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9화, 방귀 뽕! 왕王자
왕파리는 남궁세가에 식객으로 있으면서 별로 한 게 없던 터라 이참에 밥값을 하고 싶었다. 슬쩍 일어나 천면노를 향해가자 장작도 슬그머니 뒤를 따랐다.
“천면노, 오랜만이요. 어째 신수가 훤합니다.”
누가보아도 꾀죄죄한 천면노를 비꼬는 인사였다. 천면노는 입 꼬리를 비틀면서 왕파리와 장작을 바라보았다.
“앵앵거리던 모기가 사라지니 똥파리가 나타났군..., 아! 말이 헛나갔네. 미안, 미안하오. 왕파리 대협!”
“흥,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어린 후배들을 핍박하다니 염치는 어디다 두고 온 게요?”
“그래서 왕파리와 장작 대협이 날 훈계하겠단 게요?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어야지, 그러다 똥통으로 빠지는 수가 있소.”
똥파리가 똥통으로 빠지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왕파리는 심한 모욕감에 이를 부드득 갈며 분노한 기운을 발산했다.
비쩍 마른 몸 주위로 검푸른 기운이 일렁이며 퍼져나가자 주위의 식탁과 집기들이 달그락 달그락거리며 제멋대로 움직였다.
그때 어느 틈에 들어왔는지 곱게 생긴 소년과 청년이 두성이 앞의 식탁에 앉았다.
다들 한바탕 싸움이 일어날까봐 슬슬 자리를 피하는 중이었는데, 이 소년은 겁이 없는 건지, 하여간 눈을 동그랗게 뜨고 구경을 했다.
얼굴을 씰룩이며 금방이라도 손을 쓰려는 왕파리를 장작이 말리고 있었다.
천면노는 오히려 그런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지, 그들을 보면서 천천히 술을 마시다가 혼자 중얼거렸다.
“일단 칼을 뽑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베어야 진정한 무인이지. 쯧쯧, 뱃장이 없구먼.”
겨우 화를 삭이고 있는 왕파리의 가슴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였다.
“뭐가 어쩌고 어째? 내가 널 겁낼 것 같으냐?”
천면노는 전연 화를 내지 않고 귀에 손바닥을 대고 두성이를 보았다.
“응? 뭐라고? 나 대신에 네가 왕파리한테 도전하겠다고? 그건 좀 무리인데....”
두성이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천면노가 혼자 떠들자, 왕파리의 참을성이 한계점에 도달했다.
“어린놈이고 늙은 놈이고 아무나 나서라!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다.”
“그렇다면 존경하는 제자님, 이 늙은 스승의 체면 좀 세워주라.”
“사부님, 어찌 제가....”
“제자님의 무공이 이 사부를 능가하는데 뒤로 빼는 건 도리가 아니지. 존경하는 제자님, 난 술을 마셔야하니까 부탁해!”
“......”
“흥! 제자가 사부를 능가한다니 청출어람이 납셨군. 제자가 지면 사부가 대신 벌을 받아야한다. 약속하겠느냐, 천면노!”
“알았다, 뭐든지 하마. 그런데 네가 지면 너도 뭐든지 해야 한다. 일구이언은?”
“이부지자! 한 입으로 두 말하기 없기다!”
왕파리는 홧김에 앞뒤 생각 없이 천면노에게 도전했지만 속으론 아차! 하고 후회막심이었다. 그런데 어린놈을 내보내다니 천만다행이었다.
남궁악을 비롯한 패거리들은 모두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무림십대검객의 하나인 천면노가 아니라 그의 어린제자라니, 천면노가 술이 취해 헛소릴 지껄인 것이다. 그러니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주위의 손님들은 모두 이 희한하고 재미난 대결을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두성이가 마지못해 일어나 잔뜩 나온 배를 긁으며 밖으로 나갔다. 왕파리는 물론 사람들이 우르르 객점 앞으로 몰려나갔다.
자리를 잡은 두성이가 두 손을 맞잡고 왕파리에게 인사를 했다.
“왕 대협님,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
두성이가 선배에 대한 인사성이 바르자 구경꾼들은 모두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왕파리는 점잖은 태도로 구경꾼을 보며 인사를 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못난 사부를 대신해 용서를 구하는 제자에게 따끔한 훈계를 내리는 선배의 마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자, 얘야! 네가 열 번 공격할 동안 내 옷자락 하나라도 건드린 다면 내가 진 걸로 하겠다. 자, 덤벼라!”
무림의 선배로서 왕파리의 언행은 훌륭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마치 선배가 어린후배를 가르치는 듯, 왕파리는 만면에 웃음을 띠우고 뒷짐을 지고 섰다. 아까 화를 내며 악을 쓰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두성이는 무공을 제대로 배우고 난 후, 첫 번째로 갖는 대결이라 무척이나 마음이 설레고 두려웠다.
그것도 같은 또래의 대결이 아니라 십대고수에 버금가는 실력을 갖춘 고수와의 대결이었다.
여기서 진다면 자신은 괜찮지만 잔뜩 큰소리 친 사부의 체면은 땅에 떨어진다. 게다가 상대가 무엇을 요구 할지 아무도 몰랐다.
두성이가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망설이자 왕파리는 왼손을 허리에 대고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어 손가락을 까닥였다. 어서 공격하라는 신호였다.
나중에 식당에 들어온 곱게 생긴 소년은 물론 남궁악의 패거리와 구경꾼들, 그리고 술병과 잔을 든 천면노가 웃음을 지으며 지켜보고 있었다.
여유 있게 서 있는 왕파리의 몸에 빈틈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침내 두성이가 앞발로 쿵! 땅을 밟으며 왕파리를 향해 몸을 날렸다.
물 찬 제비처럼 깔끔하고 유연한 몸놀림으로 왕파리의 왼쪽 어깨를 향해 오른손을 섬광처럼 뻗었다.
왕파리가 몸을 살짝 오른쪽으로 틀면서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두성이의 팔목을 잡아채려하자, 두성이도 오른쪽으로 상체를 비틀며 왕파리의 옆구리를 노리고 오른발로 돌려 찼다.
휘익! 파공성을 일으키며 두성이의 발끝이 왕파리의 배 바로 앞으로 지나갔다.
발길을 따라 거센 바람이 일어 왕파리의 옷자락이 마구 휘날렸다. 어린놈의 발재간이 보통이 아니라 왕파리는 순간 당황했다.
(이크! 어린놈이라고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네, 조심해야겠는걸....)
왕파리가 다시 왼발을 내밀며 몸을 돌리자 두성이가 훌쩍 뒤로 피했다. 왕파리의 몸에선 전연 빈틈이 보이지 않았다. 역시 고수는 달랐다.
그동안 사부님은 남과 대격할 때에는 가진 실력의 반만 보이고, 절체절명의 순간에만 제 실력을 십분 발휘하라고 했다.
지금은 목숨을 건 대결이 아니라 암영무흔보의 경공을 실력의 반만 보이고 있었다. 우선 상대가 빈틈을 보이도록 유도해야 했다.
두성이가 다람쥐처럼 왕파리를 가운데 두고 쳇바퀴 돌 듯 빠르게 돌았다.
순간 두성이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여 그 실체를 구분하기 쉽지 않았다.
왕파리가 정신을 집중하여 손을 뻗쳤지만, 어느새 두성이가 뒤로 돌아와 왕파리의 허리띠를 잡으려고 손을 내밀었다.
왕파리는 황급히 몸을 앞으로 숙이며 한발을 쭉 뻗어 뒷발질을 했다.
두성이가 훌쩍 위로 뛰어올라 몸을 숙이며 어깨를 낚아채려는데, 왕파리는 재빨리 손으로 땅을 짚으며 한 바퀴 돌아 멀찍이 피했다.
역시 노련한 왕파리는 두성이한테 일말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때 곱게 생긴 소년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빛났다. 두성이의 경신법을 보자 어딘지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이제 두성이가 공격할 기회는 세 번밖에 남지 않았다.
초조해진 두성이는 온갖 궁리를 다해봤지만, 실력에 비해 경험이 부족해서 노련한 왕파리의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두성이가 몸을 날려 왕파리의 왼쪽을 공격하는척하면서, 섬전처럼 몸을 돌려 오른쪽 소매를 잡아챘다.
그러나 왕파리가 몸을 틀며 손을 번쩍 들자 소매는 두성이의 손끝을 살짝 빠져나갔다. 이제 남은 공격은 두 번.
이를 앙다문 두성이가 빠르게 움직이다가 순간적으로 왕파리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지며 들어갔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에 왕파리는 훌쩍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비스듬히 미끄러져 들어가던 두성이는 왕파리가 뛰어오르자 두 손으로 동시에 땅바닥을 쳤다.
반탄력을 받은 두성이의 몸이 비스듬한 상태 그대로 공중으로 올랐고, 위에서 떨어지던 왕파리의 두 다리를 잡으며 함께 땅으로 굴렀다.
생각지도 못했던 두성이의 재치에 구경꾼들은 모두 박수를 치며 환호했고, 남궁악 패거리들은 낭패하여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였다.
천면노가 술을 한 잔 쭈욱 들이켜고 입을 쓱 닦으면서 왕파리를 쳐다보자, 왕파리는 뒤통수를 긁적이며 딴청을 피웠다.
“아까 여러 사람들 앞에서, 지면 뭐든지 한다고 했지요? 뭐를 시키면 좋을까? 내 제자한테 사부님이라고 부르며 큰 절을 하라고 시킬까? 아냐, 그건 너무했고.
왕 대협이 가진 물건 중에 좋은 것을 하나 내 제자에게 주는 건 어떤가?”
“나 난, 수중에 좋은 물건은 없어도 은자 몇 푼은 있지.”
“아냐, 좋은 물건은 있지만 주기 싫다는 말이잖아. 재물이 아깝다면야, 그렇담 몸으로 때우는 건 괜찮겠지?
"뭐 뭐라고?
몸으로 때우라니 점잖은 사람이 무 무슨 말을 함부로 하나?”
“혀를 깨물고 죽으라는 것도 아니야, 단지 조금만 수고하면 될 일이지, 남한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래? 그렇다면 말해보게.”
“흠....,
허리를 좀 굽히고 엉덩이를 바짝 들게. 자네 이름이 뭔지 엉덩이로 글씨를 쓰는 놀이지. 어때? 그저 즐거운 놀이라네.”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좋다고 깔깔대며 발까지 구르면서 박수를 쳤다.
보무도 당당한 화산파의 속가제자로 십대고수에 버금가는 실력자인 왕파리가,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엉덩이를 쳐들고 이름을 쓴다?
무림인들이 들으면 기절초풍하고 박장대소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품속에 간직한 귀한 보물인 '광예검'을 줄 수도 없었다.
광예검은 너무 날카로워 검 빛만으로도 보통 밧줄은 잘려나간다는 비수였다.
일시적으로 체면을 좀 손상하더라도 결코 보물을 줄 순 없었다.
평소에 명예와 체면을 중시했지만, 보물 앞에선 명예도 체면도 한낱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오늘의 이 치욕은 반드시 갚으리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왕파리는 허리를 구부렸다. 그러자 사람들이 떠나갈 듯 그를 응원했다.
“....셋! 둘! 하나아!”
왕파리는 분해서 눈물을 찔끔 흘리며 엉덩이에 힘을 주고 ‘왕’자를 썼다. 그리고 ‘파’자를 쓰려는데 어떤 사람이 소리쳤다.
“지금 쓴 글자가 ‘왕王’자요? 아니면 ‘옥玉’잔가? 두루뭉술하게 쓰지 말고 또박또박 쓰시오!”
(체면 불구하고 '왕'자도 억지로 썼구만, 어구! 저 시불할노무시끼, 정말 열 받네.)
왕파리가 얼굴을 붉히며 ‘왕’자를 또박또박 엉덩이로 쓰는데, 잔뜩 힘을 주고 쓰느라 방귀가 튀어나왔다.
“뽕!”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깔깔대고 웃는데, 한 사람이 낄낄대며 말했다.
“아, 이제야 알았다. 왕王자에 방귀로 점을 찍으니 옥玉자가 맞긴 맞구먼.”
“어! 이것들이? 내 성은 옥이 아니라 왕이란 말이야!”
“임금 왕자도 있지만, 방귀 뽕! 왕자도 있지. 어흠!”
천면노가 점잖게 말하자 모든 사람들이 배를 잡으며 박장대소했다.
- 작가의말
구천 회 돌파기념으로
한 편 더 올립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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