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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님의 서재입니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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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금지
작품등록일 :
2023.03.11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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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3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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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5.11 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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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쪽

308. 박제가 될 뻔한 천재를 아시오

DUMMY

오랜 시간 경험을 반복하는 전문가의 깊이는 더욱 깊어지고. 또 무섭도록 예리해진다. 이 게임에서는. 현실에서는 어떤 분야의 장인이나 달인도,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기가 요원한 일이지만.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에서는 SP라는 특수한 에너지로 인해서 실제 뛰어넘을 수 있으니.


제냐는 지금은, 사방에서 그를 죄여오는 늑대의 내장이나 살을 파내는 일의 전문가가 되어야만 했다.


압력이 느껴진다. 슬슬, 말이다.


거센 바람이 뒤에서부터 불어오는 것같은 느낌이었는데. 아까부터.


이미 펼쳐둔 방어막 여러 겹 너머 근처로, 검은 늑대가 제 몸에 쏘아낸 구체가 다가오면서. 그 살갗이 갈려나가고. 방어막이 갈려 나가면서.


실제적인 압박감이 들고 있었다.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진듯, 중력이 늘어난듯한 느낌이었다. 차라리 좋은 일이었다. 방어막이 없었더라면 그런 식의 무거운 느낌이 아니라, 그냥 통째로 몸이 믹서기에 갈리듯 갈려 나갔을텐데. 방어막이 날카로운 충격을 무마시켜주고 있어서. 단순히 눌러대는 아래 방향으로의 압력만 느끼고 있었고. 어차피 아래로 길을 뚫어야 하는 게 제냐의 일이었으므로.


과감하게, 또 단순하게 자신의 등 뒤를 밀어주는 힘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물론 밀어주다 못해 완전히 분쇄육으로 만들어버릴 기세이기는 하지만. 사소한 건 넘어가자. 제냐는 파이어 인챈트와 썬더 인챈트를 양쪽으로 사용했다. 흑색장도를 꺼내들고, 왼 손에 든 흑도를 화도火刀로 만들어 쓰고 있었다. 그 순간부터, 우수右手에 든 비스트 슬레이어의 위력은 조금 경감이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냐가 사용할 수 있는 MP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의 의지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전체 MP량은 분명 정해져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보자면 쌍검을 드는 것이 결국 시간 당 데미지를 높일 수 있는 쪽일 듯했다. 한 손의 칼에 모든 기력을 집중하는 건 분명 강력한 위력을 나타내지만.

제냐가 만일 2의 MP를 다루어 검기를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한쪽에 전부 모으면 MP의 성질상 반발력 따위를 갖게 되어서 높은 밀도로 집약하는데 더욱 큰 부담이 된다. 실질적으로 한 손의 칼로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MP는 1.5 즈음이 한계라고 한다면.


양 손에 칼을 들고 각기 검기를 발휘해서 1씩 분배를 한다면, 보다 안정적으로 다량의 MP를 공격에 쏟아부을 수 있게 되는 셈이었다.


1씩 두 자루를 갖는 것보다. 1.5의 집약된 힘을 가진 한 자루를 갖는 게 한 곳을 파내는 일에는 조금 더 좋을지 모르겠는데. 지금은 바깥의 두터운 외피를 다 뚫어내고 검은 늑대의 몸뚱이 안에 충분히 들어온 상황이었다.


제냐는 양도를 쥐고서 몸을 뒤틀며 난도질을 했다. 기력이라는 건 사람의 몸에 딱 붙어 있고. 또 검에도 붙어 있게 마련인 물건이기는 했다만. 궁술가들이 화살에 힘을 실어 먼 곳에 있는 적을 때리는 것처럼. 원거리로 얼마든지 보낼 수 있기도 했다. 물론 초상술사들이 그러하듯 자유로운 방식으로는 어려웠고. 여러가지 제약이 있다.


넓은 범위를 타격하긴 어려웠고. 이미 갖추어진 기력체體의 모양 그대로를 멀리 날리는 게 가장 간단하며 정석적인 사용법이다. 검기발출이다.

제냐는 난도질을 하며 화염과 뇌기로 그 속을 갉아대고 있었다. 속도가 조금 나지 않자, 두 자루를 상단세로 크게 들어올렸다. 그대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 찍는다. 11자 베기를 아래까지 연장해서 베는 셈이었다. 자신의 다리를 자를 수는 없으니까. 제냐 스스로 딛고 선 발보다 바깥쪽을 베었다.


그 검의 궤적을 따라서, 각기 다른 검기가 발출되어 날아간다. 화염의 기운과 번개의 기운이 담겨 있는 검격이었다. 반월형으로 허공에 그려진 검기는 곧 검은 늑대의 살에 박혔고, 지금이 정확히 그 몸뚱이 내부 중 어디에 위치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남지 않은 내장을 다 부수고 그 아래 몇 발자국 정도의 깊이까지를 파냈다. 제냐는 얇게 남은 자신의 선 자리를 검으로 금세 베어내고, 아래로 나아간다.


검은 늑대는 이미 한계치 이상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고. 감각적 역치 너머의 고통이 계속해서 전달되고 있었기에 노이로제에 걸릴 것도 같았다. 제냐를 죽이려 자신의 몸뚱이에 검은 포탄을 쏴날린 건. 단순히 적을 죽이기 위해서도 있었지만. 가만히 내버려두었다간 그 고통이 끝나지 않을 듯해서. 차라리 자신의 몸을 없애버리겠노란 심정도 있으리라.


제냐의 보호막은 전부 바스라졌고. 단테스 도노반의 그것과 릿샤의 MP로 이루어진 보호막들이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참 시덥잖은, 타임 어택 승부였다. 제냐는 그렇게 생각을 했다.


MP포션을 비롯해서 여러 종류의 포션들을 들이붓듯 마셨다. 그것들의 효과는 곧바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보통 그러하다. 물약이라는 건 인체 내부에 들어가서 작용하기까지 시간이 걸리지 않는가. 초인적이고, 기이하고, 이상한 위력과 효과를 발휘하는 약물들이었는데. 발현 시간은 현실의 약물처럼 약간이나마 있었다.

제냐의 몸이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적응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일테다. 그래프로 그 약효를 그리면, 천천히 우상향을 하다가 어느 순간 급격히 고점을 찍고, 다시 내려올 테였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참이다, 이제 막.

제냐가 들이켰던 약효들이 최고의 위력을 발휘한다. 제냐는 핏발 선 눈으로, 검은 늑대의 몸뚱이 아래로 가겠노란 일념을 갖고서. 계속해서 미친 인간처럼 칼을 휘둘렀다. 다른 수가 없었으니, 하나에 몰입하고 매진할 수 밖에 없다. 교차해서 베고, 각기 다른 자리를 베기도 하고.

어마어마한 절삭력을 갖고 있는 두 자루의 칼들이었고. 아마 지금 제냐가 베고 있는 것이, 평범한 콘크리트 더미였다면 순식간에 초토화가 되고 바스라졌을 정도로 폭발력이 있고, 위력이 대단한 검술을 선보이고 있었다. 제냐의 의지에 따라서 검에 실린 기력들은 파괴적인 모습으로 타이밍에 맞추어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었다.


검기의 모양 자체는 그리 변하지 않지만. 외견은 그대로이되 성질은 조금씩 변하는 중이다. 정해진 테두리 위에서 빠르게 고속 회전을 하고, 날을 세우듯 일정 방향으로 힘을 투사해서 절삭력을 높일 때도 있었고.

한 방향으로 모아지는 힘이 아니라, 퍼지는 힘을 쏟아내며 폭발적인 참격을 만들어낼 때도 있었다. 최초에 한 자리를 벨 때는 절삭력이 필요했고. 그 다음, 그 구멍 아래를 거덜내기 위해서는 폭발력이 필요했다.


검기만 하더라도 그런 위력을 나타내고 있었고. 위에 실린 뇌전과 화염 역시 끊임없이 불타며 연기를 바깥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조금 숨이 막히기도 하지만. 알 바는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제냐의 신체는 초인이기도 하고. MP를 머금은 육신이었으니까. 다소 어려운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버틸 수 있으리라. 물리 스텟과 정신 스텟이 골고루 올라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MP가 아무리 방대하고 강력해도 업그레이드 시켜야 하는 신체의 원본이 보잘것 없으면, 결국 대단찮은 강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반대로 신체가 강력해도 MP가 전무하다면, 신체는 그 이상의 힘을 낼 수 없었고.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결국 가장 큰 시너지와 전투력을 만들어내는 비결이었는데. 말하듯 쉽지는 않았다. 모든 플레이어가 그런 방향성으로 캐릭터를 육성하지도 않았고.

방대한 양의 경험치라는 건 언제나 골치아픈 문제이다. 게임 오버를 향해서 달려가는 인간은 결국 죽게 마련이었고. 늘 그 경계선 근처에서 아슬아슬하게 달리며 고비를 넘는 유저만이 많은 양의 경험치를 얻는다.


제냐는 자신의 몸에 들어있는 모든 물을 빼내듯이. 자신에게 담겨져 있는 모든 힘을 쏟아냈다. MP고 체력이고 뭐고. 스스로의 힘으로 뽑아낼 수 없는 것들이라면. 약물의 힘을 빌려서라도 말이다. 물론, 현실에서 그 따위 짓을 벌이면 보통은 몸이 망가지게 마련이었다. 자연적인 방법으로 몸의 기력을 빼내도 그 탈력감으로 인해 한동안 괴로울 터인데. 외력外力을 빌렸다가는 신체 내외의 기관들이 어떻게 데미지를 입을 지 알 수 없으니까. 어쨌든, 게임 내에서의 이야기였다.

제냐는 뒤에서 사자가 아가리를 벌리고 삼키려 쫓아오는 것마냥. 내달렸다. 달렸다, 라고 하기에는 지독하게 느린 속도였다. 1초에 몇 센티나 아래로 길을 뚫어 내려갔을까. 한 두 걸음 정도의 보폭 길이를 내려가면 어마어마한 진행 속도를 보이는 것일 테다.


검은 기운은 보호막을 깨뜨리고 있었다. 릿샤의 것과 도노반의 것이 한 데 모여서 더욱 강력한 보호막이 되었었는데. 반투명한, 초록빛이 조금 나는 보호막이 심하게 찌그러지며 균열이 일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검은 늑대가 쏘아낸 검은 포탄의 기력 역시 다해가는 중이라는 점이다. 그런 다행스러움을 제냐가 채 발견하기도 전에. 쿠구궁, 하는 소리가 들렸고.


제냐는 뒤에서 느껴지는 검은 마력의 압력이 더욱 강해짐을 느낀다.


“이런-”


입 안으로 검은 늑대의 체액처럼 보이는 게 잔뜩 들어오기도 했다. 뇌검과 화검으로 베고 가르고, 파내는 즉시 불태우고 있다고는 해도. 지금 검은 늑대의 몸 속에 들어와서 살을 파내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혈액을 전부 다 막을 수는 없었다. 살아있는 몬스터의 혈액은 사실 인간에게 있어서 독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어쨌든 MP로 인해서 강화된 신체 기관이며 체액들인데. 몬스터의 경우에는 인간에게 이로운 방식으로 진화한 SP가 아닌, 마력, 마기가 스며들어 있었으니까.


저주술 따위를 당하는 것이나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제냐가 기본적으로 걸고 있는 몇 종의 아티팩트들 중에는, 해주, 해독의 역할을 하는 것 역시 있었다. 로브 안 쪽에 끼워넣은 브로치 형태의 물건이었는데. 로웰 드버가 이전에 독살을 당할뻔한 것을 보고서는 구매를 해서, 길드원들끼리 소지하고 있는 물품이었다.

그리 대단한 위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제냐 자신보다 레벨이 낮은 몬스터의 혈액 조금 정도는, 충분히 그 독기를 없앨 수 있었다. 로브는 빛의 입자가 잔뜩 튀어서 축축했다. ‘축축함’ 자체는 달리 표현할 방식이 없는 현상이었다.


검은 늑대의 체액과 체내의 여러 장기들을 모자이크 처리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핏물이 배어들어가는 로브와 옷가지들이다. 그래도 로브 안쪽의 옷들은 나름대로 고급품으로 맞춘 것이었고. 방수 기능 따위가 있어서 오래도록 묻어 있지는 않았다. 단테스 도노반이 준 어두운 톤의 망토 역시 고급품이기는 했는데. 검은 늑대의 혈액을 전부 떨어내지는 못했다. 나름대로 탈탈 털면 오물 따위는 금방 스며들지 않고 털리는 물건이었는데. 지금 겉에 둘러입은 채 아예 늑대의 몸뚱아리 내부에 들어온 상황이라.


그 혈액의 쏟아지는 걸 피할 길이 달리 없었다. 그저 최대한 많은 양의 뇌전과 화염을 흩뿌려서 지혈을 할 수 밖에 없다.


제냐가 아래로 떨어지며, 내려가며 지나온 길목들은 대부분이 그을린 꼴이었다. 살아있는 생살, 내부를 그렇게 잘 익은 웰던 스테이크마냥 만들어가는 건 확실히 끔찍한 고통이리라. 검은 늑대처럼 거체를 가지고 있기에 또 가능한 전략이기도 했다.

이미 정신이 나가버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검은 늑대였다. 늑대라고 하더라도 어느 정도 표정은 있었으니까. 놈의 눈깔은 광기를 표현하고 있었다.


제냐는 계속해서 아래로, 아래로 떨어진다.

언제 끝이 날까. 언제 바닥이 날까. 언제 지면을 볼 수 있을까. 생각을 계속해서 하지만 실제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끝없는 살의 벽이다. 내장을 몇 개인가 터뜨린 것도 같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뱃거죽 근처에도 뼈가 있는 것 같았는데. 곧바로 아래로 내려온 게 아니라, 사선 방향으로, 위로 올라가서 갈비뼈 부근을 건드렸을 지도 모른다.


아무튼 정신이 없었다. 굴착기도 아니고. 두 자루의 도로 바위같은 내벽을 부수어가고 있었다. 현재의 강도를 생각하면 바위보다도 더욱 단단하리라. 고작 그 정도의 강도였다면. 훨씬 이전에 제냐가 전부 부숴버리고 그 뱃거죽을 뚫고, 아래로 나왔을 테다.


현실의 물건과 정확하게 대조하고, 비교할만한 것은 없었다. 이토록 물렁하고, 동시에 충격을 받을 때는 단단해지기도 하고. MP의 흐름을 방해하는 물건같은 건 달리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욱 강한 힘으로 찢어발긴다.

생의 갈구다.

웃기는 소리였다.

게임에 로그인해서, 생의 갈구라니.


현실에서 나는 삶을 갈구하고 있는가?


제냐김서원은 문득 생각을 해보았다.


나는, 삶을 갈구하는가.


답이 없는 물음과도 같았다.


현대에 게임을 즐기고 있는 많은 인간들한테 동시에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기도 했다.


당신의 삶은


삶다운가.


삶답지 못하기에, 지금 이렇게 매몰된 정신으로 어딘가에 매달려 멍청한 집중을 반복하는 건 아닌가.


게임이 쓸모없다거나, 그런 말은 아니었다.

게임은 사실 쓸모없지만.

게임을 즐기는 인간의 태도에 따라서, 그 시간은 얼마든지 인생에 유의미한 한 때가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똥을 보고도 진리를 깨닫는 인간은 있다. 그게 철학자이고,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생에 대해 진지한 철학적 고찰을 해보아야 할 때가 있으니까.

게임이 똥이라면. 그걸 보고도 깨닫는 바는 있을 테였다.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이를테면 아주 어마어마한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고화질의 배설물이었다. 단순히 화질, 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들려오는 소리. 촉감. 냄새. 입 안에 들어오는, 비릿한 혈액의 맛. 모든 것들이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구현이 되어 있었다. 현실보다도 더욱 현실같다.

그러나 비련시 온라인의 개발진들은, 여기에 빠질만한 무언가를 두지 않았다. 도리어, 빠질만한 환상의 세계보다는. 정말로 현실의 그것마냥 고생스러운 삶의 과정을 게임 플레이 속에 담아버려서. 게임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아이러니하게도. 바깥에서의 실제 삶을 생각해보게끔 만들고 있었다.


제냐는 생각을 한다.


삶을 갈구하거나, 하지 않거나.


취업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공부를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루를 아무런 표정도 없이 보내거나, 그러지 않거나.


친구를 만나고, 가족에게 안부 인사를 건네고. 여러가지 관계성 맺는 작업들을 해내거나, 하지 않거나.


특별히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혹은 아무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고 대충 눈을 감아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청한다거나.


죽어가는 과정이었다. 삶임과 동시에, 삶을 포기한 단면들이었다. 별 것 아니고, 누구나 그렇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냥, 이 시대에 삶을 포기하는 인간들의 군상이 너무나 보편적이라서 ‘누구나’ 그럴 뿐이지. 모두가 아픈 것이었다. 모두가, 나름대로 절망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시대는 병들었다. 그런 생각에까지 미친다. 특별한 생각은 아니었다.


시대가 병들지 않았던 때를 찾는 게 도리어 더 어려울 테니까. 현대화, 고도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사람들은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잃어버렸고.


결국 방 한 칸 작은 곳. 게임 기기를 설치해두고, 이런 가상 현실에 들어와 자신의 여가 시간을 낭비하기에 이른다.


제냐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김서원도 생각을 한다.

어차피 같은 인물이기도 했다.

게임에 몰입하면서, 바깥의 일에 대해 동시에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자신의 삶은 어디로 가는가.

그런 것들이


미뤄두었던 문제지가 끝없이 자신의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청춘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였다. 답을 어쨌든, 내기는 해야 한다.


김서원은 차마 답을 적지 못하고. 조금 미뤄둔 상황이었고.

결국 게임 속으로 들어왔고.

이곳에서도 똑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떻게 살 것인가.

살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


좆같은 삶이다.


김서원은 욕을 잘 하지는 않는데.


검은 늑대의 배를 가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과지지직, 치이이이이, 퍼지지직. 쿠구구궁.

의성어로 표현을 하자면 온갖 요란한 글자들을 나열해 볼 수 있겠다. 폭풍과 지진이 동시에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늑대의 몸뚱이 안에 들어 있는, 어미의 자궁을 찾아서 오기라도 한 듯한 우스운 꼴인 제냐다. 그의 몸으로 느껴지는 진동이나 충격 역시 그에 버금갔다. 폭풍과 지진. 땅과 하늘이 동시에 울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그는, 자신은, 제냐는, 서원은, 나는, 청년은, 어쩄든 앞으로 뚫고 나아가야만 했다.


개같은 삶.

개같은,

늑대의 배를 갈라내는 것이 어떤 비유가 될 지도 모르겠다.

좆같은 삶을 끊어내고, 좀 사람답게 살아야지 않겠는가, 하는 비유 말이다.


“아-.”


서원은 욕을 하려고 했는데.

하고 싶었는데. 입을 벌리자마자 검은 늑대의 체액이 한 움큼 정도가 들어와서. 그걸 반사적으로 씹고, 삼키지 않고 뱉느라 말을 못했다.

속에만 맴돌 뿐이었다.

욕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생이다.


킬킬킬.


아주 오랜만에 웃는 것 같다,


고 제냐는 생각했다. 머릿속으로만 웃었고.


검은 늑대의 뱃속에서 비틀린 입가를 지어보였다.


이토록 오래도록 웃지 않는 인간도, 참 드물 것이다. 실제로 언젠가는 웃었을지 모르겠지만. 스스로 자각하는 웃음이라는 건 아주 오랜만이었다.


정신이 나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삶은 스트레스의 연속이고.


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은 그런 스트레스를 푸는 도구였다.


콰득.


제냐는 열심히,


계속해서,


자신의 상념을 자르듯 검은 늑대의 살을 잘라갔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끝나듯이


검은 늑대의 살결 역시 그 끝을 보여주었다.


비스트 슬레이어가 강하게 하단을 찍었고, 그 검극이 허공에 닿았다.


제냐는 그대로 흑색장도마저 근처에 찔러넣었다. 얇은 막이 찢겼고, 양도에서 기력이 발출되었다. 번개와 화염이 요동을 치면서 반경 1m 즈음을 불살랐다.

강렬한 화기와 뇌기가 폭발을 하며 주변을 지져버렸는데.

곧 검은 늑대의 외피가 찢겨진다.


늑대의 배 아래에서는. 구멍이 뚫리며 시커먼 형체가 떨어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플레이어의 눈으로 보자면. 늑대의 혈액이 빛의 입자로 모자이크화 되었으므로. 흰 빛으로 물들어 있는 기이한 물체이다.


제냐는 바깥으로 나갔고.


허공에 닿자마자 남은 기력을 움직여 자신의 방향을 조절했다.


늑대의 등허리 하단부에서 굴착을 시도해서, 늑대의 아랫배 부근으로 나왔다.


내장 몇 개를 거덜냈을 테였다.


앞쪽으로, 그리고 아래로. 대각 방향으로 제 몸을 집어던지듯 날렸다. 제냐의 몸 근처에 어려 있던 기력들이 제냐의 몸을 밀었고. 짧은 비행을 하듯 대각 방향으로 제냐가 날았다. 성의없이, 거칠게 집어던진 돌멩이같은 궤적이었다. 착지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 꼴이었고. 실제로도 그러했다. 쿠당,


하고 엉망이 된 어둠숲의 흙바닥에 뺨을 닿고 누웠을 때.


검은 늑대는 자신의 등허리 아랫 부분을 스스로 소멸시키고 있었다.


귀에 먹먹한 굉음들이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는데. 청력 기관이 피로해졌는지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도 같았다.


제냐는 감기는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위는 검은 늑대의 몸뚱이였다.


어질거리는 정신이었지만 알 수 있었다. 검은 늑대 특유의 흑마력이 그 전신에 서려 있었으니까. 시력, 청력, 촉각을 잃어도 기감으로 검은 늑대의 위치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아!”


사람이 비명이라도 지르나,


싶었지만.


검은 늑대는 괴성을 다시금 지른다.


놈은 제 배에서 나온 제냐를 씹어먹고 싶었는데.


그대로 하반신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에 틈이 났다.


제냐는 “IV."라고 중얼거렸다. 푸른색의 반투명한 창이 떴고. HP포션과 MP포션. 그리고 스테미나를 채워주는 주황색의 물약을 있는대로 끄집어내어 입에 들이부었고. HP포션은 샤워라도 하는 듯 여기저기에 뿌렸다.

이 게임에서 HP포션은 딱히 체력을 회복시켜주지 않는다. 상처가 났을 때, 추가적으로 HP가 날아가는 걸 막아줄 뿐이다. 지혈 효과가 있었고, 독이던 화상이던 여러 종류의 상처가 났을 때 해당하는 상처가 덧나는 걸 막아주는 효과가 있었다. 해독 해주의 효과도 약간은 있었고. 기력이 다했을 때 HP포션과 스테미나 포션을 함께 먹으면 효과가 조금 더 극대화되기도 한다.


제냐는 이것저것 벌컥대며 삼켰다. 말 그대로, 기력이 조금 떨어져 있었다. 무식하게 MP를 쏟아냈고. 체력 역시 많이 소진을 했으니까. 몇 초 정도.

그렇게 벌컥이며. 자신의 얼굴에 쏟아붓는 건지, 입에 넣는건지 알 수 없을 꼴로 포션병들을 비워내고 나서야 정신이 조금 더 바짝 들었다.


검은 늑대는 하반신이 날아가는 고통을 이겨내고, 그 검은 구체는 기어코 땅바닥에 닿아서, 굉음을 마저 터뜨리며 제냐로부터 조금 떨어진 자리에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폭음의 연속이었다. 산을 무너뜨리려고 다이너마이트를 여기저기서 터뜨리는 것 같았다. 그런 장소에는 가본 적도 없었지만. 영상으로는 뭐 몇 번 봤을지 모르겠다.


늑대는.

하반신이 날아가버린 늑대는 질긴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었다. HP만 40만이 넘는 놈이다. 몸이 잘린 것 정도로 죽지 않았다. 심지어, 전투 속행이 가능한 수준이다.

검은 늑대는 번들거리는 핏기 어린 눈으로 몸을 뒤틀어, 자신의 가슴팍 아래에 고이 누워 있는 제냐에게 아가리를 들이밀려고 했고.


제냐는 짧은 사이에 기력을 회복하고는, 다시 옆으로 튀어나갔다. 양 손에는 여전히 두 자루의 도가 들려 있었다.


검은 늑대에 비하자면 한없이 작은 몸뚱이로. 제냐는 메뚜기가 뛰는 것마냥 펄쩍펄쩍. 자신의 몸보다 훨씬 긴 거리를 순식간에 뛰어가며 그 근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늑대와 제냐. 둘 사이에 변한 건 크게 없었다. 그러나 일시적으로 제냐는 많은 힘을 소모했고. 숨을 고를 시간만 주어진다면 어느 정도 전투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검은 늑대는 일시적으로는 전투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몸뚱이의 반절이 날아간 상황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전투력이 급감할 테였다. 제냐에게는 시간이 필요했고. 늑대에게는 시간이 없었다.


”크아아아아!“


늑대는 괴물처럼, 아니 괴물이기는 했다만.

괴물다운 소리를 질러대며, 상반신만 남은 꼴로 앞발을 휘적대며 달려가는 제냐의 뒤를 쫓았다.

콱, 하고 어둠숲의 무른 흙을 그 앞발로 움켜쥐며 포크레인처럼 퍼냈는데. 제냐에게는 영 닿질 않았고.


제냐는 계속해서 속도를 내며, 적당한 고목을 찾아 그 위로 올라가고자 했다.


”헉.“


가쁜 숨이, 절로 쉬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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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련의 시나리오 온라인:Slow fantasy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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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323. 전쟁, 한창 24.05.20 10 1 15쪽
323 322. 몸을 부대끼며 24.05.19 9 1 14쪽
322 321. 어느, 한 명의 탈락 24.05.19 7 1 13쪽
321 320. 전쟁(5) 24.05.19 7 1 18쪽
320 319. 전쟁(4) 24.05.18 6 1 18쪽
319 318. 전쟁(3) 24.05.18 8 1 16쪽
318 317. 전쟁(2) 24.05.15 9 1 14쪽
317 316. 전쟁 24.05.15 8 1 16쪽
316 315. 호출 24.05.14 7 1 14쪽
315 314. 건너가는 24.05.14 11 1 11쪽
314 313. 로그, 아웃. 24.05.13 10 1 11쪽
313 312. 요식업자 24.05.13 8 1 17쪽
312 311. 영감 24.05.12 11 1 16쪽
311 310. 아이템들Items 24.05.11 9 1 18쪽
310 309. 가쁜 숨을 편히 내쉬며 24.05.11 7 1 20쪽
» 308. 박제가 될 뻔한 천재를 아시오 24.05.11 10 1 23쪽
308 307. 파고 들기 24.05.10 9 1 21쪽
307 306. 제 몸 살라먹기 24.05.10 7 1 12쪽
306 305. 늑대의 뱃속에서 24.05.10 6 1 13쪽
305 304. 뇌검雷劍 24.05.09 8 1 24쪽
304 303. 검은색. 금청색. 24.05.08 9 1 23쪽
303 302. 앞니와 검날 24.05.05 16 1 20쪽
302 301. 눈알 24.05.05 10 1 15쪽
301 300. 나무 위의 사색 24.05.04 13 1 28쪽
300 299. 걸음(2) 24.05.04 8 1 14쪽
299 298. 걸음 24.05.04 9 1 15쪽
298 297. 어지러운 생각 24.05.03 9 1 15쪽
297 296. 제냐의 경우 24.05.02 13 1 21쪽
296 295. 세이드 소마 24.05.02 10 1 17쪽
295 294. 이슈칼의 경우(2) 24.05.02 9 1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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