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를 정하다
곧이어 수련의 방에 가게 된 정현은 자신의 상태에 대해 사제 도우미에게 조언을 구했다.
"사도여. 드디어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발전할 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을 축하하는 바입니다."
"네? 축하요?"
"인간은 누구나 고통 받습니다. 특히 살인은 인간에게 내려진 최대의 시련 중 하나입니다. 그에 뒤따르는 양심의 괴로움, 불안, 무력감, 죄악감 등의 감정은 영원한 숙제와 같습니다."
"숙제! 그럼 정신적 고통은 치료할 수 없는 건가요? 신성 마법에 그런 종류가 있었던 것 같은데?"
"엄밀히 말하면 정신을 맑게 해주고 심신을 안정시켜 주는 마법입니다. 또한, 마법적인 정신공격을 방어하고 치료하기 위한 수단이기에 인간 스스로 가진 모순을 제거할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극복하라는 것인가요?"
"극복하지 못합니다. 이런 고통은 사회적 유대감으로 상처를 완화할 뿐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짐입니다. 그러나 우리 같은 구도자에게는 자신을 완성할 중요한 도구와 같습니다."
"신앙으로도 극복하지 못하나요?"
"신에게 막연하게 기대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신앙은 인간 스스로 신의 곁에 이끄는 길잡이지만 끌어주는 말은 아닙니다.
"방법이 없는 겁니까?"
"발버둥 치십시오. 마치 인간이 자유를 갈망하지만 어떤 인간도 자유롭지 못한 것처럼 시련은 극복하고자 해도 떨쳐내지 못합니다."
"그럼 잘 미쳐야 하겠군요."
"하하하. 그렇게 화를 낼 필요는 없습니다. 극복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겠지만 사도에게는 목표를 가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목표."
"제가 보는 사도는 무기력합니다. 수동적이며 꿈도 야망도 없습니다. 이미 예전에 꺾여버린 나무가 기형적으로 자라는 것처럼 목적 없이 세상을 사는 듯이 보입니다."
"제가 그렇게 보였습니까?"
"사도도 느끼셨을 겁니다. 제가 억지로 훈련을 시키지 않았다면 지상의 다른 인간과 별 차이 없었을 거란 사실을요."
"그건! 그렇군요. 저는, 저는."
사제 도우미의 통렬한 비판에도 정현은 대꾸할 말이 없었다. 돌이켜 보면 그는 너무 비겁하고 방관적인 형태로 살아왔다.
20대에 꺾인 야망과 세상에 대한 실망감. 완전히 닫혀버린 기회로 인해 모든 걸 포기하고 자기만의 만족감에 살아왔던 인생이었다.
신세기 이후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그 시절 모습과 비교해보면 전혀 바뀐 것이 없었다.
한 번 좌절했다고 무너진 채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끝없이 바닥에서 신세타령하던 자신과 자경 대장이 되었다고 하지만 큰 흐름에 끌려가던 자신의 모습은 근본적으로 별 차이가 없었다.
"그렇군요. 제가 스스로 변해야 하는군요. 제가 나약하기보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던 거군요."
"그렇습니다. 뭐든지 좋습니다. 저의 경우에는 신앙에 관련된 목표가 있었듯이 사도도 목표를 가지고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마침 잘됐습니다. 이제 기초훈련을 넘어 이론수업을 해야 할 때가 온 거 같습니다."
"기초! 설마 이제껏 한 게 겨우 기초훈련이란 말입니까?"
"보통 저희 세계에서는 6살부터 시작해서 20살 안에 완성하는 훈련입니다. 도리어 특별한 환경 덕분에 많은 혜택을 보고서도 늦게 완성됐다고 생각합니다. 실전과 병행하다 보니 효율이 떨어진 거지요."
"하하하!"
"이제부터는 모든 수업은 일정 시간만 수련하고 이론에 집중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그 외에도 정신 수양과 지식을 쌓는 일에 비중을 두겠습니다. 시련을 치료하지 못한다면 상처를 상대적으로 작게 만들면 되니까요."
"방법이 있기는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가르침을 내려주십시오."
일방적으로 끌려가던 정현이 처음으로 진심으로 배움을 청했다. 그것은 단순한 도피가 아니라 정현 스스로 다짐하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한 걸음이었다.
그 후 수련의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육체적 단련은 정해진 시간과 규칙에 따라 이뤄졌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이론과 철학적 토론 등의 지식을 쌓는 공부 위주로 바뀌었다.
특히 교관들의 태도도 미묘하게 바뀌었는데 정현에게 그들의 경험을 알기 쉽게 전해주거나 의견을 교환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이번에는 6개월의 수업이 그리 길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현이 수련의 방에서 수업을 마치고 지상으로 내려갈 때 사제 도우미가 물었다.
"사도여. 목표는 정했습니까?"
"제 목표는 인류의 질서와 문명의 복구입니다."
"그것을 목표로 삼은 이유가 있습니까?"
"첫째는 제가 인간이기에 인간의 질서를 바로잡아야 하고 둘째는 이제는 사라져 버린 문명이지만 저는 그때를 진심으로 좋아했습니다. 저는 후손들에게 우리의 잘못으로 지워버린 질서와 문명을 다시 전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대의 목표가 이뤄지길 기원하겠습니다."
사제 도우미는 예를 표하며 정현의 뜻을 받아들였다.
비록 신의 계시 때문에 억지로 받아들인 사람이지만 이제 다른 마음으로 가르침을 베풀 것이다. 그것은 정현에게 알게 모르게 큰 축복이었다.
"대장님 뭔가 바뀐 것 같습니다?"
"내가?"
정현을 마중 나온 안차정이 차분한 분위기로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3중대장이 보기에는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고 싶군. 이왕이면 솔직히 말해주면 고맙겠어."
"그게······. 뭔가 좋은 일이 있어 보이십니다. 전에는 전장에서 돌아오시면 짜증부터 내셨는데 오늘은 꽤 아쉬워하는 듯해서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부끄럽게도 내가 맡은 일을 제대로 못 해 미안하네."
"아니. 불만을 표현한 게 아니고 분위기가 좋아졌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뭔가 고민을 해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해결한 것은 아니지만 실마리를 찾았지. 하여튼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네? 아, 알겠습니다."
그날 안차정은 이전과 다르게 적극적으로 변한 정현의 모습을 보고 훗날 이렇게 회상했다.
"마치 껍데기만 놔두고 알맹이는 완전히 바뀐 느낌이었다."
물론 며칠 사이 다시 게으름을 피우기는 했지만, 이전처럼 막무가내로 미루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일은 정말 하기 싫군."
다만 일이 싫을 뿐이었다. 사람은 한순간에 바뀌는 건 아닌 듯했다.
그래도 긍정적인 변화로 인해 몇몇 사람은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도자의 긍정적인 변화는 무리의 활동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 작가의말
이제야 주인공이 사람 구실 하게 됐습니다.
사이다를 옆에 끼고 입에 머금을 정도는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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