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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륜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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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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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7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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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8.28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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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쪽

설화(雪花)(2)

DUMMY

※※※



섬서 화음현부터 청해 옥수까지.


긴 여정이다. 그 거리를 아무것도 없이 검 한자루와 행낭 하나로 주파해왔다고 했다. 오는 길에 분명 검을 휘두를 일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작금의 강호 무림은 그리 녹록지 못한 세상이었다.


무위의 문제가 아니었다. 검룡에게 해를 입힐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다만, 마음에 해를 입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마음씨 좋은 사람으로 위장하고 다가와 등에 칼을 꽂아넣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니.


“산에 틀어박혀 검만 수련했다고 해서, 순진하기만 한 것은 아니야. 걱정 마.”


백연이 흘리듯 물은 말에 답하며 유성이 미소를 지었다.


칠룡의 머리. 가장 뛰어난 무위를 지녔음에도 그들 중 가장 어리다. 물론 백연 자신보다야 많은 나이라 하나, 경우가 다르니 말이다.


후일 화산의 장문인에 오를 것이라 생각되는 검객이다. 그의 검끝이 올곧은 만큼이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도 중요했다. 백연 자신이 중원 무림의 미래에 심력을 쏟는 사람은 아니라 하나, 심상에 충격을 받고 잘못된 길로 빠지는 무인은 많이 보아 왔으니. 유성이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존재했다.


그랬기에 약간 마음이 쓰였는데 괜찮다 웃으며 답하는 모습이 가벼웠다. 그가 생각한 것 보다 검룡은 많은 일을 헤쳐나온 듯 했다.


쓸데없는 걱정을 마음 한구석으로 치워버린 백연이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대체 왜 여기에 있는건지 설명 좀 해줄래?”


장문인의 처소 앞. 커다란 나무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곳 앞이었다. 흩날리는 눈발이 나뭇가지 위로 천천히 쌓이며 눈꽃을 피워내고 있었다.


안쪽에서는 단휘가 운결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백연 또한 운결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보고하려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사이 다가온 유성을 붙잡고 질문을 쏟아내는 중인 것이다.


“폐관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를 천주산에 가서 들었어. 당연히 용봉지회에 올 줄 알았는데.”

“폐관이라. 그렇게 알려진건가.”

“무슨 뜻?”


유성이 길다란 머리칼을 귀 뒤편으로 흩어넘기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마음이 어지러워서 좀 고민에 빠진 것 뿐이었는데. 거창한 말이 붙었네.”

“보통 고민을 몇달씩 하진 않지 않나? 그 시간에 몸을 움직이는게 낫지.”

“그건......”


말을 이으려던 유성이 멈칫 하더니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래. 그게 너구나.”

“직접 부딪혀야 찾아지는 답들도 있으니까.”


백연이 눈가를 매만졌다.


그의 생각은 그랬다. 무공부터 삶까지. 전부 부딪히고 싸우며 만들어오는 것이 그의 일상이었다. 고민하는 과정이 존재할 때도 있으나 결국 사색보다는 몸으로 부딪혀 알아내는 것이 그의 삶이었다.


유성이 그걸 어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성과는 있었어? 고민의 해결이라거나.”

“조금?”


유성이 고개를 살풋 기울이며 백연을 향해 생긋 미소지었다.


“그래서 왔잖아. 여기에.”

“......기껏 낸 답이 그거야?”

“혼자 낸 답은 아니고. 스승님과 대화를 조금 나누었지.”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검룡의 스승이라 하면.”

“서일화라는 분이셔. 세간에는 운하검신이라는 별호로 알려져 있는데. 알아?”

“들어봤어.”


백연이 헛웃음을 지었다.


당소하가 언급했던 소문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검룡 유성이 화산의 장문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더니.


운하검신(雲霞劍神). 별호는 그 무인에 대해 상당히 많은것을 담는다. 특히 화산의 장문인 같이 잘 알려진 이라 하면 더욱 그렇다. 무릇 강호의 호사가들은 무인들의 격(格)을 나누기를 좋아하는 이들인데, 그런 이들의 입에서 저런 별호가 붙었다.


검신(劍神).


그 자체로 무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별호인 것이다.


“구름 위의 노을이라.”

“스승님은 조금......”


유성이 백연을 힐끗 쳐다보았다.


“재미있는 분이시지.”

“그 말을 왜 날 보면서 하는거야?”

“하하. 두 사람이 비슷한 이야기를 해서.”


유성이 검을 매만졌다. 검은 무복 위로 흩어지는 눈송이가 하얗게 대비되어 보였다.


“단순히 산 위에서 검을 휘두르는 것 만으로는 닿기 어려운게 있다고.”

“......뭐. 그래. 뭘 원해서 여기까지 온건지는 모르겠지만. 얻어가는게 있으면 좋겠네.”

“고마워.”

“그건 그거고. 한가지 말해줘야 할게 있는데.”


백연의 말에 유성이 눈을 깜빡거렸다.


“뭐를?”

“돈 없어. 우리 문파는.”

“......아하?”

“언제까지 머물다 가려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동안 밥값은 해야......”


그렇게 말하던 백연의 앞에 유성이 손을 내밀었다. 비단으로 된 작은 주머니. 끈으로 묶여 있는 그 물건에 백연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게 뭐야?”

“밥값.”


생각없이 주머니를 받아든 백연이 그것을 여는 순간, 안에서 달콤한 향기가 한가득 흘러나왔다. 순식간에 눈이 휘둥그레진 백연이 주머니를 재빠르게 다시 닫았다.


“이, 이, 이거 뭐야.”


드물게 화들짝 놀란 기분에 말을 더듬은 백연이 유성에게 주머니를 조심스레 되돌려주었다. 혹여나 안에 있는 것에 조금이라도 손상이 갈까.


그만큼 놀랄만한 물건이었다. 그 향과 생김새. 백연 자신이 알고 있는 물건이 맞다면.


“뭐긴 뭐야. 자소단(紫蘇丹)이지.”

“미친.”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천진한 표정으로 주머니를 들고 있는 유성. 그를 보며 백연이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지금 그걸 밥값으로 내놓는다는 미친 소리를 할 것 같으면 그냥 넣어둬.”

“진짜 주려고 했는데. 왜?”

“......화산파의 매화검수들과 검을 겨루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그만큼 중요한 물건이었다. 천하에 이름을 떨치는 영단중 하나인 자소단. 화산파에서 만드는 영약인데, 그 과정은 외부에는 당연히 비밀이다. 자하신공을 대성한 이만이 만들 수 있다는 소문부터 수십의 무인들이 진기를 한올 한올 불어넣어 만든다는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까지. 여러 소문이 횡행하는 영약이다.


당연히 대다수의 무인은 평생 구경은 커녕 향조차 맡아보지 못하는 물건. 애초에 화산파의 무인이 아닌 이들중, 저것을 마주하는 사람은 대부분 매화검수의 검에 한줌 핏물이 된다.


화산파 내에서도 보물로 취급되는 영약이니 그렇다. 각 문파를 상징하는 영약답게 저런것이 바깥에 나돈다는 소문이라도 일면 온 무림인들이 눈이 벌게져서 달려들 것이다. 무림인들은 대저 비급 구결과 영약, 신병이기에 환장하는 존재들이니.


“어떻게 들고 나온 건지도 모르겠네. 아무리 검룡이라고 해도 자소단을.”

“내 것이니까 들고 나왔지.”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백연이 되물었다. 아무리 유성이라고 해도 자소단을 마음대로 섭취할 수는 없을 터이다. 뛰어난 후기지수들이 어릴적부터 귀한 영단과 내공에 좋은 것들을 섭취해 공력을 늘린다고는 하나, 자소단은 그런 영역에서 벗어난 물건이다.


그 공능이 단순히 내공을 벌충해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는 탓이다. 떠도는 말로는 죽기 일보 직전인 무인조차 살려낼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생(生)기를 품고 있다고. 진실 여부를 떠나 그런 말이 나돌 정도의 위상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화산파 무인들 사이에서도 함부로 취급하기 어려운 물건이다. 유성의 오성이 뛰어나다 해서 막 내줄리가 없다. 하물며 명문세가도 아닌 구파에서 이름값으로 저런 영단을 마구 내줄까.


“매화검법. 내가 꽃을 가장 빨리 피웠거든. 덕분에 전번 화종지회에서 우승할 수 있었지. 이건 그때 그 보상으로 얻은 것이고.”

“아하. 그런 거였나. 그렇다면 이해가 안되는건 아니네.”


섬서에 자리잡은 두 문파인 화산파와 종남파가 교류를 목적으로 벌이는 화종지회. 섬서에서 열리는 큰 비무대회다. 그런 대회에 자소단 같은 영약이 상품으로 걸리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몇년에 한번 열리는 큰 행사이니.


거기에서 양 문파의 무인들을 모조리 꺾고 우승했다 하면 자소단을 섭취할 자격도 충분한 것이다.


“무튼 그건 그만 넣어둬. 아무리 그래도 자소단을 받아먹을 생각은 없어.”


주머니를 재차 건네려는 유성의 모습에 백연이 한숨을 푹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그건 꼭 필요할때 써. 여차하면 먹어서 성취를 올려도 괜찮을텐데.”

“내가 그런 방식으로 내공을 쌓는 것을 선호하지 않아. 여태 쓸 일이 없어서 들고만 다닌건데. 곤륜과의 교류에 쓰인다면 충분히 의미있는 일이지.”

“부담스러워서 안돼. 밥값은 농담으로 한 말이고. 그냥 가끔 사형들과 검이나 대주는 정도면 충분하니까.”


백연의 거절에 어깨를 으쓱인 유성이 다시 품에 자소단을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태연한 얼굴로 그를 응시하는 모습에 백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여전하네, 검룡.”

“너는 좀 달라졌고.”


백연이 끄덕였다.


“일이 좀 있었지.”


그 말에 유성의 표정이 살풋 굳어들었다.


“며칠전에 하오문의 소식통으로 전해들었어. 천주산 용봉지회에서 크게 일이 생겼다고.”

“응. 자세한 이야기는......”


마침 뒤편에서 문을 열고 나오는 단휘의 모습이 눈에 스쳤다. 나무에 기대어 있던 백연이 몸을 일으켰다.


“우선 장문인을 뵙고 와서 해줄게. 사형들도 함께.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



※※※



“이상입니다.”


백연이 말을 마치자 운결이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수염을 매만지는 장문인의 얼굴이 복잡한 표정이었다.


“......고생했구나.”


막 모든 이야기를 끝낸 참이었다. 단휘의 입에서 전부 들었을텐데, 운결은 백연 자신의 이야기를 또 한번 듣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짧지 않은 시간 끝에 전부 늘어놓았다. 처음 당소하를 만나던 과정부터, 검왕이 가주에서 물러나게 된 경위까지.


“정파 무림이 뒤흔들릴 겁니다.”

“그래보이는구나.”

“난세가 찾아왔다 봐야 옳겠지요.”


지그시 눈을 뜬 운결이 백연의 얼굴을 살폈다. 반쯤 눈을 내리깔고 있는 소년. 엄청난 이야기를 눈에 담으면서도 담담하기 그지없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자리에서 물러나고, 각 문파의 신선들이 지상에 강림하고 있습니다. 와중에 사파는 날뛰고 있고요. 그 속에서 겨울이 찾아왔는데, 내년이 문제입니다.”


백연이 여상한 어투로 말했다. 있는 사실을 그대로 열거하듯이.


“올해 사파가 날뛰어 농민들이 크게 피해를 봤습니다. 불타지 않은 평야가 더 적다 하더군요. 가을에 제대로 수확한 곡물의 양이 얼마나 될지가 의문인데, 다음 봄부터 본격적으로 문제가 될 것입니다.”


굶주림이 늘면 사파가 더욱 날뛴다. 선량한 민초들조차도 자진해 녹림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이 흉년이다. 그렇잖아도 어지러운 현 무림 정세에 어떤 일이 더해질지 모른다.


전부 그가 오가며 들은 것들이다. 줄어든 상행과 물자의 이동. 사파의 탓도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그만큼 돈이 돌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다같이 침체되고 있는 것이다.


“그 와중에 지저에서 암약하고 있는 세력이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마교가 관여된 듯 합니다. 주동은 몰라도.”

“오래간 잠잠한 세력이었지. 벌써 몸을 일으키려 한다 말이더냐.”

“그렇게 밖에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백연이 시선을 들어 운결과 눈을 마주쳤다.


“만일 마교가 발호한다면 가장 크게 피해를 볼 것은 우리 곤륜입니다.”

“......그렇지. 신강에서 중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곳을 지나야 하니 말이다.”


청해 옥수의 곤륜산. 위치가 그러하다. 곤륜산맥은 그 자체로 중원의 서편을 가로막고 있는 벽이다. 자연이 쌓아올린 장성이라 봐도 무방한데, 서방의 세력이 중원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필히 지나쳐야 하는 관문이다.


마교 발호를 염두에 두지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아주 티끌만한 가능성이라 하더라도.


“문파의 위치를 통째로 옮기면 모를까. 언젠가는 그들과 충돌하게 될 것입니다. 시점의 문제일 뿐이지요.”


사마외도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모든 문파들이 그러하다. 제각기 충돌과 반목을 거듭하며 피를 흘린다. 곤륜의 경우에는 그 대상이 마교일 뿐이고.


“허면 어찌해야 하겠느냐? 문파를 옮기는 것은......”


운결이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런 방도도 있긴 합니다만, 임시방편일 뿐입니다. 장성의 역할을 다른 곳으로 떠넘기는 것일 뿐이니까요. 지금으로썬 곤륜의 다음은 공동이 되겠지요.”


백연이 중얼거렸다.


“더해 이곳에서 일궈놓은 것이 있지 않습니까.”


청해 옥수에 몰려든 사람들이 많다. 오롯이 그들만의 힘으로 이뤄낸 성과는 아니라 하나, 곤륜이 거기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맞다. 곤륜의 이름이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더해 백연 자신이 없는 동안 사형들의 힘으로 옥수의 상행길을 지켜내고 있었다 했다. 그들 스스로 쌓아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자리한 곤륜의 입지를.


그것들을 전부 내버리고 도망갈 순 없었다.


“진정으로 마교가 발호했을때, 막을 수 없어 몸을 잠시 물리는 것이면 몰라도 지금은 그럴때가 아닙니다.”

“그렇다 하면?”


백연이 손을 매만졌다. 하단전 혈도에 맴도는 적양공과 현음공의 기운이 느릿하게 휘도는 것이 느껴졌다. 스스로가 엮어낸 무공을 느끼며 백연이 입을 열었다.


“더 강해져야 합니다. 모두가.”

“지금보다 더 말이냐.”

“적어도 날카로운 송곳 정도는 되어야겠지요. 무시하고 함부로 들어오다간 찔려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것을 위해 무공을 엮어내고 기틀을 다지는 중이었다.


예리한 검은 야장이 있으니 만들어내면 될 일이고, 무공은 백연 자신의 손끝에서 엮어내고 있다. 부족한 것은 수련의 깊이와 내공을 쌓아온 세월뿐이다. 다시말해, 부족한 시간을 메워야 하는 것이다.


“쉬이 되는 일은 아니지 않겠느냐. 네 사형들은 열심히 하고 있다. 단지 쌓아온 세월은 노력만으로 해결되는 일은 아니니.”

“알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방책을 생각하고 있는 중입니다. 우선 당장은 수련에 매진해야지요.”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필요하면 어떤 방법이든 써서 움직이면 될 일.


“무공도 정리해야 하고. 겨울 동안은 바쁠 듯 싶습니다.”

“그래. 청율에게 한번 가보거라. 네가 돌아왔다 하니 얼마나 기뻐하던지.”

“하하. 사숙과 정리해야 할 것이 많기는 합니다.”


운결이 미소를 지으며 백연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눈길이 소년을 응시했다.


“고생했다.”



※※※



“해서 미리 알려주는거야. 마교를 적으로 상정해야 한다고.”


모여든 것은 무진과 단휘, 소홍. 그리고 유성이었다. 다른 사형들에 앞서 가장 성취가 뛰어난 셋에게 이야기를 꺼낸 것은 일부러였다.


이 세명이 사형들 사이에서 가장 이끌어가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었다. 다짜고짜 마교 이야기를 꺼내는 것. 필요한 일이지만 아직 확실치 못하다. 쉬이 불안감을 조성할지 모르는 일이다.


때문에 우선적으로 세 사람에게 이야기를 꺼내었다. 검룡은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담담히 받아들일 사람이었고.


“지금까지 사형들이 수련을 대충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부턴 정말 실전이라 생각하고 해야 해.”


백연의 말에 무진과 단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담담히 받아들이는 모습. 팔짱을 끼고 기댄 단휘도 커다란 반응이 없었다.


애시당초 이번 용봉지회에서 금원방주와 합을 겨루기까지 한 단휘다. 지금 당장의 성취는 사형들 중 가장 앞서 있다고 봐도 좋았다. 죽음의 고비를 넘긴 사람은 성장하기 마련이니.


“무공을 익히고 실전을 할 생각이야. 옥수 근방에 있는 사파 무리를 전부 정리할건데.”

“우리야 괜찮다만, 다른 놈들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무진이 물었다.


“아직 삼원검도 제대로 성취하지 못한 놈들도 있다. 각기 지닌 재능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만.”

“모두에게 무리하게 실전을 하라 하지는 않을거야. 하지만.”


백연이 슬쩍 검을 치켜들었다.


“그런 사형들은 나랑 연습해야지. 직접 대련을 해줄게.”

“......실전이 나을 것 같기도 한데.”

“걱정마. 죽음의 공포를 딱 세 번만 느껴보면 저절로 실력이 늘어나게 되어 있으니까.”


백연이 곁의 유성을 향해 시선을 휙 돌렸다.


“그렇지, 검룡?”

“갑자기 불똥이 왜 나한테 튀는지는 모르겠지만, 크게 틀린 말은 아니야.”


어깨를 으쓱인 유성이 중얼거렸다.


“스승님이 처음 검을 가르칠때, 나를 향해 노을을 휘두르셨지.”

“......제자한테 자하신공을 펼쳤다고?”

“즐거워 하시던데.”

“네 스승이 화산의 장문인이라 했던가? 어째 우리 백연이랑 성격이 비슷한 것 같기도......”

“무진 사형.”

“하하핫.”


씨익 웃는 무진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백연이 말을 이었다.


“적화검류는 삼원검을 전부 익히고 배운다 쳐도, 안법 자령안은 우선적으로 가르칠 생각이야. 그리고 자령안을 익히려면 두 내공운용법이 바탕이 되어야 하니까. 우선은 적양공과 현음공부터.”

“다른 애들도 전부 다 말이냐?”

“운연동공을 익혔고, 삼원검과 화신풍의 초입을 익힌 정도면 충분해. 안법과 내공운용법은 타고난 기감이 더 중요하니까. 그 부분을 중점으로 확인할 거고.”


백연이 손을 모았다. 사형들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럼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수련. 하자고.”


소홍의 말에 백연이 씩 웃었다.


“오늘부터 당장이야. 불만 있는 사람?”

“당장이라도, 좋아.”

“애시당초 단휘만 강해져 온게 불만이다. 이놈아.”

“내가 지금은 제일 강한가? 유지하려면 노력해야겠네.”


의욕이 넘치는 사형들의 모습.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들의 오성은 백연의 기준에서도 뛰어난 편이었다. 그런 사형들이 의욕까지 지니고 있다. 겨울이 지나면 한층 더 성장할 터. 아직은 부족하지만 곤륜의 기둥이 될 사람들이다.


“그리고 유성.”


백연이 화산의 검객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가 눈을 깜빡였다.


“왜?”

“무엇을 배우려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답을 얻으러 왔다 했지.”

“으음, 그런 셈이지.”

“좋아. 대신 나도 부탁할게 있어.”


화산파의 후기지수인 검룡. 그의 무위는 이미 화산파 내에서도 뛰어난 수준이다. 심지어 그의 무공은 장문인인 운하검신에게 직접 가르침 받은 것들.


견식할 수 있다면 배울것이 더없이 많을 터이다. 그리고 백연은 한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네가 익힌 무공들. 혹시 자하(紫霞)도 익혔어?”

“응. 아직 초입일 뿐이지만.”

“보고싶어.”


백연의 말에 유성이 잠시 턱을 매만졌다. 고민하는 듯한 행색.


당연한 일이었다. 자하신공은 화산파 내에서도 절세의 신공이다. 아무에게나 견식 시켜줄리가 없는 무공. 애시당초 백연도 유성이 자하신공까지 익혔을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만한 자질과 위상을 동시에 지녀야 배울 수 있는 무공이니.


하지만, 그렇기에 백연은 더욱 보고자 했다. 그가 만든 두가지 내공운용법 때문이었다. 안법 자령안의 형태가 자색으로 발현한 것이 단순한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상충되는 두 진기를 엮어내 만든 무공의 색이 자색이라는 것.


화산의 자하와 본질적으로 비슷한 점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 점을 확인한다면 적양공과 현음공에서 한발 더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


“가능해?”


이윽고 유성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진짜로?”


백연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되물었다. 이리 쉬이 수락하리라 예상하진 못했는데.


“단. 조건이 있어.”

“뭔데?”


유성이 검을 매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배우고 싶어. 네가 싸우는 방식을.”



※※※



“이거 곤란하군.”


후욱.


대기가 일그러지며 비틀렸다. 높게 치솟은 거대한 나무의 그림자가 한순간 꿈틀거리듯 일렁이더니, 이윽고 한 인영을 뱉어냈다.


그림자와 동화된 듯한 인영이 잠시 비틀거리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몸을 따라 뚝뚝 흘러내리는 진기가 실체화된 그림자로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그러나 그의 몸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은 그림자 뿐만이 아니었다.


“쿨럭.”


짙은 흑색 장포의 소매를 타고 검붉은 핏물이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잠시 숨을 가다듬은 흑랑이 시선을 들어올렸다.


“......후.”


시야 위로 느릿하게 흩어지는 먹구름이 선연했다. 하나둘씩 떨어지는 눈발이 짙었는데, 지난 며칠간 질리도록 보아온 풍경이었다.


흑랑 자신에게는 좋지 않은 환경이었다. 술법무공에 가까운 그의 무공은 주변의 환경에 영향을 받는다. 하늘에 강하게 드리운 햇빛이 없으면 그림자는 옅어지는 법. 흐릿해진 그림자의 색이 마치 지금 스스로의 꼴 같았다.


“녀석한테 호언장담 했건만. 체면이 말이 아닌데.”


그가 입매를 비틀었다. 백연에게 삼 개월이라 말하고 왔건만. 이미 시한을 훌쩍 넘겼다.


지금에 와서는 돌아갈 수 있을지조차 의문이다.


흑랑의 냉막한 시선이 저 멀리로 떨어졌다.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수많은 기척이 느껴졌다. 대기에 끈적하게 달라붙어오는 짙은 기운을 느끼며 그가 기파를 끌어올렸다.


“무덤이라 하더니. 여기에 묻힐지도 모르겠군.”


중얼거린 그가 다시 한번 무공을 펼쳤다. 이윽고 그림자에 휩싸인 그의 신형이 일그러지며 녹아내리고, 잠시 후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짙은 혈향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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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선택(5) +6 23.08.23 6,990 121 21쪽
81 선택(4) +5 23.08.21 6,824 122 20쪽
80 선택(3) +8 23.08.18 7,344 126 22쪽
79 선택(2) +6 23.08.16 7,305 120 24쪽
78 선택 +6 23.08.14 7,470 127 21쪽
77 검귀의 검, 곤륜의 검(6) +8 23.08.11 7,539 140 19쪽
76 검귀의 검, 곤륜의 검(5) +8 23.08.09 7,237 125 20쪽
75 검귀의 검, 곤륜의 검(4) +7 23.08.07 7,365 132 21쪽
74 검귀의 검, 곤륜의 검(3) +6 23.08.04 7,630 134 18쪽
73 검귀의 검, 곤륜의 검(2) +4 23.08.02 7,846 134 19쪽
72 검귀의 검, 곤륜의 검 +5 23.07.31 8,185 140 16쪽
71 검왕(4) +10 23.07.30 7,682 121 13쪽
70 검왕(3) +7 23.07.29 7,438 138 12쪽
69 검왕(2) +7 23.07.28 7,457 134 15쪽
68 검왕 +8 23.07.27 7,552 141 16쪽
67 마기 +5 23.07.26 7,577 132 14쪽
66 금원방(2) +5 23.07.24 7,746 141 16쪽
65 금원방 +4 23.07.23 8,202 136 17쪽
64 용봉지회(9) +6 23.07.22 8,206 140 20쪽
63 용봉지회(8) +4 23.07.21 7,931 137 1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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