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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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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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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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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1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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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신강(4)

DUMMY

※※※



사도(邪道) 육진(六鎭).


정파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사파 무림에서 만금장을 제외하고 가장 큰 여섯 세력을 묶어 사람들은 그리 일컫는다 했다.


하오문과 수라궁, 녹림과 수로채를 위시한 사파 세력들이 포함된 사도 육진. 모든 세력이 전부 무시할 수 없을만큼 강력하다 했다. 정파로써도 쉬이 건드리기 어려운 막강한 세력.


하오문처럼 정사 중립에 가까운 문파가 존재하는가 하면, 수라궁처럼 정파와 적대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그리고 개중 천살문(擅殺門)은 가장 독특한 세력중 하나였다. 모든 움직임이 곧 의뢰와 직결되어 있었으니.


그들은 정사마를 신경쓰지 않는다 했다. 오직 살문에 들어오는 의뢰만이 전부라고.


“왜 여기 있냐니, 방금 말했잖습니까.”


천살문의 대주. 목에 칼이 바짝 붙은 상태에서도 입가에 미소를 그린다. 팔영을 본 순간 찰나 굳어들었다가 이내 미소가 걸린 얼굴. 그 위에서는 단 한치의 긴장감도 느끼기가 어려웠다. 실제로도 그런지는 모를 일이다.


‘호흡 조절까지 완벽해.’


숨결에서 느껴지는 통제력. 스스로의 몸을 도구마냥 다룬다. 살수들의 호흡법이다. 모든 상황에 있어 가장 완벽한 움직임을 추구해야 하는 이들. 위장과 잠행에 능숙해야 하는 이상, 자신의 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실격이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는, 그런 점에 있어서는 백연이 지금까지 봐왔던 수많은 살수 중에서도 뛰어나다 평할 수 있을법한 자였다.


“의뢰를 받았다고.”

“......이곳에 관한 의뢰? 근래에는 그런 일도 받는거요, 천살문은?”

“이곳? 당연히 아닙니다.”


대주가 어깨를 으쓱였다. 목에 닿은 칼날 때문에 조금씩 피를 흘리면서도 가벼워 보이는 언행.


“살문이 살행(殺行) 이외에 무슨 의뢰를 받겠습니까? 목표가 이곳에 있기에 온것 뿐이지요.”


그리 말한 대주가 시선을 슬쩍 돌려 백연을 바라본다. 아직도 여휘검과 엇갈려 들고 있는 짧은 쌍검. 단단히 힘을 주고 있던 대주의 손이 약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우선은 이것 좀 치워주실 수 있을련지요.”

“공자. 어찌하고 싶소?”


팔영이 백연을 힐끗했다. 외팔의 노인이 흘리는 시선이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예리하게 다듬어진 눈매에서 살기가 묻어나왔다.


쉬이 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처음 옥수의 객잔에서 만난 이래 혈령쌍귀와의 전투에서 함께 싸웠을 적에도 이런 눈은 아니었는데.


노인이 지닌 살수의 면모를 처음으로 엿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자를 놔주면 다시 찾아 죽이기는 어렵소. 천살문의 일원들은 목숨을 보전하는 재주 하나만큼은 뛰어나니.”

“하핫. 하오문의 그림자가 제게 원한이 있나 보군요.”

“......”


말없이 백연을 바라보는 팔영.


그 시선을 담담히 받으며 백연은 고민에 잠겨들었다.


‘죽이고 가면.’


천살문과의 반목이 확정적이다. 대주라고 했는데, 부하가 저기 저 덩치 하나만 있을리가 없다. 아마도 근처에 대원들이 있겠지. 살행이라면서 이리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암살의 범주는 이미 벗어났다.


그러나.


‘무덤에 몰려든 변수가 많아. 하나를 제거하고 갈 수 있는 기회다.’


일곱명의 일행. 백연은 일행의 실력을 믿었으나, 모든 변수를 통제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흑랑의 구출과 무덤에서 필요한 것을 챙겨 나오는 일. 최대한 속행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마교와 전면으로 붙는 것 만큼은 피해야 하는 상황이니.


그렇기에 더욱 변수를 남겨두고 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천살문의 대주가 어찌 움직일지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당신은.”

“참월(斬月)대주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이곳의 상황을 봤을 테지. 무인들이 몰려들었다. 하나같이 무덤이라는 장소에 들어가려 하는데.”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살문의 살수는 정보 취합에도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들이 목표를 쫓아 여기 왔다는 소리는 이곳의 상황에도 정통하다는 의미.


그리고, 그들의 살행 목표가 이곳에 있다는 의미는 하나에 가까웠다.


“천살문이 받은 의뢰, 그 목표가 되는 이도 마찬가지인가?”

“......흐음. 본래 의뢰 내용은 절대적으로 비밀입니다만.”


참월대주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여휘검을 막아서고 있던 쌍검을 천천히 거두면서였다. 목을 따라 흘러내리는 핏물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도 태연했다.


“일단은 목숨이 중하겠지요?”


백연의 말을 부정하지 않는 모습.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눈매를 찡그렸다 편다. 이어지는 말이 매끄러웠다.


“실은 목표를 오랜 기간 추적하는 중입니다. 동쪽까지 갔다가 다시 서쪽으로 한참을 오니 죽을 맛인데. 이곳에 또 와서 보니 이게 무슨 난리인지.”


툭툭 내던지는 말 속에서 백연은 이상함을 느꼈다.


‘동쪽이라고?’


청해에 본거지를 둔 천살문이다. 동쪽으로 가면 정파 무림의 영역일텐데. 동쪽으로 갔다 왔다는 소리는, 의뢰의 대상이 정파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의미였다.


그 미묘함을 알아챈 사람은 백연뿐이 아니었다. 찰나 꿈틀거리는 팔영의 눈썹, 그리고 곁에서 움직이는 사람이 있었다.


“너. 사파의 살수. 방금 뭐라고 했지?”

“흥미롭군요. 언뜻 매화를 보았다 했더니, 화산의 기재가 이런 곳에 와 있을 줄이야.”

“정파 무인을 살해하려는 건가? 이 자리에서 네놈을 베어버리기 전에 대답하면 좋겠군.”


나직히 깔리는 목소리. 검끝에 연분홍빛 검기를 매단 유성이었다.


날카로운 기세가 스멀스멀 일어나고 있었는데, 진득한 살기가 묻어나온다. 언제든지 참월대주를 죽여없앨 것만 같은 기운이었다. 저 검끝에서 흐르는 연분홍빛 검기는 찰나에 살수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 있을터.


“설령 그렇다 해도 문제가 있습니까?”


그러나 참월대주의 행동은 더없이 평온했다. 그가 검룡을 응시하며 작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모습이 보였다.


“정파 무인이라고 모두가 선인(善人)은 아니지요. 더해 이곳, 천마의 무덤이 있다는 소문이 나돈 것으로 아는데. 그런 장소를 찾아올만한 정파 무인이라......”


그렇게 말하며 검룡을 슬쩍 쳐다보는 눈길이 역으로 상대방을 가늠하는 듯 했다. 당장이라도 죽을 위기에 처해 있는 살수답지 않았다.


“뭐, 굳이 한마디 덧붙이자면 아마 검룡 당신과는 일절 관계가 없을 사람입니다. 안심하시지요.”

“네 녀석......”

“유성, 잠깐만.”


백연이 나서며 유성을 제지했다. 잠시 살수를 노려보던 그가 검끝을 서서히 아래로 내렸다. 여전히 그의 몸을 따라 흩어져 나오는 내공 기파는 느껴졌으나, 그 정도면 충분했다.


여차하면 출수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자신도 마찬가지였으니.


“그럼 당신은 무덤에 진입할 생각인가?”

“천살문은 한번 받은 의뢰는 완수합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그렇다 하면, 당신은 팔영의 말대로 잠재적인 위협인데.”


백연이 여휘검을 겨누며 고개를 기울였다.


“살려둬야 할 이유는?”


천살문과 나중에 반목하더라도 그 짐은 하오문과 나누어 진다. 더해 그들은 복수를 해야 할 일이 있다 해도 함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살문의 정체성이란 그러한 것이었다. 살수들은 살문을 구성하는 조각일 뿐. 사라지면 바꿔 끼는 물건이다.


죽이면 일이 귀찮아지겠지만, 당장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죽이지 못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눈앞의 참월대주도 잘 알고 있을 터.


“......거래를 하지요.”


이윽고 고민을 하던 대주가 입을 열었다.


“제 부하와 저를 이대로 보내주는 대가로, 두가지를 약조하는 것으로.”

“당신이 지금 거래를 제안할 위치는 아닐텐데.”

“들어보고 결정하시면 됩니다.”


가벼이 웃은 대주가 말을 이었다.


“우선 저희 살문은 그쪽이 무얼하든 방해되지 않게 하지요. 무덤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맡은 바 의뢰를 완성하려 할 뿐.”

“그리고?”

“한가지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백연이 가만히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자가 지금 자신에게 줄 수 있는 정보가 있다고? 무엇일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살문은 정보 조직이 아니다. 정보력이 뛰어난 것과 별개로 그 범위는 협소하다. 하오문 천라방에서 얻을 수 있는 것 이상의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암화(暗火) 백연. 맞지요?”


이어지는 대주의 말은 백연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하오문이 아닌, 오직 살문에서만 얻을 수 있을 정보.


“본 살문에서는 거절했습니다만......당신에 대한 암살 의뢰가 있었습니다.”



※※※



타다닥.


내뻗는 발걸음의 소리가 조용했다. 제각기 기파를 휘감고 산기슭을 질주하는 중이였다.


‘암살 의뢰라.’


직전 천살문의 대주를 놓아준 뒤였다. 그가 알려준 정보가 자꾸만 백연의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그만큼 당황스러운 소식이었던 탓이다.


‘크게 이상할건 없어.’


그에게 원한을 가질 자들이 없다고는 말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개중에는 암살을 사주하려 하는 자들도 있을 터.


다만 그 대상이 천살문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사도 육진의 일원. 살문이라고는 하지만 그 규모가 거대하다. 사도 육진 내에서 비교했을때 작은 방파일 뿐. 그 규모와 위세는 어지간한 문파를 아득히 상회한다 했다.


아무나 의뢰를 할 수 없는 구조라는 것이다. 단순히 천살문에 의뢰를 넣는 것 만으로 엄청난 비용이 소모될 터이니.


“걱정마, 사제.”


질주하는 그의 곁에 따라붙은 목소리. 나직하고 차분한 소홍의 음성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시선을 틀어 옆을 보자 언제나와 같은 표정의 소홍이 화신풍 바람을 휘감은채로 내달리고 있었다.


“천살문은, 적대 안해. 하오문을.”

“정보를 얻어야 하니까?”

“응.”


답하는 목소리가 여상했다. 그런 사형을 보며 백연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고마워. 사형은......”


백연은 말끝을 흐렸다.


방금 전 천살문의 대주가 나타났을때 소홍이 보였던 반응. 그는 소홍이 살수 훈련을 받은 것을 알고 있었다. 정황상 보건데 아마 천살문과 관련이 있거나, 아니면 천살문의 일원이었겠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걱정마.”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이 소홍이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가 가볍게 백연의 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거나, 잘 보관해둬.”

“그 말이 맞소. 천살문이 그걸 내어주는 경우는 흔치 않으니.”


그 사이 다가온 팔영. 아까 전의 날카로운 기세는 흩어져 사라진 노인의 모습이었다. 그가 백연의 품을 슬쩍 응시하고는 말했다.


“의외였소. 그들은 기밀을 엄수하는 것에 있어서는 무겁기 그지없는데. 당신을 노리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물건까지 내어주다니.”

“이것 말입니까?”


백연이 품속에서 날카로운 비도 한자루를 꺼내들었다. 손잡이와 날의 구분이 없이 사선으로 비틀린 쇳덩이. 비도라 하기 어려운 형상을 지닌 그것 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천살문의 대주가 주고간 물건이었다.


“표면적으로는 한번 의뢰를 할 수 있는 증표라 했으나 정확히는 천살문의 초청장에 가깝소. 그들의 본단에 방문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인데.”

“있으면, 만날 수 있어. 부문주는.”


소홍이 거들었다. 천살문의 초청장을 스치는 사형의 눈길에 잠깐 복잡한 감정이 맴도는 것이 언뜻 보였으나, 이내 사라졌다.


사형의 사정이 궁금했으나,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언제고 때가 되면 알아서 풀어놓을 터.


‘부문주를 만날 수 있다라.’


천살문주 바로 밑. 천살문을 총괄하고 있다는 인물. 그런 이를 만날 수 있는 증표다. 분명 그들도 무언가 생각을 가지고 내줬음이 분명했다. 아니라면 자신에게 우회적으로 건네는 호의의 표시인건지.


‘어느쪽이든, 당장 적대할 세력은 아닌듯 보여.’


작금의 상황 속에서 변수가 한가지 줄어든 것이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공자, 어느쪽으로 가야 하나요?”

“이쪽입니다.”


루주의 물음에 여상히 답하며 걸음을 틀었다. 머릿속 한구석에 살문에 대한 생각을 치워놓으면서였다.


점차 눈에 들어오는 주변 풍경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사방으로 갈라진 산길과, 제멋대로 뻗쳐있는 거대한 나무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하나 결이 존재했다. 백연 자신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 거대한 법칙이 작용하는 장소.


오랜만에 다가오는 익숙한 주변의 풍경에 백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쿠구구궁.


귓가에 들려오는 소음이 거칠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소란이 아직도 거대했다. 밤새 지치지도 않고 연이어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


‘점차 가까워지고 있어.’


전장의 소음은 멀어지고 있지 않았다. 몇몇은 멀찍이 떨어진 방향에서 들려왔으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소음은 아니었다. 그가 입구쪽을 향해 달려갈 수록 커지고 있는 소리.


“모두 대비하시죠. 아무래도......”


거의 흔적만 남은 갈림길을 거침없이 선택해 내달리던 백연이 중얼거렸다. 그의 말에 일행이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싸움 없이 들어가기는 힘들 듯 합니다.”


나직히 뇌까렸다. 이윽고 그들의 시야가 서서히 트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대기를 따라 퍼져오는 짙은 혈향이 느껴졌다. 앞쪽에서 들려오는 요란한 소리. 병장기가 부딪히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난무한다.


동시에 주변의 풍경도 변화했는데, 이때까지 어지럽게 뻗어있던 나무들의 결이 어느새 한 방향으로 맞춰져 있었다. 모두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한쪽을 가리키고 있는 모양. 나무들이 뻗어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달려나가는 순간.


화악.


찰나 누가 손으로 갑자기 장막을 걷어낸 듯 시야가 탁 트여졌다. 갑작스레 나무들이 사라지며 너른 대지가 드러났다. 머리 위를 가리고 있던 장애물이 사라지자 별밤이 쏟아질 듯 드리운 창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화수(魔火手).”


콰과광!


벽력같은 기합성과 함께 폭음이 터져나왔다. 일순 허공에 떠오른 신형이 보였는데, 화려한 색의 승복을 휘날리며 뛰어오른 이의 손바닥에서 검붉은 기파가 퍼져나왔다. 웅대한 기파가 짧은 순간 거대한 손바닥의 형태로 일렁이는가 싶더니 그대로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그 아래 자리한 것은 검은 기운을 뚝뚝 흘리는 마교도들. 일제히 손을 뻗으며 기운을 토해내는데, 대여섯에 달하는 이들이 뿜어낸 마기가 그대로 검붉은 기파와 마주치며 허공에서 반발했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놈!”


노호성을 울리며 손을 마구 내치는 승려. 그의 손끝에서 연이어 뇌명이 터져나오며 마교도 둘을 꿰뚫는다. 그 옆에서는 한 무인이 입을 굳게 다물고는 제 몸만한 도끼를 마구 휘두른다.


온 사방을 가득 채운 무인들. 특별히 주도권을 쥐었다 할 세력이랄 것이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모두를 적대하며 손을 겨루는 모습. 새외 무림과 마교도들이 섞여든 대지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개중에서도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백연의 시야 오른편 끝자락. 길다란 장포를 뒤집어쓴 무인들이 나무를 등지고 손끝을 매만지고 있는 모습. 그들의 소매 아래로 언뜻 언뜻 보이는 것은 붉은 글씨가 새겨진 괴황지였다.


‘술법무공을 쓰는 이들도 있나.’


그들과 비슷하게 전장을 관조하고 있는 몇몇 무인들. 제각기 긴장을 늦추지 않으며 뛰어들 시점을 가늠하고 있는 모양새다.


개중 몇은 세력 없이 홀몸으로 걸음한 모양새였는데, 가면을 쓰고 두 자루 검을 비껴맨 검객이나, 짧은 활을 들고 주변을 쉴새없이 살피고 있는 궁사같은 이들이 눈에 띄었다.


수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 전장을 마주하는 순간 한눈에 백연이 파악한 것들이었다. 극히 짧은 시간 사이에 가늠을 끝낸 백연이 일행을 돌아봤다.


“준비하죠. 바로 들어가는게 맞을 듯 싶습니다.”


이곳에서 발목이 잡히면 안된다.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거대한 전쟁터였다. 보아하니 이들은 입구의 위치는 대략 가늠했지만 들어가는 방법은 아직 모르고 있는 상황.


“하지만, 공자. 이곳은......”


루주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사방을 더듬었다.


“길이 없는데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산맥의 끝자락. 어디인지 모를 위치에 자리잡은 너른 대지는, 절벽의 위였다. 탁 트인 시야 바깥쪽에 걸친 것은 깎아지른듯한 낭떠러지. 아래로는 끝없이 깊은 허공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보이게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니.”


답하며 왼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만히 전장을 관조하는 이들. 지금쯤 저들도 새로 나타난 이쪽을 인식했을 것이다.


‘휘말리면 좋지 않아.’


이쪽이 수상한 낌새를 보이는 순간 달려들 이들이다. 아예 손을 섞지 않고 입구에 들어서는 것은 불가능할 터.


백연은 서서히 기파를 끌어올렸다. 동시에 그의 시야 한켠을 따라 서서히 밝아지고 있는 하늘이 보였다.


석양이 질때 들어온 산맥. 어느새 밤을 지나 새벽이 움터오고 있었다. 어느 정도는 의도한 바였다. 그가 기억하는 술법진의 출입법은 여럿 있었으나 가장 간단한 것이 이쪽이었으니.


“다들 잘 들으세요. 제가 신호하면, 우리는 뜁니다.”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들 그의 말을 들었는지 천천히 기파를 일으키는 모습. 가급적이면 최대한 덜 싸우고 빠져나가는 것이 좋다.


“저 위, 절벽으로.”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는 당황이 섞인 눈빛이 그를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윽고 모두가 수긍한 듯이 숨을 가다듬었다. 그들을 보며 백연이 재차 덧붙였다.


“지체하지 말고 몸을 날려야 합니다. 저 바깥으로.”

“......노부의 목숨이 오늘까지일 줄은 몰랐구려.”


팔영이 중얼거리며 주름진 입매를 끌어올렸다. 선화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떨어지면 뼈도 못 추리겠는데.”


단휘가 슬쩍 절벽 끝을 쳐다보며 뇌까렸다. 그러면서도 빼지는 않는 모습.


소홍과 무진, 유성은 담담한 얼굴로 검을 쥐고 있었다. 그들을 전부 감각에 담으며 백연은 하늘을 가늠했다.


서서히 밝아져 오는 하늘. 그 끝자락에 한줄기 흐릿한 붉은 선이 느릿하게 걸려오는 순간이었다.


“지금.”


백연이 뇌까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일행이 보법을 밟았다. 미리 준비하고 있던 기파가 한껏 터져나오며 거친 광풍을 일으켰다. 한순간 전장의 시선이 이쪽으로 쏠릴 정도로.


그리고 그에 즉각 반응하는 이들이 있었다. 여태껏 전장을 관조하고 있던 이들. 변수가 터져나오는 것을 보자마자 움직인다.


일행이 일제히 보법을 내딛는 순간 짓쳐오는 인영들.


‘안되지.’


하지만 그들의 질주가 일행에 닿는 일은 없었다. 모두가 보법을 펼치는 순간, 백연은 이미 다른 기파를 끌어올리고 있었다. 허공에 뻗어나간 그의 여휘검이 시린 빛을 날에 담으며 번뜩이고.


카앙!


첫 수는 화살이었다. 사람에 앞서 날아온 지극히 쾌속한 죽음의 선율. 여태껏 관망하고 있던 궁사의 손이 빛살처럼 움직였다. 그 자신도 화살처럼 질주하면서 쏘아보낸 것이었다.


받아친 손아귀에 느껴져 오는 충격이 강렬했다. 묵직한 내공이 실린 화살 세발을 일검에 쳐내며 백연도 기파를 몸에 휘감았다.


동시에, 그의 손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품속에 담아둔 선아의 단검. 찰나 한자루가 백연의 손에 들렸다가, 사라졌다.


“흠?!”


짤막하게 놀라는 소리와 함께 궁사가 몸을 뒤틀었다. 손에 들고 있던 활을 봉처럼 휘두르는 모습. 묵직한 소리가 귓가에 틀어박혔으나 백연은 이미 궁사에게서 눈을 뗀 상태였다.


‘가장 먼저 반응한 이가 셋.’


궁사와 한 승려, 그리고 마교의 교도로 보이는 검붉은 옷의 사내.


쿠웅.


단검을 궁사에게 던지는 것과 동시에 이미 진각을 내딛고 있었다. 그의 몸에 실린 기파가 일제히 발바닥 용천혈을 따라 폭발하듯 터져나왔다. 일행을 향해 짓쳐가고 있는 승려의 신형.


“어딜.”


백연이 뇌까리는 순간, 주변의 풍경이 길쭉하게 늘어났다. 찰나 흩어진 백연의 신형 뒤쪽으로 자색 안광이 길다랗게 늘어지며 잔상처럼 남았다.


일보의 보법. 땅에 거의 붙듯이 몸을 내리깐 백연이 그대로 질주해 검을 내쳤다. 보법 속도를 검에 담은채였다. 삽시간에 터져나온 강렬한 불꽃이 그대로 승려를 향해 짓쳐 들어갔다.


“잡것이?”


일순 놀라는 표정을 눈에 담을 새도 없었다. 일행에게 짓쳐가던 승려가 그대로 몸을 뒤틀며 손을 뻗었다. 대기를 저미는 강렬한 뇌명이 담긴 장법. 소뢰음사의 뇌전을 닮은 무공이 백연의 머리를 노리고 뻗쳐왔다.


‘우상단.’


번뜩이는 시야 속에서 백연은, 미리 보았다. 선명하게 그려지는 궤적을 따라 자연스레 고개를 틀며 그대로 검을 내친다. 자령안 안법이 그려낸 투로. 직후 승려의 장법이 그대로 백연의 머리 우상단을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작은 오차라도 있었다면 머리가 터져나갔을 법한 상황.


“어떻게......!”


그러나 백연은 실수하지 않았다. 장법에 얽혀든 그의 머리칼 끝자락이 터져나가는 것과 동시에, 소년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붉은 화염을 휘감은 검이 인지를 뛰어넘은 쾌속으로 가속했다. 검신을 따라 중첩된 기파가 연이어 터져나오며 그대로 승려의 어깨에 틀어박히고.


서걱.


귓가를 저미는 소리와 함께 승려의 몸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이미 백연이 지나친 뒤였다.


그와 함께 백연의 시야에 막 절벽의 끝에 도달한 일행이 보였다. 가장 먼저 지체없이 몸을 날리는 무진. 그의 뒤를 따라 단휘와 팔영이 몸을 던지고.


‘이런, 조금 늦었......’


백연의 시야 끝에 걸린 검붉은 옷의 사내. 그가 한발 앞서 일행에 주먹을 내치려 하고 있었다. 승려를 베느라 지체된 찰나의 시간 때문이었다.


눈을 부릅뜬 백연이 그대로 몸에 기파를 둘렀다. 세맥이 터져나갈 정도로 가득 기파를 채우며 교도를 향해 질주하려는 순간이었다.


휘이이.


귓가에 파고드는 바람 소리가 있었다. 동시에, 마교도의 옆에 나타난 한 인영이 있었다.


‘무슨?’


백연이 인지하지도 못한 순간 나타난 인영. 가면을 쓴 검객이었다. 어느 순간 그 자리에 처음부터 있었던 것 처럼 나타났는데, 그것을 본 것과 동시에 허공에 핏물이 터져나왔다.


귓가를 찟는 한줄기 휘파람 같은 선율.


소리를 듣기 전에 이미 마교도의 몸을 따라 핏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베는 순간을 인식하지도 못했다. 자령안 안법을 일으킨 채로 간극에 진입한 상태건만.


강자였다.


‘대응을......!’


백연이 입술을 깨물며 검을 내뻗으려는 그때.


“흐음.”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동시에 섬뜩한 감각이 일었다. 백연은 그대로 몸을 뒤틀었다.


온몸을 회전시키며 내딛던 보법 기파를 그대로 등허리에 싣는다. 무릎이 꺾이며 회전에 실린 힘이 척추를 지나 어깨 삼각근을 따라 손끝으로 내뻗어진다.


이어진 가속을 힘으로 전환시켜 검끝에 담아 휘두른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검격을 상대로.


다음 순간.


쩌어엉!


귀청이 터질 듯한 소리가 울리며 여휘검이 허공에 멈춰섰다. 절벽의 끝자락에 서서 검을 내뻗은 가면의 검객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를 마주하며 백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방금 자신이 펼친 검술. 눈앞의 검객이 내친 일격을 순전히 감각으로 예측해서 틀어막은 것이었다. 인지를 뛰어넘은 검격을.


일순 정적이 사방을 휘감았다. 저 아래 전장조차 순간 고요해진 상황.


이윽고 가면의 검객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목소리에 담긴 웃음기가 짙었다.


“재미있군요.”


작가의말

지각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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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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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네가 만든 마을 +5 23.09.13 5,385 100 18쪽
» 신강(4) +6 23.09.11 5,592 108 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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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신강(2) +5 23.09.06 5,832 111 21쪽
87 신강 +7 23.09.04 5,933 109 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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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검귀의 검, 곤륜의 검(6) +8 23.08.11 7,556 141 19쪽
76 검귀의 검, 곤륜의 검(5) +8 23.08.09 7,255 126 20쪽
75 검귀의 검, 곤륜의 검(4) +7 23.08.07 7,383 133 21쪽
74 검귀의 검, 곤륜의 검(3) +6 23.08.04 7,646 135 18쪽
73 검귀의 검, 곤륜의 검(2) +4 23.08.02 7,866 136 19쪽
72 검귀의 검, 곤륜의 검 +5 23.07.31 8,202 140 16쪽
71 검왕(4) +10 23.07.30 7,702 121 13쪽
70 검왕(3) +7 23.07.29 7,453 138 12쪽
69 검왕(2) +7 23.07.28 7,472 135 15쪽
68 검왕 +8 23.07.27 7,569 142 16쪽
67 마기 +5 23.07.26 7,594 134 14쪽
66 금원방(2) +5 23.07.24 7,759 142 16쪽
65 금원방 +4 23.07.23 8,219 13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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