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음으로 죽다] 6. 이것이 정말로 모든 것의 끝인가? (3)
인적도 드문드문한 길이다. 그곳에서 사마철과 독고광은 걷고 있다.
총관에게 해고를 통보 받은 후, 그들은 맹을 떠났다. 그렇다고 바로 떠난 것은 아니다. 여러 가지 뒷정리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쌓여있던 수당도 지급 받고, 숙소에서 얼마 되지 않는 짐도 챙겼다. 그 외에도 약간의 일을 더 처리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은 떠날 채비를 마치게 된 셈이다.
원래대로라면 '가보겠습니다' 식의 인사도 한 바퀴 돌며 송별식이니 환송회 등의 절차도 거쳐야 하지만, 갈만한 데가 거의 없어서 그런 절차는 많이 생략되었다.
하긴 어딜 들리겠는가.
그나마 잘해주는 듯 싶던 손노대는 마각을 드러냈다 뎅겅, 베틀도 즐긴 제갈훈 역시 한밤중에 뎅겅. 상우나 소요는 패 죽이려 들지 않으면 다행일 테니 생략하고, 남궁기한테 가서 짧은 검술 한 번 더 구경하고 나왔다. 더불어 야간조의 허조장이나 봤으면 좋았겠지만, 이 시간에는 잠들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내친김에 짧은 기간동안이나마 교분을 트던, 별다방의 점소이 아삼까지도 만나봤다. 때가 때인만큼 주문은 시키지 못했지만.
가볼 곳이 적은지라 떠날 때까지의 시간을 많이 단축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해야할 것들은 없지 않았다.
직장에서 짤리고 이사간다는 것은, 그냥 몸만 떠나면 되는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정리와 전달, 그 외의 자질구레한 것들이 필요한 법이다.
결국 그들의 몸과 마음이 모두 떠나게 된 것은, 총관과 헤어진 후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모든 과정이 끝난 후, 그들은 한참을 걸었다. 걷고 걷고 또 걸었다.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기던 사마철이 불현듯 독고광에게 말한다.
"형."
"왜?"
한 글자의 질문에 외자로 답한다. 간단하고도 명료한 그들의 문답이 세상의 고요함을 뒤흔들어 놓는다.
"미안해요."
"뭐가?"
밑도 끝도 없는 사과에 단호하게 되묻는 독고광이다.
"그냥요."
사마철은 간단하게 사과를 마무리한다. 너무 간결하여 이상할 정도지만... 독고광은 특별히 되묻지 않는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려줄거라 생각했거나, 혹은 별다른 관심이 없기 때문 일거다.
대신 화제를 돌린다.
"이제 뭘 해먹고 사나..."
사마철이야 아직 어린데다가 세상 험한 꼴 보지 않은 문사라, 그런 생각은 별로 해보지 않았을 거 같다. 하지만 독고광은 그런 걸 걱정할 나이다.
어딜 가서 뭘 해도 굶지야 않겠지만, 인간이 꼭 거기서 만족할 수는 없지 않은가. 가끔 술도 먹으며 이거저거 해야하고, 입을 옷과 쉴 잠자리도 마련해야 하는 법이다. 노숙이야 오가다가 가끔 하는 거지, 매일 밤을 길가에서 지새울 수도 없는 것이고.
이제는 무림맹에 있을 때처럼, 구석에 짱박혀서 홀짝댈 수는 없다. 뭐든지 열심히 해야만 한다.
"설마 굶기야 하겠어요."
그러한 독고광의 걱정에 사마철은 형식적인 답을 한다. 하긴 다르게 뭐라 말하겠는가. 아직 전 직장에서 그리 멀리 떠나온 것도 아니건만.
일종의 불명예 퇴직인 셈이니, 좀 많이 떨어진 곳에 가야만 직장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일단은 부지런히 걷는 것이 우선이다. 깊은 생각은 그 다음이다.
불현듯 하늘을 본다.
해가 꼭대기에 올라갔다가 서서히 내려오는 중이다. 모든 것에는 성함과 쇠함이 존재하듯, 한낮에 군림하는 햇살도 마찬가지다. 어느덧 낮의 중심을 넘어 저녁으로 가는, 그 중간점이 되었다는 거다.
조금을 더 걸었다. 특별히 경공을 쓰거나 하는 것도 아닌, 그냥 일반인의 속도로 찬찬히 밟아간다.
휙휙 날아간다는 것은 좋다. 무공이라는 것은 그런 맛에 익히기도 하는 법이다. 지나가는 사람도 없는 곳이니, 구경 당하거나 충돌할 위험 따위는 없다. 그럴 능력이 있다면, 구태여 발 질질 끌며 패잔병처럼 걸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독고광이라면 모를까 사마철에게는 무리다. 무공도 내공도 없는데, 경공이라고 익혔겠는가. 독고광이 들고뛰기도 해봤지만, 그건 위급할 때나 하는 거다. 얼마를 더 가야 할지 모르는, 지금 시점에서는 곤란하다. 둘은 그저, 터덜터덜 걸을 뿐이다.
덕분에 그들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고, 적지 않은 시간을 전진했지만 그리 많은 거리를 온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주변은 변해있었다.
아까도 한적한 길이었지만, 지금은 정도가 조금 더하다. 지나가다 마주치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넓던 길도 서서히 좁아져가고 있다. 무림맹의 세력권에서 슬쩍 벗어난 곳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해도 많이 가라앉아 서서히 어두워져가고 있다. 사마철과 독고광을 제외한 주변에는, 푸른 숲만이 존재하고 있을 따름이다. 여행객이나 나무꾼조차도 보이지 않는 인적이 말소된 장소다.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을법한 한적한 곳에서, 사마철이 발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조금 큰 목소리로 말한다.
"이제 나오시죠?"
깨져버린 정적이지만 반응은 없다. 그저 사마철이 남긴 목소리의 잔재와, 그를 지켜보는 독고광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마철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따라온 거 알고 있으니 나오시죠. 진짜 범인!"
이번에는 좀 더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조금 더 넓고 멀리, 사마철의 음성이 공기 속에 퍼져나간다.
이제서야 반응이 있다.
조금 떨어진 후방의 나무 뒤에서, 검은 인영 하나가 모습을 드러내며 말한다.
"어떻게 알았지?"
정체를 드러낸 '녀석'은 다소 낭패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자신의 은잠술은 무림맹의 날고기는 이들조차 눈치채지 못했건만, 어찌 한낱 문사가 발견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이 궁금해서라도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라? 혹시나 하고 찍어본 건데 정말 나오네."
역시 사마철이다. 가뜩이나 서늘한 공기를 금새 차디차게 만들었다.
그 광경을 본 독고광은 잠시 생각한다.
손노대의 무공 여부도 찍더니 이번에도...
어쩌면 저 녀석 인생의 절반은 찍기고, 나머지 절반은 운일지도 모르겠군. 무림맹 입사시험을 잘 치러낸 기반도, 알고 보면 찍기의 연속이었을 거 같기도 하고. 그런데 아무리 잘 찍어도 그렇지, 이 정도로 결정적인 것들을 마구 찝어 낼 수 있다니. 저 녀석 알고 보면 아주 무서운 놈이거나, 아니면 진짜로 별 볼일 없는 놈일지도 모르겠는걸. 그렇다면 앞으로도 녀석과 동행을 해야 하는 나의 입장은...
아무렴 어때? 재미있으면 그만이지, 인생 별거 없잖아.
한참 생각을 하는 척 하다가, 결국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독고광이다. 역시 그 나물에 그 밥이요, 가제는 게 편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복면도 벗지 그래. 총관의 부하 이사."
생각을 오래 하다 말을 꺼내서 그런지, 독고광이 조금 길게 말한다.
이사가 복면을 벗는다. 입가에 비틀어진 미소를 담은 채, 독고광과 사마철을 노려본다. 그에 덧붙여 되묻는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지?"
"목소리 들리잖아요. 한 두 번 만난 것도 아닌데, 설마 그걸 모를려고."
사마철의 개입이다.
"음성변조라도 했어야지."
그를 뒷받침하는 독고광의 첨언이다.
이번에는 찍은 데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이사에게 주어진 위안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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