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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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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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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9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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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9.15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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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4쪽

네가 만든 마을(2)

DUMMY

※※※



“넓군요. 절벽 아래에 이런 협곡이 숨겨져 있을 줄이야.”


시야 너머. 저 아래로 펼쳐진 협곡이 광활했다. 그들의 눈 아래를 따라 비스듬히 깎인 절벽이 깊었는데, 죽 이어진 공간 아래 협곡에는 마치 성벽같은 구조물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대편 너머로 보이는 것은 거대한 강과 폭포. 그 물결이 이 협곡의 크기를 짐작하게 해준다. 대체 얼마나 드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기 어려울 정도.


“무덤이라더니.”


유성이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사람들이 괜찮을지가 걱정이군요.”


절벽 언저리에 자리한 작은 길이었다. 끝없이 아래로 내려가는 구조였는데, 잘못 발을 헛디디면 까마득한 아래로 낙하하기 쉬운 모양새. 그들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곳이었다.


착지하는 것에 크게 문제가 없었는데, 좁긴 하지만 제대로 된 길이 나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오가던 곳인 모양이었다.


“검룡께서는 정말 소문대로시군요.”

“무슨 의미입니까?”

“천성이 바르고 상냥하시다던데. 뭇 무림인들의 선망의 대상이라고.”

“그런 말들을......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게 달갑지 않으신가 보네요.”


옅은 웃음소리가 울렸다.


유성이 뒤를 힐끗 바라보자 절벽에 기대 앉은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길게 몸을 덮은 장포를 걷어내고 팔다리 소매를 칭칭 묶는 모습. 그 자세만으로도 루주 선화가 전투에 능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싸우는 와중 옷이 펄럭이지 않도록 미리 조치하는 것이다.


저런 모습을 보아 아마 살수 훈련을 받은 모양.


이윽고 발목 소매를 질끈 동여맨 그녀가 고개를 들어올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먼저 들어간 사람들은 분명 괜찮을거니까.”

“그렇겠지요. 하지만.”


유성이 허리춤의 검을 매만졌다.


직전 절벽에서의 다급한 상황. 몰려있는 수많은 무인들을 제치고 무덤으로 들어가기 위해 백연의 말대로 절벽에 몸을 내던졌다. 그 덕에 성공적으로 무덤에 들어오기는 했건만.


“뒤에 두 사람이 남았잖습니까.”

“소홍 공자랑 백연 공자......걱정이 되긴 하지만, 그들도 괜찮을거에요.”


자리에서 일어난 루주가 유성의 곁으로 다가왔다. 큰 키의 여인은 침착한 표정이었다.


“백연 공자가 있으니까.”

“......그런가요.”

“암화라는 별호를 한번의 중원 출행으로 얻은 공자에요. 이번 천주산 여정에 대한 정보도 저는 꽤 자세히 들었는데. 하나같이 믿기 어려운 일들밖에 없더군요.”

“섬서에서도 그랬습니다. 제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웠지요.”

“그런 사람이니 무사할 거라 생각해요. 오히려 제 생각에 걱정해야 될 건, 우리쪽 같기도 한데.”


살풋 미소를 걸은 루주가 주변을 가늠했다. 그녀가 위쪽을 올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하늘이 보여요.”

“무슨 의미인지?”

“우리가 절벽으로 뛰어내릴 때에는 한치 앞도 볼 수 없을만큼 두터운 구름이 가득했는데.”


루주의 시선을 따라 유성도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말대로였다. 맑고 청명한 하늘을 따라 쏟아지는 햇빛이 협곡 안으로 비스듬이 늘어지고 있었다. 겨울의 찬 공기가 삽시간에 따스해지는 느낌.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맑군요.”

“애초에 먼저 뛰어내린 팔영쪽과 만나지 못한 것부터가 좀 이상했어요. 이 장소......제가 정보를 다루는 몸이라 이것저것 다양한 무예에 대해 아는 것이 좀 있거든요.”


길의 끝에 붙어 아래를 내려다보며 루주가 중얼거렸다.


“제 생각이 맞다면, 우리는 지금 여태껏 본 적 없는 엄청난 규모의 기문진 안에 들어온 모양이군요.”


그녀의 말에 유성이 반문했다.


“저도 기문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어떻게 다같이 절벽 아래로 떨어졌는데 다른 곳으로 흩어질 수가 있는 것인지.”

“구름을 통과하면서 무슨 일이 일어난게 분명해요. 애시당초 구름이 자연적인게 아니었던 모양인데. 그리고 아까 공자가 시간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어요. 어쩌면 이 무덤의 입구. 특정한 시간에 진입하면 특정한 곳으로 떨어지게 설계가 되어 있을지도.”


담담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루주. 그러나 그녀의 말에 담긴 내용은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말하는 대로의 기문진을 만들만한 사람이라면, 대체 뭐하는 작자란 말인가.


그리 긴 세월은 아니라 해도, 화산파의 중심에서 강호 무림을 상당한 기간동안 겪어온 유성이다. 그런 그로써도 이런 섭리를 벗어나는 장소는 듣도보도 못했다.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


“검귀의 무덤.”


유성이 나직히 뇌까렸다.


검귀는 누구이며, 어째서 이곳이 그의 무덤인 것인지. 어떻게 무덤에 이만한 진법을 엮어냈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으로.


“백연은 어떻게 여기를 알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루주가 고개를 저었다.


“언제나 비밀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런 장소까지 알고 있다니.”


기문진으로 감춰진 협곡 속에 자리잡은 거대한 도시. 발밑에 펼쳐진 웅대한 광경을 바라보며 두 사람이 조용히 시선을 교환했다.


“우선은 내려가야겠군요. 무덤이라 했는데, 누가 보아도 저 도시가 가장 중요해 보이니.”

“그렇겠죠? 백연 공자를 다시 만나면 물어볼 것이 꽤 많겠네요. 저는 궁금한건 못 참는데.”


살풋 웃은 루주가 걸음을 내딛었다. 절벽을 따라 가파르게 이어진 계단. 고요한 도시의 벽을 따라 두 사람이 말없이 걷기 시작했다.



※※※



“그래서, 궁금한게 뭔데?”

“이곳의, 진실.”


터벅 터벅.


걸음을 내딛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소홍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욱 가볍게 백연을 부축하며 움직였다. 처음에 걷는 것을 조금 불편해하자 번쩍 들쳐 업으려고까지 하는 모습.


그의 사형은 본래부터 약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사이 더욱 강해져 있었다.


길은 고요했다. 겨울의 아침. 차가운 공기가 뺨을 적시는데, 그 강도가 바깥보다 옅었다. 조금 추운 봄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익숙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감각. 원래 이 길은 이렇게 고요하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던 장소. 도시부터 강까지 이어진 길을 따라 늘어선 수레가 여럿이요, 말이 수십필이었다.


언제나 왁자지껄하던 과거의 소음이 유령처럼 백연의 머릿속을 스쳤다. 찰나 현실에 겹쳐 보인다 느껴질 정도로.


“......무덤이지.”


백연은 중얼거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곳을 처음 만든 놈이 무덤이라는 이야기를 꺼냈을때는 웃어넘겼다. 무덤이랍시고 만들어 놓은 거대한 도시. 모름지기 무덤은 이래야 한다고.


시황제의 릉에서 영감이라도 받았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미래를 어느 정도 예감한걸까.


그때는 무덤이 아니었는데.


“다시보니 확실하네. 무덤이야.”

“......도신데?”

“그렇지. 과거에는 도시이기도 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살았었어.”

“과거. 어느 정도?”

“으음, 백여년 정도 전에?”


우뚝. 걸어가던 소홍이 멈춰섰다.


그가 시선을 들어 백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그시 백연을 응시하는 눈동자.


“사제, 몇살?”

“사형. 나이는 중요하지 않아.”

“그럼 어떻게 알아?”


이 장소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느냐는 물음. 백연은 그에 가만히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제와서 이 모든것을 설명할 재주는 없다. 그렇기에 가벼운 어투로 흘려넘긴다.


“그냥 이야기를 들었어. 검귀라는 사람이 살았고, 그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이 도시에?”

“그런 셈이지.”

“그건 마치.”


소홍이 앞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지금은 적막만이 가득한 협곡의 도시. 그 전경을 눈에 담는다.


가히 중원 무림과 비교해도 작다 할 수 없는 크기. 그 위세가 드높다. 한때 저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떠했을지 가늠이 간다. 한 사람을 보고 모여든 이들의 마을.


“문파같네.”

“문파......?”


소홍의 말에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생각해본 적 없는 말이다. 검귀를 따라 협곡에 정착한 사람들의 도시. 사형의 말을 듣고 나니 그제서야 그것이 중원의 여느 문파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어찌 생각했을까. 역시 마찬가지로 이제 와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몸은, 어때?”


생각에 잠겨 길을 걷던 와중 소홍의 물음이 귀를 파고들었다. 눈매를 타고 떨어지는 걱정이 진했다.


“힘들면, 쉬었다 가자.”

“괜찮아. 아직은 버틸만 하기도 하고, 빠르게 도시에 진입하는게 나을거야. 일행과 합류해서 운기요상을 하는 것도 그렇지만, 저 안에는 영단 같은 것들도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거든.”

“영단?”

“응. 각종 영단이 다 있었지. 지금도 전부 남아 있을지는 모르지만.”


백연이 싱긋 미소 지어보였다. 사형을 안심시키려는 까닭이었는데, 그닥 통하지는 않은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연의 말은 진실이었다.


‘회복을 하려면 제대로 하는게 나아.’


만전의 상태를 되찾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기서 임시 방편으로 몸을 회복하는 시간조차 아껴서 움직이는게 맞았다.


‘이미 안에 마교도들이 들어와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사람은 없다. 허나 흑랑이 이미 무덤에 진입한지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신강쪽에서 진입하는 경로는 그들이 들어온 것과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무덤의 정문이라 할 수 있는 쪽은 그쪽 방향. 이 안에 누가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르는 일인 것이다.


“아직 기감은 제대로 펼칠 수 있어. 주변에 누군가 다가오면 바로 알 수 있도록......”


백연은 말끝을 흐렸다.


그가 내상을 입은 것과 별개로 아직 감각은 날카로웠다. 그렇기에 주변에 누가 다가오든 바로 알아차렸어야 했을 일인데.


“사형.”


피부에 닿아오는 바람. 언제부터였는지 달라져 있었다. 얼굴을 차갑게 훑고 가던 공기의 온도가 어느새 선선한 온기를 담고 허공을 맴돌았다.


자연적이지 않은 바람이었다. 깨닫는 순간 이미 백연은 여휘검을 뽑아들고 있었다. 그나마 멀쩡한 왼손으로 쥔 여휘검이 느릿하게 떨렸다.


“물러서. 내공은 충분하지? 도시까지 뛰어가면 아마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을거야.”

“헛소리, 그만.”


챙.


옆에서 검을 뽑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한치도 물러설 의지가 없어 보이는 소홍의 움직임에 백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더 이상 설득하기 어려웠다. 백연은 호흡을 아끼며 입을 열었다.


“거기.”


느릿하게 여휘검을 치켜들어 앞을 겨누었다. 길가를 따라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나무들. 그림자에 얽혀든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뭐하는 놈이냐.”

“......음. 역시 곤란하군요. 이렇게 만나려던 것은 아니었는데.”


희미하게 난처함이 섞인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실려왔다. 이윽고 그림자를 따라 천천히 걸어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무덤에 진입하기 직전 본 모습과 한치도 달라짐이 없는 사람. 두 자루 검을 비스듬히 매단 가면의 검객이었다.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곤 깨끗했던 가면의 오른편에 길쭉하게 새겨진 금밖에 없었다.


‘젠장.’


최악이었다. 분명 따라 들어오지 못했을텐데. 어떻게? 무덤을 뒤덮고 있는 기문진은 그리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강자라 하더라도 파훼하기 어려운 술법.


이윽고 백연의 시선을 의식하듯 검객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나저나 여기는 대체 뭐하는 곳인지 모르겠군요. 시간에 따라 공능이 달라지는 기문진이라니. 한발만 늦었어도 미로에 갇혀 맴돌뻔 했습니다. 그마저도 아슬아슬해 찢고 나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습니다만.”

“그걸 따라들어왔다고?”


백연이 당혹감 섞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에 검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가 생각 났다는 듯이 덧붙인다.


“아참, 걱정 마십시오. 뒤따른 인원들은 전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기문진의 흐름을 보아하니 일출과 일몰에만 진입할 수 있도록 설계된 모양인데, 늦은 사람들은 전부 환혼진의 미로에 갇혔을 것이고 아직 일몰은 한참 남았으니 말입니다.”


여상한 목소리로 기문진의 술법 구조를 파악해 말하는 모습. 단 한번 진법을 눈여겨본 것으로 그 구조를 읽어낸 듯 했다.


‘아무도 파훼하지 못할거라더니. 멍청한 자식이.’


그 모습을 보며 백연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분명 정확히 시간을 맞춰 움직였는데, 검객은 누구보다 빠르게 상황을 읽고 뒤따라 몸을 던진듯 했다. 본래라면 일출의 마지막 자락에 걸쳐 백연의 진입을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는 상황이었건만.


어느모로 보나 그의 오판이었다. 저만큼 강대한 상대를 문앞에서 마주칠 것도, 그가 기문진의 구조를 파악하고 즉시 따라 들어올것도 예상하지 못한 바.


‘오만했다.’


좀 더 침착하게 움직였어야 했건만. 오랜만에 돌아오는 길에 조금 들떠있었던 것이 잘못일까.


하지만 이제 와서는 의미없는 후회였다. 다만 눈앞의 적을 상대로 최선을 다할 뿐.


후우.


숨을 들이쉰 백연이 검객을 가늠하며 정신을 모았다. 여휘검을 쥔 그의 왼팔을 따라 미미하게 기파가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 검은 안된다.’


저자를 상대할 수 있을만한 검격을 머릿속에서 짜내본다. 문앞에서 들어오기 직전 날렸던 검. 그걸 사용하기엔 몸 상태가 너무 안좋았다. 지금 이대로면 적양공과 현음공을 동시에 일으키는 순간 그가 주화입마로 죽어나갈 판.


‘창명류수검도 제외.’


버티는 것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면 남는 것은 하나.


‘백화.’


검왕과의 심상세계에서 일으켰던 검격. 찰나 적화검류를 극성까지 연마했을때 뽑아낼 수 있는 미래의 가능성을 이끌어낸 것인데, 재현해낼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벗어날 검격이 될 것이다. 세상을 불태우는 하얀 불꽃은 검왕의 일격과도 필적할 정도였으니.


물론 그 대가로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는 모를 일이나, 지금은 그런 것을 머릿속에 담지 않는다.


화르륵.


귓가를 타고 맴도는 불꽃의 소리. 타는 듯한 열기가 손상된 혈맥을 타고 파도처럼 흐른다. 적양공 불꽃을 혈맥에 그러모은다. 압축을 더할수록 열기는 강렬해진다. 여상한 표정으로 검객을 마주하며 눈을 마추는 동시였다.


“기문진의 구조. 보고 파악한건가?”


의미없는 질문을 던지며 시간을 끌려 하는 순간.


“예, 맞습니다. 그런데......”


후욱.


검객의 신형이 흐려졌다. 한순간 인지를 뛰어넘어 백연의 앞에 다시 나타난 검객. 그가 가볍게 손을 뻗어 백연의 왼어깨를 툭 건드린다. 대응할 새도 없었다. 눈을 부릅뜬 백연이 그대로 검을 내치려는 순간이었다.


“내력을 거두시죠. 이대로 가면 돌이킬 수 없을만큼 몸이 상합니다. 그리 되면 제 친우가 많이 속상해할 것이 분명한지라.”


희미한 웃음이 가면 너머의 눈으로 스치는 것이 보였다.


동시에 검객의 손을 타고 산뜻한 바람이 휘돌았다. 내공이 가득 실린 바람결이 한순간에 백연의 어깨를 타고 흘러들어오며 세맥에 담긴 불꽃을 잠재운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한 감각.


“무슨......!”

“두분 다 진정하시지요.”


채앵!


한손을 백연의 어깨 위에 올린채로 반대손을 뻗어 찔러들어오던 소홍의 검격을 막아낸다.


가볍게 공격을 봉쇄한 검객. 그러면서 입을 연다. 맑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휘도는데 꼭 그 음성이 음률과 같은 느낌이었다.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닙니다.”


백연이 고개를 들었다. 가면 너머의 연하늘빛 눈동자가 선명히 눈에 와 닿았다. 그것을 마주하는 순간 흘러나온 말에 백연은 눈을 깜빡였다.


“백의의 제자분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만나게 되어서 기쁘군요.”

“......백의?”


이런 곳에서 들을거라 생각지 못했던 이름. 당황스러운 기분에 백연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 곁을 보자 소홍도 마찬가지의 표정을 짓고 있다.


“장문인을 어떻게?”


백연이 반문했다.


그 사이 가볍게 한발짝 물러선 검객. 얼굴에 손을 가져간 그가 가면을 잡아당겼다. 부드럽게 벗겨진 가면 아래, 길다란 흑색 머리칼을 반쯤 묶어올린 청년의 모습이 드러났다.


미려하게 떨어지는 눈매와 봄바람을 엮어 넣은 것 같은 연하늘의 눈동자. 뇌리에 각인되는 외양을 지닌 청년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백의 운결의 오랜 친우입니다. 이신이라 불러 주시지요.”

“이신?”


백연이 뇌까렸다. 그에 청년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잘것 없는 낭인으로, 성은 버렸습니다. 간혹 세간에서는 풍백(風伯)이라는 별호로 불리기도 하는 몸이지요.”

“풍백?”


곁에서 당황섞인 소홍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지간한 일에 감정을 크게 드러내는 법이 없는 그의 사형. 이리 반응하는 모습이 흔치 않았다. 소홍을 힐끗 응시하자 그의 얼굴에 드러난 당황이 선명했다.


“들어봤어.”

“낭인의 별호인데, 기억해주시는 분이 있군요.”

“대체 누구시길래......”


백연의 물음에 소홍이 입술을 베어물었다. 이윽고 그의 사형이 천천히 중얼거렸다.


“풍백. 잘 알려지지 않았어. 다른 별호가 있는데.”

“무슨?”

“지고한 검. 밤하늘의 별.”


소홍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말했다.


“검성(劍星)이야.”



※※※



“서신을 받았습니다. 도움이 필요하다 하더군요.”


검성 이신의 음성이 바람처럼 가벼웠다. 태도에서 묻어나는 삶의 궤적이 있는데, 스스로가 낭인이라고 말한 것이 진실인 듯 했다.


길을 조금 벗어난 장소였다. 잠시 쉬어가는 길이었는데, 정오의 태양이 머리 높게 떠오른 참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며 겨울 공기를 덥혀주고 있었다.


어쩌면 검성의 지고한 경지에서 자연히 흘러나오는 기운 때문일지도 몰랐다. 항상 바람에 섞여든 기운을 몰고 다니는데, 그 힘이 겨울 바람에 봄을 불러올만큼 강렬했다.


“그래서 왔습니다.”


짤막한 설명. 여태까지의 일을 이야기 하는 과정이었다. 장문인의 서신을 받자마자 신강으로 향했다. 본래라면 더 빨리 도착해 일행을 지켜볼 생각이었는데, 중간에 일이 좀 있었다고 했다.


“헌데, 그럼 어째서 입구에서 검을......”


백연이 말끝을 흐렸다. 입구를 막아서고 있던 검성. 찰나 나타난 마교도를 격살하며 동시에 백연에게 검을 휘둘렀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알아채기 어려운 행동 탓에 적으로 상정하고 검을 맞대었다.


그 물음에 검성이 난처한 듯 미소를 지었다.


“확인해보려 했습니다. 정말 곤륜의 제자들이 맞는지. 여러분의 외양은 서신을 통해 대강 설명을 들어 알고 있었으나 강호 무림이란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지요. 언제든지 외양은 위장할 수 있는 법이니.”


나긋하게 답해오는 말 속에 뼈가 담겨 있었다. 한눈에 느껴졌다. 낭인의 삶을 살아온 검객. 절대 어떤 것이라도 단번에 믿지 않는다. 경계가 몸에 배어있는 것이다.


“첫 일검으로 백의의 제자들이 맞다는 것을 파악했습니다만......직후 그런 연격이 들어올줄이야.”


그렇게 말하며 하하 웃는다.


“덕분에 가면이 못쓰게 되어버렸습니다. 나름 필요한 물건인데, 수리를 해야 할 듯 싶군요.”

“검성께선, 어째서 가면을 쓰고 다니시는 겁니까?”

“그 별호는 속에 담아두시지요. 이름으로 불러도 좋고, 풍백이라 불러주셔도 됩니다.”


나직히 뇌까리는 풍백. 웃음에 많은 것이 걸려있다.


“가면을 왜 썼냐 묻는다면, 저는 율법에 엮여있는 몸. 함부로 나다니기 어려운 신세입니다.”

“검성......아니, 풍백께서 묶여 있을만한 율법이 있습니까?”

“있지요.”


그의 시선이 찰나 허공을 스친다.


“검성이란 별호 또한 과거에 놓아두고 온 잔재이니.”

“......그렇군요.”

“그러나 백의의 요청이라 하면 와야겠지요. 나다니기 어려운 몸이라 해도.”


뒤따르는 웃음에 친애의 감정이 묻어 있었다. 운결과 상당히 깊은 우애를 지닌 듯 했는데, 말투에 숨김없이 그것이 드러나고 있다.


“더해 중원 무림을 벗어난 이곳에서의 활동은 제약이 덜한 편입니다. 여러 이유가 겹쳐 이곳에 서게 되었군요.”


그의 시선이 사방을 훑었다. 기문진으로 가려져 있는 검귀의 무덤. 풍백씩이나 되는 사람에게도 신기한 곳인듯 했다. 눈에 담긴 감탄이 보였다.


이윽고 그가 다시 백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제 사정은 여기까지 설명하면 된 듯 하군요. 이제 다른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데.”

“무엇입니까?”

“당신. 백의의 서신에서 자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풍백의 눈이 백연을 위아래로 가볍게 훑었다. 일렁이는 기파가 그의 연하늘빛 눈동자 위로 스쳤다. 극히 짧은 시간동안 일어난 안법. 백연 자신의 몸을 관찰하는 것이 눈에 엿보였다.


“곤륜의 무학을 다시 짜내려가고 있다 이야기를 들었는데, 아까 전 보았던 검격에 대해서 할 말이 있습니다.”

“아까 그 검은.”


백연이 무의식적으로 오른팔을 매만졌다. 적양공과 현음공을 충돌시켜 일으킨 증폭 현상. 그가 아직 닿지 못한 힘에 한순간 손을 뻗은 검기었다. 시야를 물들이던 백광이 아직도 눈에 선연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예. 두 상반된 힘을 충돌시켜 검격을 짜낸 듯 한데.”


풍백이 여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찰나에 검격을 보고 분석한 모양.


“맞습니까?”

“네.”

“......그 검격. 다시 쓰지 마십시오.”


그러나 이윽고 흘러나온 말은 백연의 예상을 벗어나 있었다. 한층 가라앉은 풍백의 눈이 단호함을 담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궁금하군요.”


백연이 되물었다. 몸에 무리가 가는 것은 맞으나, 그는 그 검격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적양공과 현음공을 넘어 한층 더 나아갈 수 있는 무공.


자령안 안법을 만들면서부터 생각한 것이었다. 애초부터 적양공과 현음공이 분리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엮어내기만 할 수 있다면 한층 더 상승의 영역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상극의 기운끼리의 반발을 통한 증폭. 다른 무공에서도 쓰는 일이 없지 않을텐데요.”

“당신이 말하는 것이 혹, 태극(太極)과 자하(紫霞)입니까?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풍백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길이 두터운 바위를 쓸자, 그것이 마치 바위가 아니라 흙바닥인 양 손길을 따라 선이 그어졌다.


“무당의 태극은 음양의 기운을 합일시켜 만들어낸 거대한 흐름. 허나 그 반발에서 오는 반동은 무인 자신이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디 무당의 무학은 대자연을 스스로의 단전으로 삼는데, 그렇기에 무인의 몸은 무사하지요. 대신 그만큼 파괴력이 감소하는 단점이 있으나, 무당의 검은 끝없는 면면부절의 흐름으로 압제하는 검.”


바위에 새겨진 태극을 응시하며 풍백이 말을 이었다.


“화산은 조금 다릅니다. 자하는 반발이 아니라 순응이지요. 태양의 빛을 하늘과 대지의 경계를 그릇삼아 담아낸 것인데, 서로 반발하는 기운이 아닙니다. 건곤은 순환의 흐름. 강제로 충돌시키지 않고 중단전 그릇에 기운을 담아 합일시켰다 봐야 옳습니다.”


바위를 따라 문대어진 자국. 노을을 형상화한 그림을 보며 백연이 입을 열었다.


“허면, 제가 이대로 무공을 엮어내면 그 힘은 태극과 자하를 넘어설 정도가 됩니까?”

“알기 어렵지요. 하지만 그런 것은 본디 평범한 인간의 몸으로 버틸 수 없는 힘.”


풍백이 백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지고한 무당의 선인들도 상극의 기운을 몸 안에서 충돌시키는 모험은 하지 않습니다. 반동을 오롯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예. 당신이 만일 그 몸 안에 온전히 모든 것을 품어낸다 하면 아마 천하일절의 파괴력을 지닌 검이 태어나겠지요. 하지만......”


말끝을 흐린다. 미려한 얼굴에 심려가 어렸다. 그의 눈길에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의외였다. 아무리 친우의 제자라 해도 저리 마음을 쓰는 것인가. 종잡기 어려운 성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이윽고 그가 말을 이었다.


“다시 한번 그 검을 펼치면, 당신은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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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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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신강(3) +7 23.09.08 5,573 107 21쪽
88 신강(2) +5 23.09.06 5,832 111 21쪽
87 신강 +7 23.09.04 5,933 109 22쪽
86 설화(雪花)(4) +8 23.09.01 6,176 110 21쪽
85 설화(雪花)(3) +9 23.08.30 6,366 117 23쪽
84 설화(雪花)(2) +6 23.08.28 6,574 109 21쪽
83 설화(雪花) +8 23.08.25 6,878 118 17쪽
82 선택(5) +6 23.08.23 7,007 122 21쪽
81 선택(4) +5 23.08.21 6,841 123 20쪽
80 선택(3) +8 23.08.18 7,362 128 22쪽
79 선택(2) +6 23.08.16 7,319 122 24쪽
78 선택 +6 23.08.14 7,485 129 21쪽
77 검귀의 검, 곤륜의 검(6) +8 23.08.11 7,556 141 19쪽
76 검귀의 검, 곤륜의 검(5) +8 23.08.09 7,255 126 20쪽
75 검귀의 검, 곤륜의 검(4) +7 23.08.07 7,383 133 21쪽
74 검귀의 검, 곤륜의 검(3) +6 23.08.04 7,646 135 18쪽
73 검귀의 검, 곤륜의 검(2) +4 23.08.02 7,865 136 19쪽
72 검귀의 검, 곤륜의 검 +5 23.07.31 8,202 140 16쪽
71 검왕(4) +10 23.07.30 7,701 121 13쪽
70 검왕(3) +7 23.07.29 7,452 138 12쪽
69 검왕(2) +7 23.07.28 7,472 135 15쪽
68 검왕 +8 23.07.27 7,569 142 16쪽
67 마기 +5 23.07.26 7,594 134 14쪽
66 금원방(2) +5 23.07.24 7,759 142 16쪽
65 금원방 +4 23.07.23 8,219 137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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