 진리를 찾아가는 길.

그러나 백마법사로서 더 높은 경지에 오를수록, 이러한 추악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때문에 고위 백마법사들이란, 이런 진실을 알면서도 질서를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는 자들이다.

그 사실을 조금만 더 일찍 알았더라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하하하하하하! 대이적마법이라고? 그 '기적'이 껍데기밖에 없는 거짓말이라는걸 알았더라면-! 쿨럭!"

즐거움 따위,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웃음 끝에 격렬한 기침이 터져나오며, 동시에 끈적한 핏덩이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다.

몸을 돌려 쏟아진 피를 그림자 속으로 감추었지만, 바닥을 적시는 핏덩이는 여전히 선명하게 보일 만큼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병이나 부상으로 인한 것은 아니다.

르비아가 토해낸 피는, 마치 생령의 그것처럼 검은 재로 부스러져 사라져가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짙은 마력이 스며있다고 해도, 인간의 피가 보일 반응은 아니었다.

화살에 꿰뚫렸던 오른팔의 상처 역시도 언제부터인가 피가 흐르지 않았다.

조금 전 르비아가 토했던 피처럼, 상처 안쪽에서부터 검게 메말라 부서져가고 있었다.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상처에 나셀의 눈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잘못된 길을 선택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가 얼마나 아이넬라를 증오하게 되었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점점 바스라져가는 몸을 끌어안은 채, 르비아는 쓰디쓴 한숨을 몇 번이고 내쉬었다.

참으로 지독한 일이다.

처음에는 아이넬라에게 닿기 위해 무리한 술식으로 수명의 대부분을 깎아내면서까지 처절하게 소환을 시도했다.

그렇게 가까스로 여신에게 닿은 날, 그녀는 그를 이해한다는 듯 일곱 번째 신언을 허락해주었다.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한 가지 제약을 걸었다.

그 신념이 꺾이는 순간, 그 혼조차 남지 않는 소멸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그가 진실을 알게 된 것은 너무 늦은 뒤의 이야기였다.

자격만 주어졌을 뿐, 아직 제대로 다룰 수 없었던 신언을 완성하기 위해 미친듯이 신앙에 매달렸고, 수많은 희생을 쌓아올리며 술식을 조정하고, 보조해줄 영장을 만들며, 때를 기다려왔다.

그러나 마침내 그가 신언을 다룰 수 있게 되었을 때, 아이넬라가 그에게 신언을 건네준 이유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몇 번이고 넘어버린 후였다.

신에게 속아 자신을 모조리 부숴버린 남자는 조금 떨어진 곳에 쓰러져있는 티엘을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빛바랜 웃음을 지었다.

그의 생명이 빠르게 메말라가는것이, 나셀의 눈에도 선명하게 보이고 있었다.

"큭, 하아······. 결국 티엘이 말한 대로입니다. 언젠가 모든 것을 돌이킬 수 있으리라 변명하며 누군가를 끊어낸 순간, 이미 저는 돌이킬 수 없는 선을 넘은 거겠지요. 남은것은 상투성이가 된 티엘과, 얼마 남지도 않은 이 목숨 뿐. 그렇다면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티엘의 상처를 줄여줄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해서 겨우 도달한 답······. 그것이, 이 촌극입니다."

바스러져가는 손이 멀리 떨어진 티엘을 어루만졌다.

이제는 닿는 것조차 스스로에게 허락할 수 없는, 사랑하는 여동생을.

"이제와서 설령 제가 죽는다고 해도 그 아이에게는 또다른 상처가 되어 남겠지요. 그렇다면 하다못해 증오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그 상처를 최대한 억누르는게 나을겁니다. 용서할 수 없는 원수로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증오하고 저주할 수 있도록. 그래서 만든 것이 저 검이고, 그래서 준비한 것이 이 쓸데없이 복잡한 거짓말입니다. 하, 하하하······. 실망하셨습니까?"

"결국 자기위안을 위해······, 마지막까지 그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마지막까지 저 애를 이용하는 겁니까? 등 뒤에서 칼에 찔린 티엘이, 앞으로도 이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웃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나셀은 르비아에게 달려가, 그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강하게 밀쳤다.

순간적인 충격에 검은 잿가루가 팍 하고 튀어올랐지만, 두 사람 모두 눈을 돌리는 일은 없었다.

"티엘이 겪은 고통은 다 뭡니까. 저 애가 흘려온 눈물은 대체 다 뭡니까! 아무리 악행을 반복했다고 해도, 쉽게 끊을 수 없는 애증으로 새롭게 남을 상처는 대체 뭐가 됍니까!"

무방비한 순간 뒤에서 칼을 맞은 경험은 앞으로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평생토록, 누군가가 등 뒤에 설때마다 똑같은 공포를 맛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짓을 하고도 태연히 '티엘을 위한 일이었다'고 말하는 이 남자를 용서할 수 있을리 없다.

"······속죄따위, 가능할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풀썩, 하며 오른팔의 소매가 힘없이 떨어졌다.

무고하게 죽어간 사람들의 원혼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부스러진 팔에서 흩날린 잿가루가 연기처럼 피어올랐지만, 그마저도 마치 무수한 사람들의 손이 달려들어 뜯어내는 것처럼 갈갈이 찢기며 순식간에 공기중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르비아는 오히려 그 모습을 보면서 당연한 결과라는 듯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이건 그저 억지를 부리는 것 뿐입니다. 이제껏 상처만 주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결국 이런 식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 뿐이니까요."

왼손의 손가락 역시 끄트머리에서부터 검게 문드러지며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몸의 붕괴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티엘은 저와는 다릅니다. 저처럼 헛된 꿈을 쫓지 않을겁니다. 별을 보며 그 별빛에만 매달린 어리석은 저와 달리, 이내 밝아올 새벽을 느끼고 나아갈 준비를 할 줄 압니다. 날이 밝은 뒤 비가 올지도 모릅니다. 찬바람에 떨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래도 저 아이는, 그 모든것을 받아들이며 나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은 자는 사라져주는게 당연한 일입니다. 하하, 사실 어떻게 하더라도, 결국 저는 곧 사라질테지만."

르비아는 자신의 몸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바스라지는 팔로 나셀을 바짝 끌어당겼다.

짙푸르던 그 눈빛은 이미 꺼지듯,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뒤였다.

하지만 이미 촛점을 잃어버린 희미한 눈은, 그 와중에도 마지막 열을 불태우고 있었다.

"티엘을 위해 그렇게까지 화를 내주는 당신이 있기에, 당신을 믿고서, 당신에게 남기는 족쇄입니다. 앞으로도 그 아이를 끝까지 받쳐주십시오. 설령 나로 인해 눈물짓더라도, 그것이 마지막 눈물이 될 수 있도록. 이건······, 본래는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으려 했던 진실을 억지로 파고들어버린, 쓸데없이 눈치 빨랐던 당신에게 내리는 벌입니다."

바스라져가는 왼손이 가까스로 몇 번이나 접힌 종이조각을 나셀의 옷깃에 끼웠다.

그 직후, 그의 왼손 역시도 마른 땅거죽처럼 쩍쩍 갈라지며 풀썩 주저앉았다.

더이상 벽에 기대 서있을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던 르비아는 자신의 멱살을 잡고있던 나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사람을 부축한다기보다는, 그저 모래 자루를 짊어진 듯한 촉감.

반사적으로 몸을 빼려 했던 나셀은, 오히려 그 감촉에 놀라며 르비아를 받쳐줄 수밖에 없었다.

"방금 드린 것은······, 당신 들이 걱정했던······, 대륙 각지의 결계······. 마령의 발생을······, 억제해줄 겁니다. 모두······, 백여 곳······. 활성화는 시켰지만······, 길어야 반 세기 정도가······, 한계겠죠······."

"하나의 진이 아니었던겁니까······?"

"하하하······. 그런 것,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웃음기를 머금었지만, 그것을 웃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귓가에 바짝 속삭이지 않는다면 알아듣기도 어려울 정도로 약해진 목소리였다.

"레가야와는 달리, 개인에게 귀속돼진 않아······. 하지만, 그래서야 의미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주는 숙제입니다. 그 짧은 평화, 늘려도, 줄여도,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더 남길 말은, 없습니까?"

이미 상체의 절반 가량마저 소멸한 상태였다.

목소리를 내어 말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르비아는 그 상태에서도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마지막 시선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잠들어있는 티엘에게로 고정되어 있었다.

아직 무언가 보이는걸까.

아니면, 그저 마지막 미련이 우연히 그의 시선을 그 곳으로 인도한 것일까.

"티엘에게도,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을건가요."

"진실······전해도, 혹은······, 무덤까지······, 침묵해도, 좋습니다. 당신은 내가 고른, 나의 전인······. 당신의 선택이, 곧······, 제 선택······입니다."

숯더미를 걷어찬 것처럼 잿가루가 풀썩 피어올랐다.

얼굴까지 절반이나 부서져버린 르비아는 마지막 하나 남은 눈을 적시면서도, 마지막 순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아, 그래도······. 한 번만 더, 그 정원을······."

이미 입술로만 뻐끔거리는 서글픈 한 마디였건만, 그마저도 채 끝마치기 전에 끊어져버렸다.

결국 사과할거라면 처음부터 상처만 남길 일은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러나 결국 그 또한, 두 사람의 선택의 결과였으리라.

기적같은 힘을 쥐고서 마지막 선을 눈앞에 두게 된다면, 과연 나셀 자신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은 일을 섣불리 단정지을 수는 없었기에, 나셀은 고개를 깊이 숙여, 그저 떠나간 사람에게 조의를 표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리고, 한 줄기의 습한 바람이 잿가루를 거두어갈 때까지, 더이상 제자리에서 고개를 들지 않았다.



* * *



"나셀? 나셀?"

어느새 이야기를 멈춘 채 생각에 푹 잠겨버렸던 나셀은 티엘의 목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그가 너에게도, 뭔가 이야기를 남긴거야?"

티엘은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셀은 한 발짝 늦게나마 고개를 가로로 흔들었다.

결계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접어둘 생각이었다.

세계 곳곳에 남겨진 결계는 나셀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안그래도 당장 짐이 무거울 티엘에게 떠넘길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도 티엘은 더이상 나셀을 의심하지 않았다.

복잡한 얼굴을 한 채 먼 하늘을 바라보며 애매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던 그녀는 문득 곁에 밀쳐놓았던, 아직 반 넘게 남아있는 술병과 잔을 돌아보았다.

잔을 비운 것은 티엘 뿐이었기에, 아직 나셀의 잔은 그대로 채워져있었다.

조금 고민하던 티엘의 손이 나셀의 잔으로 향했다.

하지만 나셀은 금방 그것을 눈치채고 한 발 먼저 잔을 빼앗았다.

그리고 단념하라고 말하듯 깨끗이 잔을 비웠다.

항의하듯 티엘이 병을 바라보려는 찰나, 몸을 살짝 틀어 술병을 가리는 것으로 그 시도조차도 완전히 틀어막아버린다.

그러고도 티엘이 포기하지 않는 기색을 보이자, 아예 병을 뒤집어 안에 든 술을 바닥에 쏟아버렸다.

"아-."

"그만. 술기운에 도망가도 소용 없다는거 알잖아."

"······심술궂어."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아보이네."

"그렇게 보여?"

쓸쓸하게 웃던 얼굴이 먼 하늘을 향하다, 이내 나셀의 무릎 위로 기울어졌다.

"십 년······, 아니, 팔 년 정도일까? 미라야로 떠난 뒤의 그와는 결국 한 번도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질 못했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

어느새 티엘의 눈가는 물기로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그러나 결코 고여 흘러내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마워. ······이걸로 됐어. 많이도 울고, 많이도 힘들었지만, 결국 그도 이 정원에서 떠나지 못했다는걸 알았으니까. 이제는, 사랑하던 오라버니로 기억할 수 있을테니까······."

악의는, 생각보다 단순하다.

한 번 쏟아내고 나면 금방 바래고, 옅어져, 사라져버린다.

온갖 감정이 뒤섞여있던 마음을 시간이라는 강물에 몇 번이고 고르다보면, 결국 그 끝에는 가장 깊이 남겨두었던 감정만이 남는 법.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용서하지 못해도 좋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감정이야말로, 그 사람에게 대한 진심일테니까.

그러니, 언젠간 사라질 증오를 괜히 묶어놓는 것은 필요치 않으리라.

두 사람의 자리가 달랐더라면, 그 결과도 뒤집혔을지 모른다.

결국 티엘도, 르비아도, 행복했던 시절의 추억을 발판삼아 움직였을 뿐이니.

그러니, 결국 르비아도 이 정원을 떠나지 못한 어린아이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그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 * *


"늦었군."

아공간에 만들어진 정원에서는 시간의 흐름을 느끼기 어려웠다.

덕분에 생각보다 많은 시간을 보내버린 두 사람이 헐레벌떡 뛰쳐나왔을 때는 이미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숨가쁘게 달려 카제린 대교가 있는 곳까지 나아가니 이미 마차가 도착해 있었다.

레가야 남부의 항구도시 모르유로 향하는 마차였다.

그 주변에는 특유의 검은 제복으로 갈아입은 메이트리아크와 네 명의 기사들이 저마다 다양한 표정을 숨긴 채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성도(星圖)의 주문으로 시간을 확인하던 메이트리아크가 혀를 차며 별지도를 지웠다.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진 않았지만, 간단히 인사를 나눌 시간 정도는 남았구나."

모르유에서 피앙투스로 향하는 배 자체는 그리 적지 않다.

하지만 항로의 특성상, 직선상으로 오히려 더 먼 거리를 오가는 아르타야 바네티 항에 비해 더 먼 거리를 더 오랫동안 달려야만 한다.

하루 늦어지면, 공화국에 도착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 늦어져버린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막상 때가 다가오니 억울하고 야속하게만 느껴지는 일이다.

하지만 싫다고 어리광을 부려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티엘은 되도록 의연하게 몸을 바로 세웠다.

메이트리아크는 그런 티엘을 보며 허리에 찬 칼자루에 손을 가져갔다.

검이라기보다는 창에 가까울 정도로 길고 얇은 칼날이 칼집에서 빠져나와 티엘의 눈앞에 거꾸로 꽂혔다.

"서리안개의 이스티엘 라피다멘테. 귀경은 현 시간부로 피앙투스 검은 가지 기사단의 복무를 마친다. 피앙투스 검은 문 제 2석 메이트리아크 카르날 오블리비언의 이름 하에 이를 확인하며, 그대로부터 기사의 작위와 그 의무가 회수되었음을 알린다."

검은 가지의 기사, 그들 중 그 누구도 살아서는 들은 적 없다는 작위 해제의 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어떤 의미로는 국가에 귀속되어있는 검은 가지의 기사를 평범한 일반인으로 풀어준다는 의미를 품고있는만큼, 한 때 죄인으로서 검은 제복을 받아들인 자에게는 사실상 노예해방선언과도 같은 것.

선언을 마친 메이트리아크는 드물게도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티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동안 수고 많았다. 앞으로도······. 앞으로도 건강하게 잘 지내거라. 단장으로서 내리는, 마지막 명령이다."

"······불복합니다."

"음······?"

그러나 기껏 메이트리아크가 무게를 잡는 가운데, 당돌하고 맹랑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끊어버렸다.

메이트리아크는 황당하다는 듯한 얼굴로 티엘을 향해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그러자 티엘은 배시시 웃으며 메이트리아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전 이제 대공이니까요. 기사단장이 마지막으로 내리는 명령에는 불복할거에요. 마지막이라는 말 같은건, 싫어요."

곁에서 지켜보던 리아나 아드란의 얼굴에 유쾌한 웃음이 한가득 열렸다.

메이트리아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며 모자를 깊이 눌러 써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모자가 드리우는 그림자조차도, 못말리겠다며 미소짓는 입꼬리까지는 미처 가리지 못했다.

"못말릴 녀석이로구나. 제국 귀족의 신분으로 공화국의 기사단에 남겠다?"

"탈주기사로 간주하고 주기적으로 추적대를 보내셔도 좋은걸요?"

"······부족한 인원을 타국까지 보내는게 쉽진 않으니 탈주를 허락할 수도 없군. 정 그렇다면 장기 파견으로 명령을 바꿀 수밖에."

메이트리아크는 쓴웃음을 지으면서도 검을 거두었다.

"파견지는 레가야의 란. 일자는 네가 원하는 날 까지로. 이 명령에도 불복할 생각인가?"

"아뇨. 명령, 받들겠습니다!"

단순한 형식에 불과하더라도, 언젠가 돌아간다는 약속을 품고있다면 그것으로 좋을 것이다.

메이트리아크는 검을 칼집으로 되돌리며 차례를 기다리는 네 사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미안하지만 너희들도 시간을 길게 주긴 어렵다. 알고 있겠지?"

"그럼요. 짧게 끝낼게요."

넷이서 무언가 작당을 한 듯, 은근히 주고받는 눈짓이 꽤나 복잡했다.

그러다 결국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억누르는 데 성공한 듯한 리아가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등 뒤에 감추고 있었던 물건을 티엘에게 불쑥 내밀었다.

그것은 책상 위에 올려놓기 딱 적당한 크기의 조그마한 액자였다.

얇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꿈틀거리는 나뭇가지가 중앙의 초상화를 감싸는 형태의 액자틀이 눈길을 끌었다.

잎은 없고, 날카로운 가시가 돋친 메마르고 황량한 나무다.

하지만 갈라진 나뭇가지의 수는 스물 셋.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연스레 티엘의 시선이 액자의 중심으로 향했다.

각양각색, 다양한 자세를 취하는, 메이트리아크와 브론딜을 포함하여 스물 세 명을 이루는 검은 가지 기사단의 전원이 그 작은 양피지 위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물론 가장 가느다란 세필을 사용하더라도 그 모든 사람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것은 어려웠다.

게다가 이 그림을 그렸을 화가는 이 자리에 있는 네 명을 제외하면 직접 그들을 눈으로 본 적도 없지 않던가.

그러나 초상화는 기사단원 한 명 한 명의 특징을 너무나도 훌륭하게 담아내고 있었다.

덕분에 마치 한 명 한 명이 초상화 속에 살아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티엘은 눈시울을 붉히고 액자를 꼭 끌어안으며 리아의 품에 살짝 몸을 기댔다.

쿡쿡 웃으며 그런 티엘의 등을 다독거리는 리아 역시도 이미 눈가가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이거, 액자는 로비 작품이야. 너 준다고 며칠동안 밤새 작업했더라. 초상화는 란, 린이 화가한테 일일이 설명해주면서 그려왔대. 린이 인형같은걸 만들어서 그런지, 애들 묘사를 그렇게 생생하게 했다더라고. 그리고, 그리고 이 액자, 방에 두면 조금씩 숲 향기가 날 거야. 편안한 기분이 들게 해 준다고 해서 신경써서 주문을 걸어둔 거야. 우리 울보, 밤마다 우리 보고 싶다고 울지도 모르잖아. 그렇지?"

리아의 말처럼, 품에 안긴 액자로부터 싱그러운 향기가 조금씩 배어나왔다.

울창한 숲 가운데 앉아있는 듯한 기분과 함께, 이렇게나 신경써준 네 사람에 대한 고마움으로 눈가가 다시 조금씩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어어, 또 울리면 어떻게 하냐. 여기선 웃으면서······. 하, 망할. 리아 하는 짓이 다 그렇지······."

"그, 그러는 너도, 우, 울먹거리고 있네, 뭐. 로, 로비! 너, 너도, 얼굴 가리지, 가리지 마!"

다들 한결같다.

이별이 아쉬워 선뜻 발을 돌리지 못한다.

이런 때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린델이다.

올로비스의 등 뒤에 숨어있던 그녀는 순식간에 무거워지는 분위기를 느끼자 재빨리 눈가를 닦았다.

"자, 자.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걸요. 다들, 너무 눈물이 헤퍼요. 아이, 참! 다시 만나기로 약속 했잖아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조금 양보해 주자구요. 아직 한 명 남았죠? 밀회를 즐기다 왔더래도, 여기선 공평하게 해야죠."

마지막 한 명.

나셀은 긴 말은 하지 않았다.

이미 그 정원에서 해야할 말도, 전하지 못했던 말도, 모두 전했다.

그것은 티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몸을 돌려, 가벼운 포옹을 나누었다.

"언젠가, 다시."

"언젠가, 다시."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오히려 의아해할정도로, 마치 내일 다시 만나기라도 할 것만 같은 담담한 인사.

잊지 않겠다는 상투적인 말조차도 필요없었다.

포옹조차도,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이내 두 사람은 미련조차 남기지 않는 것처럼 떨어졌다.

그 순간, 기울어가는 햇살에 서로의 가슴과 귀에서 각자 서로에게 선물한 장신구가 반짝 빛을 흘렸다.

한 사람은 제국의 땅, 레가야를 상징하는 눈꽃과 해룡의 기 아래에.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푸르른 바다에 감싸인 공화국으로 향할 마차 위로.

서로가 있어야 할 곳으로 갈라진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들어 흔들었다.

"그럼, 또 봐요."

날카로운 말굽소리가 귓청을 찢을 듯 울렸다.

더이상 시간을 줄 수 없었던 마부는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작별을 야속하게 끊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아직 남아있던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내키지 않는 몸을 돌려 마차에 올랐다.

"잘 지내. 편지할게!"

하지만 시간은 너무나 부족했다.

채 마차 문이 닫기기도 전에 제동장치가 풀리며 말들이 지면을 박찼다.

티엘의 대답을 들을 여유조차, 없이 빠른 속도로 그녀의 모습이 멀어져가기 시작했다.

티엘은 마차를 향해 달리려고 했지만, 아직 완전히 낫지 않은 발목은 그런 그녀의 뜻조차 제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한 호흡이 지날 때마다 작아진 티엘의 모습은 이내 자그마한 점으로 사라졌다.

이내 레가야의 거성이 한 눈에 들어오고, 점차 그 성조차도 손바닥으로 가릴 수 있을만큼 작아져갈 때 쯤, 미련을 남긴 채 마차 뒤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네 명의 기사들도 탄식을 삼키며 제 자리로 돌아섰다.

"하아······. 단장님한테 휴가 신청이라도 내볼걸 그랬을까······."

누구였을까.

그 의미없는, 농담같지도 않은 농담을 한 것은.

아니, 누구였는지는 중요한 것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 네 사람 모두 똑같은 심정이었을테니까.

"의외로 매정하네요. 그런 식으로 헤어져도 후회 안하겠어요?"

울적해하던 린델은 문득 평온한 얼굴을 하고 있던 나셀을 향해 눈을 흘겼다.

하지만 나셀은 잔잔하게 웃으며 한 손으로 어루만지던 목걸이를 돌려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기사단 사람들의 눈에 익숙한 티엘의 목걸이 외에, 낯선 열쇠 하나가 그 곳에 함께 걸려 있었다.

"후회하지 않을거에요. 설령 손은 닿지 않더라도······, 그래도 우리는 함께 있을테니까."

반드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이 지켜질 날은, 어쩌면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끝없이 엇갈린 끝에, 덧없는 희망만을 품고 지쳐 쓰러지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그들이 나눈 약속이 거짓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나셀은 깨어지지 않을 약속을 되새기며, 이제는 더이상 보이지 않는 연인을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새벽하늘을 떠올리게 하는 맑은 노랫소리가, 이별의 하늘을 위로하듯 따사롭게 울려퍼졌다.


작가의말

르비아는... 선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요.

작중에선 항쟁이나 미라야의 수도를 짓밟고 제도를 휩쓸어버리려는 장면 정도만 보여졌지만 실제로는 그 이상의 피를 손에 묻혔고, 이건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분명 신언이나 그란드리아가 없었더라도, 타인을 희생시켜서라도 목적을 이루려는 태도만큼은 달라지지 않았겠죠.

다만, 그 행동원리의 뿌리에는 결국 인간적인 면모가 있었다는 것 뿐입니다.

티엘과 마찬가지로 순수했던 시절에 뿌리를 내렸지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선택의 방향이 달랐다는 점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자아, 이것으로 16장도 끝났습니다.

내일부터는 다시 한 챕터로 돌아오겠습니다 :)

(아직 끝이 아니에욧 >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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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종장-새벽에 피어난 눈꽃 (1) 19.12.03 68 3 24쪽
» 16장-시원의 새벽 (12) 19.12.02 79 3 44쪽
164 16장-시원의 새벽 (11) 19.12.01 130 3 31쪽
163 16장-시원의 새벽 (10) 19.11.30 77 3 26쪽
162 16장-시원의 새벽 (9) 19.11.29 58 3 32쪽
161 16장-시원의 새벽 (8) 19.11.28 66 3 24쪽
160 16장-시원의 새벽 (7) 19.11.27 96 3 34쪽
159 16장-시원의 새벽 (6) +2 19.11.26 78 4 28쪽
158 16장-시원의 새벽 (5) 19.11.25 63 4 30쪽
157 16장-시원의 새벽 (4) 19.11.24 68 3 30쪽
156 16장-시원의 새벽 (3) 19.11.23 66 3 30쪽
155 16장-시원의 새벽 (2) 19.11.22 64 3 29쪽
154 16장-시원의 새벽 (1) 19.11.21 72 3 28쪽
153 15장-귀향歸鄕 (11) 19.11.20 68 3 38쪽
152 15장-귀향歸鄕 (10) 19.11.19 62 4 25쪽
151 15장-귀향歸鄕 (9) 19.11.18 221 3 25쪽
150 15장-귀향歸鄕 (8) 19.11.17 60 3 24쪽
149 15장-귀향歸鄕 (7) 19.11.16 61 2 34쪽
148 15장-귀향歸鄕 (6) 19.11.15 65 4 24쪽
147 15장-귀향歸鄕 (5) 19.11.14 85 3 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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