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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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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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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0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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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1쪽

신강(3)

DUMMY

“천마?”


단휘와 백연의 시선이 교환되었다.


다른 일행들의 반응도 각기 달랐다. 가볍게 미간을 좁히는 유성부터, 눈을 동그랗게 뜨는 선화, 그리고 천마라는 이름 자체에 더 관심이 있는 듯한 사형들까지.


“천마라 하면, 태조(太祖)때의 그 천마를 말하는 거니?”


선화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그분 말고 천마가 또 있나요?”

“......그를 사칭하거나, 자기가 적법한 계승자라 떠들었던 이들은 많았어요. 허나 지금 이 아이가 언급하는 이는 그런 자가 아닌 듯 싶네요.”


선화가 중얼거렸다.


“헌데, 그의 무덤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말 그대로에요. 얼마 전부터 소문이 떠돌았거든요. ‘천마의 무덤이 발견되었다!’라는 소문이요. 으레 항상 있는 헛소문인 줄 알았는데......”


소년이 눈을 반짝였다.


“그 시점부터 이 근방에 마교의 무인들이 나돌기 시작했죠. 신강 외곽 언저리를 누비는데, 그 규모가 상당해서. 누구보다도 천마에 죽고 못사는 교인들이 그리 움직이니 자연히 소문에 힘을 실어주었고요.”


합리적인 내용이었다. 그런 이유로 반신반의하던 무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든 것이라고 했다. 마교의 영역인 신강보다는 서장쪽에서 접근하는 것이 더 편리하니 이곳이 이리 붐비는 것이라고.


“소문이 헛것이라 해도, 무언가 있으니 교인들이 저리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만일 그게 진실로 천마의 무덤이라 하면 대박이고요.”


눈을 빛내며 이야기하는 소년의 목소리가 들떠있었다.


하지만 그럴만 했다. 천마의 무덤이 만약에 정말로 발견되었다 하면 그만한 가치를 지니고도 남을 것이다. 으레 무림인들은 기연을 찾아 헤매는 존재들. 그리고 천마의 무덤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그만한 기연도 없을 것이다.


“고금제일인(古今第一人)이라 불릴 수 있는 이는 거의 존재하지 않죠.”

“그자가 말입니까?”


유성이 미간을 좁혔다.


그에 선화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유성 공자를 비롯한 정파 무인들은 천마라는 존재를 그리 높여 보지 않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알려진 바로는 그러한 자였죠.”

“그를 신으로 모시는 이들마저 있을 정도니까.”


백연이 거들자 선화가 동의했다.


“당장 멀리가지 않아도 마교가 천마를 신으로 숭배하고 있고요.”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달마 대사나 삼봉 진인을 제치고 그자가 고금제일인이라 불리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각기 불도와 도가의 대종사들. 지고한 위치에 오른 선인들의 이름이 유성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주장에 선화도 수긍한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직접 겨뤄보지 않는 이상 무인들의 우열을 가리기는 어렵죠. 특히 달마께서는 천년 소림의 시조이시니. 하지만 삼봉 진인의 기록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에요.”

“그것, 저도 들어봤어요!”


점소이 소년이 잔뜩 신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 일신이 가장 지고한 무(武)에 이르렀으니, 겨울에 피어난 꽃은 꿈을 허로 삼고-.”

“두번 부서진 하늘은 흐린 새벽에 잠든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뒤이어 이어지는 내용도 잘 알고요. 천마가 태조를 배신한 것을 책하는 내용 아닙니까?”

“뒷 내용은 제쳐두더라도 삼봉께서 직접 언급하신 바를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어요. 가장 지고한 무에 이르렀다. 아무에게나 쓸 말은 아니지요.”


선화가 미소를 지었다.


“거기에 더해 가끔 오래된 서적을 보면 미처 지워지지 않은 기록들이 있어요. 대명을 건국하기 전, 원과의 전쟁을 벌일 시절에. 수만의 기마군세를 천마가 홀로 대적했다고.”

“밤하늘을 구부려 대지에 떨구었다......”


백연이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다 문득 자신에게 향하고 있는 선화의 시선이 느껴졌다.


“맞아요. 어라, 백연 공자도 알고 계시네요?”


말실수였다. 전생에 마도 무림에 구전되던 유명한 일화가 갑자기 튀어나와 중얼거렸을 뿐인데. 지금 와서는 쉬이 듣기 어려운 이야기일 터다. 백연은 어색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주워들었습니다.”

“무튼, 그런 일화들을 보면 사람같지 않은 존재는 맞아요.”

“그리고 그런 이의 무덤이 여기 있다는 소문이 돈다라.”


진실이라면 그야말로 절세 기연. 무덤 안에 새겨진 천마의 흔적 한자락이라도 뛰어난 무인들에게는 그 어떤 재보(財寶)와도 비교할 수 없을 귀중한 보물이다. 그에 더해 실전된 천마의 무공이 만약에 남아있기라도 하다면.


“정파 무림에도 알려졌다면 당장 이곳으로 달려올 사람이 한둘이 아니겠군요.”

“우리 천라방 쪽에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그런 것으로 보아 소문이 돈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싶은데.”


그렇게 말하며 소년을 힐끗 쳐다보는 선화. 그녀의 눈길에 소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암리에 퍼진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저기 산맥을 넘어 동쪽에 전해지기에는 아직 이르죠. 그나저나 무인 분들도 관심이 있으신가 보네요? 하긴 그 천마의 무덤이니까......”


소년의 목소리를 한귀로 흘리며 백연이 일행을 쳐다보았다. 다들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


지금 소년이 언급한 천마의 무덤, 이 근방에 있다는 이야기가 걸렸다. 애시당초 이 근방에 있는 무덤이라고 할만한 것은, 그가 알기로는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착각일까요?”


백연이 물었다.


“그건 알기 어렵네요. 하지만 착각일 가능성이 더 높다 보여요.”

“근거는?”

“......천마는, 남긴 것이 없어요. 적어도 세간에 알려진 바로는.”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화의 말이 맞았다. 천마가 남겼다고 전해지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후대에 이어지는 천마의 진전이라고는 그 이름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 마도 무림 자체를 그의 유산이라 치부하지 않는다면 천마는 모든게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이제와서 무덤 같은게 갑자기 나타날 가능성이 낮은 것이다. 그가 활동했던 시기로부터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거늘.


“그렇다면 아무래도 천마의 무덤이란건.”

“......공자가 말한 장소일 가능성이 높겠네요.”

“그런데 모여든 무인들이 많다 하지 않았어?”


유성이 물었다.


“마교의 교인들은 둘째 치더라도 새외의 무인들까지. 적지 않은 수야. 나도 아직 새외 무인과는 싸워본 적이 없는데. 전력을 가늠하기 어려워.”


수많은 사람들이 승냥이처럼 달려들어 무덤을 찾고 있을 상황이다. 백연 자신이 무덤의 출입법을 안다 해도 거기까지 가는 과정에서 충돌을 피하기 힘들 터. 혹여나 그들 중에 무덤 안에 들어가는 것에 성공한 사람이 있다 하면 더 복잡해진다.


“싸움을......”


백연이 일행을 둘러보았다. 다들 담담한 표정이었다. 이곳에서 충돌이 일어날 것을 대비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각자의 검을 언제나 날카롭게 갈아두는 사람들이니.


“대비해야겠네.”


무덤으로 들어가는 일. 그 시작부터 쉽지 않을 듯 했다.



※※※



“죄, 죄송합니다!”


식사를 마친 후, 점점 얼굴이 굳어가던 소년이었다. 객잔을 막 떠나려는 일행에게 다가와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외치는 모습에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왜......”

“오늘 들은것은 절대 어디에서도 이야기 하지 않을테니 제발 목숨만은......”

“아하핫.”


곁에서 짐을 챙기던 선화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걱정 말아요. 살인멸구를 할 생각은 없으니까.”


입술을 움찔거리는 소년의 모습이 재밌었다. 그 광경을 보며 백연이 머리를 쓸었다.


그러고보니 이런 곳이었다. 마도를 비롯한 새외 무림은.


스스로의 목숨을 알아서 잘 챙겨야 하는 장소.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지 않는 것도 그런 범주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이 식사를 하며 언급한 내용들이 점소이 소년이 느끼기에는 듣지 말아야 할 내용이었던 듯 싶었다. 실제로도 틀린 말은 아니었고.


“그래도 아무에게나 떠벌리고 다니지는 말아요. 그 정도 부탁은 해도 되겠지요?”

“네, 넵! 감사합니다!”


그래도 선화는 하오문의 사람이었다. 목소리에 묻어있는 경고가 선명했다. 백연도 그녀를 말리지는 않았다. 필요한 일이었으니.


다만 그것 만으로도 소년에게는 충분히 관대한 모습으로 보였을 것이다. 잔뜩 기합이 들어가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 잠시 그것을 지켜보던 백연이 소년에게 다가갔다.


“여기. 받아요.”

“네, 네?”


백연이 품에서 단검 한자루를 꺼내 소년에게 건넸다. 출발하기 전 선아가 만들어주었던 단검. 그 중 하나였다.


“서, 설마 이걸로 자살을 하라는 것은......”


사색으로 질려가는 소년의 얼굴에 백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니에요. 다만 이 도시가 언제까지고 안전하지는 않을테니.”


그의 눈길이 주변을 훑었다. 돌아다니는 무인들의 기세가 흉흉했다. 새외 무림의 무인들이 온통 이 도시로 몰려들고 있는 듯 했다. 어쩌면 조만간 큰 다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욕심은 분쟁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니.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켜야 하니까요.”

“대협......!”


연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 인사를 하는 소년을 뒤로 하고 일행은 걸음을 옮겼다. 객잔에서 조금 멀어지자 선화가 흘리듯 중얼거렸다.


“친절한 사람이네요, 백연 공자는.”

“그리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만.”

“무림의 은원은 작은것에서 만들어지죠. 좀 더 본인의 성정에 대해서 높이 평가해도 좋을 거에요. 그리고......아, 저기 있네요.”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사람들 사이 너른 공간이 있었다. 여러 필의 말을 끌고 거리의 한켠에 서 있는 팔영. 외팔의 노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흉흉했는지 다들 피해가는 모습이다.


“왔구려. 바로 가도 괜찮겠소?”

“예. 먹을것도 좀 마련해 왔습니다.”

“좋소. 나머지 분들도 괜찮소?”


유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 없습니다.”


사형들도 마찬가지의 반응. 채비를 마친 일행이 가볍게 말에 올라탔다. 쏟아지는 시선들을 모조리 무시하며 도시에서 벗어나는 일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겨울의 북풍이 매섭게 쏟아지는 길. 그러나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소문을 들었소. 암암리에 이야기가 돌더군.”

“저희도 들었어요. 무덤이 있다고.”


말을 타고 질주하는 일곱 무인들을 따라붙는 시선이 군데군데 있었다. 더 이상 그들이 내달리는 길은 한적하지 않았다. 곳곳에 남아있는 무인들의 흔적.


직접적으로 그들에게 위해를 가해오는 세력은 아직까지 없었으나, 점차 서로를 의식하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검을 몸에서 떼어놓지 마시오.”


팔영의 경고와 함께 질주하는 일행의 말발굽 소리가 황량한 서장의 대지에 나직히 울려퍼졌다.


그렇게 잠시 눈을 붙이는 시간을 빼고 달려나가기를 얼마나 지속했을까.


두차례의 노을이 스치고 마침내 세번째 노을이 지천에 깔릴 무렵.


“여기입니다.”


백연의 말과 함께 일행의 걸음이 멈춰섰다.


눈앞에 치솟은 거대한 산맥. 이름없는 산맥의 끝자락에 걸린 햇살의 조각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이동하면 무덤의 입구를 찾을 수 있을 터인데......”


백연이 뇌까렸다.


“선객들이 꽤 있는 모양이군요.”


안법을 일으킨 시야 저편. 산맥의 중턱을 따라 움직이는 불빛들이 눈에 들어왔다. 산맥의 사방에 흩어진 횃불의 빛들. 수없이 많은 무인들의 흔적을 보며 백연이 검파를 쥐었다.


“지금부터는 속도 싸움입니다. 최대한 저들과의 싸움을 지양하고 입구를 찾아서 먼저 무덤에 들어가는 것. 그것을 목표로 하겠지만. 혹시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의 시선이 일행을 응시했다. 가라앉은 백연의 눈동자에서 일렁이는 보랏빛 안광이 옅은 빛을 흘렸다.


이곳은 적지다. 혹여나 상대에게 여지를 주면 언제든지 등에 칼을 맞을 수 있는 장소. 천마의 무덤이라는 소문을 듣고 몰려든 적들이 많다. 밖에서 만나면 혹여나 대화로 풀 수 있을지 모르나 이곳에서는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가볍지 않으니.


선택지는 하나 뿐이었다.


“전부 벱니다.”



※※※



산기슭을 따라 퍼지는 기파가 요란했다. 사방을 뒤덮은 기운. 번져오는 것이 묵직했는데 쉬이 가늠할 계재가 아니었다.


‘한쪽은 마기. 교의 일원들인 모양이고. 반대쪽은......’


파지직!


시야 서편을 따라 잠시 백광이 일었다. 짙은 공력 파동이 거칠게 뻗어나가는 형태. 대기를 타고 퍼지는 기파에서 백연은 섬뜩한 뇌(雷)기를 읽었다.


“뢰음사인 모양이구려. 둘 중에 어느쪽인지 모르겠는데......”

“작은 쪽 아니겠습니까? 큰곳은 이런 일에 걸음하지 않을 듯 한데.”


백연이 답했다.


천축에 자리잡은 새외문파이다. 대뢰음사와 소뢰음사로 나뉘어 있는데, 각기 이름과 무공의 형질만 공유할 뿐 본질적인 가르침이 전혀 달랐다. 이런 분쟁에 발을 들일 자들은 아마 소뢰음사 측일 터.


“뭐, 어느쪽이든 마교와 사이가 그닥 좋지 않으니. 당장은 얽혀들 필요가 없습니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 산기슭을 달려나가면서도 주변의 기운을 예리하게 읽어내고 있는 백연. 지금 당장 뢰음사와 마교의 전투 이상의 위협은 없었다. 나머지는 마주친다 해도 크게 위협적이지 못한 이들 뿐.


정작 백연의 머릿속을 괴롭히고 있는 질문은 따로 있었다.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모를 일이군.’


검귀의 무덤. 천마의 무덤이라는 이상한 소문이 퍼진 것은 둘째 치더라도, 이 장소에 무덤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아냈는지가 의문이다.


‘우연히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라도 있는건가.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된다.’


그가 무덤이라 지칭하고 있으나 무덤의 형태를 띄지 않은 장소이기 때문이다. 처음 본 사람은 그저 도시라고 말하는게 옳을 터.


협곡을 기준으로 지어진 구조인데, 백연 자신조차 그 원리를 잘 알지 못하는 술법으로 가려놓은 장소.


그런 장소의 정보가 흘러나갔다. 대체 누구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것이 아니라면 단순히 결계가 펼쳐진 장소를 감지하고 찾기 시작한 것인지.


걸음을 멈추지 않으며 생각을 이어나가던 그때였다.


“공자!”


선화의 외침이 날카롭게 숲을 갈랐다. 귓가를 파고드는 음성에 백연은 즉각 반응했다.


채앵!


여휘검이 검집에 쓸리며 뽑혀나오는 소리가 청명하게 퍼져나갔다. 찰나 시야 앞으로 도약하는 검은 그림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허공을 따라 꿈틀거리는 짙은 기운. 검을 내치기도 전에 어떤 세력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마교의 교도들. 검은 그림자들을 응시하는 백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달리던 자세 그대로 진각을 밟았다. 왼발을 축으로 삼으며 무릎을 꺾자 시야가 극단적으로 낮아졌다. 오른발 끝이 땅에 쓸리듯 길게 원을 그리며 회전했다.


동시에.


‘적양.’


생각과 출수의 시간에 지연이 없다. 하단전 불꽃이 맹렬하게 치솟으며 오른손 여휘검에 즉시 휘감겼다. 일순 어두운 숲속을 따라 피어난 불꽃이 눈부시게 춤췄다. 땅에 붙을듯이 낮춘 몸. 한쪽 발을 회전축으로 삼으며 아래로 향한 검끝을 그대로 올려친다.


적화검류. 승화(昇火).


화악!


찰나 일어난 불꽃이 날카로운 수십줄기의 칼바람으로 화했다. 아래에서부터 위로 치고 올라가는 형태였는데, 마치 수백에 달하는 붉은 꽃잎이 일제히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는 듯 했다. 어쩌면 입을 쩍 벌린 화룡(火龍)이 승천하는 것만 같기도 한 모습.


사방을 휘감는 불꽃에 한순간 교도들의 얼굴이 눈에 스쳤다. 경악성이 짙은 표정.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손을 내뻗는 그들의 움직임이 다급했다. 그러나 검은 마기를 채 일으키기도 전에, 솟아오른 불꽃이 그들을 한입에 집어삼켰다.


파바박!


소용돌이 치듯 뻗어나간 검격이 그대로 교도들을 난도질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사선에서 빠르게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기세가 있었다. 찌를듯이 예리한 살기.


“다들......!”


백연이 외치려는 순간이었다.


그의 오른편에서 산뜻한 향기가 풍겨왔다. 어느새 검을 빼든 유성. 가늘어진 눈매를 따라 흩어지는 안법 기파가 선연했다. 백연이 느낀 살기를 똑같이 감지한 모습.


“맡겨.”


짧은 중얼거림과 함께 유성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검신을 타고 뚝뚝 떨어져 내리는 연분홍빛 검기가 대기를 수놓았다. 화려하기 그지없는 매화.


화산의 절세기재는 검격에 망설임이 없었다. 구파의 여러 검중에서도 그 살기가 짙고 고혹적인 면모가 외려 사마외도에 가깝다 평해지는 검법. 요요한 기파를 흩뿌리는 매화 꽃잎이 허공에 하나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찰나의 간극에 대기를 수십번 가까이 그어내는 검격이 엄청난 쾌(快)에 닿아있었다.


그러면서도 허초와 변초를 소홀히 하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따라갈 수 없는 극한의 감각.


간극 속에서 허공에 그어진 검격이 일순 시간이 정지한 듯 고정되고.


“또 잡놈들이......매화?”


사선에서 거친 기세를 휘감고 뛰쳐나온 거구의 무인의 눈동자가 살풋 커지는 순간.


“매화난만(梅花爛漫).”


파아앗!


낭랑한 목소리와 함께 흐드러지듯 피어난 매화가 일제히 날아올랐다. 사방을 뒤덮으며 휘몰아치는 검격. 꽃잎 한송이 한송이가 치명적인 날카로움을 숨기고 상대를 집어삼킨다. 허공에 그어냈던 검로가 일제히 꽃잎으로 화하는 놀라운 광경.


처음 만났을적 보여주었던 검격을 다시 눈앞에서 목도하는 기분이 묘했다.


‘훨씬 강해졌어.’


파바바박!


수백의 잘게 쪼개진 검기의 꽃잎이 그대로 무인을 난도질했다. 허공으로 분수같은 핏물이 튀어올랐다. 모든 검로가 각기 다른 급소를 노리고 쏟아지는데, 백연의 안법으로도 전부 막아낼 투로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찰나의 순간이 지나고.


쿠웅.


거구의 무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온몸이 피로 잔뜩 물들어 있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치명적인 급소만은 호신기로 보호해 살아남은 것이었다.


단 일초식만에 상대를 제압한 유성. 그가 백연을 힐끗 하고는 눈앞의 적에게 걸어갔다.


“자, 잠깐만!”


검룡의 기세에 상대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온몸이 피범벅임에도 불구하고 눈빛이 아직 멀쩡했다.


‘외공을 단단히 연마했군.’


상대의 기세를 가늠한 백연이 입을 열었다.


“뭐지?”

“매, 매화라면 화산의 검객 아니십니까? 정파의 무인께서 어찌 이런 곳에......”


말하면서도 연신 눈을 두리번 거리는 것이 살길을 모색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의 말에 검을 들어올리려다 잠시 멈칫한 유성이 백연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할까.”


선택을 묻는 모습. 백연이 답하려 입을 열려는 순간이었다.


피잇-!


찰나 보법을 밟았다. 끌어올린 안법 자령안이 한순간 짓쳐오는 인영을 비춰내는 것과 동시에 몸을 반쯤 회전시킨 백연의 손끝에서 여휘검이 뻗어나갔다. 불꽃을 휘감은 검신이 거칠게 대기를 가르고.


카앙!


여휘검이 멈춰서며 허공에 불티가 마구 흩날렸다. 두 자루의 짧은 검을 겹쳐 여휘검을 막아낸 인영. 그의 등 뒤로 길게 늘어진 흑색 장포가 진했다. 언뜻 흑랑의 복식과도 비슷하지만, 조금 달랐다.


작은 체구와 쉴새없이 움직이는 눈동자. 허리춤을 따라 꽂혀있는 수십의 암기. 짧은 검을 다루는 방식과 독특한 무공을 익힌 듯 유연한 팔다리와 근맥을 지닌 것 까지.


“후우. 강하시군요. 혹시 이 검좀 잠시 치워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희 대원이랑 오해가 조금 있으셨던 모양인데......”


뒤편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홍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귀에 담으며 백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살수군. 살수가 여기서 무엇하는 거지?”


백연의 말에 사내가 미소를 지었다.


“그야 의뢰를 받아서 말입니다. 나름의 사정이 있는데, 말로 풀 수 있을 듯 하여.”

“......공자.”


그때 곁에서 나직히 깔린 팔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걸음 앞으로 나선 노인의 표정이 단단히 굳어 있었다. 그를 마주한 사내의 얼굴도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굳어들었다.


“이자는 사파의 살수요. 청해에 근거지를 둔, 천살문(擅殺門)의 대주중 한명이지.”

“뭐야, 하오문의 그림자. 은퇴한 줄 알았던 늙은이가 여길 왜?”

“알것 없소. 다만 당신이 왜 여기 있는 것이오? 당장 타당한 이유를 대지 못하면......”


휘릭.


팔영의 손이 번뜩였다. 찰나 허공에 은빛 섬광이 일더니, 다음 순간 그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단검이 사내의 목에 지그시 닿아 있었다.


더없이 예리한 단검의 날을 타고 핏물 한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 자리에서 죽이고 가도록 하겠소. 그대는 위험한 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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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선택(2) +6 23.08.16 7,320 122 24쪽
78 선택 +6 23.08.14 7,485 129 21쪽
77 검귀의 검, 곤륜의 검(6) +8 23.08.11 7,556 141 19쪽
76 검귀의 검, 곤륜의 검(5) +8 23.08.09 7,255 126 20쪽
75 검귀의 검, 곤륜의 검(4) +7 23.08.07 7,384 133 21쪽
74 검귀의 검, 곤륜의 검(3) +6 23.08.04 7,647 135 18쪽
73 검귀의 검, 곤륜의 검(2) +4 23.08.02 7,866 136 19쪽
72 검귀의 검, 곤륜의 검 +5 23.07.31 8,202 140 16쪽
71 검왕(4) +10 23.07.30 7,702 121 13쪽
70 검왕(3) +7 23.07.29 7,453 138 12쪽
69 검왕(2) +7 23.07.28 7,472 135 15쪽
68 검왕 +8 23.07.27 7,569 142 16쪽
67 마기 +5 23.07.26 7,594 134 14쪽
66 금원방(2) +5 23.07.24 7,759 142 16쪽
65 금원방 +4 23.07.23 8,219 13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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