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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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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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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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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4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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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2쪽

신강

DUMMY

※※※



“안된다.”


단호한 목소리가 어둑어둑해진 방을 울렸다. 그간 많은것이 바뀐 곤륜파 내에서 유일하게 제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공간.


장문인의 처소에 앉은 백연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어째서......”

“백연아, 몰라서 묻는게냐.”


희끗희끗한 머리칼 위로 희미한 불빛이 아롱진다. 초 하나만을 밝혀놓은 방안.


하오문과 손잡고 옥수에 오가는 상행을 호위하며 나름대로 돈을 벌어들이고 있는 곤륜파이다. 이리 돈을 아끼지 않아도 될 일인데. 운결은 자신의 처소에는 결코 돈을 쓰지 못하게 한다 했다.


그리 말하던 신웅 사숙조가 한숨쉬던 모습을 떠올리며 백연이 입술을 비죽였다.


“장문인께서 걱정하시는 바는 압니다.”

“아니, 너는 모른다.”


운결이 한숨을 내쉬며 펼쳐놓고 있던 책을 덮었다. 빼곡하게 새겨진 글자. 겉면에 새겨진 제목으로 보았을때 자령안의 비급인 듯 했다. 청율이 작업하고 있다더니 벌써 초본을 완성한 모양이다.


“용봉지회다. 검왕의 눈 아래에서 열리는 대회. 그보다 안전하기 어려운 곳이거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너와 단휘도 그에 포함될 뻔 했고.”

“......그건.”

“그 소식을 내가 언제 들었다고 생각하느냐? 무사하다는 연락이 오기 전까지 눈을 붙여본적이 없구나.”


입을 다문 백연이 물끄러미 운결을 쳐다보았다. 초로의 얼굴 위로 새겨진 주름이 진했다. 하고자 하면 할 말은 많았지만, 그의 표정에 선명히 드러난 것이 진심어린 걱정이었기에 쉬이 반박할 수가 없었다.


“네 일신의 무위가 뛰어난 것은 안다. 그 재능이 내가 여태껏 한번도 목도한 적이 없는 것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운결의 시선이 등 뒤 벽에 걸린 새하얀 검을 힐끗 스쳤다. 이윽고 백연을 향해 다시 시선을 고정한 운결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재능을 지닌 별들이 스러지는 광경도 너무 많이 보았다.”

“본디 무인은.”


백연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검을 목침으로 삼고, 죽음을 벗 삼아 살아가는 이들입니다.”

“그것이 위험을 찾아 몸을 던지라는 의미는 아니지 않느냐.”

“위험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일에 위험이 따르는 것이지요.”

“......하오문의 일이다. 그들과 분명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나 나는 곤륜의 장문을 맡고 있는 몸이다. 당연히 문파의 제자들이 우선이지 않겠느냐.”


그에 백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장문인. 생각해주시는 것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 중원의 구파에서도 해마다 죽어나가는 제자들의 수가 적지 않습니다. 일신의 안위는 스스로의 검으로 지켜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지요. 문파는 문도들을 지켜주는 성벽이 아니라, 그들이 돌아올 집입니다.”

“......”

“더해 필요성을 이야기하자면, 필요한 일입니다.”


현 무영방의 방주 대리. 그가 알기로 무영방주는 거의 대외적인 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다시말해 무영방의 실질적인 방주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은 흑랑이라는 의미.


그런데 지금 흑랑이 사라지면 그 세력구도가 깨어진다. 자연히 무영방을 위시한 한쪽 편의 힘이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할터. 그에 더해 지금 곤륜파를 지원하고 있는 세력의 가장 주축은 무영방이다.


“흑랑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사람이니까요.”

“방주 대리......”

“그리고.”


백연이 또렷한 시선으로 운결의 눈을 마주했다.


“장문인께서 해오신 일들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말이냐?”


반문하는 운결.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갈길 없는 아이들을 거두어, 입히고 먹이셨지요. 곤륜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들을 비호하셨는데, 그것이 협(俠)이 아닙니까.”

“허어.”

“작게는 방주 대리를 구하는 것도 협이요, 크게는 그 과정에서 신강의 동태를 살펴 민생을 위협할 변고가 없는지 살피는 것도 협입니다.”


말하던 백연이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달리 장문인의 의지를 잇는 협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허허. 백연아.”

“예?”

“네 언변이 북경에 앉아계실 황상도 구워삶겠구나. 어디서 궤변을 이리 배워와서.”

“아하하.”


생글거리는 백연을 바라보던 운결이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연아.”


차분한 목소리에 백연도 웃음기를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장문인.”

“방주 대리가 네 친우더냐?”

“......예?”


반문한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흑랑이 친우냐고? 생각해 본적 없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고민이 복잡하지는 않았다. 잠시 눈을 또르르 굴린 백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장에서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 친우라고 하면, 예. 그렇다 할 수 있겠지요.”


그리 많이 만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호오를 느끼는 것에 있어 언제나 긴 시간이 필요한 법은 아니다. 당장 전장에 임했을때 그의 등을 찌르지 않을 것이라 믿고 맡길 수 있다 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백연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그렇구나. 네가 정말 그리 생각한다면......”


잠시 눈을 감은 운결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허락해주지 않아도 가겠구나.”

“그건......”


운결이 눈을 떴다. 걱정과 미소가 뒤섞인 얼굴의 표정이 복잡했다.


“나도 그러했으니 말이다.”

“장문인께서 말입니까?”

“협행이고 민생이고 입에 발린 이유들은 제쳐두거라.”


희미한 미소를 건 운결이 중얼거렸다.


“네가 친우를 구하러 간다 하니 말리기 어렵겠구나.”

“장문인!”


백연이 반색했다.


쉬이 허락을 얻어내기 어려울거라 생각했는데, 일이 이리 풀릴줄이야. 나름 긴 설득을 각오하고 온 상황이었다. 빠르게 잘 풀렸으니 다행이라 해야할까.


하지만 운결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운결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출발 일자가 칠주야 뒤라 했느냐.”

“그리 하려 했습니다.”

“사흘만 미루거라.”


백연은 반문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어려운 허락을 얻어낸 상황이다. 사흘 정도 일정을 미루는 일이야 크게 어려울 것 없다. 그 자신도 이곳에서 준비해야 할 것이 적지 않으니.


“감사합니다, 장문인. 최대한 이른 시일 안에 돌아올테니 너무 걱정 마시지요.”

“네가 그리 말한다고 걱정이 안되겠느냐. 최대한 조심하거라. 될 수 있으면 마교의 교도들과 맞붙는 일은 없도록 하고.”

“노력해보겠습니다. 본래 무덤의 위치라면 마교와 크게 마주칠 일은 없긴 합니다만......”


지금은 모를 일이다. 신강의 외곽에 위치한 검귀의 무덤 일대는 마교의 영역이 아니었다. 아니, 그가 살던 시절에는 신교의 영역이라 해야겠지. 하지만 그로부터 백년의 세월이 흘렀고, 지금은 어찌 되어 있을지 모른다.


‘아마 무덤 자체가 마교의 지배에 들어간 것은 아닐텐데.’


그 공간을 설계한 녀석의 솜씨는 그리 허술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백연은 무덤 내에 마교가 있으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가봐야 알 일이다.’


조만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터이다.


“그래. 이만 들어가보거라. 밤이 늦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시간이 되는대로 무궁각에 한번 들르거라.”

“청율 사숙께서 부르셨습니까?”

“맞다. 이 자령안 비급의 마지막 부분을 조금 확인해달라고 하더구나. 그리고 심법도 몇가지 물을게 있다고.”

“알겠습니다.”


끄덕인 백연이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장문인께서도 평안한 밤 되시길.”

“잘 자거라.”


정중하게 포권을 취한 백연이 문 밖으로 사라지고.


조금 뒤 소년의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운결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이리 연락을 다시 취하게 될 줄은 몰랐거늘.”


자리에서 일어난 운결이 한켠에서 종이 묶음과 붓을 꺼내들었다. 익숙한 손길로 먹을 갈아낸 그가 붓을 들고는 천천히 서신 한장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



사박.


눈이 쌓인 산기슭 아래. 시리도록 투명한 호수가 빛살을 따라 일렁였다. 바닥까지 내려다보이는 작은 호수는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얼어붙지 않고 있었다.


달리 특별한 호수여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 호수 위를 따라서 휘도는 바람이 지나치게 따스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인위적으로 누군가 봄을 한자리에 묶어놓은 듯이.


“크으. 좋구먼. 한겨울에 이런 물놀이라니.”


그 호수 언저리. 투명한 물에 발을 담그고 앉은 사람이 있었다. 덥수룩한 회백색 수염과 머리칼이 지저분한 노인이었는데, 스스로는 그 외양을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했다.


사방 천지에 산등성이밖에 보이질 않는데, 대체 어디서 구해왔는지 술병을 하나 들고 홀짝이는 노인. 그 형태가 꼭 주정뱅이와 같았다. 반쯤 풀린 눈으로 호수에 걸터앉아 술을 마시는 모습이 그러했다.


“이런 곳에서 며칠 유유자적 놀다가면 소원이 없겠구나.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풀린 눈으로 술병을 기울이며 중얼거리는 노인. 그때 그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한참 바쁘신걸로 압니다만.”

“으음?”


슬쩍 뒤를 돌아본 노인이 어깨를 으쓱였다.


“바쁘지. 바빠. 나도 다 때려치고 나와서 자네처럼 살까 싶네. 처음 개방에 들어왔을 적에는 이리 묶여 사는 삶을 생각하지는 않았네만......”

“묶여 사십니까? 천하에서 가장 빠르신 분이.”

“걸음이 빠르다고 자유로운겐가? 에잉.”


쯧쯧 혀를 찬 노인이 술병의 마개를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가볍게 손을 뻗은 노인이 양손을 비비는 순간이었다.


화르르륵!


손끝을 타고 피어오른 불길이 한차례 맹렬하게 타오르더니 순식간에 흩어졌다. 풀려있던 노인의 눈이 삽시간에 맑게 변했다.


가볍게 몸을 일으킨 노인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중얼거렸다.


“기껏 마셔놓고 주독을 빼야 한다니. 웃긴 일이구먼.”

“그것 때문에 삼매진화(三昧眞火)를 쓰시는겁니까?”

“이만한 해독법이 없네. 자네도 취기를 빠르게 몰아내야 할때면 써봐.”

“기억만 해두겠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침착한 목소리. 맑은 음률이 바람을 타고 흔들린다. 주변을 따라 휘도는 바람에 섞인 내공을 인지하며 노인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한 청년이었다.


길다란 흑색 머리칼을 반쯤 묶어 올린 모습이 단정했다. 미려하게 떨어지는 눈매가 부드러웠는데, 그 자체로 단단한 느낌이 섞여 있었다. 마치 그의 성정을 대변하는 듯한 차분하면서도 수려한 외모. 그러나 그의 얼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하나였다.


마치 봄바람을 그대로 형상화 한 것 같은 연하늘의 눈동자. 그것이 그의 얼굴과 어우러져 한번이라도 보면 잊어버리기 어려울 외양을 완성시켰다.


그 모습을 눈에 담으며 노인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래. 서신은 다 읽어보았나?”

“예.”

“무슨 내용인가? 자네에게 서신을 보낼 사람이 대체 누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덕분에 내 바쁜 와중에도 여기까지 걸음했네. 궁금해서.”

“친우입니다.”


청년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가끔 연락을 주고받는 오래된 친우지요.”

“자네랑?”

“예. 전번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냈다가, 하루만에 철회하던 녀석이었는데. 이번에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청년의 말에 노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의 도움을?”

“......사사로이 제 힘을 요구하는 녀석은 아닙니다. 그럴 성정도 아니고요. 오히려 본인의 사정을 너무 돌보지 않아서 문제인데.”

“흐음.”

“이번에는 제 힘이 필요하다는군요. 가봐야겠습니다.”


청년의 말에 노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가본다고? 어디를? 아니, 자네씩이나 되는 사람이 서신 한장에 그리 움직인다고?”

“제가 뭐라고 그러십니까. 그저 낭인 검객 하나인 것을.”


여상히 웃는 청년의 모습에 노인이 헛웃음을 뱉었다.


“이유를......아니, 이유는 되었네. 어디를 가는지나 말해주게. 어디 가는지도 말 안해줄 생각은 아니겠지? 노부가 중원 전역에서 새로운 일이 터질때마다 얼마나 뛰어다니는지 자네도 잘 알지 않나.”


끝에 가서는 잔뜩 피로함이 담긴 노인의 목소리에 청년이 웃었다.


“신개(神丐)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알려드리지요. 잠시 신강 나들이를 다녀오려 합니다.”

“......뭐?”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한시가 바쁜지라.”


노인, 개방주 신개가 입을 쩍 벌리는 순간, 그의 시야 앞이 흐릿해졌다. 한순간 청년의 허리춤에 걸린 두자루의 검이 살풋 빛나는 듯 싶더니, 다음 순간 거친 칼바람이 맹렬히 휘몰아쳤다.


찰나지간 일어난 격렬한 검풍. 청년의 보신경이었다. 지고한 경지에 이른 신개의 안법으로도 인지조차 하기 어려운 극한의 쾌(快).


직후 바람이 멎자 청년의 신형은 이미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텅 빈 호숫가에 선 개방주가 허탈한 표정으로 덥수룩한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미치겠구나. 이놈의 검객들은 제멋대로 구는게 취미인고. 검왕은 갑자기 용봉지회의 책임을 진답시고 가주에서 물러나질 않나, 검제는 사파의 씨를 말려버릴 요량이고.”


중얼거리던 신개가 뒤편의 호수를 힐끗했다. 바깥에서부터 천천히 살얼음이 오르고 있는 호수의 외양. 직전까지 주변을 채우고 있던 따스한 바람이 사라져 있었다.


그 풍경을 눈에 담은 신개가 한숨을 뱉었다.


어쨌든 벌어진 일은 벌어진 일. 적어도 청년은 어디로 향하는지 정보는 주고 갔다. 그곳이 신강이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별이, 신강에 떠오르겠구나.”


천천히 얼어붙는 호수를 쳐다보던 신개가 문득 뇌까렸다.



※※※



열흘은 바람같이 흘러갔다. 그 사이 백연은 몸이 열개라도 모자를 정도로 바삐 움직였다.


무공을 정리하고 가르치고, 스스로의 수련을 거듭하며 사숙조와 사숙, 사형들에게 무공의 뼈대를 가르쳤다. 구결의 기초는 가르쳐놓고 가야 이들이 수련을 할 수 있을 터이니. 그 와중에 하오문을 오가며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일도 병행했다. 그야말로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이었다.


“오자마자 가는거야? 또?”


아흐레째 되는 날, 잠시 들른 대장간에서였다. 한숨을 푹푹 내쉰 선아가 단검 몇자루를 건내주었다.


“가지고 다녀. 투척하기 좋게 무게를 조절해놨으니까. 너 암기도 다룰 줄 알지?”

“다룰줄은 아는데, 내가 암기를 쓸줄 아는걸 어떻게 알았어?”


선아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너는 다 잘하니까.”

“.......아하?”

“그러니까 말이야.”


백연에게 단검을 떠안기듯 건넨 선아가 말했다.


“이번에 돌아오면 야장 일도 가르쳐 줄게.”


그 말을 듣자 문득 백연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말을 안했는데.”

“응?”

“백철 말고 다른것도 다룰 수 있지?”

“날 뭘로 보는거야. 당연하지.”


그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것저것 다 가져오면 되겠네.”


검귀의 무덤 안에는 귀중한 금속이 많았다. 안에 남은 병장기가 한둘이 아닐 터인데, 그것들만 가져와도 엄청난 양이다. 선아에게 도움이 될 터였다. 희귀한 금속은 언제나 부족했으니까.


“......그런걸 기대한건 아닌데. 어쨌든 잘 다녀와. 다치지 말고. 알았지?”


짤막한 인사가 여러번이었다.


그렇게 열흘째 되는 날 새벽.


“갑시다.”


팔영의 중얼거림과 함께 일행은 길을 출발했다. 일곱에 달하는 일행. 각기 말 한필씩을 끌고 안개가 깔린 산등성이를 따라 걸었다. 아침의 시리도록 찬 공기가 햇살에 닿아 부드러운 안개를 자아내고 있었다.


저벅거리는 발소리와 두런두런 들려오는 목소리들. 백연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걸음을 옮겼다.


왠지 기분이 묘한 탓이었다. 신강으로 가는 길이라 그런지.


“걱정되나요?”


갑자기 옆에서 물어오는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자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루주의 얼굴이 보였다.


“너무 생각하지 마요. 흑랑은 그리 약한 사람이 아니니까.”

“......아. 그렇죠.”

“으응? 흑랑을 생각하고 있었던게 아닌 모양이네요. 표정이 묘하길래 걱정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쿡쿡 웃는 루주의 얼굴에 백연이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잠깐 다른 생각을 좀.”

“무슨 생각인지 물어도 될까요?”

“그냥.”


백연이 잠깐 말을 골랐다.


“옛날 생각이 좀 나서 말입니다.”


신강. 마도가 자리잡은 영역이다. 그 길거리와 마을, 도시들. 무질서와 질서의 경계에 얽혀있던 삶의 터전에 살아가는 이가 수없이 많았다. 백연 자신도 그들 중 하나였고.


실로 오랜만에 돌아가는 것이다. 시일로 따지면 백여년. 하지만 그 자신에게는 백여년이 아니었다.


잠시 떠나온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듯한 묘한 기분이었다.


“백연 공자가 옛날 생각이라고 말하니까 이상하네요.”

“왜 그러십니까?”

“아니 그야 공자는 나이가......”


말하던 루주가 입술을 비죽였다. 화장을 걷어내 평소보다 수수해진 외양이 기품을 덜어내고 생기를 더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표정. 루주는 예상외로 활발함이 넘치는 성격인 듯 했다.


“말 안할래요. 아아, 나도 꽃다운 나이가 있었는데.”


그리 말하며 스르륵 일행의 뒤편으로 빠지는 모습이 재밌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산등성이를 벗어난 일행.


뒤편에 보이는 곤륜산맥의 모습이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언제나 곤륜을 서편에 두고 동쪽으로 말을 달렸건만, 이번 여정은 그렇지 않았다.


중원의 서편을 가로막은 거대한 자연의 장성. 그것을 뒤로하고 서쪽으로 더 나아간다. 마도의 영역인 신강을 향해 달린다는 것이 이렇게 실감날 수가 없었다.


주변에 아무런 위험도 없는 것을 확인한 백연이 몸을 훌쩍 날려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조금 서두르지요.”

“그게 좋겠구려.”


팔영이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일행이 하나씩 말에 올랐다.


히히힝!


각기 준마에 올라타고 곧장 박차를 가했다. 바닥을 짓치는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 가장 앞서나가는 것은 백연이었다. 하오문의 두 사람이 길을 안내하겠다 했지만, 백연은 그런 것이 필요 없었다. 질리도록 오가본 길이니.


‘조금 달라졌네.’


예전에는 선명하게 다져져 있던 길이 이제는 거의 흐릿하게 사라져 있다. 과거엔 마도와 중원의 교류가 있던 시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은 듯 보였다.


흐릿한 길을 타고 내달리는 걸음이 빨랐다. 차가운 바람결이 얼굴을 훑으며 뺨을 얼리고 지나쳤다. 하늘에 낮게 박힌 태양빛이 대기중에서 흩어지며 사방에 빛을 뿌려댔다.


빠르게 스치는 풍경 속에서 팔영이 중얼거렸다.


“날이 춥구려. 가는 길에 묵을만한 객잔이라도 있을련지.”

“아마 있긴 할겁니다. 본격적으로 마도의 영역이라 하려면 꽤 먼거리를 가야하니.”

“있어요. 서장에서부터 중원까지 오가는 상행들이 몇몇 있으니 그들을 위한 마을들도 있죠. 가장 가까운 곳이 아마 이대로 네시진 정도......”


루주의 말을 귀에 담으며 말을 내달리기를 한참이었다. 그렇게 하늘에 떠오른 태양이 어느새 석양에 가까워진 시점.


문득 백연은 바람에 실린 향이 진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야 저편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결에 실린 향. 너무나 미미해 쉬이 잡아내기 어려웠지만, 분명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의 온도가 높다.’


차가운 칼바람에 실린 약간의 온기. 그 기운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혈향이 코를 찔러왔다.


“백연.”


어느새 그의 곁으로 말을 몰아 다가온 유성이었다. 백연을 쳐다보는 그의 얼굴이 굳어 있었다.


“피냄새가.”

“나도 느꼈어.”


시선을 교환한 두 소년이 그대로 박차를 가했다. 삽시간에 말들이 속도를 더하며 땅을 박차고 달려나갔다.


그렇게 질주하기를 잠깐. 점차 진해지는 혈향의 방향으로 달려나가던 두 사람이, 이윽고 야트막한 언덕의 꼭대기에 다다라 멈춰섰다.


그 너머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


백연의 표정이 굳어들었다.


시야 저편 너머에 깔린 불길. 육안으로는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멀리 떨어진 위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를 잠식하는 불꽃의 크기가 너무나도 거대했다. 아직은 낮임에도 불구하고 눈부시다 여길 정도로.


“저게 무슨.”


곁에서 중얼거리는 유성의 목소리에도 황망함이 담겨 있었다. 그만큼 강렬했다.


식별하기도 어려운 거리에서 느껴지는 열기. 찰나이지만 겨울임을 잊어버리게 만들 정도로 후끈한 염열이 대기를 타고 전해져온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열기 속에 섞인 혈향이 코를 찌를 정도로 짙었다. 악취에 가까운 냄새.


언뜻 스치는 바람결에 섞인 것은 사람의 비명같기도 했다.


“공자!”

“백연!”


뒤이어 그를 부르는 목소리와 함께 일행이 도착했다. 황급히 말에서 내린 사형들이 그의 곁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저기.”


모두의 시선이 타오르는 불꽃에 꽂히고.


“잠깐만요, 저건......이런. 모두 물러서요. 빨리!”


다급한 루주의 목소리가 울렸다. 황급히 나선 그녀가 말과 일행을 뒤편으로 잡아당겼다.


“왜 그러십니까?”

“보면 모르겠어요? 저거, 무공이잖아요!”


야트막한 언덕에 불꽃이 가려 시야에서 보이지 않게 되자 루주가 다급히 말을 늘어놓았다. 그녀의 표정에 서린 것은 두려움이었다.


“백연 공자. 제가 전에 불을 다루는 무공이 몇 없다 말씀 드렸죠?”

“그럼 설마 저게......?”

“맞아요.”


루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을 다루는 몇 안되는 무공중에 하나. 마교 우호법의 염혈신공(炎血神功)의 불꽃이에요. 그리고 저게 여기서 보인다는 말은.”

“십여년 전에 종적을 감췄다던 마교의 우호법이 다시 활동하고 있다는 소리군요.”


백연이 중얼거렸다. 아직도 대기중을 따라 흐르는 열기가 진했다.


“지금, 바로 이 근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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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신강(3) +7 23.09.08 5,558 106 21쪽
88 신강(2) +5 23.09.06 5,812 110 21쪽
» 신강 +7 23.09.04 5,914 109 22쪽
86 설화(雪花)(4) +8 23.09.01 6,157 108 21쪽
85 설화(雪花)(3) +9 23.08.30 6,353 116 23쪽
84 설화(雪花)(2) +6 23.08.28 6,560 109 21쪽
83 설화(雪花) +8 23.08.25 6,864 118 17쪽
82 선택(5) +6 23.08.23 6,994 122 21쪽
81 선택(4) +5 23.08.21 6,829 123 20쪽
80 선택(3) +8 23.08.18 7,349 127 22쪽
79 선택(2) +6 23.08.16 7,308 121 24쪽
78 선택 +6 23.08.14 7,474 128 21쪽
77 검귀의 검, 곤륜의 검(6) +8 23.08.11 7,543 141 19쪽
76 검귀의 검, 곤륜의 검(5) +8 23.08.09 7,240 126 20쪽
75 검귀의 검, 곤륜의 검(4) +7 23.08.07 7,368 132 21쪽
74 검귀의 검, 곤륜의 검(3) +6 23.08.04 7,633 135 18쪽
73 검귀의 검, 곤륜의 검(2) +4 23.08.02 7,849 135 19쪽
72 검귀의 검, 곤륜의 검 +5 23.07.31 8,187 140 16쪽
71 검왕(4) +10 23.07.30 7,684 121 13쪽
70 검왕(3) +7 23.07.29 7,440 138 12쪽
69 검왕(2) +7 23.07.28 7,459 134 15쪽
68 검왕 +8 23.07.27 7,555 142 16쪽
67 마기 +5 23.07.26 7,579 133 14쪽
66 금원방(2) +5 23.07.24 7,747 142 16쪽
65 금원방 +4 23.07.23 8,203 137 17쪽
64 용봉지회(9) +6 23.07.22 8,207 141 20쪽
63 용봉지회(8) +4 23.07.21 7,932 13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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