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어라하 님의 서재입니다.

무녀의 남자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판타지

어라하
작품등록일 :
2016.05.20 15:35
최근연재일 :
2016.07.08 18:27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2,201
추천수 :
2
글자수 :
89,179

작성
16.05.27 03:35
조회
211
추천
0
글자
38쪽

무녀의 남자 4

DUMMY

몇시나 되었을까? 창밖은 이미 해가 저물어 어둑해져 있다. 한결이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키려고 부스럭 거리며 움직이자 뒤통수가 뜨끔 거린다. 눈을 떠보려고 하지만 핏줄기가 눈으로 흘러들어 한쪽눈은 제대로 떠지지도 않는다. 그나마 다행인것은 피는 멎어 더이상 흐르지 않고 있다.




창 밖도, 방안도 온통 어둠이 드리워져 도무지 아무것도 분간하기 어렵다. 한결은 몸을 움직여 보려고 이리저리 움직여 보려하지만 입에는 테이프가, 그리고 팔과 다리는 노끈 같은것으로 묶여 꼼짝할 수가 없다. 한쪽팔은 피가 안통해서 마비된것처럼 도통 움직일 수조차 없다. 더구나 집안 곳곳에 휘발유가 뿌려져 있는지 석유냄새가 코를 찌른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자 맞은편 씽크대 앞 식탁의자에 앉아 있는 소율의 모습이 어슴프레 눈에 들어온다. 한결이 정신을 차린것을 알아채고 부스스 몸을 일으키는 그녀의 손에는 시퍼런 부엌칼이 들려 있다. 소율은 마치 잠자리에 들기 전의 신부와 같은 슬립과 같은 얇은 잠옷만을 걸치고 있다.




그런 소율의 모습이 술에 취한 듯 마치 유령처럼 흐느적 거린다. 소율이 다가와 한결의 입을 막은 테이프를 떼어내 주며 한결에게 가벼운 맞춤을 한다.




우리 사이가 이렇게 망가진건.. 그날 부터야.. 오빠가 그날, 독서실로 찾아간 날 그렇게 돌려 보냈기 때문에.. 그때 날 돌려 보내면 안되었던거야...




그건... 너도 알다시피, 우린 이제 남매가 되었잖아. 그래서는 안되는.. 거잖아..




우리가 먼저였다구! 우리가 먼저 였잖아!! 우리가 사랑한게 먼저 였다구!!




이거 풀어.. 이런다고 다시 그때로 돌아 갈 수는 없어.




소율의 슬립도 휘발유를 잔뜩 머금어, 마치 물에 젖은 것처럼 알몸의 실루엣을 여지없이 드러내 보이고 있다. 소율이 한결의 얼굴 가까이로 더욱 가까이로 서슬퍼런 칼을 들이댄다. 날카로운 칼날이 한결의 뺨에 상처를 내자 한줄기 피가 목덜미를 타고 흘러 내린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아팠었는지.. 내가 아픈만큼 오빠도 아파야 해. 그게 바로 우리 운명이니까!




한결이 무언가 말을 하려하자 소율은 한결의 입을 박스테이프로 다시 막아 버리고는 마치 무슨 성스러운 의식이라도 행하는 것처럼 칼을 두손으로 천천히 높이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한결의 어깨에 내리 꽂는다. 칼이 꽂히자 어깨가 뜨거워지고 이내 정신을 잃을 정도의 고통으로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어 컥컥 거리는 신음소리만 토해낼 뿐 팔이 등뒤로 묶여있는 한결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있다.





소율이 칼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어 깊이 밀어 넣자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한결은 정신이 아득해지며 정신을 잃기 시작한다. 그 때 갑자기 초인종이 울리며 문 밖에서 사내 두명이 한결을 부른다.




이한결씨~ 계십니까? 안에 누구 계시나요?




근데 무슨 기름 냄새 같은거 안나?




글쎄.. 그나저나 안에 아무도 없는거 같은데




문밖에 인기척이 들킬까 소율은 얼른 한결이 다른 짓을 못하도록 이불을 뒤집어 씌운 후 자기의 온몸으로 눌러 소리가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한다. 안은 불도 꺼져 있는데다 안에서 아뭇소리도 안나니 사내들은 몇번 더 문을 두드려 보더니 무언가 둘이 두런두런 상의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포기하고 돌아가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간다.




그 순간 책상위에 벗어 두었던 한결의 외투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유주와의 미팅시간을 잡기 위한 강PD 의 전화다. 소율이 급하게 전화기를 찾아 소리나는 옷가지를 들추며 핸드폰을 찾지만 마음이 급해서인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간신히 핸드폰을 찾아 다급히 전화를 끊어 버리고 전원 스위치까지 꺼버리지만 그러나 이미 문밖에는 멀리서 핸드폰 소리를 듣고 돌아온 남자 둘이 문을 부술 듯이 차면서 문고리를 돌리고 흔들며 열어 보려고 하지만 잠긴 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는다.




안에 누가 계십니까! 문 열어!!




그와 동시에 한결이 이불을 걷어내고 소율을 밀쳐내고 그대로 전등스위치까지 몸을 던져 팔이 등뒤로 묶인 상태에서 몸으로 전등 스위치를 켜고 그대로 문앞으로 달려가 연달아 몸을 문에 부딪히며 안에 사람이 있음을 알리려 한다. 그사이 소율이 칼를 들고 한결에게 달려 들지만 그 순간 문고리를 부수고 안으로 들어온 남자들이 날렵하게 칼을 든 소율의 손을 걷어 차 제압하고 칼을 빼앗는다.




소율을 엎드리게 한 후 손을 등뒤로 해서 수갑을 채우고 나서야 휘발유 투성이의 집안의 모습과 피투성이가 된 한결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하던 두 형사는 급히 앰블런스와 지원을 요청하는 전화를 하면서 묶여있는 한결의 손과 발을 풀어 주며 지혈을 시도한다.




불과 몇분도 안되서 앰블런스와 경찰차 서너대가 오피스텔앞에 도착하고 소율은 경찰서로 연행되고, 한결은 근처 병원 응급실로 긴급 후송된다. 다행히도 한결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지 않아서 응급치료를 하고 바로 퇴원할 수 있었고 경찰서로 가서 간단한 조서를 작성하고 유치장에 수감된 소율을 면회하기 위해 대기 중이다.




이혼 후 조현병 증상으로 2년간 정신병원에 입원했던 소율이 병세가 호전되어 자기 어머니 집으로 돌아가 지내던 중 몇일 전, 어머니를 살해하고 도망쳐서 경찰이 그녀를 추적 중에 있었다고 한다. 당연히 한결도 그녀가 찾아갈 수 있는 사람중에 하나라서 경찰들이 한결의 오피스텔을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소율의 면회를 기다리며 생각해 보니 첫날 소율의 옷소매에 묻어 있던 혈흔이 생각났다. 조금만 더 주의를 기울였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애써 고향의 소식을 외면해 왔기에 일을 이렇게까지 만들고 말았다는 자책감도 느껴진다.




수감복을 입은 소율이 면회실 유리창 건너에 모습을 드러낸다. 표정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더할나위 없이 평화로워 보이고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까지 띠고 있다. 한결은 막상 그런 소율을 보자 아무말도 할 수가 없다. 둘 사이의 그런 침묵을 깬건 소율이었다.




오빠가 찾는.. 그 아이..




한결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린다.




킥킥.. 거봐, 그럴 줄 알았어. 벌써 눈빛부터 달라지는걸.




..........




나 그애가 어디 있는지 알아..




..장난 치지 마!




맘대로 생각해. 하지만 오빠가 나한테 조금만 더 친절하게 대해 준다면 알려 줄 수도 있어..




너의 말은 아무것도 믿을 수 없어.




그대로 돌아 나오면서도 소율이 거짓말 하고 있는거라고 생각은 하지만 소율의 그 말에 자꾸 한결의 마음이 흔들린다. 잊으려고, 아니 이제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 아니,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 떠나는 한결을 등뒤로 소율이 악다구니를 하면서 소리친다.




오빠는 날 떠날 수 없어! 절대로!! 우리는 절대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했잖아!! 우리는 서로 사랑하잖아!








15장






운명의 실타래






8년 9개월 전, 고등학생 시절의 유주가 병원 복도에 주저 앉아 울부짖고 있다. 입원실 앞에는 한결의 아버지인 이목사와 교회 사람들이 진을 치고 유주의 출입을 막고 있다. 한결은 20일째 의식불명 상태로 중태다. 유주는 제발 한결이 얼굴만이라도 보게 해달라고 애원하지만 한결의 아버지인 이목사는 단호하게 그런 유주의 얼굴조차 보기 싫다는듯 뒤돌아 외면하고 매몰차게 거절한다.




이 사단이 다 저 무당 딸년 때문이라구! 두번 다시 내 눈에 안뜨이게 해~




이 목사의 말에 건장한 교회청년 서너명에게 강제로 질질 끌려 나가는 유주는 끝까지 이목사의 바지가랑이를 붙잡으며 매달려 울부짖는다.




번쩍 눈이 떠지는 유주. 얼굴은 온통 땀과 눈물로 범벅이다. 한동안 꾸지 않았던 그 날의 일들이 다시 꿈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손으로 대충 흐르는 눈물을 훔쳐내고 화장실로 가 얼굴을 씻어낸다. 오늘 만나기로 했던 드라마 OST 작곡가와의 미팅은 작곡가의 사정으로 인해 취소 되었다. 작곡가가 무슨일로 다쳤다고 들었지만 그 이상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오후 4시가 약간 지난 시간, 모처럼 에리카에게 오늘 쉬겠다고 말한터여서 약속도 취소된 김에 잠이나 푹 자려고 했지만 어차피 이제 잠들기는 글렀다. 유주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것처럼 간단히 옷을 갈아 입고 집을 나선다. 서울에 올라와 알바를 하며 신세를 졌던 카페 주인 아저씨가 시간되면 자주 들르라고 당부하던 말이 생각나서다.




'오늘 아니면 또 언제 찾아 뵐까?' 사실 라흐마니노프 카페는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걸어가도 30~40분이면 갈 수 있는데 그동안 이런저런 핑게를 대며 지난 몇년간 찾아가 보지 못했기에 미안하기도 해서 서둘러 집을 나선다.




가는 도중에 거리에서 부녀로 보이는 남녀가 무언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다. 40대 후반의 남자는 낡은 구두와 남루한 옷차림으로 보아 일용직이나 단순 노동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여자아이는 교복을 입고 있어 아직 중학생 정도로 보인다. 남자는 딸에게 검은 봉투에 담긴 상자를 손에 쥐어 주려 하지만 여자는 한사코 뿌리치고 있다.




이거 가져가 신어~




이거 내가 말한게 아니잖아! 짝퉁이잖아! 그런거 신고 다니면 친구들에게 놀림이나 받는다구




그래도 새 운동화니까 일단 이거라도 신으면 내가 나중에라도 꼭 원하는걸로 사줄테니까




짜증나~




남자가 넘겨 주려던 운동화 박스가 담긴 검은 봉투를 여자가 뿌리치자 바닥에 내동댕이쳐 지면서 박스안의 운동화 한짝이 유주의 앞으로 굴러온다. 유주는 그런 여자의 모습에 약간 발끈하는 표정을 지으며 운동화 한짝을 주워 남자에게 넘겨준다. 그 순간 남자의 손과 짧은 접촉이 생긴 순간 유주는 흠칫 놀란다. 남자의 등 뒤로 검은 그림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분명 이 남자는 곧 죽을 것이다. 아직 신내림을 받지 않은 유주의 신기로는 아주 임박한 죽음만을 예지할 수 있는데, 바로 그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다니는 사람은 하루안에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너! 아빠가 애써 사주신건데 맘에 안든다고 이러면 못써. 고맙게 받아야지~




언니가 무슨 상관인데요! 별꼴이야~




여자애는 신발과 두사람을 두고 그대로 횡하니 달려가 버린다. 남자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유주에게 고맙다는 간단한 눈인사를 하고는 운동화가 든 봉투를 챙겨 얼른 여자애를 따라 간다. 유주는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단지 임박한 죽음을 예지만 할 뿐, 그 죽음을 피하게 하거나 막을 능력이 없는 유주로써는 달리 무언가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다.




돌아서는 그 순간, 남자가 달려간 쪽에서 길게 자동차 타이어 밀리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 비명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사람들이 차 주변으로 몰려 들어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차 타이어 아래로 바닥에 흥건한 피와 내동댕이쳐진 아까 그 운동화 한짝이 보인다. 이럴때면 곧 일어날 누군가의 죽음을 미리 알 수 있는 자신의 능력에 혐오감과 함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이 더욱 원망 스러워 지기만 한다.








16장






공명 (共鳴)






마치 습관처럼 오늘도 라흐마니노프 카페를 찾은 한결을 반갑게 맞는 주인장이 커피 주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어깨부상을 보고 걱정스러워 하는거와 달리 한결은 별거 아니라는 투로 대수롭지 않게 넘긴다. 사실 길게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도 아니었기 때문에.




왜 이렇게 한가해요?




오늘부터 중간고사 기간이라서요.




오오~ 그럼 당분간은 눈치 안보고 음악 들으며 눌러 있어도 되겠네요.




한결이 카페의 구석자리 자신의 고정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5시에 맞춰 주인장은 오늘도 어김없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틀어놓고 주문한 커피를 한결의 테이블까지 가져다 준다.




그러고 보니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요. 항상 이 시간에 라흐마니노프를 트는 이유라도 있는건가요?




허허~ 그게.. 8~9년전에 몇년간 우리 가게서 알바하던 아이가 있었더랬죠.




라흐마니노프 카페 주인장은 잠시 말을 중단했다가 왠지 추억에 잠기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 아이의 근무시간이 5시부터 였어요. 일 시작하러 오면 항상 이 곡을 틀곤 했죠. 근데 그게 입소문이 나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당시 간판도 없던 우리 가게 이름을 라흐마니노프 카페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특히 5시부터는 라흐마니노프 타임이라고 일부러 그 시간에 음악을 들으러 오는 매니아 아닌 매니아도 많이 생겼죠. 그후 그 아이가 그만두게 되었지만 오후 5시 라흐마니노프는 우리가게의 아이덴티티, 일종의 전통처럼 남게 된거죠.




오.. 재밌네요.




그러고 보니 처음 우리 가게에 왔을 땐 채 학생티도 못벗었은 앳된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지 저도 궁금 하네요. 워낙 노래를 좋아해서 늘 노랠 흥얼거리고 있었던걸 보면 그쪽 계통에서 일하고 있을거 같기도 하고요.. 몇년전까진 1년에 한두번은 찾아오곤 했는데 최근은 못본지 몇년 된거 같네요.




아늑한 커피향과 더불어 손님도 한결외에는 없는 한적한 카페 분위기 때문인지, 또 집중해서 들어주는 한결 때문인지 주인장의 회상이 이어진다.




근데 정말.. 이상한 아이였죠. 무엇보다 그 아이 덕분에 제가 평생 후회 할 뻔한 일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회상)




당시엔 손님으로 우리 카페를 종종 들르곤 했었던 아이였는데, 낮에는 알바를 하는지, 카페가 한가해지는 밤 10시쯤 와서 커피 한잔 시켜놓고 카페 문 닫을 때까지 바로 이 테이블에서 검정고시 공부를 하곤 했었죠. 그날도 카페에 손님은 그 아이 뿐이었는데, 마침 그날 노모가 고향에서 올라 오셨다 내려가는 날 이었어요. 다음날 가게 열기 전에 제가 터미널까지 모셔다 드리겠다고 하는데도, 부득불 그날 밤 내려가겠노라고 우기시는데 가게를 비울 수도 없고 참 곤란한 상황 이었죠.




어머니, 참~ 주무시고 내일 아침 제가 터미날까지 바래다 드릴테니 아침에 내려가시면 되는데




아녀 아녀~ 오늘 가야혀~ 낼 아침에 소 꼴도 줘야하고, 걱정마러~ 나 혼자도 잘 찾아 갈 수 있응께.




구석에 앉아서 공부하고 있는 유주에게 할머니는 가지고 온 떡 몇개를 접시에 담아서 나눠 주며 유주의 손을 잡으며 격려한다.




이거 드시고 허세요. 공부하는거 힘들지 않아요?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꾸벅 인사하고 눈을 들어 보따리에 짐을 챙기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눈 유주의 표정이 잔뜩 어두워 진다. 카페 주인장이 가게를 나서는 노모를 문앞까지 배웅하고 나서 못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 카운터로 돌아온다. 잠시 망설이던 유주가 보던 책을 챙겨 카운터로 간다.




저.. 괜찮다면 제가 카페를 봐 드릴테니, 할머니 터미날까지 모셔다 드리고 오세요.




아.. 그래도..




지금 가시면 금방 따라 잡으실 수 있을거예요.




그 아이의 눈빛은 왠지 너무나 간곡했고, 그 눈빛을 보고나니 체면 불구하고 이름도 모르던 사람에게 가게를 맡기고는 앞치마만 벗어두고 바로 달려 갔지요. 다행히 멀리 못가신 어머니를 만나 무사히 터미날까지 모셔 드리고 돌아오고 바로 그 다음날 아침 일찍 고향에서 연락을 받았죠.




아침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편히 잠드신 상태로 가셨다고.




혹시나 전날 그렇게 끝까지 배웅 못해드리고 그 임종 소식을 들었다면 아마 저는 평생 자책감에 시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그 인연으로 그 아이는 그 때부터 우리 가게에서 3년 넘게 일하게 되었던거죠.




지금의 이 카페가 있는데, 정말 각별한 사람이네요.




아! 잠시만 기다려 보세요.




주인장은 카페 스텝만 드나드는 주방쪽 복도 벽에 걸려있던 여러개의 액자중에 하나를 떼어 가지고 온다.




바로 여기, 이 아이예요.




주인장이 내미는 액자속 사진속을 보는 순간 한결은 믿을 수 없는 장면에 눈조차 깜박일 수 없었다. 온몸은 그대로 굳어 버린 것처럼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조용히 사진 속 유주의 모습을 조용히 손끝으로 쓰다듬고 있을 뿐..




혹시 아는 사이인건가요?




한결에게는 지금 시간이 그대로 멈추어 버린것 같다. 액자 속 사진 속에는 카페 주인장과 함께 브이자를 하며 환하게 웃고 있는 해맑은 표정의 유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불현듯 폭풍같은 눈물을 쏟아내는 한결을 보면서 주인장은 이유를 알 지 못해 어쩔줄 모르고 당황해 한다. 하지만 눈물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한결의 표정은 더 없이 밝다.




갑자기 사진을 보자마자 한결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것을 보고 카페 주인장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다. 더이상 한결에게 아무말도 하지 못하고 지켜 보고만 있다.




겨우 마음을 추스리고 라흐마니노프 카페를 나온 한결은 새삼스레 주변 거리를 다시 돌아 본다. 이 거리는 이제 더이상 어제의 그 거리가 아니었다. 유주가 여기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한결에게 이 거리는 이제 더이상 여느 이름없는 거리가 아니게 된 것이다.




아직 유주가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한결의 가슴속에는 점점 더 유주에게 더 가까이 가고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차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다.




이런 기분으로 오피스텔에 들어가 일하기는 싫었다. 한결은 술 한잔을 하려고 라흐마니토프 카페에서 멀지 않은 종종 다니던 단골 주점을 찾는다.




테이블 10개 정도에 바 형태가 같이 있는 그리 크지 않은 주점으로 오늘따라 주점안은 넥타이 부대 회식손님들과 연인들로 보이는 손님으로 가득차 북적인다. 그러다 보니 오늘은 바의 구석자리 밖에 남아 있지 않아 그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키고 기다린다.




기분 탓일까 주점 안 사람들도 오늘따라 모두 행복해 보인다. 느긋하게 맥주잔을 기울이면서 낙서가 가득한 주점 벽면을 찬찬히 훑어 보던 한결은 불현듯 한 지점에서 시선이 멈춘다.




당신과 같은 하늘아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괜찮아 - 유주




그건 분명 유주의 글씨였다. 한결은 어쩌면 남아 있을 유주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느끼려는 듯 그 글귀가 쓰여진 벽을 손끝으로 몇번이나 반복해서 쓰다 듬어 본다. 그랬다. 여기에도 유주가 있었던 것이다. 지난 몇년 동안, 일주일에도 몇번씩 오기도 했던 이 주점과 라흐마니노프 카페, 이 거리의 모든 곳들에 유주가 있었던 것이다... 왜 그동안 미처 몰랐던 것일까?




그랬다. 한결이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을 뿐 운명은 끊임없이 한결을 유주에게로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운명은 한결을 유주에게로 끊임없이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유주의 곁으로 와 있었던 것이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집채만한 운명의 파도가 지금 한결을 덮치고 있었다.




이제는 이 운명을 인정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그녀가 여기 있었다. 그리고 운명은 나도 모르게 나를 그녀에게로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17장




8년 9개월전






고등학교 2학년인 유주가 다니는 읍내에 하나뿐인 남녀공학인 반석고 합창반에 오늘부터 새로운 반주자가 오게 되었다. 기존 피아노 반주를 해오던 3학년 언니의 갑작스런 유학으로 인해 임시로 반주를 맡기로 한 사람은 3학년의 이한결이라는 남학생으로 근처에서 제일 큰 교회 담임목사의 아들이라고 했다.




하지만 합창반 내에서는 갑작스런 반주자 교체에 대해 이런저런 불평불만이 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특히 한결의 안좋은 행실과 소문에 대해서 였다. 목사인 아버지가 얼마전 재혼을 했는데 망측하게도 아버지 재혼 대상이 교내 공식 커플이었던 여자친구의 엄마라는 것이다. 얄궂게도 사귀던 여자가 지금은 여동생이 되버린 것이다.




거기 강유주~




네? 네~!




한결이에게 합창반 안내를 해주고, 연습 시간과 앞으로 준비해야 할 것등을 알려주도록 해




저.. 제가요? 아, 저는..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유주는 썩 내키지 않은 이 귀찮은 일을 하고 싶지 않아 재빨리 빠져나갈 궁리를 해보려 했지만 합창단 지도선생님은 그럴 틈조차 주지 않고 오늘 연습을 끝마치고 부실을 나가 버린다. 선생님의 해산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아이들도 혹시나 떨떠름한 일이 자기에게 떠넘겨질까 어느때 보다도 빨리 부실을 떠나 버린다.




결국 횡한 부실에 단 둘이 남게 된 두사람은 왠지 뻘쭘하기까지 하다. 분위기가 서먹해지자 유주는 어차피 해야 할 일, 피할 수 없다면 즐기자 라는 마음으로 서둘러 부실을 안내한다.




뭐, 우린 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수업 후에 여기서 두시간 동안 연습을 해요. 악보는 여기에 두면 되고, 개인적으로 가져갈 건 꼭 복사해서 가져가도록 하시고요. 저기 개인 사물함은 이걸 사용하면 될거예요.




....




음.. 그리고 우린 올 겨울 방학중에 있을 전국 고등학교 합창대회를 목표로 연습중이고요.. 피아노는 저기, 쳐보고 싶으면 쳐봐도 되요. 지금 연습곡은 모두 4곡인데.. 일단 악보는 제걸 드릴게요..




혹 궁금한거 있으세요?




너네 할머니도 엄마도 무당이라며? 그리고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듣기로 너희집 여자와 사귀는 남자는 모두 죽게 된다는데.. 그거 사실이니?




학교에서 유주가 무당집 딸이라는걸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노골적인 한결의 짖궂은 질문은 왠지 유주를 발끈하게 만든다. 더구나 목사님 아들이라는 한결이 물으니 왠지 놀리는거 같아 더더욱 기분이 좋지 않은게 사실이다. 살짝 째려보던 유주는 기죽지 않고 되려 쏘아 붙인다.




왜요? 선배가 한번 실험해 보시게요?




하하~! 설마, 사양할래. 난 오래 살고 싶거든~




암튼 늦는거 선생님이 제일 싫어하시니 연습시간에 늦지 마세요. 어차피 맞춰봐야 하긴 하지만 곡 연습은 미리 어느정도는 해오셔야 해요.




나름대로 열심히 알려주려는 유주와 달리 별로 관심 없어하는 한결은 내내 심드렁한 표정이다. 어차피 대타로 온거라지만 한결의 이런 무성의한 태도에 점점 짜증이 밀려 오는 유주는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유주에게 문득 그런 한결의 주위를 맴도는 어린 영가의 모습이 보인다. 어린 영가는 남자 아이로 한 여덟살이나 아홉살 정도로 보이는데 계속해서 하염없이 한결을 바라보며 한결의 뒤를 따라 다니고 있다.




그 어린 영가는 무언가 한결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그 어린 영가와 자칫 눈이 마주칠 뻔한 유주는 짐짓 아무것도 안보이는 것처럼 태연한척 연기 하면서 서둘러 이 귀찮은 임무를 마무리 지어 버린다. 선입견이긴 하지만 앞으로 더이상 이 사람과 무엇으로든 연관되고 싶지 않다는게 지금 유주의 솔직한 심정 이었다.








18장




어린 영가






교회 사택은 교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제법 규모가 있는 2층짜리 일본식 목조주택 으로 높지 않은 울타리가 쳐진 마당도 제법 넓어서 목사인 한결의 아버지가 취미삼아 가꾼 정원은 늘 정갈한 모습을 갖추고 있다. 집에 돌아온 한결은 서재에서 이번 주말 목회에 쓸 연설 초고를 만들고 있는 아버지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자기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간다.




부엌에서는 새어머니와 일을 봐주시는 도우미 아주머니, 그리고 소율이 까지 분주하게 오늘 있을 지난해 죽은 동생 환희의 추모식 준비로 분주하다. 동생 환희를 낳으면서 한결의 친어머니가 돌아가셨고 동생도 불행하게도 일부 정신지체장애를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지만 살아 생전 동생 환희는 세상에서 누구보다 형인 한결을 좋아했다.




작년에 만 여덟살의 나이에, 아버지가 재혼하고 6개월도 안되서 환희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기에 그 누구보다 가슴이 아프고 그 이유를 알고 싶었던건 한결 이었다. 아버지의 기도로 시작한 추모식은 환희에 대한 축원을 시작으로 모두들 간단히 추모의 기도를 하면서 이어져 간다. 추모식을 위해 차려진 상에는 환희의 사진과 평소 좋아했던 음식들과 장남감, 그리고 조금 특이하다면 특이한건 환희가 죽기전까지 늘 끼고 살았던 폴더형 핸드폰이 놓여 있다.




그 핸드폰은 비번으로 잠금상태여서 환희가 죽은 후에 가족들이 비번을 풀어보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풀지 못해 그대로 환희의 유품으로 남겨지게 된 것이다. 그렇게 추모식이 끝나고 아버지와 새어머니, 소율과 한결 네식구의 저녁식사 자리로 이어졌지만 식기 소리만 들릴 뿐 언제나처럼 누구하나 말 한마디 없는 고요한 분위기다.




식사를 마치고 먼저 자기방으로 돌아온 한결의 방으로 가족들 몰래 소율이 따라 들어온다. 부모님의 재혼으로 갑자기 법적으로 남매 아닌 남매가 되어 버린 두 사람은 어릴 적 부터 한동네에서 살아온 소꿉친구이자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부터는 부모님들 몰래 사귀고 있던 교내 공식 커플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부모님의 재혼이후로 소율과 단둘이 있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으로, 예전부터 갑작스런 소율의 이런 돌발 행동은 한결을 종종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난 더 못참겠어. 졸업하면 우리 이 집에서 나가자. 응? 오빠만 좋다고 하면 난 언제라도..




그만! 더이상 그런 말도 안되는 얘긴 하지도 마. 우린 이제 남매라구!




하지만 우리가 먼저 였다구! 우리가 먼저 사랑 했잖아.




아무리 그렇다 해도 이제 두분이 결혼 하신지 벌써 1년도 더 지났어. 이제와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어. 넌 이제 내게 그냥 여동생일 뿐이야.




난 인정 못해!




목소리가 너무 커! 부모님 다 듣겠어.




난 여동생으로 사는건 싫어.




그만, 부모님이 찾으시면 나 공부하러 독서실 갔다고 말씀 드려.




이러다 공연히 오해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한결은 차라리 이 자리를 피하는게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공부를 핑게로 평소 수험공부를 하고 있는 읍내 독서실로 가 버리고 홀로 남겨진 소율은 늘 이런식으로 회피해 버리기만 하는 한결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어슴프레하게 소율의 등뒤로 어린 영가의 모습이 두사람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다음날 오전, 반석 고등학교




기독교 재단의 학교인 탓에 매주 한번씩 채플 시간을 들어야 하는 학교지만 유주의 특별한 내력을 아는 담임선생님의 배려로 채플시간을 빠질 수 있게 해주셔서 유주는 그 시간에 늘 학교 옥상에 올라와 혼자 발성 연습을 하거나 개인시간을 가지곤 했다.




학교에서 혼자 자유로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라 유주에겐 매우 특별한 시간이기도 했는데 오늘은 가을 합창대회 연습곡중 에레스 뚜를 연습삼아 불러보고 있는데, 아무도 없을거라 생각한 옥상위 물탱크 뒤에서 갑자기 한결이 툴툴 거리며 등장한다.




어제 잠을 제대로 못자서 잠 좀 잘려고 했더니 방해꾼이 있네.. 너 채플 빼먹으면 벌받는다.




전! 담임선생님 허락 받고 빠지는건데요. 선배님이야 말로 목사님 아들이시면서!




근데 방금 그 부분은 독창파트 아닌가?




제 파트 거든요.




오호~! 2학년에게 독창이라니 너 좀 인정 받나 보다?




뭐 나름. 앞으로도 평생 노래 하면서 살고 싶으니까요. 혹시 몇년 후 홍.대.여.신? 그렇게 불리고 있을지도?




하하하. 그건 노래도 노래지만, 예쁘기도 해야 하는거 아닌가? 암튼 자신감도 넘치고. 내숭 안부리는거 하난 마음에 드네.




저 마음에 들어 하시면 안되는데. 우린 상극인데?




한결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계속 유주의 신경을 쓰이게 하는건 지난번에도 본 한결의 곁은 떠나지 않고 따라다니던 그 어린 영가의 모습이 오늘도 보인다는 거다. 분명 그 영가는 계속 애절한 눈빛으로 한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결에게 무언가 꼭 전해야 할 이야기가 있는거 같다.




혹시... 집에 어려서 죽은 사람이라거나 그런 분 있으신가요?




조심스럽지만 뜬금없는 유주의 질문에 한결은 뜻밖이라는 표정이다.




뭐야? 너 내 뒷조사도 하고 다니니?




그런거 아니거든요.




근데 왜?




아.. 아니예요!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그때 마침 수업시간이 끝나는 음악 소리가 울리고 동시에 학생들이 왁자지껄 교실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들린다.




저는 다음 수업 들어가야 해서, 그럼 연습시간에 뵈요.




무언가 할말을 다 하지 않은 채 총총히 계단으로 사라지는 유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결의 표정이 묘하다.






19장




수호목






주말마다 학교근처 편의점에서 하고 있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밤 늦게 옥탑 자취방으로 돌아온 유주는 자신의 자취방 창문에 불이 켜진 것과 문 앞의 고무신을 보고 엄마가 와 있다는 것을 알고 기뻐서 방으로 뛰어 들어간다.




엄마!




유주가 읍내 중학교에 다니게 되면서 이곳에서 자취를 하게 되면서 엄마는 가끔씩 이런식으로 연락도 없이 불쑥 방문해서 유주와 하루밤 자고 가곤 했다. 때로는 단지 유주를 보기 위해서 오기도 했지만 마을 굿이나 여러가지로 마을에 일이 있을 때 읍내에 나오게 되면 늘 유주의 자취방에서 하루밤 묵어가곤 했고 유주도 모처럼 맘껏 어리광 부릴 수 있는 그런 엄마의 방문이 싫지 않았다.




특히 오늘 엄마가 읍내로 나온 것은 마을 입구에 서 있는 500년 된 성황목 때문인데, 매년 정월 보름이면 동제를 모시는 당나무로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인데 지금 도로확장 문제로 그 수호목을 베어내자는 측과 안된다고 지키려는 측의 대립으로 일촉즉발의 상황이라 마을의 무녀로 유주의 엄마도 내일 있을 담판에 나갈 예정이었다.




특히나 그 성황목으로 인해 마을의 발전이 더디게 된다고 주장하는 교회 청년회가 특히 강경해서 물리력을 행사해서라도 그 성황목을 베어 버리고 도로를 확장해야 한다며 벼르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지난 수백년동안 마을을 지켜온 마을 성황목을 베어 버리면 마을에 재해가 끊이지 않을거라고 걱정하는 마을 노인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기에 지금 마을은 두개로 나뉘어 격렬히 대립하고 있는 중 이었다.




모녀가 사이좋게 같이 누워 그동안 있었던 유주의 학교 이야기와 합창단 이야기를 듣던 유주의 엄마가 오늘따라 조심스레 유주에게 너무 늦지 않게 신내림 굿을 받을 생각이 없는지 다시 한번 묻는다. 하지만 유주의 생각은 단호하다. 무슨일이 있어도 자신은 절대 무당은 되지 않겠다는 것.




유주의 엄마도 이미 몇번이나 유주에게 신내림굿을 권유하기는 해도 억지로 강권하거나 싫다고 하면 그이상 더 강요하지는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유주의 결정을 존중해 주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자신이 무녀의 딸로 태어난 운명은 너무나 싫었지만 그건 자신이 선택 할 수 없는 문제인거고, 절대 신내림굿을 받거나 무당이 될 생각도 없는 유주지만 그런것과는 상관없이 이렇게 하루라도 엄마품에서 자는 게 행복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아침, 잠이 깨어 보니 엄마의 이부자리는 이미 곱게 개어져 있다. 마을 어르신들과 성황목 문제를 상의하러 새벽 일찍 마을회관으로 가신 것이다. 모처럼 같이 아침식사라도 하고 싶었던 유주는 약간 실망스러웠지만 도시락이라도 싸서 가져 가자는 생각으로 서둘러 준비를 시작한다.




간단히 도시락을 싸 집을 나선 유주는 가벼운 마음으로 마을회관에 들러 보았지만 마을회관은 텅 비어 있다. 왠지 불길한 생각이 들어 서둘러 수호목이 있는 마을 어귀로 달려간 유주 앞에는 수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고성을 지르며 스크럼을 짜 대치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더구나 수호목 앞에는 큰 포크레인을 세워두고 전기톱을 든 여러명의 마을상인회 사람들, 그리고 미신으로 마을발전 저해하는 고목을 베어내라. 등의 현수막과 피켓을 든 교회 사람들 앞에 고작 몇십명의 마을 노인들과 아주머니들이 줄지어 앉아서 포크레인의 진입을 막고 있다. 겨우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앞으로 나선 유주 눈앞에는 유주의 엄마가 새끼줄로 성황목에 몸을 묶고 나무를 베어내지 못하게 막고 있는 중이다.




이 나무 때문에 우리 마을 발전이 그동안 얼마나 지장이 많았는데 그깟 미신 때문에 언제까지 이럴겁니까!




지난 수백년 동안 우리마을에 큰 비나 폭풍피해가 없이 지나간게 다 이 당나무 할아범 덕인데, 그 은혜도 모르고 배은망덕도 유분수지.




심지어는 가족중에 어머니는 당나무를 지키려는 쪽에, 아들은 당나무를 베어내자는 쪽에 선 가족도 있었다.




그거 다 미신이라구요. 미신!




아이고~ 니가 앞으로 닥칠 그 후한을 어찌 감당하려고 일을 이렇게 만드는거냐




그렇게 대치는 밤까지 이어지고 유주는 가지고온 물을 엄마에게 마시게 하려고 하지만 엄마는 고작 한모금정도 마시고는 그이상 아무것도 목으로 넘기지 못한다. 유주는 그런 엄마를 꼬옥 안고 계속 곁을 지킨다. 날이 어두워 지면서 대치중인 사람 수는 수십명 수준으로 줄어 들고 그때 마침 교회쪽 사람들의 저녁거리를 준비해 가지고 온 사람들 중에 한결의 모습도 보인다.




한결도 당나무 옆에 엄마와 같이 있는 유주를 보고 슬쩍 눈빛으로 아는체만 하고 교회측 신도들에게 먹을거리를 돌리고는 바로 교회로 돌아간다.




이참에 모두 죽여 버립시다!




교회로 돌아온 한결은 지금 상황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교회 청년부가 모여서 한참 회의중인 사무실로 가 보는데, 문앞에서 들리는 이야기는 매우 격렬하고 극단적으로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결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청년들과 간단히 서로 눈인사를 나누고 조용히 구석자리에 앉아 무심한척 듣고만 있는데 회의중인 청년들의 얼굴이 무척 심각해 보인다.




그러니까 아예 불을 싸질러 버리자고요. 그 무당년 때문에 여태 틀어진 일이 한두번이냐고요! 내가 당골 무당집도 저놈의 성황목에도 휘발유를 뿌리고 싹 불을 질러 버릴테니까




특히 성확목 근처에 큰 땅을 가지고 있어 누구보다 도로가 나기를 바라고 평소에도 강성 성향을 보이던 한 신도가 무당 한명 때문에 일을 그르치게 되었다며 잔뜩 흥분해서 무슨짓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목소리를 높인다.




그냥 얼굴 가리고 가서 화염병 몇개 집어 던지고 튀자고요. 그럼 누가 알겠어요? 근처에 cctv가 있는것도 아니고..




그러다 사람이라도 다치면 일이 커져.




난 목숨 걸었다니까요! 이번에도 이대로 물러나면 앞으론 다신 저 성황목 베자고 못한다니까요. 그리고 혹시라도 잘못되면 제가 십자가 다 질테니 걱정 마세요!




진짜로 할껴?




쇠뿔도 단숨에 뽑으라고 오늘 밤에 해 버리죠. 빈병 열개하고 석유 두통만 준비해 주세요. 먼저 성황목하고 당집에 불지르고 그담에 그 무당 딸년도..




한동안 조용히 청년부 사람들 얘기만 듣던 한결이 불쑥 일어나 이야기에 끼여든다.




저에게 방법이 있어요.




뭐? 무슨방법?




저에게 맡겨 주시고 오늘은 다들 철수해 주세요. 딱 하루면 되요.




니가 어려서 아직 잘 모르는데, 이게 그렇게 쉽게 해결될 일 이었으면 지금까지도 안왔어~




그때 창밖에 후두둑 거리는 빗소리가 들리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한결이 창을 열어 보니 소나기라 하기엔 제법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이래서는.. 불도 제대로 붙지 않을거 같은데요..




음..




청년부 사람들이 망설이다 목사님 아들이기도 한 한결이 워낙 확신에 차서 말하고 비도 오기 시작하니 더이상 반대하지 못하고 한결에게 한번 맡겨 보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진다. 창밖 빗줄기를 바라보는 한결이 표정이 더욱 어두워 진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성황목 앞에는 나무에 새끼줄로 몸을 묶은 유주의 엄마와 유주, 그리고 교회 청년회 남자들 십여명이 여전히 대치중이다. 초여름이라지만 밤비는 아직 차갑다. 아침부터 거의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성황목과 한몸이 되서 나무 앞을 지키던 유주의 엄마는 밤비에 몸까지 젖자 추위로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 정신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정도로 지쳐있다.




비에 흠뻑 젖어 추위에 떠는 유주 모녀에게 우산을 씌워주며 그들 앞에 쪼그려 앉은 한결이 유주에게 오늘은 이제 그만 돌아 가라고 설득한다.




엄마가 가지 않으면 나도 안가요.




너희 어머니를 봐, 이대로 계속 비를 맞으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어.




한결이 말대로 유주 엄마의 상태는 점점 안좋아지고 있다. 잠든 것인지 기절한 것인지 이미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는데다 몸은 추위로 덜덜 떨며 점점 차가워져 가고 있다.




교회 사람들도 내가 철수시킬 테니까, 너도 어머니 모시고 집으로 돌아가.




유주는 그런 한결이 못미더우면서도 엄마의 상태가 점점 안좋아지니 마음이 혼란스러워 진다. 먼저 한결이 교회측 사람들에게 가서 오늘은 이만 철수하라고, 청년회에서 결정한 내용이라고 통고하자 교회쪽 인원들도 하나둘 그자리를 떠난다. 교회측 사람들이 다 떠나자 그제서야 유주는 엄마를 묶었던 줄을 풀고 엄마를 부축해 집으로 돌아간다.




유주 모녀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있는 한결은 무언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골목안에 숨겨 두었던 전기톱을 들고 나온다. 비가 쏟아지는 고목을 올려다 보며 한결이 전기톱을 가동하는 순간 하늘이 노한 것처럼 천둥 번개까지 치기 시작한다. 하지만 한결은 한점 동요도 없이 무표정하게 전기톱으로 성황목을 베어내기 시작한다.




소나기 인줄 알았던 비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고 자취방에 돌아와서 엄마의 옷을 벗겨 말리고 자신의 마른옷을 입히고 방을 덮혀 엄마를 따뜻하게 이불속에 눕히고서야 겨우 한시름 놓고 자신도 잘 준비를 하던 중 이었는데 잠들었던 유주 엄마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더니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친다.




할아범!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무녀의 남자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0 무녀의 남자 10 16.07.08 98 0 6쪽
9 무녀의 남자 9 16.07.08 271 0 12쪽
8 무녀의 남자 8 16.07.01 268 1 8쪽
7 무녀의 남자 7 16.06.24 166 0 11쪽
6 무녀의 남자 6 16.06.17 152 0 15쪽
5 무녀의 남자 5 16.06.10 177 1 25쪽
» 무녀의 남자 4 16.05.27 212 0 38쪽
3 무녀의 남자 3 16.05.22 257 0 35쪽
2 무녀의 남자 2 16.05.22 273 0 16쪽
1 무녀의 남자 1 16.05.20 328 0 28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