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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노미카의 서재

우리 동아리에서는 내기 게임을 잘 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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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노미카
작품등록일 :
2016.10.17 22:58
최근연재일 :
2019.03.21 23:16
연재수 :
77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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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05
추천수 :
86
글자수 :
998,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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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21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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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34쪽

14화. (3)

DUMMY

※ 이 작품은 픽션입니다. 작중 내에서 표기된 인물, 지명, 단체 등은 모두 허구적 요소입니다.















14화. 숨바꼭질, 그리고... (하) (3)














- 수진이의 시점.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났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질 거라는 생각은 단단한 착각이었다. 오히려 분위기는 생각지도 못 했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민준이에게 솔직하게 말할 마음의 준비를 하기 위해서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하게, 때로는 화를 내면서 그의 앞에서 속마음을 숨겼다. 하지만 조금 더 마음의 준비를 하겠다고 무심코 말한 이 말들 때문에 오히려 자신감을 더 잃게 하였다. 나는 민준이를 몇 번이고 속였다. 언젠가 사실대로 다 말 할 테니 지금은 그냥 일을 넘겨버리자는 생각을 핑계로 오히려 그에게 거짓말을 계속해서 했다.


민준이가 이걸 알면, 날 뭐라고 생각할까?


더 이상 떳떳하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무기력한 스스로를 발견하고는, 한없는 절망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절망 끝에 이런 생각을 했다.


민준이라면 이렇게 마음속으로 힘들어하는 나를 먼저 알아봐주겠지.


내가 먼저 민준이에게 말하겠다고 했던 친구와의 약속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이만큼 까지 내가 관심을 보이고 노력해줬는데, 그럼 분명 언젠가 걔가 날 알아봐 주고 이해해 주겠지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 때만 기다려서 진심으로 사과하면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것보다 더 이기적일 수는 없었다.


만약 정말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았더라면, 나는 남 사정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저 민준이가 먼저 나에게 말을 걸어 주며 용서해 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 언제 말할 건데?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를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던 아영이.


- 마지막으로 기회 줬다고 해서 질질 끌 생각인가 본데, 네가 그렇게 계속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어. 다 얘기해 버릴 거야.


- 잠깐만, 아영아! 진짜 딱 하루만 시간을 줘! 부탁할게!


- 그렇게 말하고 기다린 게 벌써 두 달이 넘었어! 너 진짜 뭐 하자는 거야? 날 뭘로 보는 거야? 내가 언제까지 참아줄 거라고 생각해? 내가 맨날 그렇게 넘어갔지만 오늘은 절대로 그냥 안 넘어간다.


이렇게 아영이가 말해도 할 말이 없었다. 아영이와 진작 그렇게 약속을 했었고, 나는 이미 몇 번이고 그 약속을 어겨 왔었으니까.

- 아영아 잠깐만! 지금 당장 생각난 방법이 있는데 딱 한번 들어줘... 내가 이거 안 되면 그땐 진짜 그냥 포기할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다 말해버리면 분명 민준이는 이런 나를 보고 최악이라고 생각하겠지. 나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됐다는 것은 모르고 그저 앞으로 있을 일만 걱정했던 나는, 구차하게 구걸을 하다시피 아영이에게 통사정을 했다.


그리고는 정말 어렵게, 진짜 ‘마지막 기회’를 얻게 되었다.


- 마지막 기회야. 네가 말한 편지인지 뭔지 써가지고, 이번 주 당장 만나서 끝내. 더 이상은 안 돼. 그 다음 너희 사이가 어떻게 되든 말든 난 신경 안 쓸 테니까, 알아서 해.


‘소꿉친구’로써 그에게 편지를 보내서 만나기로 하는 것. 그것이 내가 아영이에게 말한 마지막 제안이었다. 한번 보낸 편지는 다시 무를 수 없으니까. 그러니까 편지로 아예 약속을 정해놓고 만나자고 하면, 싫던 좋던 민준이를 만나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히 편지에 나에 대해서 적었으니 자연스레 민준이는 나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물론 두려웠다. 나를 어떻게 볼지가 무서웠다. 아마도 어렸을 적 일 가지고, 그리고 지금까지 알면서도 거짓말했다고 하면서 나를 무척이나 원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내 스스로 말하는 게 아영이가 먼저 말해버리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그리고, 이대로 가다가는 아예 말할 기회조차 없어져버릴 테니까.


이젠 진짜 미룰 수 없다. 그런 생각으로, 하나하나 준비를 했다.


- 선생님, 저 괜찮다면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기말고사 시험이 끝난 그 날 저녁. 초조한 마음으로 우리 담당 선생님께 가서 대신 민준이에게 편지를 전해줄 수 있냐고 조심스레 부탁을 하였다. 지금의 내가 아니라... ‘소꿉친구 수진이’가 보낸 것처럼 해서 말이다.


혹시나 내 글씨체를 보고 미리 나인걸 알아차릴지 몰라서, 컴퓨터로 쳐서 복사한 편지. 내가 나중에 마음이 바뀌더라도 이 편지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 수진아, 너무 겁내지 말고 솔직하게 말 해. 내가 민준이 담임 선생님이라 알지만, 걔는 어디 모나거나 그런 성격은 절대로 아니니까.


- 그래도... 걱정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서요. 선생님이 살짝 좀 이야기해 주시면 안 될까요?


그 동안 나를 위해 비밀을 지켜주신 것만으로도 감사드릴 따름인데, 나는 염치없이 선생님께 또 부탁을 드리고 말았다.


- 그래, 내가 내일 편지 주면서 조용히 귀띔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다행이, 선생님께서는 흔쾌히 도와주시기로 약속하였다.


이걸로 준비는 다 됐다고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고 굳게 믿었다.


... 그 다음날 민준이에게 속마음을 듣지만 않았어도. 약속한 날 망설임 없이 그를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 그런데 사실은 나도 진짜 걔한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어. 그 때 걔가 왜 나한테 그렇게 대했는지가 이해가 안 되가지고. 그 때 그런 일만 없었으면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았을 거라 생각하는데...


선생님이 민준이에게 편지를 건네주었던 그 날, 나에 대한 그의 착잡해하는 속마음을 알아버리고 말았다. 만나는 그 날까지는 담담히 기다리자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는데, 결국 못 참고 속을 떠보이고 만 것이다.


민준이는 여전히 그 날의 일을 마음 깊이 박아두고 있었다. 이제는 다 옛날 일이니까 이제는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설마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을 줄은... 초조해졌다. 하지만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 이미 민준이는 편지를 다 봤다. 그리고 내일이면 내가 누구인지를 그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아영이도 지켜보고 있다. 그녀는 내가 말하지 않으면 자기가 직접 입 밖으로 꺼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머리가 하얘졌다. 마치 내 앞에서 흔들흔들 거리는 탑처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남에게 도움을 안 받고 스스로 그걸 다잡으려고 했다.


- 와르르... 투투툭...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탑은 서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내 의지로 한번 틀어진 사이를 돌려놓는 건, 이미 불가능해 보였다.


- 미안, 나 중요한 일이 있어가지고 먼저 갈게.


정녕 그 날의 사이좋던 사이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걸까.









- 물론 수진이 네가 지금 힘들어한다는 건 알고 있어. 하지만 쉽게 생각해보면 그걸 계속 마음에 담아둘 필요는 없거든. 어차피 과거의 일은 후회해봐야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니까. 그러니까 지금 상황에 맞게 솔직해지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


- 아...


이야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무거웠다. 항상 나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 주시던 회장님이니까 혹시나 뭔가 좋은 방법을 알고 계시지 않을까 하고 기대했는데...


- 수진아, 너무 그렇게 마음에 담아 두지는 마. 원래 다른 사람의 속마음은 읽을 수가 없는 거고 그러니까 실수도 할 수 있는 거지. 원래 사람이라는 건 알고 모르게 서로에게 상처도 주고 그러는 거니까. 너무 너 자신에 대해 그렇게 자책할 필요는 없어. 특히나 초등학생 때는 제대로 뭘 알고 행동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그런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려고 하시는지, 회장님께서 상냥하게 말해 주셨다.


- 그래도, 확실히 걔랑 얘기하는 게 무서워요. 어렸을 적 일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데, 요즘 있었던 일 때문에 진짜 절 싫어하게 된 게 아닌가 해서요. 사과하기로 마음먹고 아영이한테 부탁해서 걔를 홍보동아리까지 들게 한 건데. 이번에 잘못 되면 진짜 걔랑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착잡한 속내를 털어놓았다. 내 잘못이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나를 이해해주실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하며 어리광을 피웠다.


- 물론 민준이가 너한테 감정이 있을 수도 있어. 어쩌면 화를 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넌 스스로 자기가 미안하다는 걸 잘 알고 말하고 있잖아. 그럼 민준이 앞에서도 그런 진심을 잘 해줘 봐. 걔가 그냥 네가 싫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와 심정으로 그러는 거다 하고 생각하면서, 얘기를 잘 듣고 이해해주려고 노력을 해봐. 그러면 걔도 결국에는 이해를 해 줄 거야. 뭘 겁을 낼 게 있어. 민준이 걔도 결국에는 그냥 고등학교 남학생이야. 게다가 걔가 또 선배거나 무슨 직장 상사처럼 함부로 눈 보면서 말하기 어려운 사이면 몰라, 결국 너랑 같은 나이이고 같은 학년이잖아. 네가 절대로 기죽거나 할 이유가 없어. 네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면 그냥 당당하게 사과하면 돼. 그럼 분명히 민준이도 그거 가지고 더 뭐라고 하지 않을 거야.


민준이도 결국 평범한 학생. 연상도 아니고 선배도 아니다. 어떤 특별한 직책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니다. 성별만 빼면 사람 대 사람으로서 똑같은 선상에 있는 애일뿐이다.


... 그것만으로 정말 겁낼 필요 없는 건가.


사실 선배의 말이 그렇게 확 와 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가 기 죽을 필요는 없다는 명분은 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것은, 분명 나에게 있어서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 네... 잘 얘기해 볼게요.


회장님의 말도 어느 정도 이해했고, 무엇보다 더 귀찮게 해드리는 것도 실례라는 생각에 그렇게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 그래, 아무튼 잘 해결했으면 좋겠네. 아, 이거 해결되면 이제 여기 올 이유는 없는 건가? 좀 아쉽긴 하네.


- 아니에요! 오히려 제가 너무 자주 찾아뵈어서 회장님께 폐를 끼쳐드린 게 아닌가 싶은데...


- 아니, 나는 아영이랑 중학교 있을 때도 그랬지만 이런 고민 들어주는 게 제법 나랑 어울린다고 생각하거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아끼는 동생 같은 아영이 친구인데 이 정도 특별 서비스는 해 줘야지.


그렇게 말하시면서 내가 좋아하는 레모네이드 한잔을 더 따라주시는 회장님. 내가 이야기 할 때마다 항상 그 음료를 찾고 있다는 걸 아시는지 내가 말하기도 전에 손수 음료를 챙겨주셨다. 항상 시간 쪼개서 이야기를 해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인데, 정말로 이런 좋은 선배를 만나게 되어서, 다행이다.


- 감사합니다. 잘 얘기해볼게요.


조금 용기가 생겼다. 그런 회장님의 배려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꼭 민준이와의 일을 잘 마무리를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민준이랑 만나기로 한 그 날 아침.


나는 잠시 시간을 내 윤정이와 함께, 예전에 점장님을 도와 전단지를 나눠주었던 기억이 있는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 말도 안 돼! 천하의 수진이가 저딴 비겁민준에게 쫄았다고?


- 윤정아, 이건 장난치는 게 아니야. 네가 우리들 사정을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 장난으로 말하는 거 아님. 왜 수진이가 겁을 먹어? 맞는 것도 잘 버티고 말도 잘 하면서?


그래, 나도 지기는 싫어하는 성격이니까, 게임 할 때는 그렇게 당당했었지. 하지만 게임은 어디까지나 게임일 뿐이다. 그것이 진짜 나의 성격이 될 수는 없는 일이고, 그걸 민준이 앞에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말을 윤정이에게 해 줬더니,


- 아냐, 아냐, 아냐. 게임 할 때 성격이 어디로 도망가? 러닝머신에서 뒤는 게 길에서 뛰는 거랑 별개임? 뭘 걱정해, 그냥 부딪히면 되는 거지! 윤정이가 볼 때 수진이는 민준이에게 절~대로 겁먹을 거 없어. 오히려 민준이가 겁먹으면 모를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믿어주는 윤정이.


게임할 때 내가 보여주었던 그 당당한 자세로...


- 진짜 괜찮을까? 내가 막상 걔랑 마주하면 그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까?


- 에헤~ 참, 겁 먹을거 없다니까 그러네... 음... 아! 그럼 고민 한가득인 수진이를 위해 특별히 윤정이가 엄청나게 좋은 팁 하나 가르쳐줌! 그렇게 불안할 때는 심호흡을 하는 거야! 윤정이도 게임 하다가 긴장하면 숨 들였다 내쉬었다 하면 속이 뻥 하고 뚫리거든! 한번 해볼래? 흡~ 하~


마치 명상하는 자세처럼 손을 위로 올리면서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윤정이. 숨 고르기 하는데 표정은 과하게 실린 것 같지만, 그래도 재치 있는 얘 덕분에 말하고자 하는 조언은 확실하게 와 닿았다. 비록 어떨 때는 정말 어린애 같은 말과 행동을 많이 하긴 하지만, 윤정이에게는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이런 모습도 있었다.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는 지금 이 시간만큼은 오히려 나보다 그녀가 더 어른스럽게 느껴졌다.


- 조용한 분위기에서 하면 더 효과 좋음. 그러니까 민준이랑 만나기 전에 하면 딱 좋을 거야!


윤정이는 믿음직스러웠고 든든한 친구이다. 정말로 고마운 친구 말이다.


- 미안해, 괜히 쓸데없는 일로 심란하게 해서.


- 괜찮음! 어차피 윤정이도 여기 새로 나온 파르페 먹어보고 싶었음. 음! 진짜 녹는다 녹아! 딸기랑 블루베리랑 치즈라니 완전 대박 아님? 수진이도 녹기 전에 빨리 먹어! 맛있는 거 먹고 배 채우면 그깟 멍청민준 잔소리 따위 그냥 씹어 먹지!


- 응.


농담과 진담. 윤정이에게는 물과 기름과도 같은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섞을 수 있는 ‘세제’ 같은 재능이 있었다. 덕분에 평소라면 무거운 이야기조차도 유쾌하고 즐거운 분위기에서 넘어갈 수 있었고, 잠시나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만약 나에게도 그런 말재주가 있었다면, 설령 민준이가 나를 마음에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든 잘 얘기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그건 나에게 ‘그런 재치 있는 말솜씨가 있다’고 할 때의 이야기이고, 그런 재능이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에게는 ‘희망사항’일 뿐이었다.






약속시간이 거의 다가온 늦은 오후, 마침내 목현동에 도착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민준이랑 만나기로 한 문구점이 곧 보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몸이 떨려왔다. 스스로를 괜찮다 다독이면서 어렵게 몸을 이끌고 여기까지 왔는데, 곧 있으면 그를 만날 것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함에 주체할 수 없는 긴장감이 온 몸을 감쌌다.


“이럴 땐 심호흡.”


아까 윤정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면서, 조용히 가슴에 손을 얹었다.


“흐읍... 하...”


그리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1분, 2분, 아니 몇 분이라도... 진정될 때 까지. 인적이 뜸한 한가한 동네의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긴장감이 완전히 가라앉을 때를 기다리며 그렇게 심호흡을 반복했다.


회장님과 윤정이가 나에게 했던 이런저런 말들을 떠올렸다. 민준이는 특별한 애가 아니다. 걔는 그냥 나랑 같은 나이에 남학생일 뿐이다. 옛날에 있었던 일 따위 솔직히 사과하면 될 일이다. 평소 게임에서 기죽지 않는 수진이가 어디 갈 리 없다. 그 때처럼 당당하게 자신 있게 말하면 된다...


...


...


... 그렇게 이십분이 흘렀다.


나는 약속시간이 지난 것도 모른 채, 조금은 늦어도 마음을 진정하고 가자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마음에 여유를 가지면 가질수록, 그 여유를 비집고 들어오는 민준이의 쓸쓸한 표정들이 떠올랐다. 걔는 그 때의 일을 아직도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분명 그 때 이야기를 한다면 너는 도대체 그 때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도망쳤냐고 추궁하겠지.


그나저나 선생님께서는 그저께 편지 건네주면서 잘 얘기해 주신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해 주셨는지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다고 하면 젠가를 했던 그 날 민준이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었을까?


그렇게 귀띔을 해달라고 부탁 한 게 맞는 행동이었을까? 혹시 민준이가 그 말을 듣고 이미 나인 것을 알아차리고 오늘 다짜고짜 따지려는 것은 아닐까?


결국 나는 심호흡을 멈추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깊이 억눌렀던 긴장과 불안이 용수철처럼 다시 튀어 올랐다. 그리고는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무리다. 역시, 안 되는 건 안 된다.


역시 내 입으로 그에게 솔직히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편지로 약속한 것인지라 이제는 물릴 수도 없었다. 이미 아영이랑은 마지막이라고 약속했기에 그녀에게도 부탁할 수도 없다. 조언 받을 수 있는 사람에게도 이미 조언은 다 받았다. 이제 진짜 약속시간까지 코앞이다. 머리가 하얗게 질려왔다.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정신없어하던 그 때,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민준이를 가장 잘 아시는 분... 어머니.


그래, 차라리 민준이 어머니께 솔직히 얘기해 달라고 하자.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어린 시절부터 나를 잘 알고 계셨고, 요즘에도 전화로 몇 번 이야기를 나눠봤으니까. 그래, 어머니께서 시간을 내 나를 대신해서 잘 설득해주신다면 민준이라도 충분히 납득해줄지도 모른다. 마치 선생님에게 이르는 것 같은 나 자신의 행동이 무척이나 구차하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게 부끄럽다면, 애초부터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았어야지 하고 자신을 자책했다.


나는 내가 가던 문구점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기다리다 결국 날 만나지 못하고 돌아갈 민준이에게는 나중에 어떻게 말해야 할지 떠오르진 않았다. 하지만 이것도 어머니께 잘 이야기해 드리면 분명 잘 이야기를 전해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재빨리 머릿속을 휘감았다.


그래, 어머니께 이야기하면 해결될 일이다. 지금 내가 애써 고민할 필요 없는 문제다.


나는 그렇게 그가 기다리고 있을 문구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 발걸음을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 어디 가냐?





그리고, 바로 내 앞에 서 있는 한 사람.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나는 오늘 하루 동안 몇 가지 생각만을 하였다. 민준이와 만나서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지, 어떻게 사과를 할지, 그리고 지금은 그의 어머니랑 어떻게 이야기를 나눌지...


- 아영아.


... 얘를 만날 거라는 생각, 그리고 이런 곳에서 만날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캐주얼한 반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있는 그녀. 그러나 그런 그녀의 표정은 주말에 한가하게 놀러온 사람이 짓는 표정과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오히려 학교에서 말싸움을 하던 그 어느 때보다도 싸늘한 표정으로, 바로 내 앞에서 팔짱을 낀 채 노려보고 있었다.


- 여긴 왜 왔어?


- 내가 네 일 때문에 하도 신경이 쓰여서 왔다. 너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지금 약속시간 15분 넘었는데, 민준이랑 벌써 다 얘기 하고 오는 거야?


아영이도 편지에 담긴 문구점이 어딘지를 알고는 내가 뭘 하고 있나하고 지켜보기 위해서 여기까지 쫒아왔나 보다.


나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시선도 못 마주쳤다.


- 넌 진짜 답이 없구나. 도대체 왜 그러냐? 왜 자꾸 나를 이런 일로 신경 쓰이게 하는 거야? 네 취미는 시간 질질 끌면서 사람 속 태우게 하는 거냐?


참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잘못이니까.


그러나, 속에서 갑작스럽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더 이상 억누를 수 없었다.


- 왜 온 거야?


그리고, 조금씩 그 감정이 스며나오기 시작했다.


- 왜 왔냐고? 너 지금 나 하는 얘기 듣고 있는 거야?


- 이젠 어떻게 되든 관심 없다면서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이렇게 될 거 알면서, 설마 나랑 걔가 싸우는 걸 보고 싶어서 온 거야?

이미 감정은 스스로도 주체할 수 없을 정도까지 넘쳐흘렀다.


- 너무해.


무슨 이유든 아영이가 여기까지 찾아온 것은 악의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 뭐? 너무하다고?


- 네가 알아? 네가 사람 마음을 아냐고!


마침내... 참았던 감정이 터져 나왔다.


이런 내 기분도 제대로 모르고 재촉만 하는 아영이가 원망스러웠다.


- 뭐라고? 사람 마음을 아냐고? 와, 진짜 어이가 없네. 강수진. 네가 안 말한 거잖아? 그게 왜 내 탓이 되는데?


그리고, 아영이도 목소리가 커졌다.


이젠 다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과 함께, 참아왔던 말들이 쏟아졌다.


- 그럼 왜 못 기다려 주는 건데? 민준이 심정 알면 그런 말이 나와? 걔가 나랑 있었던 일 때문에 지금도 얼마나 속상해하고 있는데! 너는 그게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는 거라고 생각해? 어떻게 남의 일이라고 그렇게 되라는 대로 무책임할 수 있어? 네가 내 입장이 돼 봐! 어렸을 적 민준이랑 지내본 적도 없으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나는 어렸을 적부터 민준이랑 지내왔던 사이이다. 아영이랑은 겨우 몇 개월만 지낸 사이이다. 당연히 내가 더 민준이에 대해 더 잘 알고, 아영이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저 남의 일이라니까 대충 얼버무리고 마무리를 지으려는 그런 속셈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아영이가 시간을 좀 더 주기를 바랐다.


내 진짜 속마음은 이거였다.


아영이에게 떠든 말은 그럴싸했다. 이 정도로 말해 뒀으면 아영이도 더 이상 나에게 할 말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을 이해하고 한 번 더 나에게 기회를 줄 것이라고 믿었다.





- 그렇게 말하는 넌 걔가 뭔 생각 하는 건지 제대로 알고 떠드는 거냐?





이어진 아영이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그것이 두말할 것 없는 ‘착각’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 네가 그렇게 걔 마음을 알면 걔가 뭔 생각 하는지 정도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지 않아? 그래 맞아, 너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는 사이고 나는 기껏 해야 세달 만났는데 당연히 네가 걔에 대해서 훨씬 더 잘 알겠지. 그럼 처음부터 나한테 부탁을 한건 뭔데? 그렇게 네가 잘 알면 네 혼자서 해결하면 되잖아. 맨날 물어보는 건데 넌 그렇게 내가 한가한 사람처럼 보여? 아니면 나랑 농담 따먹기로 장난치자는 거야?


상대는 김아영이다. 두말할 것 없는 학업 성적에 자기 사리분별은 다 할 줄 아는 그 김아영 말이다. 대충 감정에만 호소하면 이해해주겠지 하는 그런 안이한 생각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았다.


- 아니야.


-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난 너한테 충분히 시간도 줬어. 심지어는 걔랑 첫날 싸웠는데도 동아리 들게 해 줬다고. 도대체 뭘 더 해 줘야해? 너 혼자 그러는 거잖아? 혼자 고민하고, 망설이고, 결국 그러다가 입 뻥끗 하지도 않고 그냥 싹 다물고 있고.


그녀는 너무나도 매정하게도 한 마디 한 마디를 전부 다 토를 달면서 지적했다. 그런 지적이 내 귓전을 울릴수록 아영이가 그저 원망스럽게만 느껴졌다.


- 자기 혼자서 그러는 거면서 왜 남 탓을 하고 그래? 넌 나한테 민준이 생각은 안하냐고 물으면서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는 거냐? 애초부터 이게 뭐냐? 그냥 네 입맛대로 맞장구 쳐 달라 그 소리잖아?


- 아니야, 아니라고!


... 결국 더는 못 참고 아니라고 외쳤다.


그리고 도망쳤다.


아니라고 외쳤지만 맞았다. 아영이 말이 맞았다.


스스로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도 모르는 변명 따위는 말할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도망치는 것. 그저 멀리멀리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뒤도 보지 않고 도망쳤다. 아무 생각도 없이 달렸다.


이내 아영이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알고 그제야 발걸음을 멈추었다.


하지만 그렇게 도망쳐봐야 이미 모든 것은 끝나 있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가슴이 아파왔다. 억누를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넘쳐흐르는 감정이 얼굴과 바닥을 적셨다.


이미 모든것은 스스로도 뭐가 뭔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뒤틀려버렸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몇 번이고 노력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었다.


이제는 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저 누군가가 이런 내 마음을 알고 다가와 주기만을 원했다.





- 수진아, 너 왜 여기 있어? 왜 울고 있는 거야? 무슨 일 있었어?





그리고, 나를 찾아온 그 친구.


이제 다 끝났다. 더 이상 속이려고 해도 속일 수 없었다.


그렇게 된 거, 이제는 미안하다고 솔직하게 말해도 될 일 이었다.


- 찰싹!


- 싫어!!!!


이런 바보 같은 짓을 또 저지를 필요는 없었다.


그 날의 실수로 맺어진 아픔을 잊고 화해하기 위해 만나자고 약속했던 그 날.


긴 시간을 넘어 마침내 오랜만에 만난 그 친구에게 그 날의 실수를 또 저지르고 말았다.






도망쳤다.


멀리 멀리 도망쳤다.


민준이에게도, 아영이에게도, 그 누구와도 만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학생으로써의 명분도 잊은 채, 학교에서도 도망쳤다.


“하아...”


어린 시절, 나는 부모님이나 다른 어르신들로부터 종종 예의 바르다고, 착하다고 자주 이야기를 들어왔었다. 학교에서도 추천으로 모범상을 받을 정도로 예의 바르다고 소문이 자자했었다. 그런 말을 들어오면서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이 되는 착한 아이라고 생각하면서 자부심을 가졌었는데, 결국 그건 전부 나 좋으라고 그냥 했던 말들이었을까.


지금의 모습? 정말이지 나보다 더한 문제아는 찾아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 한 명을 계속해서 힘들게 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동아리 부원에게, 아니 그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면서도 오직 자기 자신만 맞다 생각하는 희대의 문제아 말이다.


- 솨아...


비는 여전히 짓궂게 내리고 있었다. 민준이와,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했던 일들이 홍수같이 쏟아지는 탓에 가슴이 너무나도 답답했던 나는 잠시나마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서 지금 앞에 펼쳐진 풍경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둡고 흐린 날씨였지만 그래도 우리 사는 동네는 이렇게 아름답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멋진 곳.’


그것은 내가 알려주고 순수한 민준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꾸밈없는 이 동네의 모습이다.






- 찾았다!


그 날 울고 있던 민준이를 찾은 곳은 우리들이 숨바꼭질을 시작했던 장소와는 한참을 동떨어진 동네 뒷산 어느 산길이었다. 다른 애들은 다 찾았는데 민준이만 혼자 한참을 찾지 못해서 돌아다니던 참, 예전에 민준이에게 뒷동산에 구경거리가 있다고 해서 몇 번 같이 산에 올라갔던 게 생각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거기로 간 게 아닌가 하고 가 봤더니,


- 진짜,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역시나, 이 철부지 애는 여기 있었다.


- 한참 찾아다녔다고! 그리고 왜 울고 있는 거야?


- 수진아, 흐윽... 여기 어디야?


- 뭐야? 설마 길 잃어버린 거야? 길 다 있는데 뭘 잊어버려? 게다가 여기 나랑 와 봤으면서! 진짜 민준이는 바보 멍청이야.


아무리 민준이가 서 있던 곳이 비록 큰 길에서 갈라진 외진 길이라고는 하지만 솔직히 길을 잃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첩첩산중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정도로 작은 동네 산이고, 그것도 몇 번씩이나 민준이와 함께 와 봤던 곳이기도 하다. 솔직히 어떻게 하면 길을 잃어버릴 수 있는 건지 의아스러울 정도였다.


- 그치만 무서웠다고! 사람도 없고. 흐윽...


- 그러니까 말 했잖아! 우리 동네에서만 숨으라니까? 딴데 숨는 거 반칙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민준이가 꼼수 쓰려고 하다가 벌 받은 거야.


- 미안... 흐윽...


그 때 숨바꼭질을 했을 때 친구들이랑은 목현동 동네 안에만 숨기로 약속을 했었다. 당연히 산에 숨기로는 절대로 약속 안 했었는데, 이 주책바가지는 어떻게든 내가 못 찾게 하겠다고 규칙까지 어기면서 산속으로 숨어들어간 것이다. 그렇게 하고서 정작 난감해 하던 건 자기 스스로였지만.


- 됐어. 그것보다 그만 울어. 아직도 유치원생이야?


그 시절 민준이는 이제 좀 남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내 눈에는 한참 어린 애들 같아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 잃었다고 우는 건 5학년씩이나 된 나이에 할 행동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잔소리를 해도 민준이는 여전히 훌쩍이면서 눈물을 닦고 있었다. 그런 민준이를 난감해하던 그 때 나는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어딘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생각과 함께 그를 불렀다.


- 어, 그러고 보니까 여긴. 맞아, 민준아! 잠깐 나 따라와 볼래? 기왕 여기까지 온 김에 내가 멋진 거 보여줄게!


- 멋진 거?


나는 힘없이 서 있는 민준이의 손을 꼭 잡고 이어진 길을 따라 나아갔다. 맑고 상쾌한 늦은 봄, 시원하고 상쾌한 바람을 맞아가며 숲속을 걸어가는 기분은 그런 동요를 듣는 것 보다 훨씬 더 실감이 와 닿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열린 곳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는 내가 정말 어렸을 적 엄마와 함께 동산을 올라가면서 알게 된 비밀의 장소.


- 짜잔!


나는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그 장소를 보여주었다.


안전망이 쳐진 바위 언덕 끝. 푸르른 하늘과 함께 드넓게 펼쳐진 그 곳. 우리가 올라왔던 산길 너머로 펼쳐진 우리 동네. 아니, 우리가 미처 가보지 못한 시(市) 전체. 그렇게 크고 넓었다고 생각한 우리 동네가 여기서는 바로 한눈에 들어온다. 개미만한 건물들과 도로들이 사방팔방으로 형형색색 퍼져있는 풍경은, 아이들에게는 가히 신세계라고 자부할 수 있다.


- 우와아!!! 여기 우리 동네야? 멋지다... 나 처음 봤어!


- 후후, 원래 나만 알고 있는 장소였는데. 특별히 민준이니까 알려 준거야. 감사하라고.


정말 처음 보는 듯이 호들갑을 떨고 있는 민준이를 보며 나는 자연스럽게 살짝 ‘뻥’을 보태서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이런 멋진 곳을 친구에게 소개해줬다는 생각에 자부심과 뿌듯함이 느껴졌다. 이미 이 광경을 몇 번이고 본 나에게도 여김 없이 전해져오는 황홀감. 처음 보는 민준이의 눈에는 아마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 진짜 멋지다! 진짜, 진짜! 여기 우리 동네에서 제~일 멋진 곳!


어느새 자기가 울던 것도 잊은 채, ‘진짜’라는 말만을 되뇌던 민준이. 그는 드넓은 우리 동네의 풍경에 잠시도 눈을 떼지 않으며 기어코 여기를 ‘동네에서 가장 멋진 곳’이라고 딱 잘라 말했다.


- 고마워 수진아! 수진이 아니었으면 평생 이런데도 몰랐을 텐데...


그렇게 주변을 한참 신나게 보고나서 나한테 감사해하던 민준이.


이런 비밀 같은 거, 나에게 가장 소중한 친구한테는 털어놓아도 아까울 리 없다.


그렇게 한참동안 우리는 그 동네 풍경을 바라보며, 또 우리 살던 곳을 이곳저곳 찍어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내려오던 길.


- 수진아, 다음에 숨바꼭질하며 여기 산까지 하기!


민준이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 뭐야? 방금 길 잃어먹고 질질 짜던 주제에 여기서 또 하겠다고?


- 아니야. 나 진짜 기억했어. 이렇게 진~짜로 멋진 장소가 어디 있는지 안 잊어 버릴꺼니까!


절대로 안 잊어버리겠다고 강조하던 민준이. 비록 아직도 어린애 같았긴 하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 민준이는 조금 더 어른스러워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후훗, 그래! 친구들한테도 얘기해 둘게. 나중에 또 하면 여기도 숨을 수 있는 거다!


- 그래, 또 숨바꼭질 하자! 꼭 하는거야! 약속!


그렇게 웃으면서 민준이가 건네준 손가락에,


- 으응. 약속!


나는 조심스럽게 내 손가락을 끼웠다.


지금까지 우리 사이는 그렇게 변해오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니까.


‘며칠 뒤’에 또 놀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민준이와 약속을 하였다.


...


그리고 선생님께 경연대회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약속을 하고 겨우 며칠 뒤의 일이였다. 그렇게 손가락을 끼우며 약속을 했던 그 날이 어린 시절 민준이와 마지막으로 함께 웃으면서 놀던 시간이 될 줄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손을 기분 좋게 잡았던 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아아...”


벌써 몇 번째 한숨이다.


나는 뭘 바라고 여기 온 걸까. 지금 여기서 뭘 하자고 서 있는 걸까.


이런 나를 보고 다들 뭐라고 생각할까. 어렸을 적 감정 때문에 빙빙 맴돌기만 하고 오히려 오랜만에 만난 그 친구에게 상처만 주고, 이런 나의 모습을 보면서 답답해하던 아영이, 그리고 내 일에 계속 신경 써 주시던 가을 선생님, 윤정이, 가게 아주머니, 학생회장님, 그리고 민준이 어머니. 그리고 지금쯤 내가 없어졌다면서 나를 찾아다니고 있을지 모르는, 내가 모를 학교에 있는 다른 사람들까지.


이러고, 용서받길 바라고 있어?


그리고, 오길 바라면 직접 걔한테 전화를 하면 되지 왜 아영이에게 전화를 해서 알려달라고 했는데? 아영이 얘는 너한테 신경 끈다고 했는데, 걔가 민준이에게 안 말했으면?


...


이제 아무것도 모르겠다.


... 아까까지 세차게 오던 빗소리가 잠잠해졌다. 우산 밖을 보아하니, 빗줄기가 무척 잠잠해졌다. 덕분에 뿌옇게 보이던 우리 동네가 조금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뭐, 그래봐야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지만.


“하아아... 이제... 그만 내려갈까.”


나는 또 한 번 한숨을 쉬며 이번에야 말로 마음을 굳혔다.


민준이가 나를 찾을 일은 없다. 애초부터 난 용서받을 수 없으니까.


그렇게 나는 드넓게 펼쳐진 ‘우리 동네에서 가장 멋진 장소’를 뒤로 하고 내려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찾았다...”




...


그리고 거기에는, 용서받을 일 없는 나를 찾아올 리 없다고 생각했던 ‘그 친구’가 서 있었다.





- 수진이의 시점 끝.







-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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