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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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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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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2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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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쪽

네가 만든 마을(6)

DUMMY

※※※



파스스.


허공에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스쳤다.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일그러지는 대기. 강대한 내공 기파가 뿜어내는 막대한 열기는 지면을 녹이고 공기를 뒤튼다. 그저 가까이 있는 것 만으로도 겨울의 눈밭과 얼음이 녹아내리고, 얼어붙은 대지가 녹아내리다 못해 바싹 말라 타버리는 열기.


전부.


한 사람에게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등 뒤로 흑포를 길게 늘어뜨린 거대한 체구의 사내. 화천귀제. 몸 주위로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계속 피어났다. 막대한 열기를 스스로의 갑옷마냥 두른 것이다. 의식하지 않아도 그리 된다. 열양지기를 호신강기인 양 사용한다.


근접해 싸우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화천귀제의 몸 근처로 다가갈 수록 그의 열기에 노출되어 위험해지니.


바로 지금.


화천귀제의 눈앞에 선 검객이 가만히 멈춰서 있는 이유였다.


“상대가 안좋군요. 아쉽게도.”


풍백이 가면 아래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검파에 가볍게 손을 올린 채였다.


상성이 좋지 않았다. 극한의 쾌검을 연마한 풍백. 그가 장담한대로 검왕이나 검제라 해도 그의 간격 안에서는 거리를 벌린다. 근접 대인전에 탁월하다는 소리였다.


허나 화천귀제는 달랐다. 몸에 두르고 있는 내공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공격기이자 호신기. 불타는 듯한 열기를 몸으로 받아내며 싸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그 열기를 다루는 자가 마교의 우호법이라면.


“차라리 대호법이 더 편할진데.”


상성이 그랬다. 그러나 풍백은 더 불평하지 않고 검끝을 매만졌다. 장난치듯 바람결에 묻어나오던 풍백의 기세가 이윽고 서서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바람을 꾹 눌러 압축하는 듯이.


그리고.


움직이지 않고 있는 것은 풍백을 응시하고 있는 화천귀제도 마찬가지였다.


드넓은 대지. 신강에 자리잡은 산맥부터 서장 끄트머리의 협곡까지 긴 선을 죽 이으면 나오는 길이다. 검귀의 무덤으로 드나드는 입구인데, 서장쪽의 입구와 달리 항시 제대로 된 길만 알면 들어올 수 있다. 지금은 수백의 마교도에 의해 통제당하고 있다.


방금 전까지는 그랬다.


풍백의 사방, 화천귀제의 앞.


대지가 쩍쩍 갈라져 있었다. 흉년이나 기근으로 인해 갈라진 것이 아니었다. 마치 거인 반고(盤古)가 검을 들어 대지를 그었다면 이리될까. 한치의 오차도 없이 깨끗한 검격 자국이 두 줄.


땅을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그 궤적이 지나치게 컸다. 개세적인 위력을 지녔는데, 검흔은 깊이에 비해 얇았다. 힘의 누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절대고수.


사람의 수에 구애받지 않는다. 직전 풍백을 향해 달려들던 수백의 마교도들. 이제는 전부 한줌 핏물로 변해 땅을 적시고 있었다.


적어도 동격, 또는 그에 준하지 않으면 접근하는 것 조차 허락되지 않는 무인. 일검에 무덤의 입구를 가득 애워싸고 있던 마교도들을 전부 지워버린 것이다.


“......흐.”


화천귀제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몸을 따라 간간히 흩날리는 불티.


가면을 쓴 검객. 쌍검을 등 뒤로 아무렇게나 늘어뜨려 맨 모습이 여유롭다. 천하에 몇 없을 자신감과 태도. 보통의 무인이 화천귀제의 앞에서 저리 행동했다면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고 불태워 죽였겠으나, 이자는 그럴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직전 풍백이 검을 뽑았다. 땅에 남은 상흔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천귀제는 보지 못했다. 풍백의 이검이 언제 뽑혀나왔고, 언제 다시 검집에 들어갔는지.


지금의 대치 상태가 만들어진 이유였다.


풍백이 남긴 검흔을 기점으로 두 무인이 마주보고 있었는데, 서로 간격을 좁히지 않고 상대를 가늠하고 있다. 화천귀제의 손끝에서 허공으로 이따금 불티가 튀어올랐는데, 금새 불어온 바람에 흩어져 사라졌다.


“이검의 검객.”


화천귀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거칠게 자란 수염 사이로 쉼없이 불티가 흩어지고, 오른손은 금방이라도 장법을 펼칠것인 양 느릿하게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는 채다.


그러면서도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가면의 검객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리 흔하지 않지. 평생 몇 보지 못했던 것을. 방금의 검격을 보니 더욱 확실해졌군.”


느릿하게 읊었다. 상대의 호흡을 가늠하면서 중얼거린 말이다. 그러나 가면을 쓴 검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검성(劍星). 중원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지 세월이 꽤 지났을텐데. 이곳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근래 마교는 한낱 낭인의 발자취에도 관심이 많나 보군요. 황실을 무너뜨리고 무림을 뒤엎으려는 작자들인줄만 알았었는데.”

“본교는, 중원의 오만한 것들과는 다르다. 언제나 모든것을 주시하고 있지.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리해야 하는 법이니.”


대업을 입에 담는다. 동시에 화천귀제의 호흡도 한층 낮아졌다. 수염 사이로 튀어오르던 불티가 서서히 잦아들고, 점차 주변의 기온이 낮아진다. 몸 밖으로 내뿜고 있던 내공 기파를 갈무리 한 것이다.


“당연히 네놈의 흔적 또한 눈에 담고 있다. 네가 황실 군부를 등진 시점부터 그러했지.”

“언제적 이야기인지 모르겠군요. 무림에 아는 이도 몇 없을 일을......”

“헌데 이제 와 얼굴을 맞대보니 궁금해지는군.”


화천귀제가 이를 드러냈다.


여전히 담담한 자세로 검을 비끄러매고 있는 풍백. 황실을 입에 담으면서도 여상한 태도이다.


“어째서 군부를 떠난 것이지?”

“모든것을 주시한다더니.”


피이이.


허공을 따라 휘도는 바람이 멎어들었다. 어느새 고요해진 사방. 여태껏 불어오던 바람이 아예 사라진 것이다. 자연적이지 않았다. 허공을 잠식하던 열기도, 튀어오르던 불티도, 잔잔히 휘돌던 겨울바람도 사라졌다.


전장을 잠식한 고요.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나에 대해서도, 황실에 대해서도. 그리고.”


풍백의 시선이 힐끗 옆을 향했다. 그가 쉴새없이 달려온 길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나타난 화천귀제. 이자가 무덤 안으로 진입하게 하지 못하기 위해.


“지저에 웅크린 용(龍)에 대해서도.”

“무덤에 진입한 떨거지들? 역시 놈들과 관련이 있었군. 네놈이 신강에 이유없이 발을 들일 자는 아니거늘. 하오문의 쥐새끼를 구하러 온 것인가?”


내뱉는 화천귀제의 호흡 사이, 그의 음성이 거칠어졌다.


허공에 뻗은 그의 손아귀가 서서히 좁혀들기 시작했다. 동시에 귀를 찢는 날카로운 소음이 피어올랐다. 유형화된 기파가 마찰하면서 내는 음률. 언뜻 들으면 귀곡성과도 비슷했다.


“뭐 어찌되었든 상관할 바가 아니로군. 전부 죽이고, 네놈의 사지를 찢어놓은 다음 알아보면 될 일.”

“가능하겠습니까? 검은 하늘에 베인 상처가 아직 그대로일텐데.”

“나는 패배를 장작삼아 강해졌다. 그리고 네놈들은 아직 제자리에 머물러 있지. 그 알량한 검 하나를 믿고서.”

“저는 두 자루, 입니다만.”


중얼거린 풍백.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늘빛 안광이 가면 너머로 스치듯 일었다.


“네놈이 나를 상대하는 동안, 나머지 쥐새끼들도 전부 죽을 것이니 걱정하지 마라. 청화단을 보내놓았으니.”


찰나. 풍백의 시선에 옅은 걱정이 스쳤다. 그러나 그것은 곧 사라졌다.


마교 화천귀제의 휘하에 있는 청화단. 풍백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집단이다. 청화단주는 화천귀제의 직전제자. 그 위세가 가히 드높다. 여느 무림의 무력대와 비교해도 고강하다 할 이들.


그러나 풍백은 보았다. 한순간 자신의 간담마저 서늘하게 만들던 소년의 백광을.


“보면 알겠지요.”


그와 함께 무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 꽤나 재밌었더랬다. 풍백은 쉴새없이 질문하던 소년의 맑은 눈동자를 떠올렸다.


‘시간이 나면 경신법 한자락이라도.’


본디 누군가에게 자신의 무공을 전수할 생각이 없던 풍백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기회가 된다면 그에게 구결 한자락이라도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 아이가 엮어낼 무공의 뿌리에, 흔적 하나정도 보태면 뿌듯하지 않을까 싶은 기분.


‘그러려면 우선.’


살아나가야 할 일이다. 이자를 막아내고.


[염혈신공(炎血神功). 수라겁화(修羅劫火).]


사방을 따라 울리는 거대한 목소리. 육합전성(六合傳聲)이었다. 절세고수가 무공을 펼치면서 자연스레 뒤따르는 기예.


쩌저정!


귀청이 쪼개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 풍백은 이미 보법을 밟고 있었다. 지천을 울리는 화천귀제의 육합전성이 풍백의 걸음을 쫓았다.


시야 앞을 가득 메우는 거대한 화염의 폭풍. 그 안에서 짙다 못해 자색에 가까운 시퍼런 불길을 두른 화천귀제가 이를 드러냈다.


[죽어라, 황실의 번견.]

“그만두고 나온지가 언젠데 아직도.”


풍백이 돌진해오는 화천귀제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바람결처럼 부드러이 보법을 밟으면서였다.


[풍신(風神).]


그리고 풍백의 목소리가 일었다.


찰나지간 흩어진 바람결을 모아 그러쥔다. 이검은 이미 발도한 상태. 빛살처럼 찢어진 검격이 바람을 휘감았다. 등 뒤로 일어나는 수십의 흐릿한 바람결. 하나 하나 전부 내공으로 엮어낸 검과 같았다.


[......!]


직후, 화염의 폭풍이 갈라졌다.



※※※



거리를 따라 바람이 불었다.


드넓은 도시. 일렁이는 바람결마저 무언의 이치를 담고 있다. 거대한 술법진의 자태인 것이다.


“대체 누가 이런 설계를......”


간간히 눈을 이리저리 돌리는 것은 루주와 유성이었다. 백연이 이끄는대로 나아가면서도 감탄을 숨기지 않는다.


“천재적이네요.”

“천재적입니까?”

“네. 일견 무질서해 보이면서도, 전부 계획안에 들어와 있어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바람이 부는 방향이 전부 다른데 이걸 이렇게......”


백연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의외로 루주는 이걸 설계한 녀석과 잘 들어맞는 면이 있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기억을 잠시 더듬으니 금새 떠올랐다. 하도 재수없어서 이름으로 부르지 않은 일이 더 많아 잊고 있었는데.


“소백.”

“......예?”

“이곳의 모든 기문진을 설계한 사람의 이름입니다.”

“들어본 적이 없어요. 이만한 실력자라면 이름도 널리 퍼졌을텐데. 혹 마교의 사람이었다거나?”

“그건 아닙니다.”

“소(邵)씨는 흔치 않은데 말이죠. 찾아보면 있을련지.”

“아, 소씨가 아니라 제갈소백입니다. 생략했군요.”

“제갈세가의 사람이 이곳의 기문진을 만들었다고요?”


백연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셈이지요.”


이후에도 루주는 계속해서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바삐 움직이는 눈. 기문진에 관심이라도 있는 듯 했다.


나머지 일행은 조용했다. 유성과 소홍, 그리고 흑랑. 눈을 반쯤 감고 있는 흑랑은 상태가 여실히 좋지 않아 보였고, 백연 또한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장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흩어진 다른 세 사람. 아직 성도에 도착하지 않았다. 소란이 일었으니 근처에 있었다면 당장 왔을 것을, 무슨 일이 있는지 주위를 맴돌며 기다려볼 요량이었다.


그렇게 반 시진 정도 지났을 무렵.


“......백연!”


다른 세 사람이 합류했다.


단휘와 무진, 그리고 팔영.


도착했을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오자마자 꺼내는 말이 두서가 없었다. 그렇게 잠시간 소란이 일자, 이윽고 단휘와 무진을 조용히 시킨 팔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상한 노인네를 만났소.”


냉정하고 담백한 목소리로 여태의 일을 들려준다. 얼마 안되는 짤막한 이야기였으나, 그것을 들은 일행의 표정이 모두 굳어들었다. 그리고는 백연을 향해 시선이 모여들었다.


“......다시 만나면 뭐라 불러야 하겠냐고.”


나직한 목소리로 되새겼다. 담담한 소년의 목소리에 옅은 당황이 섞여있었다.


팔영이 묘사한 노인의 모습. 행동, 그리고 언행까지. 백연의 기억속에 그와 일치하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검귀가 신교의 장로 흑수나찰에게 일검을 내치고 눈을 감은 뒤, 다시 눈을 떴을 때.


이 몸으로 처음 마주했던 노인.


이번 생에서 처음 만났던 사람이다. 가문이 몰살당하고, 정신을 잃고 있던 소년을 구해와 치료해주었다고 했던 노인.


정체와 속내를 알기 어려웠다. 갑자기 여기에서 그를 마주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모르는 이는 아닌가보구려.”


팔영의 물음에 백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자입니다.”

“믿을만 한것이오?”

“그건......”


백연이 말끝을 흐렸다. 답하기 어려웠다. 오히려 믿지 말아야 옳다 하겠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다. 그 언행에 수상함이 가득했다.


더해 백연이 처음 마주했을 당시의 노인은 분명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인 같아 보였다. 무공의 기운은 한자락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


그런이가 이 무덤 안에 멀쩡히 진입해 초가집까지 만들어놓고 살고 있다? 정상적이라 보기 어려웠다. 애시당초 신강에 이르는 길이 험하다. 무인이라 할지라도 객사할 순간이 수십번에 달하는데, 평범한 이가 이런 길을 혼자 오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문을 닫으라 했다 말이지요.”

“그렇소.”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노인의 말이 있었다. 무덤의 문을 닫으라는 말.


백연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이 무덤은 본래 도시였다. 처음 검귀가 이 협곡에 자리를 잡은 이후, 사람들이 모여들며 형성된 도시.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흐른 뒤.


신교가 발호했다. 정사마를 가릴 것 없이 온 세상이 전장으로 변모했다. 이 도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제갈소백의 지휘 하에 도시의 구조를 바꾸었다. 성벽을 만들고, 세력을 구축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검귀와 일행은 언제나 끝을 바라봤다.


당장 다음날 죽을 수도 있는 것이 마도의 낭인이기에.


무덤이라는 이름 또한 그것을 생각하며 붙였다. 제갈소백이 제멋대로 벌인 일이나 검귀는 그에 호응해주었다.


‘문을 닫는다는 것은.’


처음 계획했던 일. 마지막에 이르러 모두가 끝에 다다르면, 도시의 기문진을 무너뜨리고, 협곡을 지울 생각이었다. 그들의 잔재가 신교의 발에 더럽혀지지 않도록.


무덤이 무덤으로 남아 있을 수 있게.


검귀는 그러지 못했다.


마지막 날, 신교와의 일전을 벌이러 출발할때 그들은 문을 닫지 않았다. 돌아올 곳을 남겨둔 것은 어쩌면 살아남아 다시 보자는 무언의 약속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빛이 바랜 일이 되었지만.


‘이제와서 그걸 아는 자가 있다니.’


누구일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노인은 문을 닫는다는 것을 어디서 알아낸 것일까.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이상 무시하기 어려웠다. 동시에 옳은 말이었다. 교는 이곳에 침입했고, 무덤은 더럽혀지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할 생각?”


소홍의 목소리에 백연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변한건 없습니다. 노인......변수긴 하지만 당장은 문제될 것이 없군요. 그의 말이 맞습니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갑니다. 회복을 할때까지 시간을 벌고.”


백연이 흑랑을 쳐다보았다.


“월영비도를 회수합니다. 그리고 무덤의 문을 닫고 빠져나갑니다.”

“간단하군.”


흑랑이 입매를 비틀었다. 고통을 참아내는 눈썹이 꿈틀거렸다.


“깔끔해서 좋아.”

“그런데 뒤따라 오고 있는 강적이 있다 하지 않았어? 따돌리기 어려울텐데.”


여상히 물어오는 유성. 그의 말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의 청화단. 강적이라 했지. 가급적이면 싸우지 않는 것이 최선일테지만 신강은 넓고, 무덤 안에서 도주한다 쳐도 뒤를 밟힐거야.”

“그렇겠지.”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으려 하는데.”


백연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행의 얼굴들, 하나같이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이다. 루주의 얼굴에는 언뜻 옅은 미소마저 어려 있다.


“다들 괜찮겠습니까?”


물음이 가벼웠다. 대답은 빨랐다.


“그야, 당연.”

“노부의 특기 아니겠소.”

“공자께 제 실력을 보여드릴 기회네요. 방주 대리님은 제가 지키면서 싸울게요.”

“......못본새 강해졌군, 루주. 영약이라도 먹었나.”

“화산의 검을 보여줄게.”

“단휘야, 내기나 한판 하겠냐? 누가 더 마교 모가지를 따는지.”

“무진 사형, 저보다 약하지 않습니까? 하고 싶다면야 말리지는 않습니다.”


마교는 보통 두려움의 대상이다. 중원 어디를 가도 그렇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는 크다.


이들은 조금 달랐다. 하오문의 사람들, 화산파의 기재, 그리고 곤륜의 제자들.


죽음을 헤쳐온 자들이다. 검룡 유성조차도 그랬다. 난세에 민생을 살피는 화산의 검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더해 청해에서 살아남은 소년들.


무공 실력과 별개의 의지다. 위험을 알면서도 담담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


그들을 바라보며 백연이 미소를 지었다.


비슷했다. 과거 이곳에서 신교를 상대하러 가던 이들과.


“그럼 가시죠.”


백연의 안내에 따라 움직인다. 길을 가늠하고 기문진을 파헤쳐가는 걸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틀간 바깥만을 맴돌았다 했던 흑랑은 조금씩 일행의 걸음이 안으로 향할수록 헛웃음을 지었다.


“지나치게 정교하군.”


도시 외곽, 성벽에 가까운 건물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건물들이 낡아간다. 더 작아지고 초라해지는 모습. 여타 성도와는 다르다. 안에서부터 천천히 뻗어나간 도시라 그러했다.


그렇게 다시 반시진이 지나고.


어느 순간, 백연이 걸음을 우뚝 멈춰섰다.


일행의 앞에 자리잡은 것은 작은 마을이었다. 주변의 좀 더 멀쩡한 건물들 사이 자리잡은 작은 초가집들. 중원의 한 산골에나 있을법한 작은 집들의 모임.


열 몇채에 달하는 초가집들이 제각기의 형상을 띄고 그 자리에 서 있다.


산골의 나무를 그대로 잘라다 박았는지, 가지도 다 떼어내지 않고 이리저리 휘어진 나무 기둥으로 세워진 초가집부터, 기둥에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초가집. 집주인이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는지 지붕 한켠이 기우뚱 기울어져 있는 집까지.


전부 각자의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단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원형에 가까운 형태를 그리며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


낡아빠진 전각이 있었다.


문 하나와 방 한칸밖에 없는 작은 집.


그곳에 천천히 다가간 백연이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익숙한 높이였지만, 그가 기억하던 것 보다 높게 느껴졌다. 새삼 자신의 키가 작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거친 삼베가 깔린 방바닥과 작은 롱. 밤에 켜는 작은 등불과 화로. 한켠에 가만히 쌓여있는 낡은 비급들까지.


“......여기입니다.”


도시의 중심. 검귀의 마을.


“이곳에서 몸을 추스르고, 회복하지요. 마지막 거점입니다.”


방 안을 바라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집이었다.



※※※



사람들은 바삐 움직였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흑랑이 제일 우선이었는데, 초가집 한칸을 차지하고 누웠다. 혼자 내상을 치료하겠다며 들어앉은 흑랑.


노인이 주었다는 약재는 백연이 확인하고 넘겨주었다. 딱 두 사람을 위해 준비한 듯 하나씩 있다는 사실이 더욱 수상했으나, 그가 조금 떼어내 확인해 보아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청명한 내단의 향만이 감돌 뿐.


다른 이들은 제각기 방비에 들어갔다.


“청화단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구려.”

“방주 대리께서 말한대로라면 금방 올거에요. 적어도 해가 질때 쯤에는......”


초가집 너머, 건물의 지붕에 올라 버티고 선 두 하오문의 무인이었다. 그들의 눈이 사방을 살피고 있었다. 적들이 오는 신호를 가장 먼저 알아채고 경고할 이들이었다.


반면 유성은 앉아 검을 내려놓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천천히 가라앉는 검룡의 호흡.


절세기재의 몸에서 일어나는 기파가 진했다. 직전 자하신공을 쓰며 끌어낸 공력이 적지 않다 했다. 때문에 운기조식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만전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


세 사형은 말없이 주변에 서 있었다. 검을 휘두르며 막간에 수련을 하는 단휘와 무진, 그리고 백연의 곁에 서서 아무말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소홍.


백연은 막 주변을 살피고 온 참이었다.


이제 곧 운기요상에 들어갈 시간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회복하는게 중요했으므로.


하지만 백연은 검귀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잠시 방 안을 살피던 백연은 그대로 문을 닫고 걸어나왔다.


직후, 그의 발길이 향한 곳은 다른 초가집이었다.


“여긴, 어디?”


검귀의 집, 바로 근처. 단정한 모양새의 집이 있었다. 겉으로 쾌활한 모습과는 달리 언제나 제 일을 착실하게 해냈던 녀석.


곤륜파의 무인이라 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왠지 모를 기분에 녀석의 집으로 와버렸다.


“사형의 대선배의 대선배쯤 될까. 그런 사람 집이야.”

“......곤륜파?”

“으음.”


모호한 웃음으로 넘기며 백연은 청휘의 집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기억과 똑같은 내부. 조용하고 차분한 것이 운기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요건이었다. 방 한켠에 곱게 개어진 이부자리를 보며 백연이 피식 웃었다. 마지막 나가는 날에도 저리 정리를 하고 갔던건가.


“여기서 해야겠네. 사형, 오래 걸리진 않을거야. 그러니......”


그렇게 말하던 백연이 문득 말을 멈추었다. 기억속에 있던것과 똑같아 보이던 청휘의 집.


아니었다.


방 한 가운데에 떡하니 보이는 자리. 영문 모를 책 한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마지막까지도 만지다 간 듯, 그 옆에 늘어진 것은 벼루와 붓이었다. 먼지쌓인 도구들. 눈길을 끌어당기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본 백연이 고개를 숙였다. 책 표지에 새겨진 것은 익숙한 청휘의 글씨였다. 수려하게 새겨진 문자. 글자 끄트머리에 툭 떨어진 먹물 한방울의 점. 급하게 마무리 짓고 나갔다는 사실이 눈에 보였다.


긴 세월에 흐려졌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방 안에 들어선 백연이 책을 집어들었다.


“일하곤륜(日下崑崙) 태청(太淸).”


나직한 음성이 책의 제목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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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네가 만든 마을(8) +7 23.09.29 4,717 108 21쪽
97 네가 만든 마을(7) +7 23.09.27 4,711 100 20쪽
» 네가 만든 마을(6) +10 23.09.25 4,776 107 22쪽
95 네가 만든 마을(5) +8 23.09.22 4,878 100 19쪽
94 네가 만든 마을(4) +8 23.09.20 4,847 100 20쪽
93 네가 만든 마을(3) +7 23.09.18 5,073 99 24쪽
92 네가 만든 마을(2) +5 23.09.15 5,198 107 24쪽
91 네가 만든 마을 +5 23.09.13 5,436 101 18쪽
90 신강(4) +6 23.09.11 5,634 109 23쪽
89 신강(3) +7 23.09.08 5,620 108 21쪽
88 신강(2) +5 23.09.06 5,880 112 21쪽
87 신강 +7 23.09.04 5,983 110 22쪽
86 설화(雪花)(4) +8 23.09.01 6,231 111 21쪽
85 설화(雪花)(3) +9 23.08.30 6,421 118 23쪽
84 설화(雪花)(2) +6 23.08.28 6,640 110 21쪽
83 설화(雪花) +8 23.08.25 6,940 119 17쪽
82 선택(5) +6 23.08.23 7,072 123 21쪽
81 선택(4) +5 23.08.21 6,893 124 20쪽
80 선택(3) +8 23.08.18 7,421 129 22쪽
79 선택(2) +6 23.08.16 7,381 123 24쪽
78 선택 +6 23.08.14 7,540 130 21쪽
77 검귀의 검, 곤륜의 검(6) +8 23.08.11 7,609 142 19쪽
76 검귀의 검, 곤륜의 검(5) +8 23.08.09 7,312 127 20쪽
75 검귀의 검, 곤륜의 검(4) +7 23.08.07 7,445 134 21쪽
74 검귀의 검, 곤륜의 검(3) +6 23.08.04 7,701 137 18쪽
73 검귀의 검, 곤륜의 검(2) +4 23.08.02 7,925 137 19쪽
72 검귀의 검, 곤륜의 검 +5 23.07.31 8,262 141 16쪽
71 검왕(4) +10 23.07.30 7,756 122 13쪽
70 검왕(3) +7 23.07.29 7,506 139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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