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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므

SSS급 빌런이 연기를 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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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므
작품등록일 :
2023.10.26 13:42
최근연재일 :
2024.05.06 19:05
연재수 :
15 회
조회수 :
1,549
추천수 :
56
글자수 :
81,554

작성
24.04.27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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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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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글자
12쪽

아르뮨 (1)

DUMMY






나는 손을 겹쳐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시아의 붉게 타오르는 눈동자는 여전히 내 얼굴을 향해 있었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얼굴이었다.


“조금 전, 결과가 어떻게 됐지?”

“······.”

“네가 나서준 덕분에 쉽게 힘의 우위를 가져올 수 있었다.”


‘아마도 아직은’ 흉내 낼 수 없는 케일의 무력.

분명히 그게 있었다면 조금 전의 상황은 손쉽게 마무리가 되었을 것이다.

본보기로 건달 1호의 몸에 발차기를 먹인 뒤, 10m가량 날아가는 꼴을 구경했으면 될 테니까.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그러니까 그 역할은 네가 해야 한다는 뜻이다. 나는, 케일이 아니니까.”


액션 연기는 시아가, 대사 연기는 내가. 그렇게 분리를 해 두는 것이다. 물론 두 배우의 합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협박이네.”


그리고 시아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했다.

내가 케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들키게 된다면, 시아가 원하는 무언가도 이루지 못한다. 그녀는 내가 죽지 않기를 바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협박이라는 단어는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


“그래.”


‘MOON’의 본거지로 향하는 마차 안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한동안 침묵이 가라앉았다.




***




‘MOON’의 본거지 '아르뮨'의 대회의실은, 오랜만의 회의로 인해 북적거렸다.

대회의실이라고 해봐야 그리 크지 않은 사이즈였고, 그렇기에 여기 모인 인원인 11명으로도 북적거렸다.


“우선, 앉지.”


개중 가장 상석의 바로 옆자리에 앉은 인물 ‘클루에 마틴’의 말에, 다들 떠들던 것을 멈추고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보스인 케일의 자리는 타원형의 탁자 가장 끝에 위치해 있었고, 마틴이 앉아있는 곳은 그 바로 왼쪽.

알렌 시아의 자리가 케일 기준 오른쪽이었으니, 마틴의 위치는 굳이 서열을 매기자면 3위라는 이야기였다.

흰 수염을 배꼽까지 기른 노인, 마틴은 한숨을 내쉬며 다른 ‘지부장’들을 부른 이유를 밝혔다.


“우선, 번거롭게 회의에 불러 미안하이.”

“흥.”


젊은 여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아룬 디엔’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고.


“불렀으니까, 온다.”


얼굴에 흉터가 가득한 근육질의 남자, ‘글루스 타이뮨’이 아무 생각도 없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래서 왜 불렀는데?”

“보스는? 아직도 안 돌아왔어?”


그 외 줄줄이 앉은 다른 지부장들도 한 마디씩 보태며 마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마틴은 흡족한 얼굴로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이거 200년 인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관심인지라 기쁘기 그지없군.”

“닥치고 본론만 말해. 일하다 왔단 말이야.”


사채업을 담당하고 있는 수인족 ‘제리 슈게리안’이 짜증을 냈고, 마틴은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성격 급한 양반들 같으니, 인내를 기르는 것도 수양이거늘.”

“인내 넘치는 노친네가 저번 달인가... 공장장이 반말했다고 공장 2개를 박살냈어?”

“허허허.”


마틴은 웃어 넘기려다 이내 노기에 가득 찬 숨을 뱉어냈다.

보라색의 오오라가 옆에 세워 둔 지팡이에서 슬금 슬금 새어 나왔다.

네크로맨서의 정점으로 불리우는 대마법사의 힘이 그 편린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허허. 나이도 어린 녀석이 노친네라니. 예의범절을 네놈 골수에 깊이 새겨주어야···.”

“저기요오오···.”


그러나 이내 그 시도는, 연약한 목소리에 의해 무산되었다.

로브를 푹 눌러쓰고 있는, 나이 어린 소녀 신관 ‘아리’에 의해서였다.


“싸움은 나빠요오···.”


그렇게 말하는 그녀도 ‘MOON’에 소속된 범죄자였지만, 마틴은 맥이 탁 빠진 얼굴로 지팡이를 내려놓았다.

보라색 오오라도 순식간에 한 점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쓸데없이 신성력 써서 중재할 필요 없네. 나는 인내심 넘치는 연장자니까 말이야. 허허허.”


마틴의 말에 발끈하려던 이들이 몇 있었지만, 이내 포기한 얼굴이 되어서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좌중이 조용해지자, 마틴은 흡족한 얼굴로 다시금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자네 지부장들을 불러 모은 이유가 궁금할 터인데, 다들 알다시피 메르하임 케일에 관한 이야기일세.”

“보스??”

“왜? 또 어디서 혼자 재밌는 일 벌였어?”

“지금 어디에 있는데?”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지만, 마틴이 손을 들어올리자 다들 맞추기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현재 시아가 보스를 데려오고 있네.”

“···시아가? 또 찾으러 나갔던 거야?”

“그렇네. 이번에는 운 좋게 성공한 모양이고.”


흐응,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인 ‘디엔’은 파이프를 입에 머금은 채 연기를 훅 뿜어냈다.


“하여간 그 길고양이, 주인 생기고 나서는 졸졸 따라다니기만 해.”

“시아는 우리 조직의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비서네만.”

“후후, 그래서?”


아룬 디엔은 파이프를 쭉 빨아들였다가 다시 뱉었다. 푸른 연기가 공기에 먼지처럼 흩어졌다.


“그년이 계속 보스를 끼고 도는 바람에, 독차지를 못 하잖아 내가.”

“보스는 누구의 것도 아니다.”


타이뮨이 벌떡 일어나며 디엔을 노려보았다.


“자자, 그만 그만하게 다들.”


마틴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동시에 지팡이를 휘둘렀다.

쩌적, 하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보라색 뇌전이 일직선으로 내리쳤다.

디엔이 얼굴을 구기며 짜증을 냈다.


“할아범. 나는 이거 맞으면 죽거든?”

“허허.”


평정을 되찾은 마틴은 다시 말을 잇기 위해 입술을 열었다.

물론 수염에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았다.


“시아의 보고에 따르면 앞으로 4일 뒤에 이곳에 도착한다 하더군. 해서 말인데.”

“······.”

“······.”


마틴은 천천히 좌우를 둘러보다, 근 몇 년 간 ‘지부장 회의’에서 나왔던 안건을 꺼내 들었다.


“조직의 존폐에 관해서, 의견이 있으면 내어주게.”


그리고 다들, 마틴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3대 범죄 세력 ‘MOON’, 그럴싸해 보이는 명칭을 달고 있는 이 조직은 사실 겉만 번지르르 한 쓰레기 조직이었다.

원인은 ‘메르하임 케일’의 기행.

그리고 그 기행에 즐겁게 동참해 비슷한 짓을 벌이고 있는 다른 지부장들의 책임도 있긴 하다.


“솔직히 말해서 케일은 보스의 자격이 있는 인물은 아니야. 그냥 때리니까 억! 하고 따른 거지. 저번에 제국 은행 습격 사건 다들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


약 1년 전, ‘MOON’의 위상을 크게 드높이는 데 일조한 ‘제국 은행 습격 사건’.

하지만 실상은 은행에 복면 쓰고 쳐들어간 것이 전부였다.

더 우스운 건, 그들이 안에서 건져 나온 돈은 거의 없었다. 그야 사전 조사 따위를 하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빌어먹을 제국 은행 놈들이, 그···뭐였지?”

“서민 구휼 대출?”

“그래. 긴 전쟁의 여파로 지친 자국민들을 달래 주겠다며 그 짓거리를 하는 바람에 은행 안에 돈은 거의 없지 않았나.”


사전 조사? 알 바 아니다.

그냥 들어가서 때려 부수고, 돈을 가지고 나온다.

그것이 여태 ‘MOON’이 위상을 높인 방식이었고.


“또한 우리들이 지독하게 가난한 이유이기도 하지.”


마틴은 눈을 빛내며,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니까, 다들 이대로 흩어져서 각자 살 길을 찾아 떠나던가. 그게 아니라면.”


꿀꺽, 지부장들이 침을 삼켜 넘기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우리가 힘을 합쳐 케일을 몰아내고, 새로운 우리의 주인을 찾는 거네. 머리가 제일 잘 돌아가는 사람으로.”

“···!”

“···마틴.”


다들 생각만 해 보았을 뿐, 주인을 바꾸자는 말은 처음이었다.

당혹, 기대, 두려움 등등.

다양한 반응들이 뒤섞여 마틴에게 향했다.

하지만 마틴은 허허, 웃으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시아를 추대하고 싶은데. 자네들 생각은 어떠한가?”

“앙? 그게 무슨 엿 같은 소리세요, 노인네.”


곧바로 발끈한 것은 디엔이었다.

그녀는 붉은 드레스 만큼이나 붉게 타오르는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파이프를 거칠게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시아? 시아를? 보스를 몰아내자고 하는 것부터 어이가 없는데, 시아를 보스로 만들자고? 제정신이야?”

“허허허허허허허허허.”


마틴의 웃음소리가 길어진다. 안 그래도 짧은 그의 인내심의 실이 끊어지기 직전이라는 뜻.


“흐우우··· 귀찮은데에요오···.”


화아아악ㅡ!!


결국 대회의실 내부에 밝은 빛이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

‘저승의 신 플루토’의 힘이라기엔 너무나도 밝고 따뜻했지만, 여기 있는 모두의 감정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이것보다 효과적인 것이 없었다.


“자꾸 싸우며언··· 플루토님의 곁으로 보내줄 거예요오···.”

“그런 말투로 위협하면, 누가 쫄겠냐.”


슈게리안은 쥐의 것과 같이 생긴 귀를 쫑긋거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는 이내 손을 들며, 마틴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웬만하면 저 노친네 말에 동의하고 싶지는 않은데, 이번에는 찬성이야. 나도 더 이상 참기 힘들다고.”


하아, 한숨을 내쉬며 슈게리안은 볼을 긁적였다. 코에 달린 여섯 개의 수염이 입을 열 때마다 쫑긋거렸다.


“솔직히 너희들도 마찬가지지. 여기서 돈을 제대로 벌어오는 거, 나 말고 또 있어? 하아. 말하다 보니까 또 열 뻗치네. 밖에서는 3대 범죄 조직이니, 대륙 공적이니 하는데, 이렇게 가난한 데가 어디 있어?”

“음.”

“내가 그거 싫어서, 제국에서 책정한 이자율보다 10% 넘게 사채 굴리다가 응? 세력이 절반이나 날아갔거든? 근데 우리 친절한 보스께서는, 아주 근엄하신 얼굴로 ‘그건 네가 잘못했군.’ 따위의 소리나 하고 있고, 하아ㅡ.”


슈게리안은 다른 이들을 노려보듯 하나씩 훑었다.

확실히 돈에 관한 문제는 할 말이 없었기에, 그들은 슬슬 슈게리안의 분노를 피해 시선을 돌렸다.


“그 와중에 고생했다고 위로한 건 시아밖에 없어. 그러니까 찬성이야, 나는.”

“나는 반대.”

“나는 보스 때문에 여기 들어왔다. 반대.”


어쩌다 보니 마틴의 의견에 대한 찬반 거수가 이어졌다.

이곳에 없는 시아를 제외한 10명의 투표 결과는 찬성 4, 반대4, 기권 1표였다.


“흠, 무승부군?”

“결정하기 어려워요오···.”

“그래도 기권 표는 너무 비겁한데?”

“···아니야, 잠깐만.”


지부장들을 보며 하나씩 손가락을 접어보던 슈게리안은, 이내 어둠에 가려진 자리 하나를 바라보며 신경질을 냈다.


“투표한 건 총 아홉이잖아, 멍청이들아. 저 자식, 아까부터 말도 없이 무게만 잡고 뭐 하는데?”


그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쏠렸다.

시아 자리 바로 옆, 서열 4위에 있는 ‘사무엘’이 앉아있는 곳이었다.


“웃겨서.”


사무엘은 질타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품에 안고 있던 거대한 대검을 밀어내며 낄낄거렸다.


“너희들, 뭔가 잊어 먹지 않았어?”

“···?”

“무슨 소리야?”


지부장들이 되묻자, 사무엘은 피곤하다는 듯 손으로 눈가를 비볐다.


“도대체 보스를, 무슨 수로 잡을 건데? 그건, 괴물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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