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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님의 서재입니다

곤륜환생

웹소설 > 일반연재 > 무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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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하랑
작품등록일 :
2023.05.10 10:05
최근연재일 :
2024.06.29 18:10
연재수 :
300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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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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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6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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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글자
20쪽

용의 머리(11)

DUMMY

※※※



꿈결 같았다.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들. 잘하고 오라며 등을 두드려주는 사형과 사제들.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미소짓는 장문인과 이것저것 가벼운 조언을 거네는 청율 사숙. 그녀의 검을 마지막으로 확인해주는 선아와 진기의 흐름에 이상이 없는지 슬쩍 맥을 짚어보는 백연까지도.


사람들의 목소리 속에서 설향은 문득 깨달았다. 정말로 여기까지 왔다고.


-내가 지금 그녀와 검을 맞대면, 몇합이나 버틸까?

-일초지적.

-이번 비무제전에서 그녀와 맞붙고 싶어.

-힘들텐데? 대진운이 좋으면 몰라도.

-그래서 지금 네게 부탁하는거야. 떨어지더라도 뇌룡의 손에 떨어지고 싶어. 적어도 한번 만이라도 그녀와 같은 자리에 서볼수만 있다면.


그리 말했었다.


무리한 부탁인 줄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녀의 무위는 빠르게 늘고 있었으나 그때까지는 명백히 평범한 정도였다.


그렇기에 백연에게 부탁하면서도 스스로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사제는 둘도 없을 천재이며 기적적인 일을 일으키는 소년이었지만, 인과 없이 기적을 창조할 수는 없으니까.


아무리 백연이라고 해도 안되는건 안되는거다.


하지만 그녀의 말도 안되는 무리한 부탁에 자신의 사제는 이리 답했었더랬다. 참으로 태연한 목소리로.


-열합.

-뭐......?

-열합을 겨룰 수 있게 만들어줄게. 뇌룡 악예린과.


뭇 사람이 보면 말도 안된다며 농으로 치부해 웃어넘길 헛소리. 백연은 그것을 진지하게 들었고, 가능성을 제시했다.


그렇게, 이 자리에 올랐다.


대화가, 목소리가, 기억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손아귀가 찢어질때까지 휘두르던 검도. 잠을 쪼개가며 수련한 심법도. 한걸음을 걸어도 항시 보법을 펼치며 걷던 매일도.


물결처럼 일어나는 상념들이 많았다. 그것을 전부 한 호흡에 담아 뱉는 순간.


“하아.”


설향의 앞에는 흑발의 여인이 거대한 창을 어깨에 기댄채로 서 있었다.


“당신의 검, 보았어요.”


담담하게 말을 건넨다. 어투는 부드러웠지만 동시에 정중했는데, 한치의 내려봄이 없었다. 강호 무림에서 한없이 이름을 떨치는 뇌룡임에도 불구하고.


“적화검류도. 그리고 푸른 화염도. 백연이 보여주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기세였는데, 새로운 무공 갈래를 엮어내신건가요?”

“......제 경기도 보셨나보군요.”

“다른 이들의 무학을 등한시하고 홀로 나아갈 수는 없으니까요.”


강인하게 떨어지는 시선에는 한치의 방심도 깃들어 있지 않았다.


스스로의 강함을 잘 알고 있으나, 동시에 상대방의 절기도 무시하지 않는다. 뇌룡은 전투의 생리에 대해서 아주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본인이 많은 실전을 겪으며 생사의 갈래에 목을 걸어봤기에.


다시 말해.


‘실전 경험이 이점이 될 수 없는 상대.’


외려 설향의 경험이 더 적을지도 모른다.


‘경험도, 무위도, 전부 밀려.’


하나도 앞서는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포권을 취하는 설향의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한 수 배운다는 생각으로 임할게요.”


답하는 악예린도 미소를 짓기를 잠시. 그녀가 거리를 벌리며 어깨에 기대고 있던 창을 들어올렸다.


스릉.


그와 함께 설향의 검신도 물 흐르듯 검집에서 풀려나왔다.


“그럼.”


짧게 내뱉은 말. 그와 동시에 설향은 적양공 기파를 끌어올렸다. 보법을 내딛는 것과 함께였다. 찰나지간 불꽃이 길쭉하게 풀려나오며 땅을 박찬 설향의 일검(一劍)이 악예린의 면전으로 질주.


모로 꺾어진 불꽃이 다채로운 검로를 허공에 새겨내며 작열하는 열기로 사방을 달궈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검격 궤적이 설향의 진각과 동시에 전부 화염의 꽃으로 화(化)했고.


화르르르륵!


화화(火花)의 파도가 악예린의 신형을 향해 낙하했다. 좌상, 중간, 우상. 전부 상단세 일격의 검로였다. 조금이라도 방심했다가는 목을 날려버릴 듯이 날카로웠는데, 회피하는 것이 더 좋을법도 했다. 악예린의 보신경은 당소하와 자웅을 겨룰만큼 뛰어났으니까.


악예린은 그러지 않았다.


“다르네요, 백연과는-”


내뱉는 호흡 마디마디에 내공이 깃들어 있다. 눈앞에 짓쳐오는 화염의 검로를 직시하면서 창을 치켜든다. 찰나지간 한쪽 발을 길게 빼며 창을 비스듬히 쥐는 것도 잠깐. 그녀의 손아귀에 힘이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였다.


쩌저저정!


길게 뽑아낸 창격이 분열하며 허공에서 검로를 전부 쳐내었다. 창날의 끝으로 검면을 후려낸 것인데, 어지간한 감각이 아니면 시도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 여파로 인해 설향의 검격이 잠시 멈춘 찰나, 악예린의 신형이 훅 꺼지듯 쇄도했다.


“......!”


그때쯤 이미 검을 회수하고 있던 설향의 눈이 커졌다. 검격이 틀어막힌 까닭에 손아귀가 찢어질 듯 아파왔으나 그 정도는 이미 예상했다. 다만 반격초의 속도가 그녀의 생각보다도 더욱 빨랐을 뿐.


‘검을......!’


생각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저 본능적으로 몸을 뒤틀어 초식을 엮어냈다. 설향의 검끝이 낭창하게 휘어지며 화염의 꽃잎으로 된 벽을 펼쳐내었다. 창격이 그녀의 옆구리를 꿰뚫기 직전이었다.


콰아앙!


울컥.


막대한 충격이 검신을 넘어 전해져온다. 창에 휘감긴 나선 경파가 화화구벽(火花九壁)의 초식이 종잇장인것 마냥 찢어발기며 전진해 들어왔다. 걸리적거리는 것을 치워버리듯 아주 잠깐의 머뭇거림 직후였다.


그러나 그 정도 시간이면 충분했다.


설향은 내상의 충격을 삼키며 이미 후퇴보법을 밟고 있었고, 화신풍의 구결이 그녀의 몸을 떠밀듯 뒤로 실어내주었다.


하지만 창과의 거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무슨?’


그림자처럼 그녀의 몸과 같은 거리를 두고 따라붙어온다. 꿈틀거리는 창격이 어느 순간 바깥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설향의 검에 얽혀들었고.


철컥.


바깥으로 회전하는 창날에 검신이 걸려 비틀렸다. 란나찰(攔拿扎). 창술의 기본을 이루는 창법이었는데, 악예린의 손에서 펼쳐진 이상 기본기의 수준이 아니었다.


자연스레 검신을 창날에 엮어 설향의 방어를 풀어버리기까지가 한호흡도 되지 않았다. 바깥으로 당겨진 창날에 검신이 딸려가 가슴이 활짝 열린다. 그와 함께 땅을 박찬 악예린이 신묘한 보신경으로 화신풍을 따라잡으며 응조수(鷹爪手)를 내쳤다.


파앙!


허공에서 손이 얽혀들었다. 반사적으로 낙안권을 펼쳐낸 설향. 조법 기파와 권격 경파가 충돌해 거친 파문을 그려냈다. 수직으로 휘어든 악예린의 손가락이 설향의 손목을 휘감는 것도 잠시, 설향은 적양공을 할 수 있는 극한까지 일으켜 내었고.


화르르륵!


갑작스레 피어오른 불꽃에 악예린이 미간을 좁히며 쥐고 있던 손목을 놓았다. 그 사이 창에 걸려있던 검을 회수한 설향이 반보를 벌리며 커다랗게 횡격을 펼쳤다.


쩌엉!


검격이 막혔다. 어느새 시간을 되감은 것 마냥 제자리로 돌아온 창이 굳건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적양공 불꽃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은 듯 했는데, 그 까닭은 쉬이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손 위로 점점이 흩어지는 묵천암뢰신공의 진기. 언뜻 눈에 드러난 호신기가 강대했다. 아무런 방해 없이 검을 찔러넣어도 상처 하나 내지 못할것만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신경쓰지 말자.’


지금은 그런 것에 대해 생각할때가 아니었다. 우선은 저 창의 방어를 뚫고 검을 가져다 대는것 부터가 시작이었다. 나머지는 애써 의식에 두지 않는다.


설향은 생각을 죽였다. 횡격초를 내지른 검을 재차 휘두르면서였다.


쩌엉! 쩌저정!


검날과 창끝이 얽혀들었다. 한순간 두 여인의 얼굴이 지극히 가까워졌다. 그때쯤 설향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지워져 있었다. 흑발을 흩날리며 검을 내지르는 여인의 표정. 그것이 극도로 고양된 집중이라는 것을 깨달은 악예린이 미소를 지었다.


“곤륜은 다들 비슷하게......”


그 순간이었다.


설향의 눈에 자색 안광이 번쩍거리며 일어났고, 악예린은 이번 경기에서 처음으로 섬짓한 감각을 느꼈다.


‘자령안!’


찰나였다. 사고의 흐름이 급가속하며 설향은 순식간에 간극에 접어들었다. 삽시간에 시야가 이지러지며 주변 환경이 선율로 인지되는 지경.


감각이 달라졌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을 향해 짓쳐오는 악예린의 창격이 하나의 거대한 선으로 보인다.


‘......보여.’


그래서 검을 휘둘렀다.


거칠게 떨어지는 연환창식의 창격. 기본적으로 나선 경파를 휘감고 있다. 한번의 충돌로는 축기량도, 기예도 부족한 설향은 힘싸움에서 이길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여러번 휘두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검끝이 낭창하게 휘어졌다 제자리로 돌아간다. 한계까지 당겨진 근육이 같은 동작을 찰나지간에 우겨넣기를 수차례.


쩌저저정!


똑같은 자리를 날카로운 화염의 검로가 대여섯번에 걸쳐 갈라내었다. 일격에 관통당할 것을 막아내는 신기에 가까운 검격.


그럼에도 충분하지 않았다.


파악!


미처 해소하지 못한 창격 여파가 그녀의 어깨를 스쳤다. 날카로운 고통이 일었다. 하지만 설향은 고통에 익숙했고, 고통을 의식과 분리하는 것은 더욱 익숙했다.


외려 그것을 기회로 삼았다. 내지른 창이 고정된 틈을 타 몸을 숙이며 전진. 한손에 진기를 휘감아 그대로 창대를 낚아챘다. 그와 함께 꽃잎처럼 휘돌며 전진 횡격. 찰나의 찰나에 검신에 적양공 기파를 층층이 쌓아 터트린다.


화륜(火輪)의 초식. 횡격으로 펼쳐냈다.


스스로의 인지를 뛰어넘어 가속한다. 그녀의 자령안에도 한줄기 흐릿한 광채만이 느껴질 정도로 압도적인 속도와 힘.


그러나 그 순간이었다.


시종일관 미소를 걸고 있던 악예린의 표정이 한순간에 가라앉으며 차분해졌고, 문득 알아챘을때 그녀는 창을 놔버린 뒤였다. 직후 그와 함께 몸을 뒤집으며 각법을 차올리는 동작까지가 전부 설향보다 배는 빨랐다.


쩌엉!


발끝이 검면을 후렸다. 비틀린 검로가 허공을 스치며 작열하는 화염을 대기에 새겨내었다. 그러나 그것이 악예린의 몸에 닿는 일은 없었다.


‘말이나 되는......?’


그때쯤 악예린은 이미 자세를 되찾은 뒤였고, 회전 기파를 휘감아 돈 그녀가 그대로 창대를 쥐고 당겨냈다. 그와 함께 장창이 설향의 몸마저 잡아당겨 보신경 균형이 무너지는 순간, 악예린이 장법을 내쳤다.


파아아앙!


“커헉!”


설향의 입에서 선혈이 토해져 나왔다. 그녀의 복부에 닿은 악예린의 손아귀 아래로 물결치는 성라기단의 기파가 흐릿하게 이지러졌다. 호신기를 두르고 있음에도 진기가 그것을 넘어 몸 안을 격한다.


내가중수법(內家重手法)의 성취가 지극히 높은 탓이었다.


일격에 내상을 크게 입었다. 그렇잖아도 커다란 격차를 자령안과 순발력을 이용해 간신히 따라가던 균형이 단숨에 무너질 수 밖에.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토혈이 올라오는 와중에도 안법을 붙든다. 흐릿하게 일렁이는 자색 안광 속에서 설향은 상대를 똑바로 응시하려 노력했다.


‘온다.’


연환창식.


창이 벼락처럼 휘어져 떨어지는데, 그 연격에 끝이 없다. 그래서 연환창식이다. 사십구식(四十九式)이라는 이름처럼 마흔 아홉에 달하는 초식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이어질 수 있는 까닭이었다.


즉, 한번 기세를 내주면 다시 공세를 가져올 수 없다는 소리였다.


설향의 주 절기인 적화검류가 공격 일변도의 검법임에도 불구하고.


콰앙! 쩌정! 쩌저정!


흐릿하게 이지러지는 창격 궤적. 설향은 그저 검을 휘둘렀다. 시뻘건 화염이 일어나며 창격 투로를 잘라낸다. 자령안이 아니었다면 이미 경기는 끝났을 일이었다.


쩌엉!


손아귀가 찢어질듯 아파왔다. 창격 하나 하나가 한없이 쾌속하면서 동시에 무거운데, 악예린의 축기량과 심법의 성취를 방증하는 요소였다. 한번 창격을 받아낼때마다 몸에 경파가 쌓인다. 점차 손끝이 느려지는 것이 체감이 될 정도로.


보신경으로 조금이나마 무마할 수 밖에 없었다. 운해비영과 화신풍 구결이 몸을 타고 휘돈다.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영역이었다. 창격을 받을때마다 힘이 가해지는 방향으로 조금씩 물러난 것은.


콰앙!


“쿨럭......!”


선혈을 뱉고 숨쉬기를 반복. 한순간 휘어지며 떨어지는 창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실패했다. 길쭉하게 그어진 창격이 우하단으로 낙하. 설향의 허벅다리 위를 스치고 떨어졌다. 작열하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이건 위험해.’


정신없는 와중에도 생각했다. 보법을 훌쩍 밟으며 크게 뒤로 몸을 날린 설향. 그대로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달아오른 검신을 허벅다리에 가져다 대었다.


치이익.


흘러나오던 피가 아릿한 탄내와 함께 멎었다. 직후 바로 시선을 쳐들어 짓쳐오는 악예린의 신형을 확인했다.


가볍게 진각을 밟는 모습이 보인 것도 찰나였다.


어느 순간 화악 커진 악예린의 신형이 공간을 격하듯 움직여 그녀의 코앞에 도달. 그대로 창을 휘두르기까지 눈을 깜빡일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마저 연환창식의 초식.


설향은 문득 생각했다.


‘암천은 멀구나.’


저것은 오만이나 자만 따위가 아니었다. 그녀와 상대방의 무위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일 뿐이다. 연환창식만으로도 충분히 압도하고도 남는다는 판단.


그런 그녀가 곧바로 암천화광창을 꺼내들게 만든 칠룡은 얼마나 강할 것이며, 악예린이 공공연히 상대하기 위해 아껴둔 것이 있다고 말했던 백연은 얼마나 강한 것일까.


자신의 사제는 대체 얼마나 앞서 있는 것일까. 머리로는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제대로 감각하지 못했다. 아직도 모르겠다.


그 아이가 보는 세상은 어떠할까.


‘......알고 싶어.’


백연이 보는 세상을 찰나라도 감각할 수 있다면-


-이게, 네가 보는 세상이구나.


처음 자령안을 배우고 그렇게 감탄했었다. 반만 맞는 말이었다. 자령안은 백연의 감각을 녹여내 만든 안법이었지만, 동시에 성취에 따라 그 공능이 극도로 달라진다고 했다.


아직 스스로가 거기에 이르지 못했음을 설향은 잘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곤 해도, 잠시나마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까.


삐이이이-


생각에 진기가 동했다. 상념의 사이에 숨어든 의념이 곧 심법을 일으키는 기제로 화했다. 현음공과 적양공의 진기가 거칠게 혈맥을 따라 내달렸다.


직후였다.


화아악-!


시야가 또렷해졌다. 찰나지간 그녀를 향해 떨어지고 있는 악예린의 창날이 보였는데, 그 속도가 전보다 느려져 있었다. 이지러지는 선율들이 전보다 뚜렷한 궤적으로 인지된다.


그것을 직시하며 설향이 검을 휘둘렀다. 간극 속에서 화염이 하나의 커다란 반원을 그리며 장창의 앞을 막아섰고.


콰아아앙!


검창이 마주치며 진기의 파문이 파도처럼 번져나갔다.


“음?”


악예린이 의문을 담은 음성을 뱉었다. 순간의 충돌로 인해 설향의 신형이 뒤로 주욱 밀려났는데,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급격하게 가속해 본래라면 막을 수 없는 창격 궤적을 막아낸 검이 문제였을 뿐.


“......갑자기 이렇게?”


나직한 의문을 표하며 악예린이 재차 쇄도. 장창이 허공을 짓누르며 연환창식의 초식을 이어냈다. 삽시간에 허공을 수차례 격하며 비처럼 쏟아지는 창격.


그러나.


쩌정! 쩌저저정!


연이어 천둥소리가 터져나왔다. 화려한 불꽃이 점차 가속하며 사방을 짙게 물들였다. 흩어졌다 터져나오며 벼락을 잘라내길 수차례. 전부 막지는 못해 베여나간 옷자락 사이로 핏물이 점점이 배어나왔지만, 공방이 성립되기 시작했다.


투둑.


설향이 핏물을 떨구며 검을 휘둘렀다. 짓쳐오는 연환창식을 보고, 검을 휘둘러 막는다. 세번 막아내면 한번은 몸에 창날이 스쳤다. 그것은 보신경으로 최대한 위험하지 않게 받아낸다. 창날에 베인 고통은 이제 느껴지지도 않았다.


휘두르고, 막고, 보고, 피하며, 검을 내친다.


이제 네번에 한번이다. 상처가 줄어들고 있었다. 점차 몸이 추워지는 것도 같았다. 허나 이지러지는 화염이 그녀의 몸을 식지 않게 달궈주고 있었다.


‘더.’


시야에 보이는 창격이 느려지고 있다. 아니, 설향 자신의 인지가 가속하고 있는 것이었다. 머리가 뜨겁다 느껴질 정도로 달아올랐다. 눈가의 혈도에 쉼없이 진기를 흘려넣고 있었는데, 이러다가 터지겠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다섯번에 한번, 여섯번에 한번, 일곱번, 여덟번......


‘더 빠르게.’


빨라질수록 모든게 느려졌다. 수세에 몰려 밀려나고 있음에도 설향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자령안을 한없이 끌어올린다. 그럴수록 창격 궤적이 뚜렷하게 인지 속에 들어온다. 더 이상 연환창식은 파훼가 불가능한 공격들이 아니었다.


순간 순간 보이는 궤적. 이제는 미리 예측할 수 있으리라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였다.


후욱.


문득 공기가 무거워졌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악예린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이대로 가면 많이 다쳐요.”


설향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자령안으로 보고 있는 광경 때문이었다.


“그 전에 끝내는게 나을 것 같네요. 크게 다치면 백연이 슬퍼할 것 같아서.”


악예린이 입술을 열어 뭐라 중얼거리며 창을 다시 쥔다. 단순히 파지법을 바꾸는 행위. 그러나 그 순간, 무지막지한 압박감이 설향의 몸을 조였다. 본적이 있는 자세였다.


‘마지막 초식이다.’


연환창식의 마지막 일격. 사십구식. 결코 정면으로 받아내서는 안된다. 바로 깨달았다.


‘어디로 피해야?’


자령안으로 보았다. 설향은 악예린이 창을 뻗어내기도 전에 투로를 직감했다.


그러나.


‘......없어?’


회피할 곳이 없었다. 그것을 깨달은 설향이 검을 쥐는 순간, 악예린의 신형이 전진했다. 그녀가 창을 내뻗는 것과 동시에 시야가 한없이 축소했다. 지금까지 대략적으로나마 인지하에 두고 있던 주변의 상황이 전부 지워졌다.


한순간, 설향의 감각에 남은 것은 둘뿐이었다.


자신과 악예린. 그리고 그 사이에 짓쳐오는 창격.


‘전방위.’


회피는 불가(不可). 생문이 없었다. 압도적인 힘으로 받아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완벽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더.’


백연이었다면. 여기에서 방법을 못 찾았을까. 그럴리가 없다.


‘네 눈을 빌려줘.’


생각하는 것과 동시였다.


투둑.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직후 설향의 눈가를 따라 시뻘건 선혈이 흘러내렸다. 한쪽 눈의 실핏줄이 모조리 터져 나가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설향은 신경쓰지 않았다.


극히 찰나.


감각이 확장된다. 한순간 눈앞의 모든것이 또렷하게 인지되는 것을 넘어섰다. 모든 장면이 때려박듯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고, 수백, 수천을 넘어서는 정보의 파도가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리고 설향은.


앞서 보았다.


‘뒤로 피하면.’


후퇴 보법을 밟는다. 악예린의 창격이 그녀의 후퇴 보법보다 길었다. 직선 투로에 꿰뚫린다.


‘상하좌우.’


전부 창격 권역 안에 들어와 있다. 모든 방향으로 일격에 당한다.


‘정면으로.’


설향의 검이 화염을 이끌고 전진해 악예린의 창과 맞닿는다. 힘에서 밀린다. 근본적인 축기량의 차이에, 기술의 차이가 더해졌다. 연환창식의 파괴력은 적화검류를 압도했다. 손이 찢어지고 팔 하나를 못쓰게 된다.


어느것도 해답이 아니었다. 찰나지간 인지에 들어온 연환창식의 스물 다섯개에 달하는 복잡한 투로.


모든 가능성을 인지한 순간, 설향의 눈에는 한줄기의 선이 보였고.


사박.


그대로 설향의 신형이 전진했다.


운해비영의 구결이 바람처럼 풀린다. 몸에 경파를 휘감은 채로 창격의 빗속으로 직진한 그녀가 꿈결처럼 창격을 전부 회피.


유일한 길을 밟고 선 설향은 어느 순간 악예린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고.


“......!”


경악으로 부릅뜬 악예린의 눈동자에 비친 것은 사선으로 떨어지는 푸른 화염의 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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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 본선(4) +7 24.02.24 2,496 74 14쪽
195 본선(3) +6 24.02.23 2,543 74 15쪽
194 본선(2) +5 24.02.22 2,455 65 16쪽
193 본선 +5 24.02.21 2,481 73 16쪽
192 창염(蒼炎)(2) +6 24.02.20 2,484 72 16쪽
191 창염(蒼炎) +7 24.02.19 2,481 74 16쪽
190 만천(滿天)(4) +7 24.02.17 2,617 80 19쪽
189 만천(滿天)(3) +9 24.02.16 2,534 76 19쪽
188 만천(滿天)(2) +8 24.02.14 2,552 76 15쪽
187 만천(滿天) +6 24.02.13 2,533 72 15쪽
186 성장(13) +6 24.02.12 2,528 70 21쪽
185 성장(12) +6 24.02.10 2,656 73 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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