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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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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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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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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30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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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3쪽

설화(雪花)(3)

DUMMY

※※※



“천주산 이야기는 들었다.”


무진이었다. 팔짱을 낀 채로 눈을 연무장에 두고 중얼거리는 모습. 그들의 주변을 따라 죽 둘러앉은 백자 배 무인들이 있었다.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설명하기엔 너무 많습니다. 죽은 사람이 많고, 그중에 우리는 살아남았다는 정도?”


비스듬히 검을 걸친채 기댄 단휘가 대답했다. 가늘게 뜬 그의 눈이 연무장에 선 두 인영을 응시했다.


갑자기 성사된 비무 대련. 연무장의 위에는 백연과 검룡이 마주보고 서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곁의 소홍이 중얼거렸다.


“얼마 안된건데. 만든지.”

“흐음. 설마 부서지기야 하겠냐?”


어깨를 으쓱인 무진. 그의 시선이 단휘를 향했다.


“이따 시간이 나면 좀 이야기나 해줘라. 네 기도가 많이 바뀌어서 놀랐잖냐.”

“사형은 이제 그런 것도 볼줄 압니까?”

“실전도 좀 하고, 지난 며칠간은 검룡하고 검도 맞대어 봤으니까.”


그리 말하는 무진의 얼굴에 약간의 자부심이 드러났다. 그 표정에 단휘가 픽 웃음을 흘렸다.


“칠룡의 머리라.”

“아참, 그렇지. 네놈은 용봉지회에 갔으니 칠룡도 전부 보았지 않냐? 어땠는지 궁금한데.”

“나도, 궁금.”


세간에 이름을 떨치는 별호가 수없이 많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칠룡은 뭇 후기지수들의 호기심을 가장 강하게 이끌어내는 이름이다. 심지어 며칠간 검룡 유성의 검을 눈앞에서 본 참이었다. 무진과 소홍의 입장에선 다른 칠룡들이 궁금하지 않을리가 없었다.


“제대로 실력을 본건 셋뿐입니다.”

“셋?”

“독룡, 도룡, 뇌룡.”


그들과 함께 합을 맞추어 검을 휘둘렀다는 이야기는 굳이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자랑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금원방주와 싸울때 느꼈던 찰나의 감각. 간극이라는 영역에 진입하며 엿보았던 무(武)의 세계는 지고했다. 단지 그 간극에 들어가는 것 만으로도 어마어마하게 높은 벽을 뛰어넘은 느낌이 들었건만.


“그런데 그들보다도 우리 백연이가......”


단휘가 시선을 고정했다.


연무장 위에 서 가볍게 검을 들고 어깨를 푸는 소년의 모습. 금원방주와의 싸움에서 자신을 비롯한 칠룡들을 이끌며 검을 휘두르던 사제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았다. 일련의 전투에서 가장 필요한 순간마다 적재적소에 지시를 하고 검격을 펼치던 백연.


그야말로 홀로 전장을 지휘한 것이다. 어떤 감각을 지니고 있어야 그것이 가능한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더 뛰어날 듯 싶은데.”


한치의 빈말도 담기지 않은 진심. 악예린과 당소하도 직접 인정한 내용이다. 그 팽악조차도 백연의 앞에서 그의 지시를 수긍하는 모습을 보였다.


“애시당초 무공을 만든다는게 말이 안되잖습니까. 전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확실히 그렇긴 하다만.”


팔짱을 낀 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접 봤으니까 믿지, 아니면 나도 거짓으로 치부했을 거다.”

“쉬워보이게 해. 무공 만드는거.”

“그렇지? 어느 순간 새로운걸 들고오니 말이다. 이번에도 가서 현음공이니 자령안이니 새걸 잔뜩 만들어오고. 뭔지 벌써 궁금하다.”


소홍과 무진의 대화. 그것을 한귀로 흘리며 단휘가 입을 열었다.


“그것도 그런데, 방금전에 백연이가 한 말.”

“응?”

“자하를 보여달라 하지 않았습니까. 화산파의 자하신공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렇겠지. 검룡이 초입이라 말할 무공이 많지는 않으니 말이다.”

“설마 저것도 보고 뭔가를 새로 만드려고......?”


단휘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미 충분히 전달된 상태였다. 눈썹을 치켜올린 무진이 연무장 위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뭐, 무엇이 되었든 궁금하군.”


무진이 중얼거렸다.


“화산파 자하신공. 소문만 무수히 들어본 무공이니까.”

“노을이, 진다고.”

“흔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뇌리에 새겨둬야지.”


세 소년들의 눈이 연무장 위에 집중되었다. 그들의 시선이 다른 백자 배 아이들의 것에 더해졌다. 잡담도 하지 않고 검룡과 백연을 향해 쏟아지는 무수한 시선들.


그것들을 받으며 선 백연이, 눈앞의 검룡을 향해 어색하게 웃음을 지었다.


“사람이 많네.”

“그러게.”

“이럴줄은 몰랐는데......볼 사람만 보러 오라 했더니 다 와버렸잖아.”


지난 봄부터 여름까지 내내 사형들과 수련했지만, 그 중에서 무공에 지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애시당초 지금의 곤륜파는 무학에 입문하려 하는 이들을 모아놓은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문인 운결은 배고프고 죽어가는 아이들을 모아 구제했고, 곤륜파는 그 덕에 거지소굴이 되어 있었다. 무공을 연마한다지만 그것은 단지 몸을 단련하고 아프지 않게끔 운동을 시키는 단순한 행위였을 뿐.


그것을 백연이 뒤바꾸어 놓았다. 뛰어난 무공과 화려한 검격을 보여주어, 무공이 선망의 대상이 되게 만들었다. 거기에 전각을 다시 짓고 고기를 먹이고, 영약을 수련의 대가로 내걸어 봄부터 여름까지 내내 굴린 결과.


백연이 용봉지회에 가기 위해 떠날때쯤 곤륜파는 드디어 문파의 구실을 할 정도까지는 올라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아직 중원의 저 구파에 비할 수 있다 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직 문파로써는 어린아이의 수준.


그런데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지금 유성과 그의 비무를 보기 위해 모여든 사형들의 눈빛은 가볍지 않았다. 하나같이 눈도 잘 깜빡이지 않고 집중하는 모습.


마치 그것이 뛰어난 무인들의 검식을 한자락이라도 견식하려고 모여드는 구파의 무(武)에 미친 검객들 같았다.


“괜찮겠어?”

“응. 시작해도 돼.”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는 유성의 모습. 백연은 더 묻지 않고 검을 뽑아들었다. 일렁이는 여휘검의 검신이 햇살에 아롱지며 빛을 흩뿌렸다.


잠시 눈이 그친 상황. 하늘을 뒤덮고 있던 구름이 살풋 걷혀 쏟아지는 햇살이 두 소년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란히 검을 들고 마주 선 두 무인이 고개를 숙이며 포권했다.


‘한번에 기세가 달라졌어.’


검을 쥐는 순간이었다. 포권한 직후 검끝을 아래로 드리운 유성의 기세가 삽시간에 뒤바뀌었다. 몸을 따라 일렁이는 기파가 겹겹이 흔들리며 풀려나온다. 곧게 그를 응시하는 눈빛이 꿰뚫는 것 같았다.


한호흡의 시간에 완전한 집중을 이끌어낸 것이다. 스스로의 정신에 대한 완벽한 통제가 이루어져 있다.


“먼저 갈게.”


유성이 여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개를 살풋 끄덕이는 것으로 답했다.


그 순간.


우우웅.


시야 안의 대기가 휘어들었다. 유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기파가 물결처럼 풀려나오며 사방을 따라 기운을 흩뿌렸다.


그것을 보며 백연은 생각을 되짚었다.


곤륜의 심법과 검법. 지금까지 그가 만들어온 무공들은 하나같이 순간적인 감각도와 인상에 의존했다. 영감을 얻는 곳이 다양했는데, 그 과정 속에서 항상 느껴오고 있는 것이 있었다.


‘비어있어.’


운연동공에서 시작해 적양공과 현음공으로 두갈래 길을 만들었다. 각기 뒤따르는 검식이 있다. 마치 한 뿌리에서 두 무공이 갈라져 나온 듯이.


처음 적양공을 만든 것은 청율이 언급한 가능성 때문이었다. 운연동공으로 모은 내공은 쉬이 다른 성질의 기운으로 바꿀수 있었는데, 속성을 부여하기가 용이했다. 그래서 몸속에 불꽃과 바다를 품어낸 것이었다.


그렇게 두갈래로 갈라진 무공이었는데.


‘자령안은 다르다.’


눈가를 매만지며 생각하는 순간, 그의 시야가 뭉개졌다. 사방의 형상이 일그러지며 형태를 잃은 음률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동시에 그의 눈을 따라 번뜩이는 자색 안광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검은 눈동자가 어느새 보랏빛으로 변해 있었다.


두 내공운용법. 적양공과 현음공을 동시에 운용하는 안법의 형상이 이렇다는 것.


‘어쩌면 본래 갈라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생각을 흘리는 순간, 짓쳐오는 유성의 신형이 눈앞에 보였다. 그의 검이 번뜩이는 예리함을 담고 허공을 갈라내고 있었다. 상하좌우. 사방을 격하는 허초와 변초가 제각기 꽃잎의 형상을 그려내며 떨어진다.


백연은 자연스레 검을 뻗으며 현음공을 강하게 일으켰다. 검을 타고 일어난 묵직한 수기가 단단한 방어초를 이끌어내었다.


창명류수검. 천주산에서 만들어진 방어 검식이 찰나에 원을 그리며 백연의 전방에 벽을 만들고.


카가가각!


귀청을 찢는 쇳소리가 울렸다.


찰나 교환한 일수. 그러나 두 소년 모두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한번 검격을 내친 유성이 암향표 보법을 이용해 한걸음 물러섰다.


백연은 따라붙지 않았다. 눈가를 매만지며 자령안에 더욱 기파를 더할 뿐이었다.


“잘 봐둬. 지금부터야.”


유성의 말이 귓가에 꽂히는 순간.


우우웅.


백연의 시야에 모여드는 기파가 보였다. 자령안 감각도가 사방에서 몰려드는 기파의 흐름을 전부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심지어는 유성의 몸을 따라 흐르는 기운의 모습까지도.


시작은 발밑이었다. 굳건하게 대지를 딛고 선 유성의 발치를 따라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본래 대부분의 무인들이 하단전에서부터 내공을 일으켜 몸을 따라 순환시키는 것과는 전혀 달랐다. 발바닥 용천혈부터 시작해 빠르게 솟구치는 기운이 맹렬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동시에 유성의 머리 위를 따라 내리꽂히는 기운이 있었다. 정수리 부근의 혈도를 시작으로 서서히 퍼져 내려오는 기파. 상단전 백회혈을 기준으로 시작된 기운인 듯 싶었는데, 그 흐름이 지저를 향하고 있었다.


찰나를 영원처럼 늘인듯한 감각도. 어느새 간극에 진입한 백연의 눈에는 위아래에서 출발한 기운이 느릿하게 흐르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일련의 흐름은 분명 찰나였다.


하늘부터 대지까지 이어지는 기운. 다르게 말하면 건곤(乾坤). 또는 음양(陰陽).


세상을 반으로 갈라 나눠 놓은 듯한 기운이 마침내 서로에게 이르는 순간.


화아악!


소리가 지워졌다. 동시에 백연의 시야에 유성의 몸이 비쳤다. 자령안 감각도에 보이는 것은 익숙하면서도 처음보는 모습이었다.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한 유성이건만, 그의 몸은 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단전이 아니라, 중단전에서......!’


중단전 심장이 기준이었다. 위아래의 기운이 판이하게 달랐는데, 그 형상이 마치 하늘과 땅을 그대로 사람의 몸속에 옮겨놓은 듯 했다. 그러나 그 경계는 그렇지 않았다. 위에서부터 내려온 기운이 밑에서 올라온 기운과 합일되는 것과 동시에.


경계가 문대어 흐릿해졌다. 백연이 예상했던 반발은 일어나지 않았다. 판이한 두 기운의 경계 사이로 빛나는 기운의 색은 더없이 화려한 자색이었다.


곁에서 들려오는 탄성이 많았다. 사형들은 무슨 모습을 보고 있을까. 자령안 감각도에서 비친 세상은 육안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 그러나 그가 보고 있는 것의 놀라움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늘과 땅을 동시에 품어내어 만든 노을. 이질적인 기운이면서도 더없이 잘 어우러진다.


동시에 유성의 심장이 맥동하는 것이 보였다. 아니, 보인다기보단 느껴졌다. 일정한 울림 속에서, 피어오른 자색 기파가 삽시간에 온몸을 따라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지고.


피잇-!


귀청을 찢는 바람소리가 왼편에서 울렸다. 움직임을 순간 눈치채지도 못했다. 백연의 탁월한 감각도와 자령안의 공능이 그가 반응할 수 있게 해주었을 뿐.


카앙!


오른편으로 검을 펼친 백연이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소리는 왼편에서 났건만. 소리까지 속이는 허초였다. 동시에 지독할 정도로 쾌속한 연격이 뒤따랐다.


캉! 카가강!


백연은 유성의 검식을 뒤쫒는 것을 포기했다. 일일이 보고 반응하는 것이 불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어하는 것은 가능했다. 연무장 바닥에 굳건히 내리찍은 진각. 그의 발치를 타고 솟구친 현음공의 수기가 검격에 묵직함을 더해주었다.


창명류수검. 일검 일검에 원을 그린다. 물결처럼 퍼져나가는 기파가 사방을 격하고 들어오는 매화검법의 끝자락을 잡아챘다. 상대의 공격 변초에 상관없이 단단한 벽을 세운 것이다.


‘초입이라더니.’


그 말을 믿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자하신공. 가공할만한 위력이다. 찰나 펼친 창명류수검의 반격초에 세번 와 닿는 유성의 검격을 느끼며 백연이 입꼬리를 당겼다.


‘승부를......’


일순 호승심이 맹렬하게 솟구쳤다. 찰나에 고민이 머릿속을 스쳤는데, 그의 감정에 반응해 적양공 불꽃이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카가각!


허공에서 검이 얽혀들었다. 그 너머 유성의 눈빛이 백연의 눈과 마주쳤다. 유성의 눈가를 타고 흐르는 기파. 그의 안법과 비슷한 자색이 흐릿하게 떠올라 있었다. 그러나 완벽히 같지는 않았다.


찰나에 시선을 교환한 두 소년이 동시에 보법을 펼쳐 뒤로 물러났다.


지극히 짧은 공방. 자하신공을 일으키고 십여초식이나 교환했을까.


“여기까지 해야될 것 같은데.”


삽시간에 기파가 잦아들었다. 귀에 꽂히는 유성의 목소리에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으로 눈가를 살풋 문대자 자령안의 기파가 사그라들었다. 순식간에 흐릿했던 세상의 풍경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유성의 얼굴이 그제야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 아직 자하신공을 다 거두지 않은 것인지, 그의 몸을 따라 흘러내리는 기파가 보였다.


백연은 그제서야 자신의 사형들이 어째서 탄성을 내질렀는지 깨달았다.


“그거 화려하네.”

“......조금, 그런편이지?”


유성의 몸. 중단전 부근을 중심으로 흘러내리는 기파가 육안으로 보였다. 동시에 그의 뒤편을 따라 일렁이는 허공이 자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몸을 중심으로 작은 노을이 일어난 듯이.


마치 반투명한 자색 장포를 어깨에 걸친 듯 했다. 기파로 옷감을 짜내리면 저렇게 될까.


이윽고 그 기운이 완전히 사그라들고, 자하신공을 거둔 유성이 다가왔다.


“원하는 건 얻었어?”

“어느 정도는.”

“마음 같아서는 끝까지 하고 싶은데. 널 찾아온 사람들이 있는 것 같네.”


유성의 말에 백연이 고개를 돌렸다. 연무장 끝자락에 서 있는 사람들의 형상이 보였다.


곰같은 덩치의 사내와, 단정한 외양의 사내. 그리고 거기서 조금 떨어진 뒤편에는 연푸른 도포를 입은 청년과 짧은 단발의 소녀가 서 있었다.


“남은 대련은 나중에 할까.”

“고마워. 덕분에 생각할게 많아졌어.”


직접 눈으로 목도한 자하신공. 그 기운이 움직이는 방식이 뇌리에 강렬하게 새겨졌다. 자신이 만들 무공에 응용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럼.”


두 소년이 납검하고 가볍게 포권했다. 승부를 내지 않고 싱겁게 끝나버린 대련이었으나, 지켜보는 사형들의 표정에는 감탄만이 담겨 있었다.


연무장에서 내려온 백연은 빠르게 걸음했다. 연무장 가장자리에 모여선 네 사람. 그들에게 다가간 백연이 반갑게 웃음을 걸었다.


“사숙, 사숙조!”

“왔으면 좀 보러 오기나 해라 이놈아. 장문인께 인사 드리고 나서 곧장 향한다는 곳이 여기라니.”


신웅이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러자 곁의 신유가 웃음을 지었다.


“사형. 애한테 왜 그럽니까? 검법 수련하는게 기특하다 해주지는 못할 망정.”

“쯧. 여튼 건강하니 되었다.”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린 신웅이 몸을 돌렸다. 행색이 바쁜 것이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만 가본다. 잠깐 얼굴만 보러 온 것이라. 밑에서 또 사파 놈들이 나타났다고 하니 확인해봐야지.”

“같이 가시지요, 사형.”


그리 말한 신유가 백연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단정한 외양의 사숙조가 백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생많았다. 석식을 먹을때나 보자꾸나.”

“바쁘신 모양이군요.”

“그래. 네 덕에 눈코뜰새가 없다. 전에는 어디서 돈 빌려올까가 인생 최대의 걱정이었는데 지금은 사파 놈들이 설치는 것을 막아야 하니......에잉.”


투덜거리면서도 만면에 웃음을 건 신웅이 몸을 돌렸다.


“이따 보자.”


손을 휘적휘적 저은 신웅이 큰 보폭으로 걸어 사라졌다. 그 뒤를 따라 살풋 웃음을 지은 신유가 같이 사라지고.


“고생했어요, 백연.”


뒤이어 다가온 청율이 미소를 그렸다. 젊은 무궁각주는 여전히 단아한 행색이었다. 그럼에도 기세가 조금 달라져 있었다. 그간 무공을 좀 수련했는지.


“청율 사숙. 다녀왔습니다.”

“소식을 들을때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하하......”

“그래도 몸 성히 돌아와서 다행이에요. 그건 그렇고, 방금 전에 사용했던 무공은......?”


청율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한결같은 무궁각주의 모습에 백연이 웃었다.


“사숙께서 곧 정리해주셔야 할게 많습니다.”

“기대하고 있을게요. 당장 오늘 저녁이라도 괜찮은데.”

“아마 바로 시작해야겠죠.”


그리 여유롭지 못하다. 무공 정리는 최대한 빨리 할수록 좋다. 사형들에게 적양공과 현음공을 전부 가르치는 것만 한세월일 터.


그의 말에 청율이 생긋 미소지었다. 기쁜듯한 얼굴을 한 사숙이 이내 몸을 돌렸다. 바빠보이는 기색이었다.


“저도 정리하다가 한달음에 달려나왔거든요. 백연과 단휘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놓고 온 일이 있으니 이만 다시 가봐야지요.”

“사숙조들도 그렇고, 다들 바쁘신 모양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옥수에서 나름 중요한 세력이니까요.”


처리해야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라 했다. 덕분에 백자 배 사형들중 몇몇을 뽑아 문파의 일을 가르치는 것도 생각하고 있다고.


“신웅 사숙께서 혼자 맡고 있던 재정이나 여러가지 일을 전부 분담하려 생각중이에요. 재경각주라도 뽑아야 할까봐요.”


백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청율은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저녁에 봐요?”

“석식 시간이 끝나면 무궁각으로 가겠습니다.”

“기다릴게요.”


청율마저 몸을 돌려 사라지자 남은 것은 한명이었다. 팔짱을 끼고 있는 소녀. 얼굴을 따라 흩어지는 단발이 여전했다.


“갔다와서 인사도 안하고. 몸은 괜찮아?”

“보다시피.”


선아가 미간을 좁혔다. 한걸음 다가온 그녀가 손을 척 내밀었다.


“......뭔데?”

“검 좀 보여주라. 상태는 확인해야지.”


백연은 선선히 허리춤의 검을 풀어 건네었다. 여휘검을 받아든 선아가 그것을 뽑아들었다. 여전히 춤추듯 일렁이는 검신의 형상. 그것을 잠시동안 기울이며 살핀 그녀가 손으로 검면을 툭 쳤다.


“으음.”

“왜, 뭐 잘못된거 있어?”

“아니. 멀쩡해. 성질이 조금 바뀌고 있는데 그걸 확인하려 했어.”


백철의 고유한 특성. 그가 사용할수록 불어넣은 진기에 의해 성질이 변화하는 것이다. 그의 몸에 최적화된 형태로.


검을 확인한 선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휘검을 돌려주었다.


“고생했어. 보아하니 검을 잘 쓰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은걸.”

“덕분에 여러번 목숨을 건졌지.”


이보다 그의 몸에 잘 맞는 검은 없을 일이다. 그만큼 잘 쓰고 있었고.


그 말에 선아의 입꼬리가 움찔거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기분이 좋은 모양인지. 이윽고 그녀가 다가와 백연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도 바쁜데 잠시 온거라. 시간 나면 찾아와. 내 대장간으로.”

“대장간이 있어?”

“당연하지. 이래봬도 야장인걸?”


곤륜파의 대장간을 홀로 도맡고 있다고 했다. 세워진 전각들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에 마련해주었다고. 그녀가 일부러 그 장소를 선택했다고 한다. 덕분에 요즘은 하루의 절반은 무공 수련에, 나머지 절반은 야장 일에 투자하고 있다고.


“백철 다루는 연습을 하고 있는데, 많이 늘었어. 조만간 백철검을 많이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좋은 소식이었다. 그렇게 선아와도 가볍게 인사를 마쳤다.


“많이 바뀌었네.”


흩어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백연이 중얼거렸다. 그가 없는 사이에도 곤륜파는 잘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하나하나 구색을 갖추고 있다는 느낌이 확 와닿았다.


“그야 당연하지. 네가 이렇게 만들어 놨으니까 말이다.”


어느새 다가온 무진이 그의 머리를 툭 쳤다.


“백연. 나도 수련.”


소홍도 함께였다. 무표정한 사형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연무장을 가리키는 모습이 자신과 대련을 요청하는 모습이었다. 백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석식 전까지 수련이나 좀 할까.”

“나도 끼워줄래?”


그사이 슬쩍 다가온 검룡이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곁에 서 있던 단휘가 미간을 좁혔다.


“거, 검룡이 애들 수련에 끼어들어도 되는 겁니까?”

“애들이라고 하기엔 너무 강하지 않나 싶은데.”

“흐음. 그럼 제 검이나 한번 받아주실렵니까? 나름 독룡과도 자주 대련해봤는데.”

“좋아. 나야 환영이지.”


소란스러운 일행. 그들의 사이에서 백연이 미소를 지었다.


“좋네.”


왁자지껄한 곤륜산 위. 눈꽃이 주변의 나무를 타고 쌓이고 있었다. 찬 공기와 달리 포근한 감각이 마음을 가득 채웠다.


그제서야 집에 도착한 기분이 들었다.



※※※



그로부터 칠주야 뒤였다.


산마루에 눈이 가득 쌓이고 있었는데, 완연한 겨울이 찾아온 느낌이 들었다. 실제로 날씨도 그러했고.


평화로운 날들이었다. 사형들에게 무공을 가르치고, 청율과 무공을 정리하고. 이것저것 돌아다니며 처리할 일이 한가득이었다.


분명 그러했는데.


“......루주. 이곳까지 무슨 일로.”


피풍의를 걸친 여인의 행색이 눈밭 위에 도드라졌다. 곤륜의 정문에 선 그녀가 백연을 보며 지친 미소를 지었다.


“암화 소협. 간만이네요. 급히 전할 소식이 있어서.”

“일단 들어오시지요.”

“아니요. 여기서 할게요.”


그 모습을 보며 백연이 미간을 좁혔다. 루주 선화. 이곳까지 다급히 올라올 사람이 아니다. 왠만한 일은 아래 사람을 시켜 처리해도 되는 그녀가 이리 달려올 정도의 소식.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는 것을 느끼며 백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해보십시오.”

“아, 말하는 것은 제가 아니라......”


그녀가 품속에서 종이 한장을 꺼내었다.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새하얀 백지를 보고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게 뭡니까?”

“잠깐만요.”


그녀가 종이를 가벼이 건드리는 순간이었다. 한순간 종이 위로 붉은 물결이 툭 번지듯 휘돌고.


촤르륵!


종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마치 스스로 의지를 가진 듯 움직이는 형상. 팔락이는 종이자락의 끝이 바르르 떨리더니 직후 허공에 음성이 울렸다.


[아, 아. 들려?]

“이게 뭔.”

[잘 들리나보네. 백연. 오랜만이야.]

“하령?”


사방에 울리는 앳된 목소리. 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를 신비한 공능에 백연이 눈을 깜빡였다. 독특하기 그지없는 술법 무공에 대한 궁금증이 샘솟았다.


그러나 다급한 기색으로 이어진 하령의 말을 듣는 순간, 그 술법 무공에 대한 궁금증은 싸그리 사라지고 말았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시간이 없으니까 바로 말할게. 신강에서 흑랑의 소식이 끊겼어. 네 도움이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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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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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네가 만든 마을(2) +5 23.09.15 5,123 105 24쪽
91 네가 만든 마을 +5 23.09.13 5,364 100 18쪽
90 신강(4) +6 23.09.11 5,567 107 23쪽
89 신강(3) +7 23.09.08 5,554 106 21쪽
88 신강(2) +5 23.09.06 5,811 110 21쪽
87 신강 +7 23.09.04 5,909 109 22쪽
86 설화(雪花)(4) +8 23.09.01 6,152 108 21쪽
» 설화(雪花)(3) +9 23.08.30 6,349 116 23쪽
84 설화(雪花)(2) +6 23.08.28 6,556 109 21쪽
83 설화(雪花) +8 23.08.25 6,858 117 17쪽
82 선택(5) +6 23.08.23 6,990 121 21쪽
81 선택(4) +5 23.08.21 6,824 122 20쪽
80 선택(3) +8 23.08.18 7,344 126 22쪽
79 선택(2) +6 23.08.16 7,305 120 24쪽
78 선택 +6 23.08.14 7,470 127 21쪽
77 검귀의 검, 곤륜의 검(6) +8 23.08.11 7,539 140 19쪽
76 검귀의 검, 곤륜의 검(5) +8 23.08.09 7,237 125 20쪽
75 검귀의 검, 곤륜의 검(4) +7 23.08.07 7,365 132 21쪽
74 검귀의 검, 곤륜의 검(3) +6 23.08.04 7,630 134 18쪽
73 검귀의 검, 곤륜의 검(2) +4 23.08.02 7,847 134 19쪽
72 검귀의 검, 곤륜의 검 +5 23.07.31 8,185 140 16쪽
71 검왕(4) +10 23.07.30 7,682 121 13쪽
70 검왕(3) +7 23.07.29 7,438 138 12쪽
69 검왕(2) +7 23.07.28 7,457 134 15쪽
68 검왕 +8 23.07.27 7,552 141 16쪽
67 마기 +5 23.07.26 7,577 132 14쪽
66 금원방(2) +5 23.07.24 7,746 141 16쪽
65 금원방 +4 23.07.23 8,202 136 17쪽
64 용봉지회(9) +6 23.07.22 8,206 140 20쪽
63 용봉지회(8) +4 23.07.21 7,931 13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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