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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윤의 서재입니다.

투시透視, Second Sight

웹소설 > 자유연재 > 공포·미스테리, 추리

최승윤
작품등록일 :
2014.08.03 00:37
최근연재일 :
2014.12.18 17:34
연재수 :
34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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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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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글자수 :
272,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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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8.03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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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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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7쪽

Episode 01 빨간 드레스 (7)

DUMMY

3. 빨간 드레스




계영은 지각을 했다.


세준이 X팀에 들어온 지 사흘 동안, 계영은 두 번이나 지각을 했다. 그는 심지어 사무실로 출근하지도 않았다. 세준은 그의 문자를 받고 주차장에 갔을 때야, 전날과 같은 상추색의 점퍼를 확인할 수 있었다.


뭘 했는지는 몰라도 매우 피곤한 기색으로, 손에는 「희즈 웨딩샵」 계약서 봉투를 들고 있었다. 세준은 그의 부은 눈을 보며 커피를 내밀었다. 어제 여자와의 이야기를 끝내고 밖에 나갔을 때, 계영은 이미 사라진 후였다.


“자요, 커피. 어제는 나를 적진에 보내놓고 혼자 몰래 퇴근하시더니, 오늘은 왜 지각입니까?”


“……지각 아니거든?”


계영은 커피를 마시며 차를 가리켰다. 빨리 차 문이나 열라는 재촉이었다.


세준이 한숨을 쉬며 운전석에 앉자마자, 계영은 날쌘 고양이처럼 옆자리를 차지했다. 하루 사이에 제법 익숙해진 건지, 그는 세준의 내비게이션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나 그렇게 놀고먹으며 월급 축내는 월급 루팡 아니야. 나 나름대로 뭘 부탁할 게 있어서 아는 사람을 좀 만났어.”


오죽했겠습니까.


세준이 대답하지 않고 행선지를 쳐다보자, 계영은 대뜸 울컥해서 말했다.


“너, 인마, 기어오르려고 하는데, 네가 아무리 영특하고 쓸모 많은 사장의 비밀스러운 아들이라고 해도, 우리 사이에 원칙이 있어. 바로 하나야. 너는 움직이고 나는 생각한다, 오케이?”


“솔직히 말해 보세요. 하인이 필요한 겁니까, 파트너가 필요한 겁니까?”


“아, 사실은 돈 많고, 젊고, 식스팩을 가진 집사가 필요해.”


“……그런 집사가 왜 선배 밑에서 일하겠습니까.”


계영이 찍은 행선지는 희즈 웨딩샵이었다. 어제부터 언니인 차우현의 집은 들르지 않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세준도 그 사실이 궁금했으나, 한때 알던 여자와 만난 이후로는 달라졌다. 그 여자가 직접적인 뭔가를 말해주진 않았지만 어떤 묘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계영이 몹쓸 선배이긴 하지만, 그의 선택은 일면 옳았다. 희즈 웨딩샵에는 신데렐라 스토커와는 무관한 비밀이 있고, 그 비밀들이 중첩되어 두 자매 사이에 골이 깊어졌다. 결국 그 비밀을 드러내거나 해결하지 않는 이상, 언니인 차우현이 동생을 내칠 것은 당연했다. 그러므로 행선지는 자매들 사이의 비밀이 생긴 장소, 바로 희즈 웨딩샵이다.


세준은 묵묵히 핸들을 돌리며 생각에 몰입했다.


희즈 웨딩샵의 비밀은 도대체 무엇인가. 권계영이 생각하는 그들의 비밀은 무엇인가. 계영 대리는 왜 어제 ‘그 사람’이 ‘여러 번’ 그런 행동을 했을 거라고 말한 걸까.


“그래서, 어제 뭐 건졌어?”


차가 잠실에 들어설 때야 계영이 물었다. 세준은 반쯤 빈 커피 잔을 힐끔 보며 생각했다. 역시 카페인이 들어가야 뇌도 돌아가는 모양이군. 그걸 이제야 묻다니!


“네, 뭐, 약간은 건졌죠.”


“뭐래? 내 가설이 맞아?”


가설 따위를 이야기해 준 적이 있긴 한가.


“선배야말로 뭐래요? 그런 거 말한 적도 없잖아요.”


세준은 혀를 차며 폰을 푹 던졌다.


“들어보세요. 녹음해 왔으니까.”


엄밀히 말하면 허락을 받지 않았지만, 법적인 용도가 아니라면 상관이 없다. 여자도 뭔가 범죄적인 것과 관련된 말은 일절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위기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확실히 여자는 희즈 웨딩샵의 화제를 꺼낸 후부터 눈에 띄게 동요했다.


“뭐야, 내가 가설을 말 안 했다고?”


계영은 어제의 일을 잊은 듯 툴툴댔다.


“아냐, 분명히 말했을 거야. 아무튼 나도 어제 저녁에 내 정보원 중에 하나를 만났는데,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차희현 씨가 사망하기 전에 샵을 둘러싼 정황이 매우 이상하더라고. 그 정보원에 따르면, 희현 씨는 죽기 전에 남편인 세영 씨와 샵을 닫는 문제로 싸웠대. 언니에게도 1년 만에 찾아가 샵을 닫는 문제를 말하다가 거절당해서 다시 돌아간 거고.”


세준은 어제 대한 자료들을 곱씹으며 미간을 좁혔다.


“……가게의 일이 양분되어 있으니 그럴 만도 하죠. 제가 어제 대충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샵은 동생 쪽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디자인이나 상표권은 대부분 언니가 가지고 있고, 두 사람 사이에 동업 계약서는 없는데다가…… 실무적인 일과 실제로 이익이 산출되는 디자인 쪽의 통장도 두 사람 명의로 각각 나눠져 있으니까요. 만약 두 사람의 사이가 그렇게 안 좋다면, 동생이 샵을 닫으려 하는 만큼 언니는 일부로라도 샵을 유지하려고 했을 겁니다. 그러니 문제가 복잡하네요. 가게 수익은 어떤가요?”


“차우현 씨가 디자인에 직접 참여하지 않은 것은 1년이 넘었어. 그 동안은 가게 네의 다른 디자이너들을 이용해서 그럭저럭 명성을 굳히고 있었지. 게다가 신기할 정도로 가게 수익이 떨어지지는 않고 있어. 다만 차우현 씨가 디자인을 내놓을 때는 매년 성장하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그만그만한 상태를 유지할 뿐이야.”


“그렇다 해도 역시 차희현 씨가 그렇게 간절히 샵을 닫을 만한 이유는 없었죠. 오히려 언니 쪽이 닫으려 하면 모를까. 차우현 씨는 디자인을 하고 제작도 하니까, 차라리 혼자 가게를 내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요.”


“맞아. 이 경우에 차우현 씨가 동생의 청을 들어주지 않으려 하는 것은 정말 말 그대로 엿 먹으라는 심정이라서 그랬던 것 같고…… 차희현 씨 같은 경우는 자신에게 밥줄인 샵을 닫아야 할 만큼 절실한 뭔가가 있다는 거지. 정보원에 따르면, 희현 씨는 죽기 전, 그 몇 주간 매우 겁에 질려 있었다고 해. 우리 회사에 계약을 하러 왔을 때도 그렇고.”


오픈카는 시원하지만 대화의 단절을 가져온다. 세준은 카의 지붕을 꽉 닫으며 확인했다.


“그렇군요. 이제야 전반적인 상황이 눈에 들어오네요. 좋아요, 그러면 선배의 가설은 뭡니까?”


계영이 계약서 봉투에서 사진 중에 하나를 꺼냈다. 차희현이 언니에게 보내려고 기를 쓰는 웨딩드레스 사진이다.


“내 생각은 이래. 적어도 차희현 씨가 언니에게 웨딩드레스를 보냈다는 것은 화해의 제스처였다는 거야. 이 사진을 보면 명확해.”


사진의 어디가 명확하다는 건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준은 전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가 명확하다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계영은 코웃음을 쳤다.


“무지는 네 팔자고.”


“좋아요, 웨딩드레스는 정말 뭔지 모르겠지만, 대리님의 말에 궁금한 건 하나 있습니다. 만약 그 웨딩드레스가 동생이 언니에게 보내는 화해의 신호였다면, 동생인 차희현 씨가 언니를 배신하고 결혼한 지 1년 만에 기를 쓰고 화해하려고 한 이유는 뭡니까?”


“겁에 질려 있다는 게 힌트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결혼한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하고, 친언니에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일신의 위협을 느꼈다면......, 대개의 경우 그 여자의 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위협을 당했다고 볼 수 있잖아.”


지난 저녁에 만난 여자가 떠올랐다. 그 여자 역시 희즈 웨딩샵이 화제에 오르자마자 떨었다.


“그나저나 당신이 만난 여자 친구는 뭐래? 서세영에 대해서? 그 바닥이 원래 소문이 중요하잖아.”


“일단, 여자 친구 아니고요······.”


“그렇다 치고.”


계영이 알아내길 원했던 정보 중 일 순위는 자매 사이에 낀 남자 서세영에 대한 정보였다.


“뭐, 제가 보기에 어제 그 여자는 서세영이라는 남자를 몹시 겁내는 것 같았어요. 비밀이 잡혀 있다고 하더군요. 그 남자가 자신의 비밀을 움켜쥐고 협박하고 있다, 그렇게만 말했어요. 서세영은 원래 웨딩샵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던 인물로······, 남동생이 시골에 큰 도축 농장을 가지고 있고, 서세영 씨 자체는 오랫동안 서울에서 실험실 근무를 했다고 하던걸요? 음, 뭐라더라? 이상한 실험이었는데. 더비? 더미……? 샵에도 이름이 올라와 있진 않대요. 다만 부인이 사망한 이후로, 차희현 씨는 개인사업자니까 회사를 처분할 권리를 가지고 있죠. 서세영 씨는 폐업신고를 하고 샵을 정식으로 사들이려 하고 있어요. 다만 차희현 씨가 결혼을 할 때 디자인과 상품 권리자인 언니의 동의 없이는 가게를 처분할 수 없다는 각서를 공증을 받아놓은 상태라서 이게 상당히 난해한 문제이긴 합니다.”


“전형적인 나쁜 남자군.”


계영이 딱 잘라 말했다. 마침 목적지에 도착이 가까워져, 차는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우회했다.


“……나쁜 남자라면, 저 말입니까?”


“아니, 당신 말고, 서세영. 덕분에 내 가설이 완성됐어.”


“어떻게요?”


“서세영이 차희현과 여자들의 어떤 비밀을 비열하게 움켜쥐어서, 협박하고 샵을 자기 것으로 하려고 한다는 거지.”


“아, 네. 그럼, 그 나쁜 남자 확인하러 가면 되는 거 맞습니까?”


차는 미끄러지듯 웨딩샵 앞에서 멈췄다. 둘은 차를 건물 지하에 넣고 밖으로 나왔다. 둥그런 철제 테로 구부러진 사인Sign은 하얀 아크릴 판으로 면을 이루고 청색의 빛나는 도료로 목적지를 과시했다.


「Hui’ Wedding Shop」


가게 앞에는 청담동의 여느 웨딩샵이 그렇듯, 잘 정리된 작은 정원이 펼쳐졌다. 푸른 정원과 나뭇가지들에 휩싸인 샵의 사인은 품격이 있어 보였다.


쇼윈도에는 웨딩드레스 서너 개가 걸려 있었다. 세준으로서는 평상시에 일말의 관심도 가져본 적이 없는 주제였다.


결혼, 그리고 웨딩드레스-.


사실 세준의 눈에는 웨딩드레스들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구별되지 않았다. 그냥 하얗고, 어떤 부분은 펑퍼짐하고 어떤 부분은 쫙 달라붙는다는 게 차이의 전부였다.


하물며, 반짝이는 천이 몇 개 더 붙었다고 해서 그렇게 비싼 이유조차도 이해되지 않았다. 뭔가 디자인이 특별한 것도 아니지 않는가.


세준은 비단 자신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신랑들의 생각도 비슷할 거라 여겼다. 결혼식이란 상대 여자와 부모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치르는 귀찮은 이벤트에 불과했다. 희즈 웨딩샵에서의 생각도 다르진 않았다.


“여기 사장님 만나 뵈러 왔는데요.”


계영이 샵의 문을 열며 부드럽게 웃었다. 데스크에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다가 놀란 듯 돌아봤다.


“약속을 하고 오셨나요? 예약자분 성함이…….”


세준은 모른 척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르긴 해도, 단단히 오해하는 눈초리였다.


이 여자와 결혼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내가 아깝지.


데스크의 여인에게 저주를 품을 때, 권계영이 설명했다.


“아, 권계영이라고 합니다. 웨딩드레스 때문이 아니라, 돌아가신 사모님의 유지를 이행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시크릿 세이버라고 하면, 사장님도 아실 텐데요. 몇 번 전화를 드렸어요. 오늘도 이 시각에 뵙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예상 외로, 계영은 성실하게 자신을 설명했다. 세준은 그 조곤조곤하고 부드러운 어투에, 계영과 클럽 앞에서 본 날을 떠올렸지만 금세 그만두었다.


그날, 호화로운 클럽 앞에서 계영은 소박한 옷차림으로 골목에 서 있었다. 세준은 그가 누굴 기다리는지, 왜 그런 표정인지가 궁금했고, 몇 분 후에야 계영이 기다리던 남자를 알아차렸다. 그날의 계영은 평소와는 다르게 어딘가 초연하고 또 한편으로 처연한 느낌이었다.


이후에 회사에서 다시 마주쳤을 때의 계영은 원래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 인상은 그것으로 한 번 뿐이었다.


“이쪽 홀에서 잠시 기다려 주시겠어요? 이사님께 말씀드릴게요.”


여직원이 둘을 안쪽의 방으로 안내했다. 커튼이 쳐진 방은 샵의 홀만큼 넓고 쾌적했다. 계영은 소파에 앉았고, 세준은 선 채로 몇 분을 기다렸다.


세준이 먼저 물었다.


“……약속 하고 오신 거 맞아요?”


계영은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오후 2시에 뵙겠다고 분명히 말했지. 부인의 유지 이행 건 때문에. '이름' 뿐인 이사에게.”








샵의 이윤에 대한 처리는 법적 상속인인 서세영이 가지고 있겠지만, 일단 개인사업자인 차희현이 사망한 후였으므로, 샵은 폐업 처분을 하고 재개업을 하는 게 맞았다.


문제는 차희현과 그의 상속인인 서세영이 가게에 대한 권리를 가진 반면, 실질적인 가게 물품의 상품에 대한 권리는 언니인 차우현이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동업계약서를 쓰지 않았지만, 시크릿 세이버의 법률팀이 알려준 바에 의하면, 이 경우 판례는 대체로 동업으로 인정하는 일이 잦았다. 차희현이 시크릿 세이버에 남긴 유서를 통해 언니 차우현에게 먼저 샵의 폐업을 의뢰한 것도 서세영에게는 문제가 될 수 있었다. 샵의 수익이 적지 않은 편이므로, 서세영은 어떻게든 폐업을 하고 정식으로 가게를 자신의 이름으로 재개업하는 쪽이 이득이다. 그러나 언니인 차우현이 동생과 제부에게 앙심을 품고 있는 지금과 같은 경우, 남편 서세영이 혼자 샵을 처분했다가는 역으로 고소를 당하고 디자인의 권리조차 법률적으로 끝장날 소지가 많았다. 결국 서세영은 부인의 유지를 실행하는 시크릿 세이버 쪽에서 언니라는 차우현의 마음을 돌리고 어떻게든 샵의 폐업과 재개장에 힘을 실어주길 기대해도 시원치 않을 판이었다.


그러나 서세영은 늦었다. 약속했던 2시보다 훨씬 늦은, 2시 20분경에야 부랴부랴 커튼을 열고 들어섰다. 매우 잘생겼지만 지친 느낌을 주는 남자였다. 늦은 등장에 대한 사과는 일절 없었다.


“오셨군요.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전화 드렸습니다. 이행 시기가 만료 되어 가는데 걱정이 되어서요.”


“한세준이라고 합니다. 차희현 씨의 계약에 따라 유지와 계약 내용을 전달해드리고자, 긴급팀에서 파견해서 나왔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앉으시죠.”


세준을 자리로 안내한 세영은, 자신을 따라 온 여직원에게 다급히 말했다.


“차 좀 부탁해. 나는 아이스 티로.”


데스크를 지키는 직원과는 다른 여자였다. 세준은 시계를 들여다보고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됐습니다. 곧 가야 합니다.”


그러나 계영이 마치 유령처럼 부스스 허리를 세웠다.


“저는 커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 것도 안 섞인 순수 원두로요. 아시죠? 아라비카 스타일의······.”


어이가 없는 눈으로 돌아봐도 소용이 없었다. 여직원이 불만스러운 눈으로 사장을 쳐다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계영은 그때서야 서류철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며 특유의 느긋함을 발휘했다.


서세영이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래, 어떻습니까. 처형은 아직도 버티는 중입니까?”


“네, 다섯 번 모두 실패했습니다.”


계영의 대답에 그는 탄식했다.


“하! 그깟 웨딩드레스를 인계하는 일이 뭐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이렇게 시간을 끄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어감이 이상했다. 세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웨딩드레스를 받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


그간은 웨딩드레스 자체의 의미를 터부시하는 까닭에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서세영의 말을 듣고 보니 희한했다. 어떤 물건의 가치란, 그것을 받을 사람의 태도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대개 보석을 주면 선뜻 받고 쓰레기를 주면 거절한다. 그러나 문제의 웨딩드레스의 경우, 세준은 그 가치를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웨딩드레스가 차우현에게 중요하지 않으면 우현은 그냥 동생의 유지대로 그것을 받고 치우면 그만이다. 반대로 중요하다면, 그 중요도만큼 차우현은 그 웨딩드레스를 받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한쪽은 죽어서도 그 웨딩드레스를 언니에게 줘야했고, 언니는 한사코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 드레스는 중요한 걸까, 하찮을 걸까.


"웨딩드레스의 인계건은 사실 중요합니다, 이사님."


계영이 일부러 이사라는 호칭을 또박또박 발음하며 말했다.


"샵은 실질적인 소유주가 사라졌으니 폐업 신고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폐업 신고 후에 이사님이 이 샵을 그대로 본인 이름으로 재개업하길 원한다는 겁니다. 그런 경우에는 실제 부인분의 동업자에 가까운 차우현 씨가 법적으로 이사님의 모든 판매 물품에 제동을 걸 수 있어요. 만약 차우현 씨가 웨딩드레스를 받게 되면, 그건 동생과의 화해의 의미가 될 테니, 이사님이 별다른 분쟁 없이 차우현 씨를 직접 설득할 여지가 있는 거죠. 그러니 차우현 씨가 드레스를 받고 안 받고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뾰로통한 얼굴로 사라졌던 여직원이 차를 가지고 돌아왔다. 직원이 차를 놓고 돌아가자마자, 서세영은 계속 투덜댔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차를 벌컥거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세준은 이상한 기분을 느끼며 남자의 손을 쏘아보았다.


아주 이상했다. 순간적으로 감지한 것이지만, 남자의 어떤 부분은 매우 이상했다.


계영이 되물었다.


“왜 말이 안 됩니까?”


조용한 목소리였다. 서세영은 차를 단숨에 마시며 언성을 높였다.


“아니, 시크릿 세이버에서 하는 일이 어이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시크릿 세이버가 최선을 다한다는 건 압니다. 제 말은 처형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처형, 그러니까 차우현……, 어차피 그 여자 차우현은 하는 일도 없었단 말입니다. 제 와이프가 워낙 수완이 좋고 미인이여서 유명했던 샵이지, 그 여자는 아무 하는 일도 없이 살만 쪄서······, 죄송합니다, 하여간 그래서 집에만 박혀 있는 게으름뱅이인데······!”


“그렇습니까?”


계영이 받아쳤다. 차분한 태도였다.


“저는 이사님이 처형되시는 차우현 씨를 어떻게 여기시든 상관할 바 아닙니다. 아무튼 이 사안에서의 문제는 그분께서 고인의 유품을 받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는 겁니다. 물건만 받으면 차우현 씨에게 부인의 두 번째 유지인 샵의 폐업처리를 말씀드릴 수 있는데 말입니다.”


“그럼 그런 경우에 저는 어떻게 됩니까? 처형이 끝까지 아내의 유품을 받지 않으면요. 아내가 당신들 회사에 어떤 계약을 걸어놓은 겁니까? 제 변호사는 제가 독자적으로 인수할 수 있다고 합니다만, 역시 상품들의 디자인 권리나 이런 것이 매출과 당장 관련이 되는 지라......”


“사모님의 유지는 정확히 세 가지입니다. 아마 일전에 우리 회사의 법무팀에서 변호사들이 와서 설명해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계영의 말투는 계속해서 조용했다. 세준은 약간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지만, 서세영은 스스로에게 도취된 것처럼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서세영은 자기 흥에 빠진 남자 특유의 거들먹거리는 투였다.


“네, 시크릿 세이버……, 당신 쪽들 변호사들이 뭐라고 말하긴 했습니다. 그 망할 놈의 박스, 그 안의 웨딩드레스를 처형이 받지 않는다 해도 제가 샵을 처분할 권리나 아내의 유산을 상속받을 권리는 있지만 문제가 좀 더 복잡해질 수 있고, 해결하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요. 게다가 보험이라든지, 이런 문제가 있습니다. 아내가 보험의 제일一 수혜자를 저로 해 놓지 않았어요.”


서세영은 여러 모로 안달이 나 있었다. 계영은 그런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상냥한 어조에 비해, 아무런 감정을 담지 않은 눈길이다.


“네, 어쨌든 선생님 쪽에서도 우리가 사모님의 유지를 제대로 이행하는 게 이득이시겠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처형 되시는 차우현 씨께서 절대로 그 상자를 받지 않겠다고 하고 있어서 매우 곤란합니다.”


“그 시크릿 박스인가 뭔가에는 아내가 작업한 웨딩드레스가 있는 거죠?”


“네, 열어보진 못하게 밀봉되어 있습니다만, 당시 작성하신 서류와 당시 같이 계약을 진행했던 법률팀의 증언으로는 그렇습니다.”


시크릿 세이버에서는 고객이 계약서에 의거한 유지나 유서를 남길 때, 상자 안에 불법적인 것을 담지 못하도록 법률팀들이 항상 동행했다. 법률팀은 계약서가 작성된 당시의 기록까지도 남기고 있기 때문에, 모두가 상자 안에 어떤 종류의 물건이 담겼는지는 알고 있다. 다만, 열어보지는 못할 뿐이다.


“그 상자를 제가 볼 수는 없습니까? 열지는 않겠습니다. 그냥 볼 수 있을까요?”


서세영은 파리처럼 손을 비비며 중얼댔다.


“계약이행 만료일이 다가오는데, 안 되면 부피를 봐서 제가 처형의 집에 밀어 넣기라도 해야겠습니다. 억지라도 받게 만들면, 처형도 이쪽 이야기를 들을 기분이 될지도 모르죠.”


한때 연애하던 남자가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을 해버렸다. 그렇다면 차우현은 어떤 기분일까. 게다가 저 남자는 자신의 목적 외에는 관심도 없는 것 같은 자식일 뿐인데.


세준은 생각하기도 싫은 기분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영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차희현 씨 박스, 차 트렁크에 실려 있지?”


계영의 말처럼 문제의 박스는 트렁크에 이틀 동안 실려 있었다. 세준은 묵묵히 지하 쪽 계단으로 내려갔다. 계영에게서 줄곧 미스터리한 침착함과 서세영이 풍기는 요상한 불쾌감이 같이 떠올랐다.


서세영과 대화를 진행하던 당시, 계영의 눈이 두어 번 정도 반짝였고,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방식은 예전에 클럽 앞에서 마주쳤을 때와도 비슷했다. 그때 계영은 -비록 세준은 그날 처음 그 여자와 대화다운 대화를 나눴지만- 세준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넌 우리 회사 대표 이사의 아들이지? 하지만 그들의 일행은 아닌 것 같네. 그들이란, 저 클럽 안에서 비비고 있는 사람들 말이지. 삼 년 동안 내 애인이었던 남자와 그 남자와 결혼할 거라는 여자는 같은 반지를 끼고 있거든. 요트 클럽의 반지. 그놈이나 그년과 같이 어울리는 무리들은 모두 그 요트 클럽 반지를 끼고 있지.’


계영이 그렇게 말하기 전까지는 약간 미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계영은 클럽에서 나오는 모든 사람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몇 시간 동안이나 클럽의 입구에서 서성였다. 세준이 담배를 사러 잠깐 나오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그 자리에 버티고 있었다. 세준이 흥미를 느낀 것은 바로 그 부근이었다.


세준은 그전에도 아버지의 회사를 심부름차 몇 번 들락거리긴 경험이 있었다. 클럽에서 마주치기 전에도 계영은 낯이 익은 상대였고, 심부름에 관련된 일로 짧은 대화를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계영은 회사 안에서건 밖에서건 사장의 숨겨진 아들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그는 자신의 곁에서 담배를 피우는 세준을 동네 개처럼 생각하는 태도로 말을 걸었다.


세준을 그에게 묘한 호기심이 동한 것은, 그가 클럽 앞에 막 도착한 어떤 여자를 보면서 말할 때였다.


‘저 여자는 프로처럼 보이려하지만, 사실 클럽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긴장하고 있어.’


왜 입니까, 세준이 연기를 뱉으며 물었을 때 계영은 대답했다.


‘……신발이 새 거라서. 뒤꿈치가 까져 있잖아. 거기다가 저 명품 클러치 백은 중고지. 저 여자의 손 크기와는 다른 범위로 넓게 낡아져 있어. 한마디로 저 여자보다 손이 큰 다른 사람이 저 클러치 백을 들고 다녔다는 거야. 방금 스포츠카에서 내린 저 남자도 마찬가지야. 차가 자기 게 아니야. 그럴 듯해 보이려고 빌려온 거겠지. 왜냐고? 스포츠카잖아. 여기서 보인다고. 전방의 백미러의 각도가 자기하고 맞지 않아서 방금 자기 머리를 확인할 때야 겨우 맞췄어. 차를 빌리고, 위험한 데도 거울 각도도 맞출 생각조차 못한 채 얼른 달려온 거야. 제때 반납해야 하니까.’


그때 세준은 생각했다. 저 클럽 안에 있다는 이 여자 애인, 누군지 모르지만, 죽었군, 하고.


방금 웨딩샵에서의 느낌도 당시와 비슷했다. 계영은 서세영에게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세준은 1년 6개월 전쯤 전에 겪은 날카로운 감각을 떠올렸다. 계영과 함께 있다 보면, 그 감각이 돌아올 때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뚜벅 뚜벅-.


지하로 향하는 계단의 소리는 턱없이 크게 울렸다.


지하주차장은 어두웠다. 환하고 밝은 상부의 전경에 비해, 지하는 관리의 미흡함을 드러내듯 상당히 어둡고 음습했다. 어쩌면 지나치게 화사한 거리나 샵의 분위기 탓에, 눅눅함은 더 강하게 와 닿았다.


마지막 계단에서 발을 옮기는 순간, 습한 시멘트 냄새가 폐부를 적셨다. 문제의 드레스는 회사 상자 안에서 곱게 접힌 채 차 트렁크에 놓여 있었다. 뚜껑에 은박으로 Secret Saver 라고 찍힌 상자였다.


처음 상자를 실은 게 계영이었기 때문에, 원래의 무게는 알지 못했다. 단지, 웨딩드레스라는 항목에 비해 지나치게 무거웠다. 세준은 상자를 들어 올리며 저도 모르게 중얼댔다.


“……생각보다 무겁네?”


상자 자체의 무게인가.


고개를 갸웃하며 몸을 돌릴 때였다.


뭔가 홱, 하고 앞을 가렸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남자가 느닷없이 지나갔다.


검은 우비를 눌러쓴 남자였다. 그가 혼령처럼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들어설 때와는 다른 공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어느새 청연靑烟 같은 공기가 가득 차더니 괴물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꿈틀꿈틀, 꿈틀꿈틀.


세준은 동작을 멈춘 채 숨을 죽였다.


검은 우비의 남자가 거무스레한 안개 속에서 훅 하고 튀어 나와 움직였다. 사내가 움직일 때마다 시골의 땅내 같은 냄새가 만연했다. 주변은 두텁고 검은 연기 때문인지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남자는 무거운 자루를 질질 끌고 있었다. 그는 미친 것처럼 눈이 뒤집힌 채로 혼잣말을 해댔다.


“들켜서는 안 돼, 이런 걸로 들키면 안 돼……. 다 네 잘못이야. 고분고분 말을 잘 들었어야지…….”


무시무시한 광기였다. 세준은 저절로 숨을 들이켰다. 검은 우비의 사내는 어둠 속의 사신처럼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흡사 그 어둠 안에서 세준을 알아차린 것처럼 부릅뜬 눈매였다.


세준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을 쳤다. 상자 안에서 무언가가 달그락거렸다.


검은 우비의 남자는 세준의 존재를 의식하면서도 보이지는 않는 듯, 눈을 매섭게 뜨고 허공을 노려보며 다가왔다. 한 발, 한 발-. 남자가 내딛을 때마다 그가 끌고 있는 검은 자루가 쓱쓱, 바닥에 스치는 소리를 냈다. 사내가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자, 자루의 실체가 드러났다.


자루가 아니라 여자였다.


검은 우비의 남자가 끌고 오는 그것은, 피부가 파리하고 눈을 뜬 채로 굳어 있는 여자의 몸이다.


몇 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여전히 세준이 보이지 않는 듯 눈을 가늘게 뜨다가 고개를 돌렸다. 곧 결계와 같은 검은 안개가 다시 그 남자를 에워쌌다. 남자와 안개는 한 덩어리가 되어 나타날 때처럼 천천히 사라졌다.


마침내 세준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상자를 놓치지 않고 꼭 들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하면서도 이런 상황에 늘 그렇듯, 욕설이 나왔다.


“……씹할.”


사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가끔 본다. 어떤 일인지 해석은 불가不可했지만 한두 번이 아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괴담이 넘치는 시크릿 세이버의 X 팀에 들어가고 싶었다.


작가의말

업데이트 기록 _ 14.11.10 수정(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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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 5

  • 작성자
    Lv.36 온연두콩
    작성일
    14.09.09 01:54
    No. 1

    혹시 주인공은 사이코메트러인가요?
    심리학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본능적인 감이 뛰어난
    사람인가 싶었는데 예상보다 더한 능력자군요.

    찬성: 0 | 반대: 0

  • 답글
    작성자
    Lv.10 최승윤
    작성일
    14.09.10 21:50
    No. 2

    아니요, 사이코메트러는 아닙니다..^^ 하이드 파와 지킬 파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이 나중에 나오는데, 본인은 지킬의 인성을 갖고 있지만 하이드 DNA를 발휘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인간의 어두운 부분, 어두운 기억, 어두운 장면을 읽는 능력이 있어요. 나중에 나옵니다..^^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Personacon 마니
    작성일
    14.09.16 02:07
    No. 3

    오...세준군....그런데 부러운 능력은 아니네요. 아니 그보다 추리였다가 갑자기 호러로 바뀌는 줄 알았어요. 역시 x팀은 어딘지 특별한 사람들만 모이는 건가요. +_+

    찬성: 0 | 반대: 0

  • 작성자
    Lv.21 윤도경
    작성일
    14.11.28 00:45
    No. 4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 작성자
    Lv.22 젤라
    작성일
    14.12.09 15:37
    No. 5
    비밀댓글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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