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어마어마한 대물 大物
할아버지의 호통에 두성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호신술을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그 애들을 물리칠 방법이 떠올랐어요.”
‘물리칠 방법? 얻어맞지 말라고 아주 기본적인 호신술을 가르쳐준 게 전부인데 무슨 소릴 하는 게냐?“
조 의원은 생뚱맞은 소릴 하는 두성이를 보다가 기가 차는지...
“아, 알았다! 물리칠 방법이라는 게 주먹이 들어오면 볼이나 입술로 막고, 몽둥이로 때리면 무릎으로 막고, 손가락으로 찔러오면 눈으로 막는 거냐?
정말 대단한 무공을 깨우쳤구나! 주먹 공격을 눈이나 입으로 막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하고, 매우 불쌍한 무공으로 문파를 하나 차리면 무림천하통일은 식은 죽 먹기겠네!”
조 의원의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두성이는 개의치 않고 잔뜩 부운 얼굴로 찌그러진 웃음을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저번에는 제 능력이 모자라 두들겨 맞아서 엄청 분했지만, 오늘은 제가 일부러 맞아서 기분이 좋은 거예요.”
두성이의 뜬금없는 말에 조 의원은 기가차서 한마디 했다.
“예끼 이놈아!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얻어터지더니 머릿속에 뭐가 들어갔는지 어디 해부 좀 해 보자!”
“할아버지, 정말이에요!
그 애들이 날 때렸을 때의 움직임을 모두 기억하고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호신술을 응용해봤더니 맞지 않을 자신이 생겼어요.
그래서 오늘 싸움을 걸었더니 그 애들의 움직임이 자세하게 보이는 거예요. 내 눈엔 애들의 움직임이 전보다는 많이 느려졌어요.
그래서 그 애들의 공격을 피하자 나도 모르게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가더라구요.
여태 맞은 게 분해서 한 대 때리려는데, 갑자기 내 주먹에 맞으면 애들이 죽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차마 때리지 못하고 그냥 맞아준 거예요. 히히!”
그 말을 들은 조 의원은 어린놈이 거짓말을 그럴 듯하게 하는 게 매우 괘씸했다.
영민하고 순진해서 거둬주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아주 약삭빠른 녀석이었다.
그동안 어린놈의 겉모습에 감쪽같이 속은 걸 생각하니 이 나이 먹도록 헛살았구나 하는 자괴감에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네 주먹에 한 대 맞으면 애들이 죽을 거 같다고? 그럼 어디 이 돌멩이를 깨보아라!”
조 의원이 약방 앞에 제법 넓적한 돌멩이를 가리키자 두성이는 주먹을 쥐고 돌멩이를 한동안 노려보더니 날쌔게 주먹을 내려쳤다.
“팍!” 하고 돌멩이가 조각이 나며 땅바닥에 흩어졌다.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녀석의 말이 사실이었다.
조 의원은 할 말을 잊고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두성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다.
처음 두성이를 만났을 땐 무공(武功)의 ‘무(武)자도 알지 못했다.
그동안 단전에 내공을 쌓는 흔한 호흡법을 가르쳐 준 게 전부였다. 그런데 어떻게 주먹에 내공을 싣는 법을 혼자서 깨우쳤는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조 의원은 상처에 약을 꼼꼼히 발라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은 괴물(怪物)이 아니면 천재다, 아니 어마어마한 대물(大物)이다!!!”
운비는 꾸무럭거리며 간신히 일어나 이층으로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갔다. 약초가 가득한 방에는 한쪽에 약초를 써는 긴 작업대가 있다. 작업대 위를 대충 정리하고 쓰러지듯이 누웠다.
누워서 깊게 숨을 들이마시니 갖가지 약초 냄새가 뱃속에 가득했다.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신 호흡법을 생각하고 따라했다.
온갖 약초의 향기가 처음에는 뱃속에 가득하더니 다시 빠져나가고 다시 가득차기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에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꼈다.
“어? 이러다간 몸에 약초냄새가 아주 배는 것 아냐? 약초냄새는 좋은 거니까 혹시 알아?
내가 나타나면 주위 사람들의 병이 낫는다거나 울적했던 기분이 좋아진다거나 하지 않겠어?
그렇게 된다면 난 걸어 다니는 귀한 약초가 되는 거네? 야호, 신난다!”
운비가 아픈 것도 잊고 작업대 위에서 누운 채로 위로 폴짝폴짝 뛰어오르자 아래층에서 잠자고 있던 조 의원이 점잖게 한소리 했다.
“도망보법이 너한테 잘 맞는 모양이구나, 내일부턴 천보를 연습해라. 어흠!”
“아이고, 까불다 망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한여름에 접어들었다. 가만히 있어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두성이는 약방의 일이 어느 정도 손에 익어 조 의원이 말만하면 약초들을 금방 찾아왔다.
어느새 손발이 척척 맞아서 조 의원은 한결 편해졌다. 두성이를 보는 조 의원의 얼굴엔 미소가 그치지 않았다.
“두성아, 이번 약초를 구하는 일은 나대신 네가 다녀오면 어떠냐?”
두성이는 그동안 약방 안에서만 생활하다시피 해서 매우 갑갑했다.
콧바람을 쐬고 싶어도 참고 있었는데, 불감청이 고소원야(不敢請耳固所願也 진실로 바라던 것이)라 큰소리로 대답했다.
“넵! 맡겨만 주세요. 헤헤!”
조 의원은 구해올 약초의 이름과 육포 등 먹거리와 식수 등을 챙겨주고 산에서 주의할 점을 일러주었다.
“할아버지, 다녀오겠습니다.”
망태를 짊어진 두성이는 지팡이를 들고 조 의원이 일러준 산을 향해서 첫 발걸음을 떼었다.
두성이는 관광객들이 거리를 메운 시장통으로 들어섰다. 두성이를 괴롭히고 때렸던 패거리들이 한쪽 골목에서 어정거리고 있었다.
이들 십여 명의 대장으로 나이보다 덩치가 큰 삼식이가 야비한 웃음을 짓더니 거만한 몸짓으로 두성이를 불렀다.
몇 달 전이었다면 지레 겁을 먹고 쭈뼛거렸겠지만, 그사이 이들의 경지를 훨씬 뛰어넘은 두성이는 오리려 미소를 지으며 당당하게 걸어갔다.
그런 두성이를 보는 놈들은 뭔가 달라진 두성이의 태도에, 전에 얻어터진 놈이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렇지만 아직은 덩치가 작은 두성이가 그들의 눈에 차지도 않았다. 삼식이가 손을 내밀며 목에 힘을 주고 말했다.
“갖고 있는 돈을 모두 내놓고 망태도 벗어서 이리 줘, 반항하면 오늘은 다리를 부러뜨릴 거다.”
삼식이의 부하 촉새가 두성이의 뒤로 돌아가 망태를 뺏으려고 하였다.
두성이는 몸을 홱 돌리더니 검지를 뻗어 촉새의 이마를 콕 찍었다. 촉새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러자 삼식이가 눈을 부라리며 달려왔다.
“어쭈우! 요 녀석 제법이네. 어디 맛 좀 봐라!”
삼식이의 커다란 주먹이 눈 깜작할 사이에 두성이의 눈앞으로 다가오자 두성이가 오른발을 뒤로 슬쩍 뺏다. 커다란 주먹은 얼굴에 닿지 않고 코앞으로 지나갔다.
그 순간 두성이는 오른손을 잽싸게 내밀어 삼식이가 차고 있는 돈주머니를 슬쩍하더니 한발 옆으로 물러서서 웃으며 말했다.
“이건 지난번에 나를 때린 보상금이지? 잘 쓸게 고마워!”
말을 마친 두성이는 한발 앞으로 쭉 내딛더니 어느새 유람객들 사이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보기에는 어기적거리는 거 같았는데 뒤통수도 보이지 않았다.
삼식이와 부하들은 닭 쫓던 개가 지붕만 쳐다본다는 말처럼 사라진 두성이와 돈주머니를 생각하며 입만 헤 벌리고 서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녀석이 요술을 부리는 거 같았다.
조 의원이 그동안 두성이가 하는 행동을 보니 생각하는 것이 확실히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어린 두성이를 혼자 보내는 조 의원의 뜻은 두성이를 믿고 단련시키려는 것이었다.
먼 길을 여행할 때는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도적이나 산적들 때문에 사람이나 마차나 함께 모여서 간다.
두성이는 마차들이 모여 있는 곳을 물어서 찾아갔다. 마침 커다란 마차가 황산까지 가는 손님을 모으고 있었다.
마차는 열다섯 명을 태울 수 있었는데 벌써 열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부들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어서 마차에 손님이 다 차도 다른 마차를 기다렸다가 함께 떠나곤 했다.
게다가 표물을 운송하는 표국과 같이 간다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기에 마부들은 표국의 일정을 잘 알고 있었다.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앉아있던 사람들이 모두 두성이를 쳐다봤다. 두성이는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전 두성이라고 하는데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호호, 어린데도 인사성이 밝고 매우 씩씩하구나.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라, 같이 가자꾸나.”
후덕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반갑게 두성이를 부른다. 여자들은 세 명이 안쪽에 앉아 있었고 맞은편엔 남자들이 앉아있었다.
다행히도 밥 한 끼 먹을 정도의 기다림이 지나자 인원이 다 차서 마차가 출발하였다.
마차가 천천히 항주를 빠져나와 관도로 들어서니 기다리고 있던 다른 마차들이 출발하였다.
마차는 모두 세 대였다. 태양이 내려쬐는 넓은 관도를 마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찜통 같던 마차 안은 불어오는 바람결에 조금 시원해져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맞은편에 앉은 남자들은 나이와 행색이 각각이었는데 모두 눈을 감고 흔들리는 마차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두성이도 흔들리는 마차에서 알게 모르게 잠이 들어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이윽고 마차가 멈춰 섰고 마부가 손님들에게 말했다.
“모두 내리십시오, 점심식사를 하고 바로 출발합니다.”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 보니 커다란 오복식당 앞이었다. 아마도 여행객을 위한 전문식당 같았다.
두성이는 기지개를 펴고 사람들을 따라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은 만원이었는데 부유한 유람객이 아니라서 모두 간단한 국수나 호빵, 만두를 먹고 있었다.
어린나이에 혼자 가는 두성이가 안쓰러웠는지 후덕한 인상의 아주머니가 두성이의 손을 잡아끌며 다정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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