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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노미카의 서재

우리 동아리에서는 내기 게임을 잘 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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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노미카
작품등록일 :
2016.10.17 22:58
최근연재일 :
2019.03.21 23:16
연재수 :
77 회
조회수 :
21,308
추천수 :
86
글자수 :
998,913

작성
17.07.17 00:23
조회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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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자
34쪽

15화. (1)

DUMMY

※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작중 내에서 표기된 인물, 지명, 단체 등은 모두 허구적 요소입니다.









15화. 그 시절 처럼, 그녀와 함께





“옷 됐고, 스마트폰 배터리 다 충전됐고, 지갑 챙겼고. 오케이, 이걸로 준비 끝.”


이걸로 필요한 건 다 됐다. 평소 그렇게까지 꼼꼼하게 신경 쓰지는 않는 나일지라도, 오늘은 다르다. 오늘 하루는 평소와는 조금 다른 ‘특별한 날’이 될 테니, 이 정도 수고는 양반이다.


“엄마, 갔다 올게!”


“응, 잘 갔다 와!”


나는 모든 것을 다 확인한 뒤 방안에 계신 엄마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그런데. 신발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신발장을 열어 확인해봤지만, 거기도 없었다.


“엄마, 내 신발 어디 있어?”


“아... 맞다. 엄마가 빨아놨었다. 지금 가져다줄게.”


뭐야, 없어진 줄 알고 깜짝 놀랐네. 모처럼 오늘 일 때문에 며칠 전에 고심해서 고른 녀석인데...


그런 생각을 하던 참, 엄마가 내 신발을 들고 오셨다.


“뭐야, 그거 어제 산 새 운동화인데 뭐 하러 빨아? 그냥 신으면 되지.”


“왜 빨긴, 새로 사면 원래 냄새 나는데 당연히 빨아야지. 아, 민준아. 그리고 잠깐만 기다려봐.”


그렇게 말하시고는 갑자기 또 방으로 들어가시는 엄마. 나는 무슨 일인가 생각하면서 신발을 꾸깃꾸깃 집어넣었다. 그렇게 기분 좋게 새 신발을 다 신은 참에 엄마가 손에 무언가를 들고 오신다.


“아들, 팔 좀 들어봐.”


“팔은 왜...”


그렇게 말은 해도 일단 엄마가 시키는 대로 팔을 들었다. 그러자, 엄마는 그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옷과 양 팔에 뿌리신다. 그 조그마한 액체가 내 옷에 흩뿌려지는 순간, 진하고 달콤한 꽃향기 비슷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거... 향수야?”


“응.”


진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르는 것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뭐야, 그런 걸 왜 뿌려. 내가 여자애도 아니고.”


“어어? 얘가 뭘 모르나 보네? 요즘은 남자들도 자기 외모에 신경 잘 써야해? 그래야 데이트할 때 여자들이 좋아한다고.”


또 데이트 얘기.


“엄마, 그러니까 수진이는 그냥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라니까. 엄마도 그런 건 알고 있잖아? 그냥 저번에 있었던 일 그냥 얘기 좀 나눠 보려고 만나는 건데. 제발 오해 좀 하지 마.”


“어휴, 꼭 그렇게 큰소리로 안 말해도 엄마가 더 잘 알아. 수진이랑 전화하면서 몇 번이나 얘기를 들었는데.”


수진이랑... 전화...


내가 그 날 산에서 수진이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 까지는, 상상도 못 했었던 것이다. 그야 엄마도 수진이도 시치미를 뚝 떼고 아무 말도 안 했으니 내가 알 리가 없지. 엄마는 전화로 나에 대해서 고민하고 있던 걔한테 이런 저런 이야기도 들어주고 조언도 해주셨다고 한다. 수진이랑 한 비밀 약속은 지키고 정작 아들인 내 앞에서는 걔에 대해서는 모르는 척 거짓말하고. 솔직히 처음 그 얘기 들었을 때는 엄마한테 좀 서운했다.


하지만,


“수진이가 엄마한테 고맙대. 엄마한테는 직접 말 못해서, 나한테 대신 좀 전해달라고 하더라고.”


비가 그치고 산에서 내려오던 날. 수진이는 자기 이야기를 들어주었던 친구들과 많은 주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거듭했었다. 그 중에서 특히나 우리 엄마한테 많이 고맙다는 얘기를 했었다. 그래도 우리 엄마만큼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녀가 유독 더 고맙게 느꼈나 보다. 자기도 물론 전화를 해서 직접 얘기도 할 거라고 하면서도, 일단은 나한테도 꼭 고맙다는 얘기를 전해달라고 거듭 부탁했었다.


“고맙긴, 후후. 어릴 때나 지금이나 수진이 걔는 예의 바른 건 여전하네.”


그렇게 말하면서 미소를 짓는 엄마. 어린 시절 나에게도 특별했던 친구인 수진이는 우리 엄마에게도 특별한 존재였나 보다. 이렇게 오랜 시간 공백을 뛰어넘어 다시 그녀를 만나게 되었다는 걸 생각하면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갔다 올게.”


“그래, 수진이랑 얘기도 많이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와.”


이제는 부드럽게 퍼진 향수 냄새를 맡으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직 우리 홍보동아리 친구들이 여름방학 기간 중 학교에서 만나기 전의 일.


오늘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수진’이와 약속을 잡은 날이다.


오전 11시. 시간은 겨우 이른 점심이었지만 벌써부터 밖에 서 있는 것조차도 괴로운 시간이다. 7월 중순, 장마가 끝난 여름 날씨는 말 그대로 사우나를 연상할 정도로 후덥지근하다. 소매와 반바지로 최대한 시원하게 입은 것과 더불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부채까지 챙겨왔지만, 이걸로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멈추기는 어림도 없어 보였다.


약속 시간이 되었는데 수진이가 오질 않는다. 이젠 더운 것도 모자라 어질어질해지는 지경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차가운 얼음물이라도 한 병 가져올 걸 그랬 -



!?


“으아!”



내 입에서 비명이 쏟아진 건 순간 혼을 빼놓을 정도로 시린 감촉이 내 목 줄기를 타고 오던 그 순간이었다. 폭풍처럼 밀려오는 찬 감촉에 미처 입을 다물 새도 없이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동시에 내 시선은 자연스레 그 감촉을 선사해 준 ‘장본인’에게 향한다.


“후훗.”


손을 내 뒷목에 뻗은 채 티 없는 미소를 지어보이는 한 여자. 그녀의 손에 들려있는 그 차가운 감촉의 정체는 다름 아닌 차가운 물병이었다. 얼음물 생각하는데 내 목에 차가운 물병을 갖다 대다니, 이게 무슨 우연이야.


물론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안 그래도 이 불쾌한 날씨에 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이라도 소리를 질렀을지도 모른다.


“뭐 하는 거야?”


“민준이 시원하라고.”


하여간, 애들 장난은... 물론 정말 그 때부터 함께 지내온 친구이니까 엄마가 말 하던 ‘그런 사이’가 아니더라도 자연스럽게 이런 장난을 걸 수 있는 거겠지.


강수진. 4년 반 만에 다시 만난 초등학교 시절 소꿉친구이다. 물론, 진짜 오늘 처음 만난 것은 아니고, 사실 고등학교 들어오면서부터 같은 홍보동아리 부원으로써 이미 오랫동안 함께해온 사이이다.


그녀가 다름 아닌 소꿉친구 ‘수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겨우 며칠 전의 이야기이다. 그 전까지 그녀는 그 사실에 대해서 철저히 내 앞에서 숨겨왔고, 나는 그런 것도 모른 채 수진이를 소꿉친구 ‘수진’이와는 다른 애라고 생각하면서 지내왔었다. 어렸을 적 있었던 서로간의 오해 때문에 서로를 의심만 한 채 솔직히 말하지도 못하고 지내왔던 우리 사이. 결국 수진이가 학교에 안 오고 도망쳤던 큰 해프닝도 겪긴 하였지만 이번일 덕분에 우리들은 길고 길었던 오해를 풀고 마침내 화해 할 수 있었다.


- 그 동안 좀 미안한 게 있어가지고 좀 얘기도 하고 옛날 생각도 하면서 지내볼까 하는데, 괜찮아?


그리고 오늘 같이 만나서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을 제안한 수진이. 비록 화해는 했다고 하더라도 솔직히 우리 사이에는 아직은 좀 미묘한 감정이 흐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동아리 친구 수진이의 모습과 내 기억에 남아있던 소꿉친구 ‘수진’이의 모습. 비록 그녀와 화해를 했다고 해도 오랫동안 두 사람을 따로따로 생각했던지라, 지금 와서 그 두 사람을 같은 수진이로 보자 하니 무척이나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더욱이 화해를 하고 난 그 다음날 바로 방학을 맞이한 탓에 그녀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없었고, 방학이 시작된 이후로는 가끔씩 단체 대화방으로만 이야기를 나눌 뿐 미묘한 감정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얼마 전 수진이가 나에게 보낸 문자는 각별했다. 나도 여자애들을 만나는거에 다소 조심스러워하는 성격인지라 이런 제안을 하면 솔직히 좀 꺼려지긴 하는데, 그나마 수진이는 여러 모로 내가 잘 알던 애이기 때문에 그런 부담을 조금은 떨쳐내고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번 만남을 통해서, 그간 길었던 공백의 시간을 정리하고 싶었던 것도 있다. 내가 알고 있는 ‘두 명의 수진이’를 하루라도 빨리 내가 알고 있는 ‘한 명의 수진이’로 바라보고 싶었다.


“늦었어.”


“겨우 3분 늦은 거 가지고 쩨쩨하게 굴래?”


“3분 늦은 것도 늦은 거지.”


“뭐야?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 기다리는 데 그것도 못 기다려?”


수진이가 잠시 삐친 표정으로 쳐다보았지만,


“그래, 그럼 내가 늦었으니까 벌로 이거 줄게. 이제 됐지?”


이내 표정을 풀더니 아까 내 목에 가져다대었던 얼음물통을 건네주었다.


“어 진짜야? 넌 안 마셔도 돼?”


“내 건 따로 있어.”


수진이가 그렇게 말하며 다른 얼음물병을 하나 꺼내 보였다. 마침 이런 더운 날씨에 물 생각이 간절했는데... 나는 그 차가운 물병을 받자마자, 더는 참지 못 하고 바로 뚜껑을 열어 그 안에 든 시원한 얼음물을 들이켰다. 찌릿할 정도로 시원하고 기분 좋은 감촉이 입과 목을 적시는 순간, 온몸이 시원해지고 머릿속이 상쾌해지는 듯했다.


“아아... 진짜 시원하다. 나 진짜 목말랐는데.”


“후훗, 이걸로 봐 주는 거지?”


“센스 좋은데? 뭐, 이 정도면 봐 줘야지. 고마워.”


웃음기 섞인 말투로 수진이에게 말했다. 이런 물 한 병으로 농담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그것은 홍보동아리에서 항상 만나서 느꼈던 그런 단순한 익숙함과는 달랐다. 그건 어렸을 적부터 함께 지내온 내공이 만들어낸, 눈빛만으로도 서로를 알 수 있는 친숙함이었다.


긴 공백 때문에 걱정도 많았었지만 그래도 우리들에게는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감대가 남아있었다. 덕분에 방금 전까지 그녀를 만날 생각에 긴장되고 초조했던 기분은 많이 가라앉았다.


“옷 그 날 입고 온 거네?”


물을 한 모금 더 마시며 수진이를 바라보자, 이제 눈에 들어온 그녀의 드레스 차림.


그 날 놀이터 뒤편에서 한참을 울면서 있었던 수진이는 손등과 옷자락까지 눈물 자국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물론, 애초부터 그런 심란한 분위기 속에서 수진이가 입었던 옷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지만.


“으응. 그 때 사실 너랑 얘기할 생각에 한참 고민하다가 고른 건데. 그 날은 그렇게 되가지고.”


나는 수진이의 드레스를 차근히 보았다. 민소매에 가까운 짧은 소매에 베이지색 배경에 작은 꽃무늬가 그려진 원피스. 그리고 드레스를 장식하는 리본과 분홍빛 핸드백. 신발도 항상 보아온 그런 운동화가 아니라 굽이 낮은 빨간 힐을 신고 있었다. 잡지 속 모델처럼 막 그런 어른스러운 이미지의 의상 차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학생’ 다운 순수함과 함께 은은한 여성미가 묻어나는 복장이다.


“어울려?”


수진이가 나를 살짝 올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잘 어울리네.”


그녀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지만, 솔직한 기분을 말한 거다.


“그래... 나는 혹시나 더 괜찮은 게 있을까 하고 좀 고민했었는데, 고마워.”


수진이가 쑥스러운 듯이 시선을 피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 했던 그녀의 태도. 확실히 그녀는 많이 변했다. 어렸을 적에는 비록 지금보다 머리가 훨씬 길긴 했지만 그런 외모에 비해서 여자다운 느낌은 거의 없었다. 초등학생 시절, 그녀는 나보다 키도 한참 컸었고 목소리도 당찼다. 종종 내 손을 잡아끌며 이 동네 저 동네를 밤늦게까지 뛰어 돌아다니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항상 잔소리를 드는 것은 나였다. 남자답지 않게 소심하다는 잔소리를 도리어 얘한테 자주 들어왔었다. 보통 여학생들처럼 한참을 내려다보는 키에 여자다운 외모, 조신한 말투와 행동... 나도 몰라볼 정도였던 지금의 얘를 누가 외모로만 보고 그 시절 걔였다고 생각할까.


“아아 그나저나 덥다. 더우니까 여기 그만 서 있고 빨리 어디든 가자! 어디 갈 거야?”


시선을 피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수진이가 다짜고짜 물었다.


“글쎄, 나는 딱히 생각 안 해봤는데?”


“에이 뭐야? 그런 건 진작 생각하고 와야지? 그럼 어디 갈까. 음... 아! 내가 지금 생각난 데가 있는데, 갈래?”


“어디 갈 건데?”


“후훗, 그건 도착할 때까지 안 알려 줄 거야. 따라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나를 잠깐 쳐다본 수진이가 앞장서서 가기 시작한다.


5년 만에 그녀와 함께 하는 우리 동네 구경.


여전하네...


들뜬 채 앞장서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국 오늘도 얘가 먼저 제안을 하고, 그녀가 가자는 곳에 놀러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 하면서 먼저 앞장서서 가는 그녀. 정말이지 그 시절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였다.


다만 하나 다른 게 있다고 하면, 그 때처럼 그녀가 내 손을 잡아끌지 않는다는 것 정도. 확실히 손잡고 다니는 건 나도 부담스럽고, 분명 수진이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서로 잘 아는 사이라고 해도, 이제 애들도 아니고 고등학생씩이나 됐는데 무턱대고 손을 잡고 다니기는 그렇다. 우리가 연인 사이라면 모를까...


수진이는 그저, 그녀를 여자로써 알기 이전부터 친구로서 지내온 사이일 뿐이니까.


“뭐 해? 왜 멍하니 서 있어?”


저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저 만치 거리를 두며 나를 보고 있는 그녀.


“아, 미안...”


“뭔 생각 하는 거야? 더운데 빨리 가자!”


“어, 알았어! 지금 갈께!”


잠깐 했던 아쉬운 생각을 접어두고, 나를 빤히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는 수진이를 뒤따라간다.


오늘은 그 추억 속 친구와 함께 어렸을 적 웃으면서 즐겼던 그 날을 되새기며, 언젠가 나중에 기억할지 모르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고자 한다.




무더위와 습한 기운이 세상을 지배하는 바깥을 피해 우리들이 처음 도착한 곳.


“모처럼 시내 구경 나왔는데 설마 오락실에 올 줄은.”


예전에 동아리 친구들과 와서 점심밥을 걸고 내기 게임을 했었던 그 오락실이다. 확실히 애들이랑 놀러 오기에는 딱 좋은 곳이긴 하지만. 기왕 만났으면 어디 카페에서 이야기 같은 거라도 나누거나 할 줄 알았는데.


“왜? 민준이 너도 게임 하는 거 좋아하잖아. 아까 들어오면서 ‘오오’하고 감탄한 주제에.”


... 조그맣게 혼잣말 한 걸 어느 틈에 들은 거냐. 솔직히 기대를 조금이라도 했냐고 물으면, 맞다.


“이거 얼마 전에 신곡 나왔다던데! 어때? 나랑 또 한판 할래?”


그녀가 오락실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남자들이나 좋아할 법한 그 발판 리듬게임이다. 하여간 이런 구석만큼은 예전이랑 별반 차이도 없어 보인다. 하긴... 이런 걸 남자애들만 즐겨야 한다는 생각은 편견일 뿐이지만... 무엇보다 수진이의 실력은 이미 두 눈으로 봐서 너무나 잘 알기에 그녀 앞에서 이런 이야기는 정말로 편견이다.


그나저나 얘는 저번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옷차림이 지금 하려는 이 게임이랑은 전혀 어울리는 구색이 없다. 아무리 그래도 치마 차림에 굽 있는 신발 신고하는 건 좀 걱정이다. 무엇보다 이런 복장은 좀 여러모로 위험한 구석이 있다. 굽 있는 신발로 함부로 발을 굴리다가는 다칠 수도 있는 것도 물론 위험하지만... 그보다, 발을 굴리면서 자연스럽게 날리게 될 치맛자락이 상당히 위험하다.


“야, 옷이랑 신발 그렇게 입고서 되겠어?”


이런 이야기를 ‘직접’ 하다가는 안 그래도 평소 이런 이야기에 민감해하는 이 녀석이 정색할지도 모르는 생각에 차마 직접 말하지는 못하고 조심히 대충 둘러말했다.


“아. 걱정은. 저번에 한 거 봤으면서. 넌 안 할 거야?”


... 그걸 떠나서 수진이는 ‘그걸’ 별로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지만. 내 걱정과는 상관없이 벌써부터 발을 풀면서 준비만만이다.


“그럼 해봐. 난 너 끝나고 할 테니까.”


“그래, 그럼 게임 하는 김에 내기 한판 하자. 여기서 이기는 사람이 오락실 게임 대주기!”


수진이가 나름 솔깃한 돌발제안을 했다. 어렸을 적부터 소소한 내기를 좋아했던 우리, 그리고 내기 게임으로 돌아가는 홍보동아리. 우리들 사이에 이런 소소한 내기 이야기가 오고가는 것은 어쩌면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다.


“어, 진짜지? 지금 너 말했다. 너 나중에 후회하기 없기다? 나중에 가서 복장 가지고 점수 안 나왔다 라든지 그런 소리 하기 없다.”

“오케이. 일단 이기고 그런 소리 해~!”


눈빛을 보아하니 자신만만해 하는 수진이. 감히 내 승부욕에 불을 지펴? 비록 저번에는 그래도 여자라서 좀 봐주려는 마음은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런 거고 뭐고 절대로 안 봐준다.


그렇게 언제나 우리들 사이에 약속처럼 자리 잡은 소소한 내기 게임 제안과 함께, 오랜만에 그녀와 함께 한 이야기의 그 첫 페이지를 적었나갔다.




“아아...!”


말도 안 돼. 또 졌다. 편안한 복장에 운동화 신은 내가 드레스랑 굽 있는 부츠 신은 여학생에게 지다니. 그것도 저번에 이어서 두 번 연속으로. 더욱이 이번에는 서로 모르는 신곡으로 대결 한 건데. 거기에 떠 오락실 게임 대주기라는 거부하기 힘든 내기로 동기부여까지 하고 전력을 다해서 했는데... 그러고도 졌다.


“하아... 수고했어. 근데 괜찮아? 표정이 힘들어 보이는데? 하아...”


땀을 닦고, 숨을 고르면서 인사를 건네는 수진이. 얼음물을 건네주며 나를 챙겨주는 그녀였지만,


“나야 뭐 지금 했으니까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가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솔직히 그렇게 말 하는 네가 더 힘들어 보인다. 아까 끝냈는데 아직도 숨을 헉헉 거리고 있는 수진이. 이러고 보면 정말 미스터리다. 발판 리듬게임이 워낙 폐활량을 많이 요하는 만큼 보통 숨이 차면 기진맥진하며 제대로 못 하는 게 당연하다. 나도 마지막에는 숨이 차 집중이 안 돼서 진짜 죽기 살기로 했는데, 운동과는 상극인 얘가 오히려 이럴 때 나보다 더 집중해서 잘 했다니.


“숨 차는 거 말고. 넌 기분이 안 괜찮아 보이는데? 아, 혹시 아까 했던 내기 져서 그런 거야? 에이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래? 걱정 안 해도 돼, 난 그렇게 많이는 안 할 테니까.”


게임 돈 대주는 게 아쉬워서 그러는 게 아니다. 나름 자신 있다고 자부한 이 게임에서 그녀에게 두 번 씩이나 진 게, 자존심이 상해서 그렇다.





다행이도 첫 게임에서 져서 침울했던 기분은 다음 게임을 하면서 눈 녹듯이 사라졌다.


“수진아, 그렇게 툭툭 끊어서 치면 안 되고, 밀어내듯이 해줘야해.”


“안 된다니까... 공이 너무 빨리 와서 자꾸 쳐져.”


수진이는 정직했다. 다른 게임들은 답이 안 나올 정도로 형편없는 실력임을 보여주었으니까.


예를 들면 저번에도 한 번 그 몹쓸 실력을 보여주었던 에어 탁구 말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치면 안 되고... 이렇게 스윽 하고 닦아내듯이.”


역시나 어정쩡한 자세로 불안하게 공을 넘기는 모습을 보고만 있기에는 좀 답답했지만, 이렇게 말로 조언하는 것 외에는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손을 잡아주고 하는 게 바람이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진이는 여자였기에 함부로 그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의 자리까지 직접 와주면서 공을 튕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4번 정도를 이어서 더 한 결과...


“하아, 하아... 이제 그만. 숨차서 못 하겠어.”


그녀는 에어 탁구에 대한 가능성 대신 거친 숨고르기만 보여주었다. 천생 타고나는 능력도 있지만, 반대로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얘는 예전에는 맨날 저녁 늦게까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도 안 힘들어 하더니 지금은 뭐 하는 것도 없는데 그렇게 힘들어 하는 건지. 도대체 그 시절 남이 부러워할만 했던 체력은 지금 다 어디 간 걸까.


“오오, 이것 봐! 이거 예전에 많이 했던 게임인데. 진짜 오랜만이다! 이거 하자!”


모처럼 궁금해진 참에 그녀에게 물어보려고 하였지만, 그보다 앞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결국 그건 물어보지 못 했다.




다음으로 우리가 손 댄 것은 어렸을 적 문방구점 앞에서 100원씩 넣고 앉아 했던 슈팅게임이다. 물론 고품격(?) 좌석과 큰 브라운관으로 바뀐 오락실에 걸맞게 여기서는 한 판에 동전 500원짜리지만.


“파워 나왔다.” “오케이, 땡큐.”


한 스테이지에서 하나씩 나오는 파워 업 아이템. 서로 2단계씩 먹으면 기본적으로 파워가 안 나온다. 그래서 2인 플레이를 할 때는 일반적으로 처음에는 한 개씩 사이좋게 먹은 후, 한 사람에게 4단계까지 다 몰아준 다음에 나머지 한 사람은 스테이지를 깨가면서 파워를 먹는 방식이 가장 효율이 좋다.


오랜만에 하는 게임이었지만, 우리들의 환상 콤비는 여전하다.


- 콰쾅.


“아 맞다... 지금 가면 저 큰 비행기 나와서 안 되는 데.”


“아, 미안. 나도 깜빡 잊어버렸다.”


다만 군데군데 잊은 기억의 파편만큼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아아, 오랜만에 제대로 놀았다!”


그렇게 이런저런 게임들을 실컷 즐기고 밖으로 나온 우리들. 오랜만에 이렇게 같이 게임을 하니 무척이나 재미있었다.


“마지막에 인형 안 나온 건 좀 아쉬운 데. 거기서 왜 안 걸려가지고...”


물론 마음처럼 안 풀려서 허전한 것도 있었지만...


저번에 아영이에게 곰 인형 뽑아서 줬던 일이 생각나서 모처럼 인형 뽑기에 다시 도전해봤는데, 이번에는 수진이랑 나랑 사이좋게 이천 오백 원씩 써서 깔끔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괜찮아. 그래도 재미있었잖아.”


“너야 괜찮겠지, 어차피 내 돈 써가지고 한 건데.”


“뭐야? 이제 와서 내 핑계 대기는? 그러니까 아까부터 그만하자고 말 했는데 네가 계속 한 거잖아.”


수진이가 납득이 안 간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렇긴 하지. 사실은 그만 하자고 얘가 말은 했는데, 예전에 뽑았던 기억이 있는지라 오기가 생겨서 계속 해보자고 무턱대고 한건 있으니까.


“그러니까... 네 탓이라고는 말 안했어. 그러니까 내가 스스로 아쉽다고. 너도 솔직히 아쉽지 않아?”


“쳇, 이제 와서 말 돌리는 거야?”


“아니, 미안...”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쏘아보는 수진이. 이럴 때는 정직하게 사과하는 게 답이다.


“그래도 너도 아쉬운 건 맞잖아.”


“그렇긴 하지. 나도 좀 아쉬운 건 있는데... 뭐 어차피 애초부터 그런 요행 바라는 건 우리 타입이 아니잖아?”


인형 뽑기가 요행인가. 만약 원하는 만큼 마음껏 뽑을 수 있는 요행이 있는 거라면 애초부터 이런 게임이 나왔을까.


“내가 보기에는 진짜 아쉬운 건 너인 거 같은데?”


그런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하는 수진이.


“솔직히 말하면... 맞아.”


솔직히 돈 쓴 사람 입장에서는 그래도 뭐 좀 하나 건져 가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무엇보다 ‘뽑은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쓸데없는 ‘자존심’까지 건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까짓 거 인형 하나 가지고. 그럼 백화점 가서 인형 하나 사줄까?”


“됐어요. 내가 애냐? 원래 이것도 너 줄까 하고 한 건데...”


“응?”


갑자기 화들짝 놀라는 수진이.


... 아, 잠깐.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아, 아니 지금 말한 건 그러니까. 이건 그냥 우린 어렸을 적부터 친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러는 거야!”


“으응, 알고 있어! 알고 있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재빨리 해명을 했지만 수진이도 알았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지만, 이내 나와 그녀는 시선을 피하고 만다. 내가 한 말에 스스로 이상한 생각이 들어 수진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렇게 잠시 동안 미묘한 분위기가 우리 사이로 흘렀다.


“아, 그나저나 더우니까 빨리 가자!”


그 분위기를 먼저 깬 수진이. 그녀는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렇게 말했다.


“그, 그래! 빨리 가자...”


“어디 가자는 거야?”


“마트! 안 그래도 사려고 했던 게 있었거든. 빨리 가자!”


그렇게 말을 남기고는 뒤도 안돌아 보고 아까처럼 먼저 앞서 가는 수진이.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고는 “응”하고 짧은 말을 남기며 그녀와 거리를 두고 천천히 뒤따라갔다.


그렇게 우리 사이에 흐른 미묘한 감정은 마트에 가는 내내 계속되었다.





햇볕이 쨍쨍한 한여름. 이런 무더운 날씨에는 꼭 무언가를 사러 가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저절로 발걸음이 향하게 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우리 사는 곳이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닌지라 비록 전문 백화점은 찾기 힘들지만, 잡화 코너가 딸려 있는 마트가 있다. 꼭 무언가를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맞으면서 이것저것 눈으로 구경을 하며 심심하지 않게 돌아다닐 수 있는 이곳이야말로 한여름 최고의 피서지 중 하나이다.


“아, 있다.”


잡화 코너의 이곳저곳 둘러보던 수진이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멈춘다. 그녀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챙모자다. 알록달록한 형형색색의 챙모자들이 진열대에 나란히 놓여있었다.


“모자 사려고?”


“응. 사실 집에 있는 챙모자가 좀 오래 되가지고 이참에 하나 사려고. 원래는 저번에 사려고 했는데 못 샀으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모자를 하나 둘 집어보고 둘러보는 그녀.


그러고 보니 어린 시절에도 수진이는 남자애 같았던 성격과는 다르게 여느 여자애들처럼 옷 입는 것은 무척이나 좋아했었던 것 같다. 제법 길었던 머리에 드레스 입은 모습만 보면 수진이는 세상 어디에나 있을법한 평범한 여자애중 하나일 뿐이었다.


“음, 이거 어때?”


수진이가 모자 하나를 머리에 쓰더니 나를 보며 물어보았다. 산뜻한 물방울무늬와 꽃 장식이 잘 어우러진, 보기만 해도 시원한 디자인의 모자이다.


“오, 잘 어울린다.”


“그래? 후훗... 어? 이것도 써봐야지.”


다른 모자를 뒤적이며 써보고 거울을 바라보는 수진이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왠지 기분 좋아하는 것 같아하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았다.


다시 보아도 그녀는 정말로 성격이 여자답게 변했다. 말괄량이 같던 어린애가 지금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다는 게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더 이상 예전 같은 눈으로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게 쓸쓸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는 남녀 사이라도 그저 친구로서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무리 소꿉친구 사이었다고 해도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그녀를 대할 수가 없었다. 그런 이유가 꼭 주변 시선이 부담스러워서인 것만은 아니다. 어딘가 낯설고 부끄러운 감정을 나 스스로가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때? 이건?”


그리고 그건 수진이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오, 그것도 잘 어울리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그 날 싸우지 않고 지금까지 계속해서 사이좋게 지냈었다면, 지금보다는 좀 더 편안하게 서로를 대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도 괜찮은 거 같은데? 넌 어떤 것 같아?”


좀 더 ‘소꿉친구’라는 이름에 걸맞게, 부담 없이, 그리고 허물없이 지내지 않았을까...


“응. 그것도 잘 어울려.”


“뭐?”


수진이가 불만어린 목소리로 말하기에 나는 정신을 차린다.


“뭐야 그게? 이것도 그냥 어울리고 저것도 그냥 어울리면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이중에서 하나 사려고 하는데 그렇게 대충 말하면 내가 어떻게 골라?”


“아 미안... 난 그냥 진짜 다 어울려서 솔직히 말 한 건데?”


“그런게 어디 있어? 하여간. 다시 잘 봐! 뭐가 제일 잘 어울리는지.”


... 지금은 이런 생각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은 수진이와 모처럼의 휴일을 즐길 생각만 하자.





“민준이 넌 왜 아무것도 안 봐?”


마음에 드는 챙모자를 산 뒤 이어서 옷 코너에서 한참동안 옷을 골라보던 수진이가 나를 보면서 묻는다.


“딱히 난 옷 관심 없어.”


그녀가 한참 옷을 고르고 있는 동안 나는 별로 할 것도 없는지라 한참동안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고 있었다.


“하여간, 민준이는 아직도 애라니까. 모처럼 나왔는데 옷 구경 좀 하지 계속 스마트폰만 보고, 그런 건 나중에 집에서도 질리게 할 거면서.”


“어차피 난 옷 골라봐야 뭐가 뭔지도 몰라. 그런데 봐서 뭐 하냐?”


“그러니까 입어보면서 직접 두 눈으로 봐야지? 멍하니 그러고 있으면 뭐가 달라져?”


솔직히 고등학생이 멋 부려야 거기서 거기이다. 어차피 방학 아니면 교복 입을 시간이 더 많을 텐데, 괜히 돈 낭비이다.


“아... 저기 남성용 티셔츠 있다. 민준아 와봐.”


그런 생각을 하건 말건 수진이는 또 날 귀찮게 하려고 부른다.


“아 됐다니까... 난 귀찮은데 굳이 뭐 하러 - ”


“좋은 말 할 때 빨리 안 올래...?”


살기(殺氣).


여기 온다고 그 성격이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하아, 네에~...”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이 오늘도 잔말 없이 폰을 내려놓고 그녀를 따라간다.





길고 긴 옷 탐방이 겨우 끝났다.


“지금 이렇게 여섯 벌 입은 거 다 해서 기억해 놔. 이게 요즘 딱 어울리는 거니까. 알고 있지?”


그야말로 고행에 가까운 옷 탐방이었다. 브랜드도 대충 한 군데만 가보면 될 껄 진짜 자기가 알고 있는 브랜드는 죄다 찾아내서 옷을 구경시켜준다. 하도 옷 마음에 드는 거 골라보라면서 귀찮게 구는 주제에, 막상 옷 고르면 안 어울린다는 둥 센스도 없다는 둥 하면서 핀잔을 한바가지 먹이고는, 자기가 추천한 옷을 입혀본다.


‘꼭 입힌다.’ 이것 때문에 탈의실도 몇 번을 들락날락 거렸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모자라서 자기 스마트폰으로 사진까지 찍는 그녀. 물론 얘가 ‘나중에 참고용으로 보라고’ 하면서 채팅방으로 보내준 거 보면... 어떻게든 나한테 옷 입는 방법을 전수하려는 게 눈에 훤하게 보이지만.


“글쎄... 대충 머릿속에 정리는 됐는데. 나중에도 기억날지는 모르겠다.”


“아... 진짜, 그렇게 옷 입는 데 관심 없으면 나중에 어떡하려고. 나중에도 어머니한테 챙겨달라고 할 거야?”


“아 알았어, 기억할게!”


한숨을 쉬며 째려보는 수진이를 보고는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그렇게 말했다. 신경써주는 건 고마운데, 얘 정말 피곤한 녀석이네...


- 꼬르륵...


... 이런 분위기 안 좋은 타이밍에 눈치 없게도 더 분위기 안 좋게 울리는 나의 뱃가죽.


“후훗, 다 들었어.”


안 그래도 수진이에게 분위기가 끌려가던 참인데, 그녀 앞에서 제대로 밑 보이고 말았다.


“아, 아니야 이건...”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 때랑 톤이 완전히 똑같았는데. 하여간 민준이 넌 어렸을 때나 지금이나 거짓말은 엄청 잘 해요.”


애써 아닌 척 했지만 스스로도 그 말투에 확신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 소리는 내가 생각해도... 온 땅을 울릴 정도로 컸으니까.


“그러니까 난 이렇게 피곤한 거 하기 싫다니까...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지치는 줄 알았다고. 얼마나 지겨우면 배도 그러겠냐?”


“네가 한 게 뭘 있다고 그래? 그냥 눈 뜨고 돌아다닌 거 말고 더 있어? 게다가 내가 공짜로 옷 입는 방법도 가르쳐줬는데 나한테 고마워해야하는 거 아니야?”


애초부터 난 생각도 없었는데 자기가 먼저 말한 거면서.


“그래... 그건 고마우니까 빨리 밥이나 먹자.”


“배고프면 말로 하면 되지 그렇다고 일부러 배에서 소리 낼 건까지는...”


지금 일 때문에 그런 것인지 아주 기세등등한 수진이.


“야, 너는 배고프면 소리 안 내냐?”


“아니? 안 내는데?”


“어이구, 딱 봐도 거짓말이네. 소리 난 적 없다고?”


“응. 네가 소리 직접 들은 적도 없잖아? 난 원래 배고파도 배에서 소리 같은 건 -”




- 꼬르륵...!




“어...?”


그 순간, 마치 그 소리는 분위기의 반전을 알리는 ‘신호탄’처럼 들렸다.


“어... 지금 소린 뭐지? 방금 ‘안 난다’고 말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 이건...”


하마터면 절묘한 타이밍에 꼬투리를 잡혀버린 탓에 말문이 막혀버린 그녀.


“그, 그래, ‘거의’ 안 낸다고! 거의! 이번에는 지, 진짜 어쩌다가 한번 난 것뿐이야.”


“오호, 그래? 근데 왜 그러는데? 부끄러워?”


“부, 부끄럽다니! 내가 애, 애들도 아니고 이런 거 가, 가지고...”


“수진이 너 얼굴 빨개졌다?”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말까지 더듬는 수진이... 이 녀석, 아까까지는 내 앞에서 당당해하더니.


“아, 아니야, 이건 더워가지고 그런 거야!”


“바로 위에 에어컨 있는데 뭐가 더워서. 난 추울 지경인데.”


“더워서 그런거면 더운거라고! 으으...”


손을 꽉 쥔 채 뺨을 부풀리면서 나를 원망스럽게 쳐다보는 수진이. 아까부터 얘한테 계속 이런저런 잔소리를 들었는지라 속이 좀 상해있었는데, 그녀의 순진한 얼굴을 보니 그 섭섭했던 기분이 한 번에 가시는 듯했다.


“흥, 그래도 나는 한 번 소리 났는데 너는 두 번 소리 났어.”


“그게 뭐가 중요해... 넌 나보다 더 크게 났으면서.”


어느덧 우리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나 했을 법한 유치한 말싸움으로 번진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애들 같다.


“후훗... 하여간 너나 나나 진짜 애다.”


“네가 먼저 나보고 뭐라 했으면서?”


“그러니까 먼저 허세 안 부렸으면 됐잖아.”


하지만, 우리들은 서로 알고 있다.


지금 나누는 이 말다툼은 진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히려 친구 사이를 돈독하게 하는 소소한 활력소라는 것을.


“뭐, 됐어. 그럼 ‘저번에 네가 말해준 것처럼’ 너랑 나랑 공평하게 없었던 걸로 하자.”


“그래, 솔직히 이번에는 내가 먼저 그런 거가 있으니까. 아까는 미안.”


그런 것을 알고 있기에, 우리들은 금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화해한다.


“빨리 밥 먹자. 여기 식당가가 있다는데, 거기서 먹자.”


“그래.”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그런 특별한 사이다.





- (2)편에서 계속.


작가의말

코노미카입니다.
 최근에 우내게 배경이 된 장소 몇군데의 사진을 찍어봤습니다. 제가 배경 그리는 능력은 없는지라 일러스트 표현은 못 하지만, 그래도 사진으로 이 작품이 되는 배경 모델 장소를 제 블로그에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작품을 이해하시는데에 좀 더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3권 분량 역시 재미난 스토리로 계획을 하고 있으니 독자 여러분들의 꾸준한 구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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