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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Winterer 님의 서재입니다.

새벽의 시, 얼음의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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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LWinterer
작품등록일 :
2019.07.01 19:36
최근연재일 :
2019.12.10 12:46
연재수 :
17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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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7
추천수 :
664
글자수 :
2,473,044

작성
19.12.05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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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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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글자
12쪽

종장-새벽에 피어난 눈꽃 (4)

DUMMY

12월의 마지막 날 답게도 바깥은 이미 눈이 한창 쌓여있었다.

그나마 사람들이 다니는 길 만큼은 눈이 얇게 쌓여 비교적 최근에 한 번 정리를 했다는 사실은 알아볼 수 있었지만, 쏟아지는 눈발을 보고 있자면 그것도 얼마 못가 다시 눈밭으로 변할 것 같다.

풍성하게 쌓인 함박눈은 풍년을 가져온다고 했던가.

그 이야기가 맞다면, 다가올 일 년은 제법 풍족한 결실을 맺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 것은 봄바람이 불어와 눈을 녹인 후에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쌀쌀한 날씨로 인해, 스치는 바람조차도 술기운으로 살짝 달아오른 피부에는 제법 날카로워 금새 뺨을 빨갛게 만들고 만다.

이대로 해가 바뀌길 기다리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막 티엘에게 모자를 벗어주려던 나셀은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떨어지는 눈을 잡아채려는 티엘을 발견하고 말았다.

어느덧 스무 살이나 먹어, 소녀라는기 보다는 아가씨라 부르는 것이 어울릴 나이가 되었건만, 눈송이를 잡기 위해 팔짝 팔짝 뛰는 모습은 조그만 어린애라고 해도 믿을만큼 사랑스럽다.

얼마 전까지 대공이라며 무게를 잡고 지내던 사람이 사실은 이런 성격이라면, 과연 레가야의 영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런 나셀의 시선을 뒤늦게 눈치챈 티엘은 조금 멋쩍게 웃으며 짐짓 딴청을 피우기 시작했다.

"춥진 않아?"

추위를 타지 않는다는 것은 알지만, 역시 무심결에 물어보고 만다.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인지 일부러 두꺼운 옷을 걸치고 있긴 했지만, 그 가느다란 목은 차가운 밤공기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티엘은 생긋 웃으며 오히려 잘 됐다는 듯 나셀의 팔을 끌어안았다.

"팔짱 끼면 안추워."

팔을 풀지 말라는 말보다 무섭다.

억지 아닌 억지에 피식 웃은 나셀은 굳이 괜찮다고 거절하려는 티엘의 머리에 자신의 모자를 씌워주었다.

마침 거리로 나온 시간도 적절한 편이었다.

달도 이미 하늘 중천에 오를 만큼 늦은, 올 해의 마지막 날도 한 시간 남짓 밖에 남지 않은 시간.

상점가의 발빠른 상인들은 벌써부터 신년 축제 준비를 마친 채 호객 준비에 들어가고 있었다.

걷기 힘들 정도로 잔뜩 쌓인 눈도 어느새 곳곳에서 상인들의 손에 의해 조금씩 정리되기 시작했다.

제법 쌀쌀하긴 하지만, 오래간만에 팔람의 거리로 돌아온 티엘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일이었다.

"참 이상한 일이지. 살아온 햇수로만 보면 란의 거리가 더 익숙해야할텐데······."

티엘은 감개무량하다는 듯 점점 밝아오는 거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야경만큼은 전 대륙에서 손 꼽힐만큼 아름답다는 란이지만, 한 번 마음이 떠났던 곳에는 다시 쉽게 마음을 둘 수 없었던 것일까.

티엘은 시찰을 구실삼아 몰래 란을 돌아다닐 때보다 더욱 그리움 가득한 눈으로 거리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 곳에 두고 온 추억도 있지 않아?"

"없지는 않아. 아첼이랑 처음 만난 곳도 있고, 또 아버지 몰래 빠져나와서 돌아다녔던 거리도 남아있어. 하지만······."

일부러 뒷말은 잇지 않은 채,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웃음 속에 가려진 것은 아마도 그 곳에 추억을 함께 나눌 사람이 더이상 없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잠시 웃기만 하던 티엘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품 속에서 주먹만한 크기의 둥그런 수정구를 꺼냈다.

내부에 작은 장식을 넣고 액체를 채워, 흔들면 마치 눈이 내리는 것처럼 보이는 장난감이다.

하지만 나셀은 이내 그 수정구 안에 자리잡은 풍경을 알아보았다.

단 한 번 눈에 담은 것 뿐인데도 쉽게 잊을 수 없었던 어느 정원의 풍경이었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묻어둘건 전부 놓고 왔어. 하지만 한 가지만은 남겨, 가져왔어. 내게 남은 마지막 영지. 이젠 네가, 이 영지의 마지막 한 사람이야."

수정구 안에 자리잡은 것은 티엘에게 있어서 가장 최초의 안식처였던 대공가의 비밀정원이었다.

그 곳은 레가야의 영토가 아니며, 따라서 작위와 함께 황제에게 반환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땅이다.

때문에 티엘은 정원으로 드나들 수 있는 주문식 자체를 성에서 분리해냈다.

그리고, 그렇게 잘라낸 정원을 수정구에 담아 가져온 것이었다.

나셀이 수정구의 정체를 눈치챘다는 것을 알아본 티엘은 문득 스스로 팔짱을 풀었다.

"티엘?"

절대로 떨어질 것만 같지 않았던 티엘은, 뜻밖에도 나셀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막 돌아서려는 나셀을 가로막듯, 두 손으로 받쳐든 수정구를 그에게 내밀었다.

"······나셀. 나셀 아윌로스."

입김이 새하얗게 부서지는 가운데, 한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며 공교롭게도 낡은 모자를 휘감은 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다시 드러난 티엘의 얼굴은 안절부절 못할 만큼 긴장한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입은 쉽게 열리지 못했다.

망설임이 이어지는 동안, 잦아든 바람을 따라 느릿하게 떨어지는 눈송이가 밤하늘을 닮은 머리칼 위로 소리없이 쌓여갔다.

그러다 겨우, 질끈 감았다 뜬 눈을 나셀에게 향한 티엘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스티엘 아르야 카르티치스가 묻습니다. 나의 과거, 나의 추억, 그리고 나의 미래를 드린다면······, 나의 곁에 서 주기를, 나와 함께 걸어주기를 약속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망설이고 망설여온, 오랜 시간을 기다려온 약속의 말.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그려온 장면이었지만,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는 것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았다.

아니, 오히려 현실이기에 더더욱 격렬하게 뛰는 것이리라.

티엘은 초조함을 이기지 못해, 기어이 다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실수였다.

눈을 감는 순간, 그대로 시간이 멈춰버리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제발, 빨리 대답해주기를.

대답을 위해 숨을 들이쉬는 그 찰나의 시간조차도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길게 늘어진다.

이대로 영영 굳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대답을 듣기 전에 자신이 먼저 쓰러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이 날을 그리며 인내해온 삼 년의 시간조차도, 이 순간에 비하면 한 티의 불씨조차 되지 못할만큼 짧았다.

하지만.

"미안하지만, 거절할게. 내가 받아도 될 말이 아니야, 그건."

순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대답이 귀를 파고들었다.

아.

심장이 철렁 떨어져내렸다.

거절당할거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못했는데.

역시 삼 년이나 떨어져 있어, 조금은 서먹해진 걸까.

순간적으로 다리가 풀려 넘어질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며 눈을 떴다.

눈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꼴사납게 울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이제 어떻게 하면 되는거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완전이 헝클어뜨렸다.

힘이 빠진 두 팔은 어느새 툭 떨어져 있었다.

이미 그녀의 눈에는 더이상 나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이렇게 가슴이 옭죄이는데, 그는 어디로 가 버린 것일까.

"아-"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시야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었으니.

가슴이 꽉 죄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의 팔이, 자신을 힘껏 끌어안고 있었으니.

자신이 나셀의 품에 안겨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결코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되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순간, 저미는 듯 아파왔던 심장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백하기 직전보다도 더더욱 격렬하게 뛰었다.

맞닿은 가슴을 통해 나셀의 귀에 고동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나셀······?"

"미안. 하지만 이 말만은, 받기보다는 해 주고 싶어."

흥분과 긴장, 그리고 망설임.

가슴이 터져버릴 듯한 환희 속에서, 나셀은 자신의 진심을 조금이라도 선명하게 담아내기 위해 말을 다듬었다.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토록 많은 시와 노래를, 그리고 이야기를 스쳐왔는데도 어째서 이렇게나 단어가 모자란 것일까.

그가 아는 어떤 말로도 가슴 속을 채우는 이 기분을 절반, 아니, 티끌만큼도 담아내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다.

그의 말을 기다리는, 한 순간의 좌절감으로 물기까지 머금어버린 저 자수정빛 눈동자를 언제까지고 기다리게 할 수는 없기에.

"나, 나셀 아윌로스는 그대에게 약속합니다. 이 삶이 끝나는 그날까지 당신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내 삶의 모든 것을 다해 당신의 곁에 서겠다고. 당신은 이 맹세를, 받아 주시겠습니까?"

움츠러들었던 팔이 천천히 다시 올라갔다.

나아가다 돌아서고, 나아가다 돌아서길 반복하던 두 팔이 마침내 연인을 감싸안았다.

"네. 몇 번이라도, 기꺼이."

그리고 다음순간, 힘껏 나셀의 품에서 벗어난 티엘은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겹쳤다.

뜨겁다.

심장을 불태우던 각인보다도, 마력으로 끓어오르는 피보다도 더욱 뜨겁지만, 결코 고통스럽지는 않은 또 하나의 낙인.

서로의 눈빛이, 향기가, 가장 깊은 곳까지 스며들었다.

그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강렬한 빛이 터져나왔다.

축제의 거리를 밝히기 위한 등불보다도 더욱 환하고 아름다운 불꽃이었다.

새 해가 왔음을, 그리고 축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화려한 불꽃놀이의 시작이었다.

"새 해, 축하해."

수줍은 얼굴로 살짝 떨어진 티엘이 빙그레 웃었다.

순간, 갑자기 두 사람의 주위로 반짝거리는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주위의 눈과 얼음이 녹아내리고, 소리없이 흘러 발치에 모여들더니 마치 보석처럼 반짝거리는 얼음의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칼라가스가 얼음을 빚고, 슈니엘이 빛을 모아 애냐가 온갖 아름다운 색으로 닦아낸 꽃잎.

파드마가 짜올린 마력은 마치 면사포처럼 둘러쳐지고, 마지막으로 실리안은 그 꽃들을 엮어 화관을 만든 뒤 티엘의 머리에 씌웠다.

계약자와 그 반려를 축복하며 생령들이 보내는 축하의 선물이었다.

"너희들······."

티엘은 살짝 스며나온 눈물을 훔치며 활짝 웃었다.

그토록 실수투성이었던 자신이 이렇게까지 행복해도 되는걸까.

아니. 아니다.

이내 티엘은 그 의문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행복해도 되는게 아니라, 행복할 수밖에 없었다.

연인과, 기사단의 동료들과, 자신과 함께하는 친구들까지도 이렇게 축복해주었으니, 행복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티엘. 나도, 한 가지 줄 게 있어."

"응?"

생각지도 못했던 나셀의 말에, 티엘은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번에는 나셀의 얼굴이 눈 앞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티엘은 달콤한 기분에 몸을 맡기며, 기꺼이 그의 입술을 받아들였다.

부드럽게 녹아, 상냥하게 뒤섞여, 두 사람의 영혼이 하나로 이어지는 기적의 한 순간.

그 마주침이 끝나는 것이 두려워, 어느새 나셀의 목을 감싸안았다.

그 온기가 멀어지는 것이 두려워, 어느새 티엘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언젠가의 밤, 이별을 위해 나누었던 슬픈 약속은, 달콤한 입맞춤 속에서 그렇게 소리없이 사라져갔다.


내일의 하늘이 무슨 색일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빛은 서로를 품은 채 웃음지을 것이다.

마치 별빛을 머금고 반짝이는, 새벽녘에 핀 눈꽃처럼.


새벽의 시, 얼음의 용.



작가의말

긴 시간에 걸쳐, 가장 오랫동안 품어온 글이 마침내 끝났습니다.

티엘의 이야기는 어떠셨나요. 여기까지 함께 해주시며, 즐거우셨는지 감히 여쭤봅니다.

이제와서 긴 이야기는 맞지 않겠지요.

약 5개월에 걸쳐, 끝까지 이 이야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다음 작품을 소개하기까지는, 아직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시엘리아 제국으로부터 머나먼 동쪽. 코엘드리아 만국(蠻國)을 배경으로 하는 또 다른 곳의 이야기입니다.

그 때는, 조금 더 성장한 글로 찾아뵐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ps. 내일부터는 짧은 외전 한 편을 올릴 예정입니다. 종장이랑 분량은 비슷할 것 같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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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장-새벽에 피어난 눈꽃 (4) +2 19.12.05 86 5 12쪽
168 종장-새벽에 피어난 눈꽃 (3) 19.12.05 67 3 30쪽
167 종장-새벽에 피어난 눈꽃 (2) 19.12.04 72 2 25쪽
166 종장-새벽에 피어난 눈꽃 (1) 19.12.03 68 3 24쪽
165 16장-시원의 새벽 (12) 19.12.02 77 3 4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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