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아이텐스의 리루비안 연재지

기름의 시대

웹소설 > 자유연재 > 판타지, 라이트노벨

아이텐스
작품등록일 :
2020.08.29 17:54
최근연재일 :
2024.02.29 20:38
연재수 :
121 회
조회수 :
3,526
추천수 :
18
글자수 :
697,994

작성
22.04.04 20:39
조회
23
추천
0
글자
12쪽

달콤한 유혹 - 8

재미있게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DUMMY

근신처분 후 린세는 반성문을 들고 대사에게 불려갔다. 린세가 주는 반성문을 읽지도 않고 적당히 놔둔 대사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린세에게 물었다.


“잘 쉬고 왔어?”


근엄한 표정 치고는 단순한 질문이라 린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잘 쉬었습니다.’


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럼 피곤하다 거나 힘들다 거나 하는 변명은 못하겠네?”


평소라면 그럭저럭 장난이라고 넘길 수 있을 그 한마디가 한없이 진지한 대사의 태도와 겹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치 미리 빠져나갈 구멍을 차단해 놓으려는 것 같았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솔직히 말해봐.”


올것이 왔다. 린세의 생각보다 빠르게 대사가 치고 들어왔다. 린세는 자연스럽게 모르는 척했다.


“어제 말씀드린 그대로예요. 혹시 징계를 내리시려는 거라면 저한테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만홍 씨는 아무 잘못 없어요.’


대사는 작게 코웃음을 치곤 천장을 한번 훑듯 고개를 돌리고 가소롭다는 듯이 말했다.


“영사. 내가 여기서 대사일을 한지 벌써 15년이야. 영사가 조난된 그 날 세르텀 항구가 폐쇄되는 일이 있었는데, 거기에 영사가 관련되어 있다는 얘기가 있어. 어떻게 생각해?”


린세는 입안이 타들어가는 것 같았다. 무어라 답을 해야 대사가 납득해줄 수 있을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린세는 차마 자기 입으로 란펑의 이름을 말할 수 없었다.


“그런 우연도 다 있네요. 잘못 와전된 게 아닐까요?”


대사는 눈을 감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사.”


“네, 대사님.”


대사는 천천히 눈을 뜨며 말했다.


“나는 못 알아내서 영사한테 묻고 있는 게 아냐. 영사한테 듣고 싶어서 묻고 있는 거지.”


대사의 말은 조용히 쇠사슬이 되어 린세의 목을 휘감았다. 린세는 아직 대사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하지만 상대를 믿으려 하는 마음은 조용히 전달되었다.


“잘 들어 영사. 우린 외교관이야. 탄트라의 얼굴이라고. 우리가 우선해야 하는 건 개인적인 감정이나 체면 같은 게 아냐. 국가의 명예지. 우린 탄트라에 공헌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거야.”


린세가 외교관으로서 이 자리에 서있는 이상 저 말에서 벗어날 순 없다.


“영사가 보고 들은 것. 아무리 사소한 거라고 할지라도 우리 탄트라엔 큰 보탬이 될 수 있어. 그날 세르방트 구역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겠어?”


대사는 더 이상 재촉하지도 추궁하지도 않았다. 그저 조용히 린세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한스와는 또 다른 압박감이었다.


린세는 조용히 마른침을 삼켰다. 태어나서 한 번도 더위를 느껴보지 못한 몸이나, 지금의 이 숨막히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이상 숨길 수는 없다. 그날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그 자리에 린세가 있었다는 건 반쯤 확정된 분위기로 가고 있었다. 린세는 선택해야 했다.


“저는 탄트라의 외교관으로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대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시에 백호님의 장기말로써 이 자리에 있기도 합니다.”


대사의 움직임이 멈췄다. 대사는 지긋이 린세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린세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땐 백호가 왜 그런 얘기를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거기서 있었던 일은 백호님의 명령과 관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제가 함부로 발설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결과가 대사님의 신뢰 상실이라면 어쩔 수 없어도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탄트라에서 백호는 성역. 그 이름이 나온다면 쉽사리 손을 쓸 수 없었다.


“영사가 백호님과 독대를 했다는 얘기는 들었지.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겠지만, 다음엔 언질이라도 주면 좋겠어. 영사의 돌발행동이 직원 모두를 위기에 빠트릴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도록 해.”


대사는 차분히 말했다. 자극적인 단어나 거친 말없이도 확실하게 의미가 전해져왔다.


“백호님이 탄트라를 보살피시는 것처럼 나는 이곳의 모두를 보살피는 역할이야.”


대사는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리고 대사도 여기에 부임한 이상 내 식구야. 무리하지 말고. 힘든 일 있으면 말하고.”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기고 대사는 방을 나섰다. 혼자 남은 린세는 긴장이 풀리자 온몸의 힘이 쭉 빠지며 자연스럽게 의자에 늘어졌다.


“심장 떨렸다아.”


동시에 생각할 여유가 생기자 지금까지의 대화를 복기하며 실수한 건 없는지 표정 등이 어색하진 않았는지 되돌려보았다. 고민 결과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린세는 자세를 다잡고 옷을 고쳐 입었다.


“머리를 썼더니 당이 떨어진 것 같아.”


린세는 대사관을 나서 거리로 나왔다. 린세가 대사에게 불려간 건 모두가 알고 있었고 당장 오늘 끝내야 하는 일도 없었다. 약간의 여유라면 부릴 기회가 있었다.


한참 해가 떠있을 시간. 거리엔 거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거나 현지인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이 전부였다. 나름대로 현대화가 이루어진 다른 구역들과는 다르게 탄트라 구역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다.


“세르방트······. 는 가면 안 되겠지. 아쉽네.”


다 포기하고 복귀해서 각설탕이나 씹으려는 찰나에 린세는 거리에 누가 있는 걸 발견했다. 이 더위에 긴소매 옷을 입은 채 양손 가득 짐을 들고 지친 발걸음으로 오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멀리 있어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만홍 씨! 우연이네요. 무거우실 텐데 제가 들어드릴 게요.”


린세는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만홍의 짐을 들어주고자 하였다. 그런데 그때까지만 해도 지쳐서 겨우 걷는 모양새였던 만홍은 린세를 보자마자 기겁하며 팔을 뺐다.


“아닙니다.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영사님은 일 보십시오.”


그리고는 린세를 지나쳐서 허겁지겁 대사관으로 향했다. 린세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만홍을 따라갔다.


“아니예요. 그냥 기분전환 삼아 나온 거라서 한가한 참이예요. 보따리 하나라도 주세요.”


린세가 재차 권했음에도 만홍은 한결 같았다.


“아닙니다. 정말 괜찮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만홍의 팔은 떨리고 있었고, 다리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불안하게 움직였다. 린세는 기회를 보다 만홍의 손아귀에서 짐을 낚아챘다. 들고 있을 힘도 없던 만홍은 그 손길에 저항할 수 없었다.


“이렇게나 무거운데. 어디서부터 들고오신 거예요?”


짐은 린세가 들기에도 묵직함이 느껴졌다. 이런 짐을 들고 여기까지 온 만홍이 대견해지는 순간이었다.


“여기선 못 구하는 것도 있어서 세르방트 구역부터요. 정말 괜찮으니 주십시오.”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만홍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연약했다. 린세는 콧김을 내뿜고는 만홍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만홍의 말을 무시하고 대사관으로 향했다.


“그런 상태로 뭘 들겠다는 거예요. 그냥 제가 들게요. 나중에 간식이나 사주세요.”


린세의 말에도 만홍은 억지로 따라가서 자기가 들려고 하다가 결국 체력이 모자라다는 걸 확인하고 반 강제로 포기하게 되었다.


만홍이 포기하고 얌전히 따라오는 것을 확인한 린세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그나저나 뭘 이렇게 산더미처럼 많이 사신 건가요?”


린세는 힐끔 안의 내용물을 보았으나 제대로는 보이지 않았다. 만홍은 잠시 숨을 고른 뒤에 대답했다.


“문구류랑 부식거리, 그리고 종이입니다.”


“그걸 전부 혼자서요?”


“네.”


린세는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리 만홍이 말단이고 이틀이나 빠져 일이 밀렸다고 해도 이렇게나 부려먹는 건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사관 앞까지는 제가 들게요. 그 다음에 바꾸면 다른 직원들도 뭐라고 못하겠죠?”


정말 물자가 부족해서 만홍에게 일을 시킨 것은 아닐 터였다. 명색이 대사관에서 직원을 멀리 심부름 보낼 정도로 물자가 부족한 상황이라면 강대국 칭호는 내려놓는 것이 맞았다. 단순한 괴롭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조치였다.


“네.”


만홍은 계속해서 숨을 골랐으나 좀처럼 진정될 낌새가 없었다. 안되겠다고 판단한 린세는 적당히 쉴 만한 곳을 찾아 그리로 갔다. 그래도 약간이나마 그늘이 진 건물의 뒤편이었다.


“부식은 어떤 걸 사셨죠?”


“과자랑 찻잎, 커피콩, 사탕 정도입니다.”


사탕이라는 소리에 린세는 순간 눈을 빛냈다가 이내 정신차리고 만홍을 앉혀놓고 일어났다.


“잠깐 물이라도 떠올 게요. 어디 가지 말고 있어요.”


린세는 종종걸음으로 가 오면서 보았던 현지인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물 한 바가지를 구해왔다.


“실례할 게요.”


먼저 만홍의 머리에 물을 살짝 부어준 린세는 항상 예비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각설탕을 물에 풀어서 만홍에게 주었다.


“천천히. 너무 급하게 마시진 말고요.”


원래는 소금을 살짝 넣는 게 맞지만, 아쉽게도 수중에 없었다. 그래도 설탕물이면 충분히 활력을 넣어줄 수 있었다.


만홍이 물을 마시는 동안 린세는 짐을 뒤져 만홍이 사온 쿠키를 꺼냈다. 개중에서 겉에 소금을 뿌린 것만 추려내어 만홍에게 주었다. 충분히 소금물 대신이 될 수 있었다.


뭔가를 먹고 마시고 나니 만홍의 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린세는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끼며 만홍의 옆에 앉아 따로 빼놓은 쿠키를 먹었다.


“음. 괜찮네요. 나중에 이거 산 가게 알려주세요. 다른 것도 먹어보고 싶네요.”


“네. 알겠습니다.”


만홍은 멍하니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린세도 따라서 하늘을 보았다. 비가 오려는 지 하늘 저편에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야겠네요. 비가 오겠어요.”


“네.”


쿠키를 다 먹은 린세는 짐을 챙겨서 일어났다. 만홍도 힘을 내서 일어나 린세의 뒤를 따랐다.


다음은 분주히 대사관을 향해 걷는 일뿐이었다. 둘은 충분히 외부에서 시간을 썼고, 슬슬 일에 복귀해야 했다.


“영사님은 왜 저에게 잘 해주시는 건가요?”


린세는 직감적으로 이 질문이 정말 궁금하거나 비아냥 거리는 게 아닌 다른 의미가 있다는 걸 눈치챘다. 얼마 보진 못했어도 만홍은 썩 붙임성 있는 성격은 아니었고, 누군가와 대화를 함에 있어 자기만의 기준을 내세우지 남의 기분까지 고려하는 성향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 어떤 대답도 오답이 되는 질문. 린세가 만홍이 되지 않는 이상 절대 맞출 수 없는 문답이었다.


‘이건 얼버무리는 게 나아. 섣부르게 대답하면 도리어 역효과가 날 거야. 하지만······.’


어차피 정답을 맞출 수 없다면 린세는 피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가 가면을 쓰고 대하는 만홍에게 자기만은 진심으로 대해주고 싶었다.


만홍은 그렇게 하고 있으니까.


“사람을 돕는데 이유를 생각하고 하는 성격은 아니라 서요. 거의 다 왔네요. 남은 거리는 혼자 들고 오실 수 있죠? 저는 조금만 더 농땡이 피우다 들어갈 게요.”


린세는 그렇게 말하고 들고 있던 짐을 만홍에게 쥐어 주었다. 만홍은 순간 휘청거리긴 하였으나 다시 힘을 내서 짐을 들었다.


“네. 고생하십시오.”


린세는 멀찍이 떨어져 만홍이 대사관으로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앞으로도 고생길이 훤해 보이는 뒷모습에 린세는 작게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시간은 아직 조금 더 있었다. 린세는 좀 더 주변을 돌아보다 돌아가기로 하였다.




항상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의말

오늘도 좋은 하루였으면 좋겠습니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기름의 시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21 달콤한 유혹 - 26 24.02.29 5 0 12쪽
120 달콤한 유혹 - 25 23.12.31 7 0 23쪽
119 달콤한 유혹 - 24 23.08.27 8 0 12쪽
118 달콤한 유혹 - 23 23.06.16 10 0 10쪽
117 달콤한 유혹 - 22 23.04.13 11 0 12쪽
116 달콤한 유혹 - 21 23.02.21 15 0 11쪽
115 달콤한 유혹 - 20 23.02.09 15 0 13쪽
114 달콤한 유혹 - 19 22.12.24 17 0 11쪽
113 달콤한 유혹 - 18 22.10.31 15 0 11쪽
112 달콤한 유혹 - 17 22.10.19 16 0 10쪽
111 달콤한 유혹 - 16 22.10.06 17 0 11쪽
110 달콤한 유혹 - 15 22.09.18 18 0 11쪽
109 달콤한 유혹 - 14 22.08.13 19 0 14쪽
108 달콤한 유혹 - 13 22.08.01 24 0 11쪽
107 달콤한 유혹 - 12 22.07.02 18 0 13쪽
106 달콤한 유혹 - 11 22.06.23 18 0 14쪽
105 달콤한 유혹 - 10 22.04.21 22 0 15쪽
104 달콤한 유혹 - 9 22.04.12 23 0 11쪽
» 달콤한 유혹 - 8 22.04.04 24 0 12쪽
102 달콤한 유혹 - 7 22.03.28 26 0 12쪽
101 달콤한 유혹 - 6 22.03.22 18 0 12쪽
100 달콤한 유혹 - 5 22.03.10 23 0 12쪽
99 달콤한 유혹 - 4 22.02.20 22 0 11쪽
98 달콤한 유혹 - 3 22.02.08 23 0 11쪽
97 달콤한 유혹 - 2 22.01.30 27 0 12쪽
96 달콤한 유혹 - 1 22.01.24 27 0 17쪽
95 작고 흰 괴물 22.01.16 23 0 12쪽
94 초에 불을 불이는 건 누구인가? - 8 22.01.09 16 0 10쪽
93 초에 불을 불이는 건 누구인가? - 7 22.01.03 16 0 18쪽
92 초에 불을 불이는 건 누구인가? - 6 21.12.28 17 0 11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