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신궁 神弓
“할아버지, 이젠 안심하셔도 됩니다. 다른 의원님들도 잘 모시겠습니다.”
“그래, 우리들의 연구는 계속되어야 한다. 무림의 안위가 달려있어.”
연구실에는 기이한 독약과 대마혈궁에서 특별히 하사한, 사람의 이성을 흐리게 하여 야수로 변하게 만드는 환약이 세 알 있었다. 두성이는 혹시 몰라서 대마혈궁의 비약을 챙겼다.
탁일문과 마동탁 그리고 초대봉은 독수방을 샅샅이 뒤져 돈과 보석들을 마대에 담고 통나무집과 시체들은 모조리 태워버렸다.
할아버지를 비롯해 의원들과 일행은 일단 낭인부대로 돌아왔다.
두성이는 사천당가에서 일을 마친 홍조심과 정찰대가 낭인곡으로 오자 부상당한 낭인들을 치료해주고 모두 당가로 데리고 명령했다.
그리곤 낭인곡에 살던 사람들을 모아놓고 모두 짐을 싸서 사천으로 옮기라고 명령했다.
사람들은 짐을 싸서 수레에 옮기면서도 그동안 정들었던 곳을 떠나려니 선뜻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지 머뭇거렸다.
그러나 낭인들이 없는 낭인곡에서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기에 모두 살림을 하나라도 더 챙기려고 부지런히 움직였다.
마침내 낭인곡을 떠나는 수레들 뒤로 불타오르는 통나무집들이 하나둘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두성이는 이미 청성산 지역 인근에 커다란 장원을 알아보라고 말했었다.
은자 한 냥이면 쌀 한 가마를 살 수 있었으니 낭인곡과 독수방에서 가져온 은자 팔만 냥이면 엄청난 돈이었다. 커다란 장원을 매입하는데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혈수방이나 대마혈궁과 연계된 조직들을 찾아내서 하나하나 깨부수기로 작정했다.
두성이는 사명명과 차를 마시면서 운남에 있다는 무정곡에 대해 물었다.
“네, 우리도 들은 적이 있어요. 그러나 우리와 직접적으로 다툰 적이 없어서 신경을 쓰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찾을 수는 있을 겁니다.”
“서둘러서 알아봐 주십시오.”
“네, 단장님. 알겠습니다.”
다정하게 말을 마친 사명명은 밝게 웃었다. 그녀가 환하게 웃자, 찻집 안의 객들이 모두 넋을 놓고 쳐다보느라 찻물이 다 식어버리는 것도 몰랐다.
낭인곡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는데도 이상한 기미도 없었고 대마혈궁의 움직임도 없었다. 폭풍전야의 고요함이랄까?
그렇게 조용한 가운데 호북성에 있는 불새단의 선비 이시학이 스무명의 단원들을 이끌고 찻집에 도착했다. 아직은 이들이 묵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인근에 있는 커다란 장원을 구입했지만 반년 동안 방치한 터라 개조하고 수리할 곳이 많았다.
그 장원은 육 개월 전에 낙향한 높은 벼슬아치가 내놓은 곳이라 무척 넓긴 했지만 관리인만 홀로남아 지키고 있어서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장원을 수리하라고 탁일문에게 맡겨놓고 찻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따라 거리엔 좌판을 벌이고 호객행위를 하는 떠돌이 상인들이 많아 거리는 매우 혼잡하였는데 유독 찻집 근처가 더 심했다.
해가 서산에 걸리고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왕래도 뜸해져 좌판상인들은 하나둘 좌판을 거두기 시작했다.
이시학 일행에게 객잔을 잡아주고, 장원을 돌아본 두성이와 일행이 찻집으로 들어섰을 때였다.
모두 흰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만 내놓은 채 차를 마시고 있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서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천하에 몹쓸 악당아! 오늘이 네 심판의 날이다!”
모두 머리를 뒤로 묶고 남장을 했으나 목소리가 앙칼진 걸 보니 여자들이었다. 뒤이어 밖에 있던 노점상인들도 좌판 아래 감춰뒀던 칼을 뽑아들며 일제히 안으로 들어왔다.
두성이는 삿대질을 하고 욕을 퍼부으며 검을 뽑아든 여인들을 보고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여러분, 천하에 몹쓸 악당이라니 사람을 잘못 보았습니다.”
두성이가 손을 저으며 변명하였으나, 그들의 우두머리인 여인이 검을 겨누고 콧방귀를 뀌며 차갑게 대꾸했다.
“역시 그 여인들의 말 그대로군, 네놈이 시치미 뗄 줄 알았다.
중원에서 숱한 여인들을 농락하고 그것도 모자라 기루에 팔아넘긴 네놈의 소행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얼굴은 반반하게 생겼다만 마음속엔 독사가 똬리를 틀고 있는 놈아, 끝까지 세 치 혀로 변명만 할 심보냐?”
그러자 사방에서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저놈의 감언이설에 정조를 뺏기고, 기루에 팔려가 눈물로 지새우는 여인들의 복수를 해주자!”
“저놈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인들의 한을 풀어주자!”
“뱀 같은 놈의 변명을 들어줄 시간이 없으니 빨리 목숨 줄을 끊어놓자!”
“이놈아, 중원에서 이곳으로 도망 오면, 네놈의 파렴치한 죄가 숨겨질 줄 알았냐?”
“죽여라!”
“우와!”
두성이가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들은 뭔가 커다란 오해를 하고 있었다.
여인들의 정조를 유린하고 기루에 팔아먹은 인간이하의 파렴치범으로 몰리고 있다니.
억울했지만 여인들과 싸울 수도 없었다. 두성이가 전전긍긍하고 있자 마동탁이 앞으로 나서며 발에 힘을 주어 쿵! 하고 발을 굴렀다.
그 여파로 바닥이 울리고 지붕이 들썩였다. 마동탁은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어떤 놈이 그런 말을 했소? 정인군자인 우리 주공께 더 이상 무례한 말을 한다면 단단히 각오하시오!”
마동탁의 살기를 품은 강한 기세에 잠시 흠칫했던 여인들의 우두머리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욕을 했다.
“미련한 곰처럼 덩치만 큰 네놈을 믿고 파렴치한 짓을 저질렀구나,
저놈들의 사지를 잘라버려라!”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우두머리와 주위의 여인들이 바닥을 박차고 위로 뛰어올라 두성이와 마동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문 앞에 있던 여인들은 초대봉과 탁일문을 노리고 비검을 던졌다.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날아오는 화살처럼 예리했다.
상체를 공격함과 동시에 옆에서 단검을 던져 하체를 공격하는 공격은 시간과 위치가 절묘하게 맞아 방어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동탁이 도를 뽑아 휘두르며 앞에서 날아오는 여인들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그만 비검에 장딴지를 찔리고 말았다.
마동탁이 주춤하는 사이 두성이는 마동탁의 등을 뛰어넘으며 검을 뽑아들고 우두머리의 검을 내려쳤다.
검과 검이 부딪쳐 불꽃을 튀기는 순간, 두성이는 공중에서 반 바퀴 재주를 넘으며 우두머리 여인의 견정혈을 노리고 손가락을 뻗었다.
우두머리 여인이 몸을 비틀어 옆으로 피할 때, 앞에 있던 여인들이 두성이를 향해 검을 추켜세웠다.
세 자루의 날카로운 검이 두성이의 발바닥과 장딴지를 물어뜯으려고 뱀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들었다.
공중에 떠있던 장천상은 물구나무서듯 자세를 바꾸고 세 자루의 검을 후려쳤다.
내력을 주입한 장천상의 검이 세 자루의 검을 두 토막으로 잘라버렸다. 잘라진 검이 여인들을 향해 내리꽂히자 여인들이 놀라 주르륵 뒤로 미끄러졌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 두성이가 우두머리 여인을 향해 몸을 날리는 순간, 엄청난 파공성을 동반한 화살이 열린 창문을 통해 날아왔다.
그 기세가 워낙 강하고 맹렬했다. 두성이가 막지 않으면 앞에 있는 여인들이 위험했다.
두성이는 검에 힘을 주고 몸을 틀면서 섬전처럼 다가오는 화살을 두 동강을 낼 요량으로 힘껏 내려쳤다.
“꺄앙!
엄청난 굉음과 함께 날아온 화살은 부러지지 않았고 살짝 방향을 바꿔 벽돌로 지어진 벽에 깊숙이 박혀 화살 깃만 남겨놓았다. 그 기세로 볼 때 화살을 날린 사람의 완력이 범인의 경지를 넘어선 것이다.
우두머리 여인은 느닷없이 화살이 소리를 지르며 어깨 바로 옆을 지나쳐 벽에 박히자 놀란 얼굴로 말을 잃었다.
두성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화살을 쳐내지 않았다면 자신은 화살에 꿰뚫려 이미 죽은 몸이었다. 갑자기 두성이가 몸을 날려 멍하니 서있는 여인의 어깨를 잡으며 좌측 구석으로 몸을 피했다.
“쇄애액!”
눈에 거의 보이지 않는 속도로 날아온 검은 화살은 여인이 서 있던 곳에 박히며 부르르 떨고 있었다.
두성이가 문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삼십여 장 건너 지붕위에서 괴한이 대궁을 겨누고 있다가 활시위를 놓았다.
머나먼 거리에서 날린 화살의 위력이 상상을 불허할 정도이니 궁수의 안력과 무력이 무척이나 뛰어남을 짐작할 수 있었다.
두성이가 막지 않으면 찻집 안의 누군가가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두성이는 괴한의 뒤를 쫓으려던 생각을 접고 날아오는 화살을 향해 몸을 날렸다.
건너편 지붕을 밟고 높이 뛰어오른 두성이가 날아오는 화살을 장작을 패듯 힘껏 내려쳤다. 몸이 떨어져 내리는 속도와 힘이 잔뜩 들어간 일격에 화살은 기와지붕에 부딪쳤다가 다시 튀어 올랐다.
화살은 두성이가 재차 내려친 검에 맞아 지붕에 떨어졌다. 그사이 궁수는 사라지고 없었다.
화살을 주워들고 찻집으로 돌아온 두성이가 우두머리 여인에게 화살을 내밀었다.
“우리들의 목숨을 노린 이 화살은 보통화살이 아니고 쇠로된 화살입니다.
혹시 이런 화살을 쏘는 자가 누군지 짐작이 가는 바가 있습니까?”
여인은 화살을 쳐다보며 생각을 굴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직접 보지는 못했으나 대마혈궁에 신궁이라 불리는 영주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이 화살이 그 사람의 것인지는 모르겠어요.”
상황이 이지경인데도 여인들은 여전히 검을 움켜쥐고 적개심에 불타고 있었다. 우두머리 여인도 자신의 사명을 깨닫고 장천상을 노려보며 명령했다.
“우리의 목적은 파렴치한 놈을 응징하는 것이다, 모두 공격하라!”
“멈추시오!”
“......?”
“나도 절대로 도망치지 않고 끝장을 볼 것이오.
그러니 시시비비를 밝히고 싸워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오.
나는 하늘에 맹세코 절대로 그런 파렴치한 짓을 하지 않았소.
나를 모함한 자가 누군지 대면을 시켜주시오.
그래야 공평한 게 아니겠소?”
말을 마친 두성이는 우두머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우두머리는 두성이가 비열한 자라면 자신의 생명을 무릅쓰고 남을 구해주지 않았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싸워보면 그 사람의 속을 알 수 있다고, 행동거지를 보니 결코 파렴치한 소인배는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좋아, 어떤 거짓말을 할지는 두고 보면 알겠지.
소홍과 춘매를 데려와라!
설마 당사자를 보고도 시침을 떼며 거짓말을 하는 자라새끼는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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