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웹소설 > 일반연재 > 판타지, 게임

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최근연재일 :
2024.06.09 13:17
연재수 :
349 회
조회수 :
8,280
추천수 :
762
글자수 :
3,324,406

작성
24.04.24 18:23
조회
10
추천
1
글자
25쪽

285. 도망을 잘 친다는 건

DUMMY

제냐 역시 마찬가지이다.


언령을 외기도 전에 달리고 있는 그의 발치에서 푸른 번개가 솟아나 주변을 지졌다.


그리고, 제냐는 문득 멈추어 섰다.


급박한 상황이었고. 질주를 멈출만한 때는 결코 아니었는데.


주변에 있던 병력들은 자연스럽게 퇴각하는 헌터즈 길드원들을 쫓는다. 거대한 원형의 둘레가 점점 좁혀지는 것처럼. 각지에서 일행을 포위하기 위해 달려들고 있었고.


근처에 있어 길드원들과 교전을 벌이던 소수의 초인병력, 그리고 여러 경비병들 따위가 먼저 닿는 형국이다.


점점 멀어지는 이들을 쫓기 위해 달리고. 잠시라도 멈춰 있는 제냐에게 더 빨리 닿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피차 속력전을 벌이는 터라, 잠깐의 멈춤도 큰 의미였다.


잔디밭 위에 우두커니 선 제냐의 발치는 번개로 차오른다.


정확히 말을 하자면, 갈색의 구두 밑창에서 청백색의 번갯줄기가 번쩍거리며 솟아났고, 주변의 잔디와 허공을 태웠다. 불길이 미약하게 일었다. 스킬의 효과 외에 에너지를 소모한다는 건 미숙함의 상징이기도 했지만. 제냐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세세한 컨트롤을 신경 쓸 여력은 없다.


“뇌신雷侁. 번개 걸음.”


제냐가 중얼거렸다. 술식이 복잡했기에, 어쩔 수 없이 특징적인 단어를 지어 기억과 집중력을 보조하는 셈이다. 머릿속에선 깨나 어려운 도형 맞추기 정도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시스템이 보정을 해주고 있음에도.


청백색의 번개들은 마치 파문처럼 점점 커져갔고, 제냐의 발치에서 발목 무릎, 그 위까지 올라온다. 마치 물들듯 말이다. 하체 전반이 번개의 색으로 물들어 빛났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마냥 청백색의 빛은 밝아졌다가, 사라졌다가를 짧은 순간에 반복했다. 몇 번 깜빡이더니, 제냐는 다음 순간에 제자리에서 사라졌다.


빛이 명멸하는 타이밍에 맞추어 갑자기 신형이 사라진 것이다.


제냐를 잡기 위해서 달려가던 병력들은 순간 움찔하며, 자신의 시야를 더듬어야 했다.


갑자기 어디로 갔다는 건가.


초상술을 사용하는 워메이지의 곁에 있다보면 온갖 놀라운, 신기한 일들을 겪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었다.


제냐가 사용한 건 이동기技였다. 쓰기에 따라서 공격용으로 써먹을 수도 있기는 하다만. 풋워크라는 게 그런 법이니까. 일단은 속도와 방향 조절에 있어서 부족한 면이 많아서. 도망가는 용으로만 쓰려 했다.


번쩍,


하듯 빛과 함께 사라진 제냐는 순식간에 멀리 떨어져 있는 호아킨의 옆에 나타났다.


“컹.”


호아킨은 사자의 모습 그대로 옆을 보았고, 갑자기 나타난 인물을 확인했다.


갑자기 뭐냐,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사자의 얼굴 근육으로는 제대로 표현이 안되었지만. 아무튼.


제냐는 다시금 번쩍, 하고


호아킨의 옆에서 사라지더니 그 등 위에 나타났다. 사자의 갈기털을 움켜 잡으며, 떨어져 내리듯 그 등에 안착하여 붙는다. 번쩍거리는 번갯불은 곧 사라졌다.


길게 운용하는 것 역시 가능은 했다. 그런데 한 번 에너지를 충전하고나서 그걸 소모시키는 방식의 이동기이기 때문에. 이처럼 깨나 긴 거리를 순간이동에 가깝게 주파하고 나면 훨씬 떨어지는 속도로 계속 이동해야 했다. 그냥 달리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겠지만.


그리고 MP소모 역시 속도에 걸맞은 편이었고.


HP도 MP도 상당히 올라, 10만을 넘은지가 오래 되었지만. 그래도 전투 상황에서의 소모값은 항상 예민하게 경계하고 셈을 해야만 했다.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모르는 것이었으니.


뇌신雷侁(우레 뇌, 걷는 모양 신), 번개 걸음이라는 스킬은 제냐 나름대로 아이디어를 발휘해 만든 물건이었다. 초상술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곧 상상력이었는데. 번개와 같은 속도로 이동을 하는 순간 가속 기술은 어떤, 남자의 로망마저 자극하는 기술이 아니겠는가. 제냐는 그런 류의 스킬을 꼭 하나쯤은 갖고 싶었다.


그리고 아마 제냐가 여러 스킬들을 분해하고 재조립해서 만든 스킬이기는 하지만, 본디 다른 곳에 비슷한 발상의 스킬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다. 콘란드 대륙민들도 수 천 여 년간 농담 따먹기만 하며 지낸 건 아니었으니까. 초상학적 발전에 있어서 플레이어들이 떠올릴 수 있는 것 이상을 늘 먼저 상상해내고 이미 실현시킨 게 대다수였다. NPC들로서는.


그러나 어쨌든 제냐에게 꼭 맞는 매커니즘과 효력을 가진 스킬이라는 걸 부정하긴 어려웠다. 그는 마스터 마기아이면서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마기아로서의 정체성보다도 검술가로서의 그것이 조금 더 확고했고. 번개 걸음은 그의 전투 전략을 도와줄 아주 좋은 보조 기술이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블링크Blink 계열은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단거리 순간이동은 아니었다. 시간을 아주 잘게 쪼개어 제냐가 스킬을 사용하는 장면을 관찰한다면, 선형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궤적이 찍히리라.


사람이 인지하기 어려운 정도의 급가속과 정지이기에 순간이동이 아닐까, 느끼고 사실 별 차이도 없는 것 뿐. 만일 이동 경로를 미리 예측하고 그 지점에 길을 막을만한 막을 설치해둔다면 꼼짝없이 걸리게 되리라.


번개 걸음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안력眼力을 위해 MP를 투자하는 것또한 선행되어야 했다. 꼭 안력에 국한될 필요는 없고, 기력 감지술로 대체를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좋았고. 어찌 되었건 극한의 속도로 움직이는 와중에 주변을 제대로 감지하고, 다른 사물의 위치를 알 수 있어야 했다.


주변의 상황 파악이 되어야 공격을 하던, 후퇴를 하던 할 테니까.


제냐는 둘 모두 사용하는 편이었다. 기력술사로서 거친 전투를 계속할수록, 기본 계열의 패시브 스킬들이 레벨 업을 했고. 또 새로운 레어, 유니크 급의 스킬들을 얻어갔다. 개중에는 감각, 감지 계열 역시 있었다.


그에 더해서 기감 능력을 활성화하고, 따로 눈 따위 기관에 MP를 넣어 강화술을 써야만 가능한 기술이었다. 번개 걸음은.


조금 더 다듬기는 해야 했다. 숙련도도 올리고. 미세 조정이 완벽해져야 상대의 빈틈을 찌르는 움직임을 보일 수 있으리라. 지금 당장은 호아킨의 곁, 그리고 위로 이동해서 안착하는 정도로만 써먹는다.


“못보던 기술인데.”


호아킨이 사자의 아가리를 열어 소리를 뱉었다. 내부에 있는 발화 기관을 인간의 그것과 비슷한 모양으로 바꾸는 모양이었다. 능숙하게 부분 변화가 가능하다는 건 호아킨이 뛰어난 변신술사라는 의미도 된다.


호아킨의 이야기에 제냐가 답했다.


“예 뭐. 실전에서 쓰기엔 아직 부족함이 많아서.”

“얼마나 멀리 뛸 수 있는 거야?”


최태현이 물었다. 그 또한 라이엔의 아래에서, 썬더스에 매달려 가며 제냐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1km에서 조금 부족한 거리를 순식간에 주파한 것 같았다. 초장거리마저 똑같이 움직일 수 있다면 별다른 이동 능력이 필요치 않아지는 수준이다.

저런 이동기가 완성된다면, 초상술사건 궁술사건 뭐건 단번에 잡을 수 있으리라. 라이엔이 괴조를 이용해 멀리까지 태워주는 것 역시 쓸모없는 일이 될 것이고.


“아직은 이 정도가 한계. 그리고··· 한 번에 뛸 수 있는 거리도 제한이 있고 애초에.”


빠른 이동기의 직전에 배터리를 충전하듯 시간이 조금 필요했다. 그리고 막대한 MP를 소모하여, 단번에 움직이는 것이기에 장거리 이동에도 적합하지는 않다.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 공격용의 이동기로 쓰는 게 딱 적당하리라.


“무섭구만. 제냐 군. 대인전에선 상대가 없어지겠어 이러다.”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릴.”


태현이 새의 아래에 매달려 중얼거리고, 제냐가 답을 해주었다. 통신기를 통해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라. 주변의 소음이나 거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서로의 바로 곁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우아아아-!


멀리서 함성을 내지르는 병력들이 보였다.


다행히, 대부분의 병력과 또 초능력자들은 그들이 나가는 방향의 반대쪽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그들이 아무리 빠르다고 한들, 제냐 일행의 속력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쉬이 잡히거나 하지는 않으리라. 이 상태로 페이스를 유지하며 달리기만 한다면 아마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제냐는 사자의 등 위에서 주변 광경을 감상했다. 제대로 감상할 겨를도 없이, 휙휙 바뀌는 느낌이기는 했다. 이어지는 풍경을 보고자 한다면 최대한 멀리를 쳐다보아야 했다.


제냐는 앞으로,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진형을 치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문득 보였다.


아주 아득한 거리라서 곧바로 마주칠만한 상태는 아니었다. 수백 여 명 정도의 규모였다.


개중에서 가운데 있는 자들은, 기세가 심상치 않았고.


“전방에 진형 피해서 갑시다. 왼쪽으로 틀까요?”

“오케이.”

“한 번에 모여서?”

“그게 좋겠어요.”

“그래.”


태현은 말이 없었고. 제냐가 무리를 보고 이야기를 건네자 호아킨이 답했다.

그 다음에 물음이 라이엔이었고, 제냐가 답하며 마지막으로 릿샤가 그래, 라며 수긍했다.


최태현은 주변에서 벌떼처럼 모여들고 있는 이들을 살폈다. 고작 몇 분이다. 5분이 지났을까, 싶다. 애초에 구멍을 내놓은 담장에서 달리기 시작한 순간부터 지금까지. 오는 와중에는 몇 놈들을 상대하고, 또 교전을 벌이느라 늦어졌는데. 이제부턴 교전 시간을 최소로 줄이고 직선 거리로 달려가는 것만이 할 일이었다.


포위 당하면 답도 없으리라.


점점 좁혀오는 사방의 벽을 피해 도망가는 미물처럼.


거대한 사자와 매. 그리고 초상술사 하나는 전속력으로 달리거나 날았다.


전방에 진을 치고 그들에게 으르렁거리는 병사들이 보였고, 양 방향으로 나뉘어져 상대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것도 좋은 방법일 지 몰랐다. 그러나 한 시라도 낭비할 수 없고, 모든 인원이 대공가를 빠져나가는 것만이 중요한 지금 굳이 일행을 나누는 건 도박이라고 여겨졌다.


애초에 비련시 온라인 내에서 벌이고 있는 대개의 행동들이 전부 도박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정도가 있는 법이었다. 어쩔 수 없이 감당해야 하는 리스크가 있는 반면. 피할 수 있는 리스크도 있는 법이니까.


상대가 으르렁거리며 기세를 돋울 때는 정면에서 마주할 이유가 없다.


일행은 전속력으로 돌진을 계속하다가. 왼쪽으로 선회를 해서 크게 빠졌다. 그들이 방향을 바꾸자, 멀리에서도 관측을 하는지 부랴부랴 이동을 하는 게 보였다.


“어쩌지.”


라이엔이 통신기로 물었다. 전음 스킬은 모든 길드원들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채널을 공유하고 있었고 모두에게 들린다. 개중에서 제냐가 답을 했다.


“그대로 왼쪽으로 계속 꺾다가, 500m 앞에서 오른쪽으로 꺾죠.”

“그래도 따라 붙으면.”

“릿샤.”

“그래, 그래.”


라이엔이 계속 물었고. 제냐는 릿샤를 불렀다. 릿샤는 아직 가져온 수를 모두 털어내지 않았다. 남아있는 비장의 수가 있다는 뜻이다.


흑색의 로브 깃은 바람의 흐름에 따라 펄럭거린다. 릿샤 역시 라이엔처럼 자신의 주변 근처를 밀봉시켜서, 바람의 저항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굳이 복잡한 기교를 발휘하지는 않는다. 라이엔의 경우에는 저것만을 위해 스킬을 빌드업한 셈이다. 썬더스를 타고 초고속 기동이 가능하면. 그 몸 주위를 강력한 막으로 두를 수 있을 때 이동이 곧 공격 기술이 될 테니까.


릿샤는 이동기를 위해 그만한 투자를 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대기를 조작하고 있으니. 눈을 뜨기 어렵다거나 시야를 확보하기 힘든 정도의 바람의 영향은 받지 않았다. 릿샤의 팔다리 근처를 붙들고 있는 유색의 바람 줄기들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바람을 지배하고 있었다.


릿샤는 덕분에, 강력한 압력을 받고 있지는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녀 역시 물리 스탯을 키우지 않은 게 아니기에 움직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펄럭거리는 로브 자락의 안쪽에서 다른 물건을 꺼내들었다.


보통 사회적으로도 가치가 높은 보석 종류가, MP를 담기에도 용이하다는 건 흔하게 알려진 정설이었다. 릿샤 역시 체험적으로 사실이라 느끼고 있었고.

덕분에 초상술사, 연금술사 계열들은 제작 비용의 단가가 어마어마하게 올라갔다. 아티팩트 종류를 만들 때의 단가가 말이다.


그만큼 많은 돈을 벌어들이면 문제가 없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만들고자 하는 이상적인 아티팩트를 위해 충분한 비용을 벌지 못한다. 물건 자체에 희소성이 있는 탓도 영향이 있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지불해도 시장에 팔리지 않는 물건을 살 수는 없으니까.


이래저래 현실적 여건과 타협을 보면서 모두 물건을 만들어야 하고. 릿샤는 그런 한계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편이었다. 헌터즈 길드가 워낙 사냥을 자주 하고, 일반적인 NPC들의 입장에서는 전설같은 네임드 몬스터들을 잡아 죽이고 있는 탓이었다.


어둠숲이나 데슈칸 산맥이나, 별다른 능력을 가지지 않은 일반적 시민들에게는 미지의 장소나 다름이 없었다. ‘위험하다’라는 것만 알고. 얼마나 위험한지조차 알 수 없는 정도이다.

그런 곳에 심부에 존재하는, 고수급 이상의 보스 몬스터들은 몸뚱이가 거대하고, 또 희소한 재화들을 쏟아낸다. 죽음으로써. 고스란히 산슈카의 거대한 시장에 갖다가 팔면, 막대한 돈이 들어오는 것이다.


전투 클래스는 돈을 벌기 편하다, 라는 인식이 있는데. 물론 평균적으로 보자면 그런 편이었다. 그러나 위로 올라갈수록, 실력이 있는 이에 한해서 벌기 편해진다. 이 게임의 난이도는 순차적으로 오르지 않고, 구간 별로 기하급수적인 상승을 거듭하니까.

그런 난이도에 적응하는 소수만이 막대한 보상을 얻는 식이었다.


릿샤 애드윈은 몸을 앞으로 기울인 상태로 날고 있었다. 각도로 보자면 5, 60도 정도 되는 경사다. 전방을 주시하며 썬더스의 옆에서 바람을 부리는 중이다.


썬더스, 거대한 갈색 매는 구형태의 MP막이 그 근처에 쳐져 있었고. 약간의 불투명성을 가진 그 막 내부는 바깥의 대기가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심지어 관성으로 인한 흔들림도, 갈색 매 썬더스와 라이엔에게는 그다지 없었다. 그 아래에 매달려 있는 최태현은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나부꼈으나.


헌터즈 길드 일행은 좌측으로 쭈욱 꺾어서 이동을 한다. 대각선 방향으로 전진하는 셈이었는데. 저 멀리에 있는 병력들이 그들을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갑옷을 입고 있는 대공가의 병력들과, 그 가운데에 저마다의 복색을 갖춘 이들이 뭉쳐 있는 꼴이었다. 아마 제대로 된 무장을 하지 않고, 검창 따위만 꼬나든 이들이 기사단일 확률이 높았다.


그들이 지나쳐온 곳에 붉은 늑대 기사단의 병영이 있었고. 그들 병영에 공격을 퍼붓고 지나왔었으니. 그 폭발에서 살아남고 또 태세를 정비한 이들인 모양이다.


기사단 전체를 상대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또 마침 붉은 늑대단의 병영에 단장, 혹은 간부급이 자리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천운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계는 게임이지만 현실과 가까운 정밀성을 보여주는 게임이어서. 감히 예측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하나의 퀘스트를 수행하더라도. 언제 공격을 감행할 것이냐, 시기에 따라서 난이도가 천차만별로 변할 수 있었다.

보통 복잡 다단한 게임이라고 한다면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비련의 시나리오는 공략을 위해 정해진 시간 따위가 달리 없었다. 가장 극악한 점은, 미리 정해진 공략 따위가 밝혀져서. 그 방법대로 게임을 플레이한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는 부분이다.


만일 플레이어가 대공가와 같은 거대한 세력을 공격해 무너뜨리는 퀘스트를 받았다고 했을 때. 대공가 내부 인원들의 훈련 계획이나 움직임들 따위를 모두 파악해 가장 경계가 허술한 시기를 찾았다고 하더라도.

공격을 위해 돌입을 감행한 시기에 운이 나쁘게 대공가의 인물이 아닌 외부 인물이 들어와서 최적의 타이밍이 변할 수도 있었고. 극단적으로 말해서 허공에서 운석이 떨어져서, 플레이어가 재난에 휩쓸려 죽을 가능성도 있었다.


물론 그만한 일이 벌어지는 건 억 단위의 플레이어를 보유하고 있는 비련시 온라인 내부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현실’을 가장 가깝게 시뮬레이트 하는 게 이 게임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작은 세계가 아닌 더 큰 세계와 환경. 콘란드 대륙을 감싸고 있는 기후나, 그 바깥 천체의 움직임까지 어느 정도 데이터에 따라 구현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말 그대로 횡액이나 다를 바 없는 일들도 현실에서는 벌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었다. 그런 논리를 벗어난 우연 따위도 최대한 현실과 다를 바 없이 만들어내려는 노력의 흔적이었다.


플레이어들로서는 한 개 밖에 없는 목숨을 그따위 우연에 의해서 잃어버리는 것이 불합리하다고 여겨질 지 몰랐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인간의 머릿속 합리로 잴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점까지 포함하여, 현실을 자아낸다. 그게 ‘비련悲戀’의 시나리오인 이유였다. 연정과는 별로 상관이 없으니 단순히 비극적 시나리오라 할 수도 있겠지만은.


연인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모든 인간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정서에서 떨어질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썩 잘못 지은 게임 타이틀title은 아니었다. 부모 자식간의, 친구간의, 혹은 보편적인 인류간의. 여러가지 사랑으로 인해 사람의 삶이 지어지고, 유지되고 있었으니.


불합리한 헤어짐 역시 세상에는, 얼마든지 존재하는 법이었다.


그런 비극을 가급적이면 줄이기 위해서, 위대한 인간들은 역사에 족적을 늘 남겨왔고 말이다.


플레이어들은 물론 항의를 무수하게 해대지만. 게임의 개발사 태迨Tae가 긍정적인 피드백을 돌려준 적은 없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이 지어진 이유와 스타일이 먼저 있고, 그 이후에 게임의 형상이 잡힌 것이라 그렇다.


게임의 유저들은 유일한 게임 타이틀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을 플레이했고. 관심이 없는 이들마저, 게임 내에서 벌어지는 여러가지 사건과 뉴스에 간혹 귀를 기울이곤 했다. 화젯거리인 것만은 분명했다. 누구에게나.


“잡힐까.”


릿샤가 중얼거렸다.


라이엔이 답했다.


“아마도요. 오른쪽으로 틀어요?”


일반적인 병력들은 아마 한 번 방향을 꺾는 것만으로 다가오지 못할 테였다. 그들의 진로를 예측해서 전방에 주둔하고 있던 병사들은 긴 횡이동을 하고 있었다. 멀리 있는 적이 조금의 각도를 움직여도, 맞닿는 자리를 미리 짐작해보면 큰 이동으로 보인다. 덕분에 병력이 왼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었다.


그들의 뒤와 양 옆을 바짝 따라오는 병력들 역시 있었지만. 초인 병력들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따라붙지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저들을 상대할 수는 없었다. 하나하나가 고수급에 준하거나, 그 이상인 실력자들이다. 대충 잡아도 백은 넘어 보이는 숫자의 초인병들을 이겨내려면. 지금 헌터즈 길드원들의 수준이 훨씬 높아야 한다. 지금 당장의 전투력 수준이 200 즈음에 달하고 있었는데. 적어도 수퍼, 슈페리얼 마스터 급. 300 이상은 되어야지 않을까 싶었다.


격하의 상대라고 할 수 있는 적들의 합동 공격도 문제였고. 저들 사이에 섞여 있을지 모르는 초고수급 NPC들의 존재가 위협적이었다.


레벨 200대를 넘는 이들은 국가적으로 보더라도 최상위권에 속하는 실력자들이다. 이런 변방의 왕국에서는 아마 제1위의 실력자가 300을 넘을 테였고. 그 아래로 한 두 순위만 내리더라도 몇십 계단씩 전투력 레벨이 떨어질 터였다.


거대한 제국 따위로 게임의 무대를 옮긴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지겠고 그리고.


어쨌건 지금 상대할 수 있는 적들은 아니었다. 정면에서 승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도망치는 일이라면 지금도 가능했고.


전방에 진을 친 일반 병력들이 충분히 좌측으로 횡이동을 했다고 생각했을 때.


일행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충분히 빠른 속도로 달리거나 날고 있었고. 사자는 마치 날고 있는 것처럼 내달렸다. 호아킨 역시 질주 계열의 스킬을 쓰는 중이다. ‘붉은 날개’라는 유니크 스킬이었다.


본래는 날 수도 있는 종류의 스킬이었는데. 호아킨은 그런 식으로 쓰진 않았다. 아직 숙련도가 낮기도 했고. 거체를 띄워 올리려면 그만큼 MP의 소모가 컸다.


이전, 아주 옛날. 제냐가 처음 플레이를 시작했을 때 마주한 스킬이기도 했다. 그 때에는 별 생각이 없었지만. 이후에 호아킨이 그 스킬을 익힌 걸 보고,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당시는 초보자였고, 시작의 도시라 할 수 있는 피스 시市에서 어느 고양이 변신술사를 만나 그의 등에 올라탔었다. 고양이, 다니엘 어쩌구 하는 이름의 플레이어였던 그는 제냐를 태우고 성벽을 뛰어 넘고 날았었다.


그 때와 비슷한 느낌이기는 했다. 레벨도 다르고, 속력도 달랐으며. 고양이는 아니고 사자였지만 지금은. 아무튼.


많은 곳을 다니고 수많은 괴물들을 쓰러뜨렸지만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인가, 하는 감상이 들기도 하는 점이었다.


‘유니크’ 스킬이라는 건 숫자가 정해져 있는 스킬이라는 의미였다. 예컨데 ‘붉은 날개’의 경우에 1,000개가 게임 내에 퍼져 있는 개수라고 한다면. 1,000명의 캐릭터가 그 스킬을 익히고 있을 때 개중 누군가가 스킬을 잃어버리거나, 게임 오버 되지 않는 이상 새롭게 누가 익힐 수 없는 법이다.


레어 스킬은 일반 스킬에 비해서 획득 조건이 조금 더 까다롭고 희귀하다는 이름에서 붙었지만. 그런 숫자적 한계는 없었다.

유니크 스킬은 플레이어들이 볼 때는 모두 ‘붉은 날개’라고 보이고 있으나. 시스템적으로 들어가자면 각 스킬마다 고유 코드가 있어, 그 코드별로 누군가가 익히거나 잃거나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유일’하다, 라는 스킬의 수식어는 그런 의미였다.


‘전설’급이 되면 마찬가지로 숫자의 한계도 있고, 그 개수가 대폭 줄어들게 된다. 이는 아티팩트에 내장되어 있는 스킬까지 셈하는 것이었고. ‘전설급’ 스킬을 내장하고 있는 무기는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위력과 가치를 지니게 된다.


여러가지 제약이 붙어있다고는 하지만 전설급 스킬을 사용하는 캐릭터를 잠시 대체할 수 있게 되니.


호아킨의 몸 근처에서 붉은 연기같은 것이 뻗어나왔고, 그것이 각 발이나 등줄기 근처를 맴돌면서 기운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속력이 늘어날수록, 날개가 바깥으로 더욱 커졌다. 종래에는 날개와 같은 형상이 등허리께에 생겨나 바깥으로 제 모습을 자랑했다.


제냐는 그 등 뒤에, 갈기털을 잡고서 바짝 매달려 있었다. 체감적으로 알 수 있는 속도는 어마어마했다. 반쯤 날고 있는 셈이었다. 거체가 한 번 발을 뗄 때마다 훅, 하고 허공을 질주해 이동을 한다.


잔디는 무참하게 사자의 발에 짓이겨지기도 했으나. 그 족적 사이의 간극이 워낙 넓어 그리 많은 수가 희생되지는 않았다.


정원사들이 때마다 무리를 지어서 가꾸고 있는 저택 부지였다. 잔디 따위로 이루어진 면적이 상당히 넓었다. 도시나 마을 규모의 넓이를 그렇게 메우고 있다는 점에서, 대공가의 저력이나 재산 규모를 알 수도 있었다. 물론 돌길이나 잘 다져진 흙길로 이루어진 길도 많이 있었지만.


사자는 날듯이 달려 위에 있는 매와 초상술사의 뒤를 쫓는다.


오른쪽으로 확 꺾어서 달려가자, 상대가 멀리서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제냐는 가끔식 고개를 들어 전방을 확인했다. 사자가 허공으로 몸을 띄웠을 때 고개를 높이 들면 아주 멀리가지 확인이 가능했다.


비스트 슬레이어는 어느새 허리춤의 칼집에 넣은 상태였다. 흑색 장도를 꺼내지 않은 것 역시 아직 전력을 발휘하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제냐로서는. 이번의 습격은 어디까지나 견제에 불과하기에 말이다. 이를 통해서 대공이 무언가 적절한 제스쳐를 취했으면 싶었다.


아마 대놓고 공격을 감행했으니 변고가 일어나긴 할 테였다. 감춘다고 감췄지만 대공이 머저리가 아니라면, 제냐 킴 일행이 그런 짓을 벌였다고 짐작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인상착의는 완전히 달라도 결국 사용하고 있는 능력이라거나. 혹은 이 시기에 대공가를 침략할만한 이들을 추려본다면 금세 알지 않겠는가.


비련시 온라인의 NPC들은, 고도의 정치적 게임 플레이가 가능할정도로 제각기 지능과 자유도를 갖추고 있었다. 깊이 사귀고 대화를 해보아도 사람과 차이를 느끼기가 어려울 정도이니.


대공가에서 본격적으로 제냐를 쫓기 시작하면. 그리고 헌터즈 길드원들을 암습하고자 하면 배겨내기가 어려울 것이기는 했다.


길드원들은 우측으로 내달린다. 지그재그로 빠르게 움직이는 셈이었고. 말단 병력들 사이에서, 정식으로 갑옷을 차려 입지 않은 작자들이 뛰어나와 그들을 막으려 하고 있었다. 질주가 길어질수록 다른 방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력으로 쫓아와 그들을 잡으려 하는 자들은 모두 대공가의 초인병들이다.


릿샤는 로브깃에서 준비한 아티팩트를 꺼낸다.


*

girl-with-red-hat-IKJ8k8cfHnY-unsplash.jpg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320 319. 전쟁(4) 24.05.18 6 1 18쪽
319 318. 전쟁(3) 24.05.18 8 1 16쪽
318 317. 전쟁(2) 24.05.15 8 1 14쪽
317 316. 전쟁 24.05.15 7 1 16쪽
316 315. 호출 24.05.14 7 1 14쪽
315 314. 건너가는 24.05.14 10 1 11쪽
314 313. 로그, 아웃. 24.05.13 10 1 11쪽
313 312. 요식업자 24.05.13 8 1 17쪽
312 311. 영감 24.05.12 11 1 16쪽
311 310. 아이템들Items 24.05.11 9 1 18쪽
310 309. 가쁜 숨을 편히 내쉬며 24.05.11 7 1 20쪽
309 308. 박제가 될 뻔한 천재를 아시오 24.05.11 9 1 23쪽
308 307. 파고 들기 24.05.10 8 1 21쪽
307 306. 제 몸 살라먹기 24.05.10 7 1 12쪽
306 305. 늑대의 뱃속에서 24.05.10 6 1 13쪽
305 304. 뇌검雷劍 24.05.09 8 1 24쪽
304 303. 검은색. 금청색. 24.05.08 9 1 23쪽
303 302. 앞니와 검날 24.05.05 16 1 20쪽
302 301. 눈알 24.05.05 10 1 15쪽
301 300. 나무 위의 사색 24.05.04 13 1 28쪽
300 299. 걸음(2) 24.05.04 7 1 14쪽
299 298. 걸음 24.05.04 8 1 15쪽
298 297. 어지러운 생각 24.05.03 9 1 15쪽
297 296. 제냐의 경우 24.05.02 12 1 21쪽
296 295. 세이드 소마 24.05.02 8 1 17쪽
295 294. 이슈칼의 경우(2) 24.05.02 8 1 16쪽
294 293. 이슈칼의 경우 24.05.02 9 1 19쪽
293 292. 벨케임의 고뇌(2) 24.05.01 12 1 22쪽
292 291. 벨케임의 고뇌 24.05.01 9 1 19쪽
291 290. 길드원員의 회의 24.04.30 9 1 26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