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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사는 광명을 꿈꾼다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로맨스

공해상어
작품등록일 :
2023.09.17 11:17
최근연재일 :
2023.10.23 11:20
연재수 :
24 회
조회수 :
359
추천수 :
11
글자수 :
135,909

작성
23.09.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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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Page 3. 회귀자의 27번째 시발점

DUMMY

다음 날, 남자는 나를 탁자 반대편에 앉히고는 물었다.


“그래서, 미래는 고정되는 것이냐?”


아무래도 운명론에 대해 이야기하고싶은듯 보였다.

나는 남자가 내준 간단한 완두콩 스프를 뒤적거리며, 그의 학구열에 맞춰줄까 말까 고민했다.


“음······.”

“예끼 이놈아. 뜸들이지 말고 말해보거라. 미래는 바뀌는 것이냐? 아니면 특수한 상황은 고정되는 것이냐?”

“글쎄.”


나는 창문을 통해 여전히 휘몰아치는 눈보라를 보았다. 27번의 회귀동안 한번도 없었던 눈보라. 저 눈보라 때문에 앞으로 알고 있던 내 미래는 모조리 바뀌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또 허탈했다.

내 손을 떠나간 나의 이야기는, 이리도 허무하게 바뀌어 버리는구나. 세상에 정해진 운명이라곤 없구나. 하는 사실이 또다시 머리에 각인되었다.


그래, 이곳은 소설 속 세계다.

그것도 내가 직접 쓴 나의 판타지 소설 속.


내가 애정하던 작품의 주인공에게 빙의했다. 주인공 주변 인물들을 만나고, 내가 설정했던 지역들을 실제 내 눈으로 직접 보았다.

이 상황에 흥분하지 않을 작가가 정말 있을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남자가 답답한듯 재촉했다.


“혼자 뭘 생각하는 거냐. 정말로 운명은 정해져 있는 겐가······?”


나는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만약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내가 27번이나 이 세계를 헤메고 있을 이유도 없다. 난 이 세계의 작가니까 모든 설정을 이용해서 해쳐나갔겠지.


“이 세계에 절대적인건 없어.”

“그, 그런 것이냐?! 미래는 어떻게 해야 바뀌는 거지?”

“눈보라가 칠 때.”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밖에 눈보라와 나를 번갈아 보았다. 나는 그런 남자를 빤히 바라보다가, 조금 진중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이 나를 구했을 때, 내가 로프를 감았을 때, 당신에게 나에 대해 말할 때, 심지어는, 당신이 벽난로에 불을 피웠을 때.”

“······.”

“평소 산책을 자주 다니던 사람이 딱 하루, ‘다른 길을 가볼까’하며 길을 걸을때 생기는 분기는 어림잡아 수백가지. 새롭게 만나는 사람, 사람을 본 사람, 그들이 만났다는 경험, 새로운 냄새에 동물들이 가진 흥미, 쥐가 새로운 사람의 발을 피해 다른 길로 이동한 것. 그로 인해 다른 사람에 경험을 주고, 더 나아가 인생의 변화를 발아하고 쥐의 이동을 통해 다른 곳에 전염병을 일으킬수도 있는 것이지.”


남자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정해진 운명은 없다. 우리는 거대한 나무를 기어오르는 한낯 벌레일 뿐이고. 신 또한 마찬가지지. 그들또한 나무에서 살아가는 한낯 새일 뿐이니.”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시 떠 남자의 표정을 관찰했다. 유일신을 섬기는, 운명론이 지배하는 중세 시대의 인물이라면 나는 섭리를 거스르는 오만한 인물일 터.

그러나 남자의 반응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하, 하하······ 마치 신이라도 만난 것 같은 기분이군.”


남자는 어찌저찌 받아들이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이 알던 상식과 비교하며 여러번 충격을 받는 것 같았다. 믿고 싶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말.

무려 미래를 한번도 아니고 수십번 보고 돌아온 회귀자의 말씀 아닌가.


“그, 그런가······.”

“그보다. 이제 당신 소개를 듣고 싶은데.”


그 말에 남자가 나를 슬쩍 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다시 숙였다.


“에흠. 되었다. 나를 처음 봤다는 건 27번의 회귀 동안 난 한번도 그 지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아니냐.”

“······.”

“······.”

“······.”

“그래, 이름과 소속은 말해야겠지.”


남자는 허탈하게 씨익 웃더니 망토를 휘익 펄럭였다. 망토에 녹아있던 눈이 사방팔방으로 튀겨지며 먹던 수프에도 다량 튀었다.


오른팔을 척!

하체를 딱!

멋있는(이 남자기준) 자세를 빡!


요란스러운 움직임과 함께 남자가 외쳤다.


“이몸은 마탑 소속 악마연구부의 학장! 아카데미의 마법학 최고 교수였던 인간! 그 드높은 신의 아이마저 가르쳤던 나! 테.슬.로 발리노르! 7서클까지 올라간 대마법사가 바로 이 몸이시다!”


나는 그를 일별하며 수프를 한입 떠먹었다.

역시나 마탑 소속이었군.

근데 악마 연구부는 처음 듣는데. 최고 교수였다는 사람 치고 이름도 들어본적 없고······. 그리고 신의 아이라.


뻘쭘해진 테슬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리에 털썩 앉을때, 나는 물었다.


“악마연구부는 처음 듣는데.”

“으하하핫! 당연하지! 17년전에 몰살당한 비밀조직이었으니까! 물론 대마법사인 이몸은 어떻게든 살아남았지만 말이다! 끌끌끌!”

“몰살당했다고? 왜?”


“왜겠느냐. 우리는 이단이었으니까.”

“아.”


나는 무심결에 주변에 두었던 거울을 매만졌다.


‘붉은 눈을 가진 악마’

이것은 태양신을 따르는 신성국에게는 교리에 어긋나는 괴물이며 숨겨야 할 존재다. 동시에 이를 연구하거나 신봉하는 것은 당연히 괴물과 동일하게 이단으로 취급한다.


그럴 때 나타나는 것이 ‘이단 심문관’


나는 푸른 눈의 기사를 떠올리며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오, 눈보라가 그쳤군.”


테슬로의 말과 함께 쏟아지는 햇빛에 나는 눈을 찡그렸다. 손으로 가리며 창문을 바라보자, 환한 햇빛이 식탁 위 꽃병에 내리쬐어지고 있었다.

아래쪽에 [테슬로가 사랑하는 그대와 뱃속의 아이에게]라고 적힌 낡디 낡은 꽃병. 내가 꽃병을 보고있다는걸 알았는지 테슬로가 꽃병을 돌렸다.


“가족이 있었나?”

“있었지. 지금은 떠났지만.”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나?”

“‘안광의 깊은 숲’으로 갔겠지. ······더는 묻지 말아다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테슬로가 미약하게 씨익 웃었다. 그리고는 담배를 꺼내 태우며 나긋하게 말했다.


“궁금한것은 다 물었다. 악마에 대한 궁금증도 미약하게나마 해결했고, 회귀에 대해서도. 운명에 대해서도 얼추 알게 되었으니.”

“악마의 힘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나?”

“별로. 이제는 모르는 채 지내고 싶군.”


한평생 한가지만을 바라본 연구자가 ‘앎’을 포기한다는 건 어떤 무게를 가질까. 나는 테슬로가 뿜는 담배연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콜록, 콜록. 이게 무슨 냄새야.]』

“······담배 냄새.”


나는 들리지 않는 반신의 말에 대답하며, 그 무게를 옅게나마 이해했다. 그런 나를 본 테슬로가 말했다.


“자네는 담배 안 피나?”

“회귀하면 어린 몸이니까. 매번 매연에 적응하는것도 힘들지.”

“그건 부럽구만.”


테슬로는 반도 못핀 담배를 치익- 하고 끄며 말했다.


“어제부터 이야기가 길었군. 자네는 이제 어떡할 텐가? 눈도 그쳤으니 떠나는 것도 가능하겠군.”

“글쎄, 어쩔까.”


미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물론 예상은 가능하겠지만······


수많은 인생을 살았다.

용병으로써 산 삶과, 이단심문관으로써 산 삶.

국가영웅이 된 삶과, 평범한 여자로써 산 삶.

지구로 돌아가고 싶었던 삶과, 수십년에 세월에 그 목표가 꺾여버린 삶도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의 인연이 닿은 사람들을 구하고 싶다는 목표를 가진 삶을 얻었다.


나는 어떤 삶을 또 살아가야 할까.


모든 것을 때려부수는 망나니 영웅이 되야 할까?

모든 남자와 여자를 곁에 두는 하렘왕이 될까?

시원한 사이다를 추구하며 빠르게 나아갈까?

수많은 부귀를 누리는 노후를 꿈꿔야만 할까?

아니면 미래를 알기 위해 회귀할까?


그런 고민을 하고있는 나에게, 테슬로가 말했다.


“어떤 생각을 하고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고개를 돌려 테슬로를 마주했다.

70은 넘어보이는 늙은 모습. 하얀 머리와 하얀 수염, 고생했는지 쭈글쭈글해진 손까지.


내가 소설에서 적지 않았던 인물이, 변수를 뚫고 나를 만났다. 한 시점에선 아무 보잘것 없던 인물이 내 시점에서 가치가 있는 인물이 되었다.


“불확실한 미래라도, 품고 가는게 좋을 걸세. 앎이란 대단하지만 앎으로써 고통받는것도 있으니.”

“당신도 회귀를 하나?”

“그래 보이나? 끌끌. 아직 청춘인데 말이야.”


어떤 가치인지는 알지 못한다.

돈, 사랑, 능력. 이것또한 가치지만, 불확실한 세계를 지켜보는 것 또한 하나의 가치리라. 세계는 흘러가서 아름다운게 아니라, 그 자체라서 아름다운 것이니.


나는 벌써부터 이번 생을 포기할까 생각했던 어제의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반신이 죽은것은 슬프지만, 어차피 예정되어 있었던 일.


게다가 우린 회차의 기억을 공유하는 사이이니, 수천년을 함께한 우리는 더이상 서로가 죽는다고 좌절할 인연은 아니었다.


“결정했어.”

“그래? 그것 참 궁금하군. 회귀자의 스펙타클한 스물 일곱번째 인생에 첫 시발점은 어디로 정했나?”


나는 고통받았다.

물론 구원받은 적도 있다. 구원한 적도 있고.


고통받을 것이다.

악마가 되었으니 배척받을 것이고, 불로가 되었으니 이별의 아픔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또한 사람 사는 것 아니겠는가.

힘들었던 인생에 한번쯤 되돌아볼 만한, 한번쯤 다시 생각해볼 만한 인생. 지금 창문에 내리쬐어지는 햇빛처럼 찬란한, ‘광명(光明)’을 꿈꾸고 싶다.


나는 말했다.


“아직 여정을 떠나기엔 이른 것 같군.”


테슬로가 적적하던 차에 잘됐다며 웃었다.

나도 따라 웃자, 테슬로가 살짝 놀란 듯했으나 이내 같이 웃었다.


“내게 마법을 가르쳐주지 않겠나.”


27회차.

나는 이 오두막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해피엔딩의 목적은 유지한 채로.


작가의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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