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정사대전의 서막
두성이가 무림맹으로 돌아와 약방에서 치료를 받고 밖으로 나오자 놀랍게도 아버지가 근심스런 얼굴로 서 계셨다.
“얘야, 많이 다친 건 아니지?”
“네, 가벼운 부상입니다. 근데 어쩐 일로 이 먼데까지...?”
“네가 무림맹주가 되었는데 가만있을 수도 없고, 할아버지가 전한 물건도 있고 해서.”
“아버지, 방으로 들어가시죠.”
두성이는 아버지를 모시고 맹주실로 들어갔다. 장중표는 아들이 대견해서 만면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할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안녕하시죠?”
“우린 모두 평안하다. 엄마가 네 걱정에 애를 태우지만.”
“참! 취영이를 찾았어요.”
“그래? 지금 여기에 있니?”
“아뇨, 아직은 아니에요.”
두성이는 그간 냉여빙과의 일을 말씀드렸다.
“천만다행이다. 빨리 보고 싶은데, 기다려야겠지?”
“머지않아 찾아간다고 했는데, 취영이를 생각한다면 그쪽에서 키우는 것도...,
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일단 취영이가 잘 있다는 것이 중요하지. 할아버지와 엄마와 함께 깊이 의논해봐야 할 것 같구나. 참, 이것 받아라.”
장중표는 등에 멘 장검을 두성이 앞에 내려놓았다.
“사룡검이라고 하는 전설의 보검이야. 할아버지가 너한테 맞는 보검이라고 주신 것이란다.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검이라고 하셨단다.”
고풍스런 검집은 낡아서 무척 오래된 검이란 걸 알 수 있었다. 두성이는 조심스럽게 검을 잡았다.
“스르릉!”
힘들이지 않아도 미끄러지듯 검이 빠져나오자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성이가 검을 들어 허공에서 좌우로 흔들자 웅웅거리는 소리가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용울음소리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사룡검, 네 마리 용의 혼이 깃든 검이었다.
두성이는 사룡검을 등에 메고 대청으로 나가 무림의 원로들에게 아버지를 소개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를 모시고 가까운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오랜만에 이야기꽃을 피웠다.
다음날, 대마혈궁의 척살대 습격사건을 보고 받은 제갈 군사는 회의를 열어 맹주를 전적으로 보호하는 호위대를 만들기로 했다.
맹주를 그림자처럼 호위하는 호위대는 대장으로 마동탁을 임명하고, 대원으로는 각파의 후기지수 중에서 실력이 출중한 삼십 명의 고수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장천상의 지근거리에서 몸을 숨기거나 행인들로 위장하고 목숨을 바쳐 문주를 보호할 것이다.
두성이는 제갈 군사와 파대봉 그리고 정파의 수뇌들과 함께 지도를 펼쳐놓았다. 앞으로 벌어질 대마혈궁과의 전투에 대해 세밀한 작전을 의논했다.
이제 죽느냐 사느냐하는 무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선 절박한 시기였다.
사천에 있던 그들의 꼬리가 잘려나가고 척살대가 임무를 실패하고 도망쳤지만, 언제 어디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적들을 마냥 기다리기보단 먼저 공격하는 것이 최선의 방어라고 의견이 모아졌다.
지도를 면밀히 검토한 제갈 군사가 좌중을 보며 입을 떼었다.
“우리도 놈들처럼 서역으로 향하는 대규모 상단으로 위장하여 청해성 서녕에 집결하여 본부를 세워야겠습니다.
대마혈궁이 북서쪽 기련산에 있으니 우리가 놈들의 턱밑에 자릴 잡고 갑자기 쳐들어간다면,
꼬리가 잘려나가 심각한 타격을 입은 놈들은 당황해서 우왕좌왕할 겁니다.“
“맞습니다, 놈들의 머리를 잘라버린다면 몸통과 다리는 저절로 와해될 것이니 뒤를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요.”
의견의 일치를 본 무림맹은 상단으로 위장할 준비를 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사천당문과 청성파는 장원을 지킬 인원을 제외하곤 모두 상단에 합류하여 공전절후의 대결을 위한 첫걸음에 합류하였다.
아버지를 배웅하고 돌아온 두성이를 조서방의 추명성이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맹주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입니까?”
“낙양에서 월하미인이 납치 되었다고 합니다.”
“왜요? 누가?”
“대마혈궁의 삼대영주 중에 환영영주라고 합니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중요한 시기에 대마혈궁의 중요한 인물인 환영영주라는 자가 일개 아녀자를 납치하다니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군요.”
“.....”
“월하미인이 그들에겐 매우 중요한 인물인가요?”
“네,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월하미인 설중매는 마교의 성녀였습니다.”
“네에? 마교의 성녀?”
청천벽력 같은 말에 두성이는 경악실색하였다. 마교의 성녀라면, 지금의 상황에선 커다란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조서방의 핵심인물들은 모두 성녀의 전속 호위대였습니다.
과거 정파에 의해 마교가 무너지고 뿔뿔이 흩어질 때,
성녀의 나이는 겨우 열 살이었습니다.”
추명성은 그 당시를 회상하는지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마교의 잔당들은 성녀를 보호하며 기척을 숨겼지만, 성녀가 있는 한 마교의 부흥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
성녀는 영특하였고 마교와는 어울리지 않는 착한 심성을 지녔다. 이린 나이에 죽고 죽이는 참상을 목격했던 성녀는 모든 걸 잊고 조용히 보통사람의 삶을 살려고 노력했다.
잔당들이 복수를 외치며 성녀를 구심점으로 암암리에 세력을 불리려고 갖은 방법을 다 썼으나 성녀는 죽음을 불사하며 그들을 거절했다.
결국엔 성녀의 전속호위대도 그녀의 뜻을 이어 지난 일을 반성하며 지금까지 신분을 숨기고 성녀를 보호하고 있었다.
성녀 설중매는 지난날 지옥을 방불케 한 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간 참상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넋을 위로하고 싶었다.
혼자만 편하자고 숨어 지낼 수만은 없었다.
세파에 지친 사람들이 즐겁게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래서 춤과 노래로 사람들을 위로하는 월하미인이 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대마혈궁에선 각지에 흩어진 마교의 잔당들을 규합하려면 성녀가 필요했기에 그동안 암암리에 성녀의 행방을 추적해오고 있었다.
그동안 신분을 세탁하고 살았으나 결국 성녀는 대마혈궁의 환영영주에게 납치된 것이다.
성녀를 앞세우고 옛 마교의 잔당들을 흡수한다면 대마혈궁의 위세와 사기가 올라가서 막강한 전력을 갖출 수 있었다.
추명성의 이야기를 들은 두성이는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성녀를 구출해야 했다.
“지금 그들의 행방을 알 수 있습니까?”
“워낙 신출귀몰하게 움직여 그들의 행방을 놓쳤지만, 그들은 결국 대마혈궁으로 갈 것이니 우린 그 길목에서 기다릴 생각입니다.”
“낙양에서 이곳까지 아무리 빨리 와도 보름은 걸릴 터이니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그 안에 구출계획을 철저히 짜야겠습니다.”
* * *
한편 대마혈궁에서는 부복해 있는 부하들을 노려보던 궁주의 노여움이 폭발하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믿었던 귀궁수가 죽다 살아난 것도 모자라 혈미상단의 오백여 명이 한순간에 전멸하였고,
게다가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는 척살대마저 박살이 났다니,
해룡방주는 그동안 뭘 한 겁니까?“
“으헉!”
해룡방주 풍만해의 안색이 시퍼렇게 죽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책상머리에 앉아 생각만 한다고 죽은 놈들이 살아온답니까?
정신들 차리시오! 에이, 모자란 것들···,
하나같이 쓸 만한 것들이 없으니···,
에이!“
궁주는 흉악한 눈알을 굴리며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었다.
우습게 알았던 놈들한테 치욕스런 꼴을 당해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었는지 앞에 있던 찻주전자를 내던져 박살을 내었다.
엎드려 있던 부하들은 무슨 불상사가 일어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한쪽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풍만해도 마음이 편치 않아 죽을 맛이었다.
잔뜩 우거지상을 하고 있던 궁주가 팔걸이를 내려치며 소릴 질렀다.
“다들 보기 싫으니 냉큼 물러가라!”
궁주는 잔뜩 찌푸린 눈초리로 비실비실 물러나는 수하들의 등짝을 노려보다가 성질이 나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갑자기 명령을 내렸다.
“여봐라! 감숙에 있는 부하들을 모두 단파로 집결하라고 연락해라! 이대로는 참을 수가 없다.
우리 정예부대와 단파에서 합류하여 사천에 있는 당문과 청성파는 물론 각지에서 모여든 정파라는 놈들을 싹 쓸어 도륙해야겠다.”
부하들과 함께 밖으로 물러나온 풍만해는 속으로 치민 화를 풀 길이 없어 얼굴을 잔뜩 구기며 걸었다.
지금도 중원무림에선 내로라하는 위치에 있는데 서쪽의 오랑캐 같은 놈들한테 굽실대야하는 서글픈 신세에 울컥 목이 메었다.
대마혈궁의 궁주를 도와 서쪽 지방을 차지하면 군사를 빌려 중원의 무림을 통일하려는 원대한 꿈으로 혈궁에 협조했다.
그런데 지금의 형세를 보면 무림맹의 세력이 생각보다 막강해 자신의 꿈을 이루기는 힘들 것 같았다.
명색만 그럴듯한 군사의 지위지 실제론 궁주 혼자 다 결정하고 자신은 그저 훈수나 두는 이방인,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또한 궁주는 서쪽 지역을 서역의 군벌세력과 나눠 자신의 세력을 공고히 할 생각뿐이었다.
그 세력으로 중원지방을 정복할 꿈도 꾸지 못하는 찌질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낙심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는데 부하가 뛰어왔다.
“군사님, 궁주님께서 부르십니다.”
풍만해가 다시 궁 안으로 들어가자 궁주가 친근하게 말했다.
“군사께선 사천 대설산 인근의 단파로 가서 감숙에서 오는 천오백여 명의 부하들을 지휘하고,
우리 정예부대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적당한 곳에 본부를 세우고 기다려 주시오.
군사를 공격대의 선봉장으로 임명하겠소.”
말을 마친 궁주는 영패를 꺼내 풍만해에게 주었다.
풍만해는 허리를 숙여 영패를 받았다. 이제 대마혈궁의 정예부대까지 합해 칠천여 명의 선봉장이 되어 공격의 일선에 서게 된 것이다.
풍만해는 칠천여 명의 부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면 중원을 장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슨 수단을 써서든지 부하들의 마음을 사로잡아야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궁을 빠져나왔다.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