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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글쟁이 님의 서재입니다.

블러디 로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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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글쟁이
작품등록일 :
2020.02.24 14:57
최근연재일 :
2020.03.18 15:33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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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9,271

작성
20.03.09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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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쪽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것

DUMMY

오필리아는 마크의 연구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게 누구신가. 오필리아 아닌가. 여긴 어쩐 일로? 혹시 이자벨이 협조하겠다고 마음을 바꿨나?”


시약과 서류들을 번갈아보며 연구를 하고 있던 마크가 오필리아를 눈치채고 앉은 채로 의자를 돌렸다.


“아니, 릴리라는 아이의 시체, 아직 있어?”

“영안실에 있을 텐데 무슨 일이지?”

“그거 나한테 넘겨 줘.”


오필리아가 앞뒤 설명을 모두 자르고 다짜고짜 밀어붙였다.


“안 돼. 이자벨을 제외하면 가장 큰 가능성을 보여준 실험체다. 조사해야 할 것이 많아.

그나저나 릴리에 대한 건 어떻게 안 거지?”

“이자벨이 원한다고 했어. 그 아이의 마음을 돌리는 게 시체를 조사하는 것보다 더 값지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

“시체를 가지고 친구놀이라도 할 생각인가. 그럼 이자벨에게 이렇게 전하면 되겠군. 릴리의 시체를 원한다면 협조하라고.”


마크는 대화는 끝이라는 듯 다시 의자를 원래대로 돌려 서류를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오필리아는 마크를 선 채로 지긋이 응시했다. 그녀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는지 마크가 다시 의자를 돌려 오필리아를 바라보았다.


“뭐, 더 할 말이라도 있나?”

“그렇게 고집을 부리다간 절대로 이자벨의 마음을 돌리지 못할 텐데. 그 애가 비협조적인 건 네가 무슨 짓을 했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여기서 그 애한테 더 양보하라고 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겠어?”


오필리아가 논리적으로 설득했다. 마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이자벨에게도 네가 허가를 내려야 가지고 올 수 있다고 말했어. 네가 선택해. 여기서 그 애에게 더욱 미움 받을 건지 어떨 건지.”

“...알겠다. 릴리의 시체는 네가 알아서 해라.”


득실의 저울이 릴리를 내어주는 쪽으로 기울었다. 마크의 답변을 받아낸 오필리아는 의기양양하게 실험실을 나섰다.


정원에서 오필리아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이자벨은 계단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벤치에서 일어났다. 먼저 오필리아의 표정을 살폈다. 미묘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됐어?”


이자벨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오필리아는 그제서야 얼굴을 폈다.


“마크한테서 허가를 받아왔어. 영안실로 가자.”


이자벨이 안도했다. 마크가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라고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오필리아는 내려왔던 계단을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이자벨도 뒤를 따랐다.


영안실에 도착했다. 여전히 복도까지 차가운 공기가 가득했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한기가 몸을 덮쳤다. 스산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이런 분위기가 익숙한지 능수능란하게 영안실에 비치된 칸 하나하나를 확인해가며 릴리의 시체를 찾았다.


“마크 쪽에서 나온 시체는 전부 이쪽으로 모아둔 모양이네. 가장 최근에 들어온 게··· 여기 있다.”


오필리아가 칸의 문을 열었다. 사람의 발이 보였다. 그러나 오른발이 없었다. 조심스럽게 들 것과 함께 안의 시체를 빼냈다.

정강이부터 머리까지 천으로 감싸져 있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다.


“네 친구가 맞는지 확인해 봐.”


얼굴만 볼 수 있도록 살짝 천을 들췄다. 릴리였다. 다행히 저번에 보았던 그 남자아이와는 다르게 편안한 얼굴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자 눈물이 핑 돌았다. 릴리가 죽은 게 자신 때문인 것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케일에게 구속당하지만 않았다면, 좀 더 강했더라면. 마술을 조금 더 빨리 각성했더라면··· 그러나 이제와서는 아무 소용도 없는 이야기다. 방울진 눈물을 조용히 손으로 훔쳤다. 그 모습을 오필리아는 옆에서 안타깝다는 듯 아무 말 없이 지켜보았다.


“맞아. 릴리야.”

“그럼 이제 이 아이를 화장해야지. 들고 따라올래?”


이자벨은 대답대신 들 것의 손잡이를 쥐었다. 오필리아는 다리 쪽을 손잡이를 잡았다.


“들어올린다. 하나. 둘. 셋!”


릴리의 시신을 확보한 둘은 영안실을 뒤로 했다.



“화장은 어디서 하는 거야?”


복도를 걸으며 이자벨이 물었다.


“성 밖을 나가면 화장장이 있어. 거기서 화장을 하고 나온 유골을 받아오면 돼.”


오필리아는 망설임 없이 걸었다. 이자벨은 묵묵히 들 것을 든 채로 그녀의 뒤를 쫓았다. 그녀의 말대로 성 밖을 나가자 화장장이 있었다. 오필리아는 이자벨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화장장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말했다. 상대방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필리아와 함께 릴리에게 다가왔다.


“이 아이인가요?”

“네, 부탁드립니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남자는 들 것을 혼자서 가볍게 들어올리더니 화장장으로 걸어가 릴리의 시신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고 기름을 먹인 나무판으로 입구를 막았다.


“좀 걸립니다. 다른 일이 있으시면 하고 오셔도 괜찮아요.”

“어떻게 할래?”

“그냥 여기서 기다릴래.”


릴리가 들어가 있는 화장장 앞에 자리를 잡고 쪼그려 앉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오필리아가 이자벨 옆으로 다가와 함께 쪼그려 앉았다.


“수목장이라고 해서 말인데, 어떤 식물로 할지는 생각해놨어?”


이자벨이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어떤 식물로 할지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수목장이라는 말을 들은 그 순간 릴리를 추운 영안실이 아니라 이 아름다운 정원에 묻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이름이 릴리라고 했지. 나무는 아니지만 그럼 백합이 좋겠네. 하얀 머리카락이였으니까 흰 백합으로. 그걸로 괜찮을까?”


좋은 생각이었다. 그녀를 기리기에도 적합한 꽃이었다. 이자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키우던 백합이 없어서 백합 구근을 좀 찾아봐야겠네. 같이 갈래?”


오필리아가 일어서서 쪼그려 앉아 있는 이자벨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에는 순순히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릴리의 묘비처럼 쓰일 꽃이다. 그 꽃의 씨앗은 자신이 고르고 싶었다.


“잠시 다녀올게요.”

“다녀오세요.”


화장장의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필리아가 먼저 화장장을 나가고 그 뒤를 이자벨이 따라 나가려던 찰나였다.


“아가씨.”


남자가 이자벨을 불렀다.


“저요?”


그러나 아가씨라고 불려본 적이 없던 이자벨은 약간 당황하면서 자신을 검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가씨 친구지? 저 아이.”


남자가 불타고 있는 화장장을 가리켰다. 이자벨은 짧게 대답했다.


“이런 말이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본 아이들 중에 가장 편안해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어. 여기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끔찍한 얼굴을 한 채로 죽는 경우가 많거든. 개중에는 심하면 목이 잘려오는 아이들도 있고···”

“......그래서요?”

“그러니까 저 아이는 그래도 죽는 순간에 편안히 눈을 감았구나라고 생각해서 말이야. 여기선 그것도 축복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잔혹한 곳이니까. 그러니까 너무 그렇게 풀죽어 있지 마. 아가씨가 여기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몰라도 아가씨 친구도 아가씨가 그러는 걸 바라지 않을 거야.”


남자가 낮게 울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자벨을 위로했다. 타인에게서 처음 받아보는 순수한 호의라고 이자벨은 느꼈다. 이런 경험이 없었기에 뭐라 대답해야할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뭐해 이자벨, 빨리 안 오고?”


그 때 밖에서 오필리아가 이자벨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갈게!”


이자벨은 결국 남자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오필리아를 따라 화장장을 나섰다. 남자는 그 둘이 성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았다.


오필리아의 보관실에 도착한 둘은 씨앗의 선별을 시작했다. 생각보다 백합의 종류가 많았다.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가장 큰 차이는 색이었다. 이름부터 백합이라 무조건 흰색이 아닐까 생각했던 이자벨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빨강, 주황, 노랑, 분홍이 있었고 가장 충격적인 색은 검정이었다. 그 중에서 하얀 백합의 씨앗만을 골라냈다.


“백합도 종은 여러개지만, 그걸 전부 설명하고 있으면 해가 져버릴 테니까 일단 여기 있는 것들을 중 몇 개만 가져가도록 할까. 네가 원하는 걸로 골라. 그럴려고 따라온 거잖아?”


오필리아가 나머지 구근들을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이자벨은 구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이런 것에 대해 식견이 없는 그녀로서는 다 똑같아 보일 뿐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골랐다. 가장 마음에 드는 모양으로 골랐다. 심사숙고한 끝에 엄선된 구근들을 소중히 종이봉투에 넣었다.


“백합의 꽃말은 뭐야?”


이자벨이 물었다.


“색깔에 따라 다르지만 하얀 백합은 순결, 변함없는 사랑을 뜻해. 아직 어린 너희들에게는 해당사항이 없겠지만.”

“그렇네.”


둘은 구근을 챙기고 다시 화장장을 향했다.

화장장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남자가 오필리아의 부탁대로 릴리의 유골을 꺼내 나무상자에 옮겨둔 상태였다. 남자는 상자를 이자벨에게 건넸고 그녀는 그 상자를 소중하게 안아들었다.

정원으로 가는 내내 이자벨은 품에 안은 상자만을 응시했다. 이 안에 릴리가 들어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 때문에 갈림길을 무심코 지나쳐 오필리아가 몇 번이고 다시 끌고 돌아오는 짓을 반복해야 했지만.


정원으로 돌아온 둘은 장갑과 앞치마를 두르고 이번에는 모종삽까지 준비했다. 아직 아무런 꽃도 심어지지 않은 땅에 다른 꽃들과 거리에 여유를 두고 심을 생각이었다. 따로 두는 이유는 단지 공간이 부족해서다. 이자벨은 적당히 땅을 파고 그 아래에 상자를 두었다. 그리고 그 위를 흙으로 덮고 구근을 두었다. 구근은 거리를 두고 여러개를 심었다. 이자벨은 구근을 심으며 이 백합들이 모두 성장해 꽃을 피울 날을 상상해보았다. 릴리의 머리카락처럼 하얀 꽃잎을 펼치고 향기를 은은하게 풍길 것이다. 분명 아름다울 것이다.


“이제 물만 주면 끝이야. 이 꽃들은 앞으로 네가 가꿔 줘. 이 백합들도 분명 그걸 바랄거야.”


이자벨은 물뿌리개로 조심스럽게 땅을 물로 적셨다.


‘이제는 편히 쉬어 릴리.’


마음 속으로 릴리에게 그렇게 전했다. 분명 전해졌을 것이라고 믿는다.


수목장이 끝나고 다음 날부터는 오필리아의 말대로 백합들의 관리는 온전히 이자벨이 맡게 되었다. 그녀의 지극한 정성 덕분인지 백합 구근들은 무럭무럭 줄기를 뻗으며 성장했다. 이후 이자벨은 오필리아와 함께 대부분의 시간을 정원에서 보냈다. 매일매일 백합의 상태를 확인하고 벤치에 앉아 오필리아의 도서들을 빼와 읽었다. 소설들도 많았고 꽃에 관한 책들도 많았다. 그러면서 이자벨은 오필리아와 점점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완전히 마음을 열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필리아는 조급해하지 않고 이자벨이 스스로 다가와주기를 기다렸다. 가끔가다가 마크의 협조 독촉이 오긴 했지만 오필리아가 핑계를 대며 흘려보냈고 이자벨에게 알리지 않았다. 마크가 하는 짓이니 또 뭔가 심한 일을 시킬 것이 틀림 없기에 알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백합 구근을 심은 지 2달이 지났다. 어느새 백합은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만개했다. 심었던 모든 구근들이 개화에 성공했다. 릴리의 머리카락 색을 닮은 아름다운 꽃들이 정원 한 구석에 가득찼다. 그 모습에 이자벨은 마치 환히 웃는 릴리의 얼굴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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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살아남기 위한 각오 20.02.28 9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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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돌아가기 시작한 톱니바퀴 20.02.24 11 0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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