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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글쟁이 님의 서재입니다.

블러디 로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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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른글쟁이
작품등록일 :
2020.02.24 14:57
최근연재일 :
2020.03.18 15:33
연재수 :
22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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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수 :
109,271

작성
20.02.27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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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쪽

살아남기 위한 각오

DUMMY

이자벨은 왼쪽 하단에서 들어오는 대각선 베기를 오른쪽으로 몸을 날려 피했다. 날이 길고 얇은 레이피어로 검날을 마주대는 짓은 절대 하지 말라고 릴리가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이자벨은 휘두르기의 반동으로 몸이 경직되어 있는 소녀에게 찌르기를 날렸다. 레이피어의 검날이 옆구리를 살짝 도려내었다.


“읏···!”


소녀가 짧게 신음했다. 공격 당했다는 것에 초조해진 것인지 분노한 것인지 소녀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가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검은 초심자인 이자벨에게도 손쉽게 회피할 수 있을 정도로 위협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검의 무게 때문에 휘두른 후에 빈틈이 많아져 이자벨의 레이피어에 점점 상처가 늘어가기만 했다. 과욕이 부른 참사였다. 소녀의 피가 조금씩 운동장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왜 안 닿는거야···!”


소녀는 고통에 찡그린 얼굴로 한껏 짜증을 냈다. 그럴수록 휘두를 때 쓸모 없는 동작이 많아지고 그에 따라 속도도 떨어졌다. 악순환이었다.


‘쉽게 이길 수 있겠어!’


이자벨의 긴장이 살짝 풀렸다. 힘이 잔뜩 들어가 굳어있었던 어깨에 힘이 빠지고 자연스러워졌다. 그 영향으로 찌르기나 베기가 훨씬 더 편해졌다. 이자벨은 잠깐이었지만 검과 싸우는 방법에 대해 알려준 릴리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그녀가 없었으면 이렇게 싸우지 못했을 것이다.


“좀 맞으라고!!”


점점 수세에 몰리는 소녀가 울음을 터뜨렸다. 소녀의 눈물에 이자벨의 마음이 약해질 뻔 했지만 릴리의 충고를 되뇌었다.


‘절대 마음 약해지지 말 것. 싸울 때는 오로지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것에만 집중할 것. 끝낼 기회가 찾아오면 주저하지 말 것. 모든 것을 이용할 것.’

“흣!”

“아앗!”


이자벨의 찌르기가 소녀의 손을 빠르게 꿰뚫고 돌아갔다. 소녀는 손을 베여 고통을 호소하며 양손검을 지면에 떨궜다.


“아아아!! 내 손이!!”


피가 쏟아져 나오는 손을 부여잡고 소녀가 운동장에 주저앉았다. 이자벨은 검을 거두지 않고 소녀의 목숨을 끝내기 위해 다가갔다.


“제발 살려줘! 이렇게 빌게! 이런 영문모를 곳에 끌려와서 실험체로 쓰이다가 죽고 싶지 않아!!”


소녀는 주저앉은 채로 꼴사납게 머리를 땅에 박고 그렇게 외쳤다. 비통한 소녀의 목소리에 이자벨의 움직임에 조금의 망설임이 섞였다. 소녀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치지 않은 반대쪽 손으로 품에 숨겨두었던 단검을 몰래 뽑아들었다.


“죽어, 이 망할 년!”


이자벨은 욕설과 함께 달려드는 소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공포와 분노, 기습에 성공했다는 확신, 마지막으로 눈물과 콧물이 범벅된 보기 힘든 표정이었다.


“미안해.”


이자벨은 당황하지 않고 레이피어를 앞으로 내지르며 소녀에게 사과했다. 이자벨의 목을 치기 위해 일직선으로 달려들던 소녀의 심장이 레이피어의 검날에 그대로 관통당했다.


“......”


심장을 관통당한 소녀는 단검을 떨궜다. 입에서는 핏덩이를 토했다. 다리는 더 이상 몸을 지탱하지 못했다. 무너져내리는 것을 막고 있는 건 이자벨이 들고 있는 레이피어였다. 이자벨은 오른손을 당겨 소녀의 가슴팍에 박힌 레이피어를 스윽 뽑아냈다. 지지대를 잃은 소녀의 몸이 추락한다. 이미 소녀의 동공에는 빛이 깃들어 있지 않다. 하나의 생명이 끝난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을 끝낸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다. 틈을 보여주면 기습해 올 것이라는 걸 이자벨은 알고 있었다. 여기는 그런 곳이라고 이해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한다. 그렇게 이해하고 그것을 이용했다.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소녀의 피가 웅덩이를 만들어간다. 어느새 자신의 발치까지 퍼졌다. 소녀의 죽음을 확인하자 관중석에 앉아있던 연구원들이 하나 둘 씩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굳게 잠겨있던 운동장 문이 열렸다.


“대단하군!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어! 날 찌르려고 했을 때부터 싹수가 다르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정도일 줄이야!”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크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아주 흡족한 듯 만면에 미소를 띄고 이자벨에게 찬사와 박수를 보냈다.


“첫 결투치고는 아주 능숙했다! 적을 죽이는데 망설임이 없군! 특히 결투의 마지막, 상대방의 기습을 이용한 찌르기! 첫 전투에서 그런 것을 해낼 줄이야. 너라면 나의 비원을 이루게 해줄지도 모르겠군!”

“헛소리.”


이자벨은 첫 싸움에서 승리했다는 기쁨보단 이렇게 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실에 씁쓸함과 자기혐오를 느끼고 있었다. 살아남기 위해 가차없이 사람을 죽였다.각오했던 일이다. 하지만 각오했다고 해서 그 후에 몰려오는 감정까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혼자 흥분하며 기뻐하는 마크에게 이자벨은 자기 스스로도 놀랄만큼 차갑고 무거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하하! 다음 결투도 기대하고 있겠다. 이자벨.”


그러나 마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만족했다는 듯이 더 큰 소리로 웃었다. 이자벨은 그런 마크의 웃음소리가 너무나도 듣기가 싫어 빠르게 실험실을 빠져나왔다. 실험실을 나오자 간호사 두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명은 이자벨에게서 무기를 받아 어디론가 이동했고 나머지 한 명은 이자벨을 욕실로 안내했다. 흙먼지와 피로 더러워진 전투복을 벗고

바가지에 물을 퍼 머리에 부었다. 머리에 묻었던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코가 자신의 것이 아닌 비릿한 피냄새를 맡았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손에 인간의 살을 베고 찌를 감촉이 남아있었다. 이자벨은 거품도 잘 나지 않는 싸구려 비누로 오른손을 박박 문질러댔다.


목욕을 마치고 나온 이자벨은 간호사가 가져온 원피스로 갈아입고 감옥으로 돌아갔다.


“이자벨!”


이자벨이 감옥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걱정하고 있던 릴리가 달려갔다.


“나, 죽였어.”

“괜찮아. 살아있잖아. 넌 잘못한 거 없어.”


언젠가 풀죽어 있던 이자벨에게 했던 말을 릴리가 속삭이며 끌어안고 토닥였다. 괜찮다며 그녀에게 계속 속삭였다.


“릴리도 처음엔 이랬어?”

“점점 괜찮아질거야.”


릴리는 질문에 대한 답변 대신 이자벨을 위로했다. 이 천성이 착해빠진 친구에게 지금은 그래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에 어땠어, 릴리는?”


그러나 이자벨은 같은 질문은 반복했다. 대답해주지 않으면 밤새 질문해댈 게 뻔했기 때

문에 우선 릴리는 이자벨을 앉혔다.


“난 아무렇지도 않았어. 난 너처럼 착한 사람은 아니거든.”

“내가 너무 무른 걸까?”


이자벨이 릴리에게 안긴 채로 물었다.


“물러터졌지. 동화속의 공주님처럼 세상물정 하나도 모르고 착해빠졌어. 흑심 품은 나쁜 왕자한테 깜빡 속아넘어가서 간도 쓸개도 다 빼줄만큼 물러터졌지.”

“그 정도야?”


릴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자벨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 때 릴리가 하지만이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절대 나쁜 건 아니야. 약삭빠르고 남 속여먹기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한테는 너가 훨씬 더 눈부시게 보여. 그대로 여도 괜찮아.”

“하지만 그러면 릴리에게 맨날 걱정만 끼칠 텐데? 나 그건 싫은데.”

“생각해보니 그러네. 그럼 조금은 나빠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릴리는 반 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이자벨은 진지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고민하는 얼굴이 되었다.


‘이런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분이 귀여운 거긴 한데···’

“그리고 릴리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너보다는 나쁜 사람일 걸? 그건 확실해.”

“그래도 나쁜 사람은 아니야. 내가 알아.”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나에 대해 아는 거 있어?”


릴리가 일부러 심술궂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자벨이 릴리의 질문에 얼굴을 찡그러더니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그러네. 생각보다 잘 모르고 있었어. 그럼 오늘은 릴리에 대해 좀 더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는데?”


똘망똘망하게 눈을 빛내며 더욱 더 몸을 기대오는 이자벨을 보고 릴리는 잘못 건드렸다며 속으로 후회했다. 또 한 편으로는 그걸로 괜찮아진다면 싸게 먹히는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해서 그 날 밤은 평소와는 반대로 릴리가 자신을 주제로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자벨의 첫 결투 이후 1달동안 마크가 그녀에게 보이는 관심은 비약적으로 높아졌다. 그 때문인지 훨씬 더 많이 그리고 자주 그에게 불려가 실험을 당하거나 결투를 치뤄야했다. 마크는 그녀가 결투에서 승리하면 마치 자신의 일인 것처럼 기뻐했고, 실험 결과가 좋으면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아이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마크가 그런 반응을 보이면 보일수록 이자벨이 그에게 느끼는 혐오감만 자랄 뿐이었다.


"이자벨, 넌 오늘부터 감옥이 아니라 개인 방에서 생활하게 될 거다. 네 데이터는 매우 흥미롭거든. 더 많이 관찰하려면 내 관할 지역에 있는 게 효율이 좋으니."


오늘 실험이 끝나고 실험실을 나가려고 할때 마크가 할 얘기가 있다며 이자벨을 잡아세우고 이렇게 통보한 것이다.


"난 그 감옥이 더 좋아. 네 눈이 닿는 곳에 24시간 있으라니 역겨워서 토가 나올 것 같아."


1개월동안 병적으로 느껴질 만큼 광기와 환희에 빠져 자신을 바라보는 마크에게 이자벨이 질렸다는 듯 혐오스런 표정으로 강경하게 거부했다.


"왜 싫지? 방으로 옮기면 차가운 돌바닥이 아니라 따뜻한 침대에서 편안하게 잘 수도 있고 목욕도 네 맘대로 할 수 있다. 음식도 그런 돼지사료 같은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을 수 있는데? 난 내 실험체한테 방을 내어준 적이 없다. 이건 널 굉장히 높게 사고 있다는 증거라고. 아, 그 흰머리가 감옥에 있어서 그런가? 좋아. 그럼 그 녀석까지 같은 방을 쓸 수 있게 해주지."


마크는 이자벨의 매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제안이 가지는 장점을 빠른 속도로 읊었다. 이자벨은 다른 것보다 마지막 조건에 마음이 움직였다. 물론 다른 조건들도 매력적이였다. 4개월동안 감옥생활을 하면서 이미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있었다. 게다가 릴리까지 함께 호강할 수 있다면 마크의 손아귀 안에 들어가도 상관 없을 것 같았다.

감옥에 있어도 그의 실험체라는 자신의 신분이 바뀌는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릴리와 상의하겠어."

"그 정도는 기다려주지. 난 매너 있는 신사니까 말이야. 긍정적인 대답, 기대하고 있겠다."


마크가 선심쓰는 척하며 어울리지도 않는 신사흉내를 냈다.


"매너는 개뿔."


이자벨은 그렇게 주워섬기며 실험실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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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살아남기 위한 각오 20.02.28 9 0 11쪽
8 살아남기 위한 각오 20.02.28 8 0 11쪽
» 살아남기 위한 각오 20.02.27 23 0 11쪽
6 살아남기 위한 각오 20.02.26 10 0 11쪽
5 돌아가기 시작한 톱니바퀴 20.02.25 12 0 11쪽
4 돌아가기 시작한 톱니바퀴 20.02.24 14 0 12쪽
3 돌아가기 시작한 톱니바퀴 20.02.24 11 0 12쪽
2 돌아가기 시작한 톱니바퀴 20.02.24 17 0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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