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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라하 님의 서재입니다.

무녀의 남자

웹소설 > 자유연재 > 로맨스, 판타지

어라하
작품등록일 :
2016.05.20 15:35
최근연재일 :
2016.07.08 18:27
연재수 :
10 회
조회수 :
2,191
추천수 :
2
글자수 :
89,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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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5.2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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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28쪽

무녀의 남자 1

DUMMY

무녀의 남자






1장




프롤로그






유주는 어릴 적 마을에서 한참 떨어진 뒷산 언저리에 외따로 떨어진 당집이라는 곳에서 살았는데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마도 유주가 너댓살 무렵부터였을때 부터 였을거다. 유주에겐 또래의 친구들이 많았다. 더구나 그 친구들은 항상 먼저 유주를 찾아왔고 유주가 원하면 밤 늦게까지라도 같이 놀아주곤 했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노는데 빠져 해 지는것도 모르고 있다 저녁밥 시간에 늦게 들어가 어머니로 부터 야단 맞는 일도 종종 있었다.




당집 뒤로는 마을의 공동묘지가 있었는데 그곳이 유주와 아이들의 놀이터겸 아지트 였다. 공동묘지라고 해서 두렵거나 무섭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봉분 뒤로 숨기도 하고 산소를 미끄럼틀 타듯 타고 넘으며 술래잡기도 하며, 비석 앞에 둥글게 모여앉아 손뼉치며 다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 여덟살 무렵부터인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유주는 여덟살이 되었는데, 그 아이들은 처음 유주를 찾아 왔을 때 그모습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거기다 더더욱 이상한건, 주변에는 유주가 사는 당집 말곤 인가라곤 없는 산속인데, 그 아이들은 대체 어디서 살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부터였다.




또 어릴적엔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거지만 그 아이들의 모습이나 행색이 평범하지 않았는데, 그 아이들이 다른 아이들과 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유주가 초등학교를 들어가면서 부터 였다. 학교에서 보는 급우들과 무덤에서 함께 노는 아이들이 다르다는 것을..




유주를 찾아오는 그 아이들은 눈이 하나 없다거나 머리가 깨져서 뒤통수는 백골이 보이고 팔이 하나 없는 아이도 있었지만 당시까지도 엄마와 마을 굿을 상의하러 엄마를 찾아오는 마을 어르신 몇분을 제외하고는 또래의 친구들을 본 적이 없는 유주는 그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너무나 심심했고 유주에게는 같이 놀아주는 또래의 친구들이었을 뿐인거다.




하지만 일곱살이 되어 마을의 초등학교를 다니게 되면서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을 만나게 된 유주는 무덤에서 같이 놀던 그 아이들이 학교의 아이들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 한 것이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유주에게만 보이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유주의 할머니는 일제시대 전국적으로 이름이 난 유명한 큰무당이었지만 유주의 어머니는 무당이 되기 싫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마자 집을 떠나 부산으로 가 거기서 유주의 아버지를 만나 유주를 임신했으나 행복도 잠시,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병원에서도 원인을 알 수 없다는 신병으로 고생하다 결국 만삭의 몸으로 다시 마을로 돌아와 유주의 할머니에게 신내림 굿을 받고서야 비로소 신병에서 벗어나 무녀의 길이 자신의 거부할 수 없는 운명임을 인정하게 됐다고 한다.




유주의 집안 여자들은 대대로 무녀의 피를 타고나서, 귀신을 본다거나 사람의 죽음을 예지하는등의 신기한 능력을 보이곤 했는데, 한 대씩 건너 유독 강한 신기를 가진 무녀가 태어난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할머니에 이어 유주가 아직 신내림을 받지 않고서도 죽은자를 본다거나 그 사람의 물건을 만지거나 접촉하게 되면 죽음이 임박한 경우 그사람의 죽음을 미리 감지하는 능력도 보이고 있다. (유주에 의하면 그 사람에게서 검은 후광? 혹은 그림자 같은 것이 보인다고 하는데 분명하게 그림자와는 다르다고 한다.)




유주는 매일 자신을 찾아오던 친구들이 오직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 죽은 아이들 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그 아이들이 찾아오는 매일매일이 공포와 두려움의 연속이 되었다. 몇일 전 까지도 즐겁게 같이 손뼉을 치고 놀던, 손 잡고 뜀박질하며 놀던 그 아이들이 이제는 피하고 싶은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문을 굳게 닫고 열어주지 않아도 그 아이들은 여느날처럼 유주를 찾아와 문밖에서 함께 놀자고 유주를 부르곤 했다. 모든게 끔찍하고 두려웠다. 이런 두려움은 결코 익숙해 지지 않았다. 유주는 이불속에 숨어서 눈을 감고 두손으로 귀를 막고 학교에서 배운 동요를 크게 소리내어 부르며 자신을 부르는 그 아이들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했다.




그렇게 몇년, 아이들은 매일같이 유주에게 놀자고 찾아왔고 유주가 읍내 중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엄마를 졸라 겨우 읍내에 허름한 자취방을 얻어 자취를 하게 되면서 비로소 당집을 나올 수 있게 되었고, 읍내로 나온 뒤로는 더이상 그 아이들은 찾아오지 않게 되었다.








2장




도망자에게 낙원은 없다






오피스텔안은 두꺼운 암막커튼이 드리워져 있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조차 없이 어둡다. 밖에서 누군가 디지털도어락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열리고 복도의 나즈막한 불빛이 오피스텔안으로 들어와 간신히 사물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실내가 보이기 시작한다.




책상 위에는 마스터키보드와 컴퓨터, 모니터 3대, 그리고 제법 덩치 큰 검정색 스피커가 놓여 있고 오디오 인터페이스와 노트북 컴퓨터도 있다. 침대는 이미 제 역활을 잃고 두꺼운 책이며 씨디같은 물건들만 잔뜩 쌓여있고 바닥에는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소주병과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들이 널부러져 있고 씽크대 위에는 먹다 남긴 배달음식들이 랩도 씌워지지 않은채 놓여있다.




안에 들어선 종호는 벽을 더듬어 간신히 전등 스위치를 찾아 방안을 밝힌다. 방안의 퀴퀴한 냄새에 연신 손사래질을 해보지만 별로 나아질 것도 없다. 소파 위에는 술에 취해 마치 시체처럼 늘어져 곯아 떨어진 한결의 모습이 보인다. 웃옷은 입지도 않은 채로 몇일 째 면도조차 안하고 머리는 언제 잘랐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덥수룩 하다.




종호가 손수건으로 코를 막으며 바닥의 물건들을 발로 슬슬 밀며 한결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 보지만 깨어나지 않는다. 고개가 돌아가며 얼핏 느껴지는 숨결에서는 술냄새가 진동한다.




야! 이한결! 전화는 대체 왜 안받는거야. 일어나봐 오늘은 꼭 얘기 좀 해야겠어.




그래도 반응이 없자 이제는 신경질 적으로 발로 툭툭 차며 깨우려고 해보지만 한결은 여전히 정신을 못차린다. 분을 못이긴 종호는 듣건말건 한결의 몸을 흔들어 깨우려 소리친다




술 좀 작작 먹으라고! 이 알콜 중독자 새끼! 야 너 오늘까지 곡 마무리 짓는다고 약속 했잖아.


곡 어딨냐고! 내가 너에게 들인 돈이 얼만지 알아?




한결의 입에서 나는 술냄새에 종호는 인상을 팍 찡그린다




어휴~ 술냄새~ 봐. 대체 얼마나 처 마신거야?




그때 종호의 휴대폰이 급작스레 울린다. 허겁지겁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한결 때문에 오른 감정을 추수리고 정중하게 전화를 받는다.




어? 애기야~ 잠시만 기다려봐.


아냐~ 아냐 가지마. 지금 내려갈게


너~ 가기만 해! 지금 내려 간다니까!




전화를 끊고 잠시 화를 삭이던 종호는 한결을 향해 잔뜩 심술사나운 표정을 지으며 마지막으로 한결을 한번 더 흔들어 깨워 보려 하지만 술에 만취한 한결은 도무지 일어날 기미가 안보인다.




이한결! 오늘 저녁에 다시 올테니까! 곡 꼭 완성해 내 앞에 내놔라. 안그럼 여기 방 빼버릴테니!




분에 못이겨 한결에게 주먹질을 하려고 하다 차마 그렇게까진 못하겠는지 애써 자제하며 분풀이 하듯 문을 거칠게 닫고 나가 버린다.




종호가 사라진것이 확인되자 부스럭 거리며 일어나는 한결, 익숙한듯 어두운 가운데서도 담배를 찾아 한대 피워 문다. 그리고 창가로 가서 암막커튼을 살짝 열어 아래를 내려다 본다. 오피스텔 앞 주차장에 세워둔 빨간색 오픈카에 앉아 있는 미모의 젊은 여성을 향해 종호가 다가가자 그 여자는 잔뜩 힐난하는 표정으로 종호를 쏘아댄다




오빠 오늘은 틀림없이 곡 나온다며? 이렇게 약속 안지키는데 오빨 어떻게 믿으라는거야!




여자의 기세에 종호는 어떡하든 달래서 이 순간을 넘기려고 한다.




혜나야~ 아이참~ 이걸 뭐라 해야 하지. 한 2~3일만 더 기다려주라. 이 오빠가 삘만 받으면 10분만에도 한곡 뚝딱 뽑아내는데! 알잖아!




근데 대체 여긴 뭐하러 온거야? 더운데 밖에서 기다리게 만들고




아~ 글쎄 아는 동생 하나가 사는데, 월세 낼 돈이 없다고 돈 좀 빌려 달라고 해서..




그런일이면 지가 찾아와야지, 오빤 호구야? 참~나~ 하여튼! 곡만 지난번 처럼만 잘 빠지게 나오면 용서해 주겠지만 아니면 우리 사인 그날로 끝인줄 알아!




그걸 말이라고 해? 당연하지~ 너 오빠 못믿어?




차에 올라서도 연신 여자를 달래느라 여념이 없는 종호를 태운 여자의 스포츠카는 요란한 굉음을 내며 어디론가 내달려 사라진다. 그 모습을 창으로 내려다 보던 한결은 암막커튼으로 다시 세상과 차단막을 치고 돌아와 마스터키보드 앞에 앉아 길게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며 혼잣말처럼 읍조린다.




그지.. 새끼..




그리고는 한결은 마치 아무일도 없었던 듯 컴퓨터를 켜고 헤드폰을 끼고는 마스터키보드와 작곡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음악에 맞춰 고개를 끄덕이며 작업을 시작한다.








3장




사고






"늘 지내오던 공간이 왠지 전혀 처음 보는 낯선 공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건, 나 자신이 변했거나 혹은 그 장소가 원래 자신이 있던 곳이 아니기 때문 일 것이다.."




(회상) 8년 3개월 전..






얼마나 긴 잠 이었을까? 천정의 형광등 불빛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들다. 어렵게 눈을 떠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 보니 흰 가운 입은 사람의 모습이 보이고 그 중 한 남자가 다가와 한결의 눈 꺼풀을 뒤집고, 작은 손전등 같은걸 비추어 보기도 했다. 연신 무언가 묻기도 했지만 한결의 고막에서는 웅웅 거릴 뿐 잘 들리지 않았다. 손과 발도 움직여 보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어떻게 된거지?’




눈을 돌려 벽에 걸려진 10년은 넘음직한 촌스런 벽시계를 보니 11시 15분. 지금이 낮일까 밤 일까. 간호사에게 물었다. "밤 이예요." 사무적인 짤막한 답변이었다. 한결은 모든것이 혼란스러웠다. 그렇다면 4시간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걸까?






그리곤 다시 잠이 들었다. 한결은 웅성대는 소리에 눈이 떠진다. 얼마나 잠을 잔 거지? 다시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1시 20분. 창 밖이 어두운걸 보니 아직 밤이다. 중년의 남자가 한결이 깨어난 것을 보고 다가온다. 단번에 아버지임을 알 수 있었다.




목사인 한결의 아버지는 언제나 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에, 늘 근면하게 살아온 삶을 보여주듯 살 찐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로 깡마른 체구, 낡았지만 깨끗하게 다려서 구김 하나 없는 곤 색 정장 양복차림으로 늘 같은 머리스타일, 같은 옷을 고집하는 완고하고 보수적인 사람으로 이 촌 동네에서 가장 큰 교회를 이끌고 계신다.




한결이 깬것을 확인하고는 곧 의사를 불러 온다. 의사는 다시 내 상태를 살펴보면서 묻는다. "제 말 들리시나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힘드시면 굳이 말 하려고 하지 않으셔도 되고요." 의사가 돌아가고 난 후 한결은 느리지만 천천히 아버지에게 궁금한걸 물었다.



저 얼마 동안 여기에 있었던 거죠?




한결의 아버지는 머뭇거리면서 특유의 또박또박한 어투로 그간의 사정을 설명 해 줬다. 한결은 1년 8개월 가까이 혼수상태였다고 한다. 깨어 난 것 자체도 기적이라고. 한결의 기억으론 마치 어제 저녁 사고였던 것 같은데, 그렇다면 학교며, 친구들이며, 가족들.. 가족..? 그래 한결에게는 동생이 있다.. 한결이 보다 아홉 살 어린 정신지체를 가지고 있던 가엾은 남동생.




아버지, 환희는요?



그거.. 기억 안나니? 환희는 그렇게.. 죽었잖니.




'그렇게 라니? 그건 무슨 뜻일까?' 환희의 모습이 바로 오늘 아침에 본 것처럼 생생한데, 환희가 죽었다니.. 의사 말로는 오랜 혼수상태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 같은 것일 수 있다고 했다. 사실 현재 한결의 기억상태는 마치 이빨 빠진 낱말퍼즐 같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부분도 있고, 전혀 기억나지 않는 부분도 있었다. 의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회복 되리라는 말로 한결을 위로했다.




너무 오래 누워있다 보니 근육이 약해져서 당장은 혼자 밥을 먹거나 걷는 것도 힘들었다. 아버지는 교회를 오래 비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도우미 아주머니 한 분이 와서 항상 돌봐 주시고 계시다.




기억이 돌아오게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의사의 권유대로 한결의 아버지가 면회 시 마다 가져 온 사진과 물건들을 보면서 많은 기억을 회복했다. 하지만 부분부분 기억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고 의사는 어쩌면 모든 기억이 다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그 무렵부터 한결은 자신도 모르게 곡명도 모르는 어떤 곡의 음률을 읊조리는 버릇이 생겼는데, 그 곡이 뭔지 너무나 궁금해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새로 온 신참 막내 간호사가 아는 곡이라고 한다.




라흐마니노프 잖아요.






라흐마니노프?



대학때 클래식 동아리 활동할 때 많이 들어서 기억나요. 아마 그게 피아노협주곡 2번인가 3번인가. 정확하진 않지만 혹시, 그..! 영화 밀회 아시죠? 거기 주제가로도 쓰였는데.




뜻밖의 해박한 클래식 지식을 가진 막내간호사 덕분에 궁금증은 풀렸지만 한결이 왜 그 곡을 알고 있는지는 여전히 기억나지 않고 있다.




막내간호사로 말하면 옆자리 어린 환자에게 약을 줄 때도 늘 눈높이에 맞추기 위해 침대 곁에 턱을 괴고 쭈그리고 앉아 말을 걸어주던 마음씀씀이가 고운 25살 아가씨로 167은 족히 넘는 큰 키에 볼륨 있는 몸매라서 사실 그 포즈를 뒤에서 보면 엉덩이가 복숭아처럼 크고 도드라져 보여 한결은 자신도 모르게 발기가 되곤 할 때면 행여 들킬까 난처해 지기도 했다.




그렇게 며칠 후부터는 물리치료와 재활치료를 함께 시작했다. 병실은 2인실로 낡은 병원치고는 깨끗하고 빛도 잘 들어오는 병실이었다. 옆 병상은 골수 성 백혈병인가로 투병중인 11살짜리 사내아이의 자리였는데 동생인 환희 또래였지만 늘 아이답지 않은 무표정한 표정으로 아픈 주사나 검사를 해도 보채거나 잘 울지도 않는 꼬마였다.




여전히 한결이 왜 그 라흐마니노프의 곡을 알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사고 전에 취미로 클래식 음악을 들었을 수도 있는 일이고,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했을 수도 있었지만 한결이 클래식을, 그것도 라흐마니노프를 좋아했다거나 듣게 된 기억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5개월을 더 병원에 있다가 다음 해 봄이 되어서야 퇴원할 수 있었다.




한결은 그사이 대부분의 기억을 회복했지만 거의 2년만에 돌아온 집은 전부 낯설었다. 마치 이상한나라의 엘리스처럼 내가 모르는 다른 세상에 던져진 그런 기분도 들었다. 벽지도, 책상도, 침대도, 책꽂이의 책들도 다 그대로인데 한결은 다른 차원에서 온 사람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은 1월 말, 완전히는 아니라도 친구들 얼굴도 하나 둘 기억나고 학교에 가 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 사고가 났으니, 같이 다니던 친구들은 이제 전부 졸업했을 터.. 가봐도 크게 도움은 안 될 듯 했다.




하릴없이 책상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라흐마니노프 씨디가 보인다. 런던심포니 오케스트라 연주의 피아노소나타 2번 c 마이너와 3번 d 마이너, 그리고 두 개의 소품이 들어 있는 씨디다. 씨디를 가지가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한결이 평소에 자주 듣던 곡이어서 흥얼거리게 된 것일 터이다. 비로소 어느 정도 납득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씨디 뒷면에 매직으로 ‘이 세상 유일한 내 사랑 한결의 생일축하~♡’ 라는 메시지가 적혀 있는 것으로 아마 당시 사귀던 누군가로부터 받은 선물인 듯 하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다.




마침 오늘 저녁부터는 교회 예배를 나오라고 당부하셨기 도 하고, 한결이 사고 전에 교회를 꼬박꼬박 나가는 착한 아들이었는지 까지도 기억은 없지만 목사 아들이라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었을 것이다. 산책도 겸해 구닥다리 씨디 플레이어를 찾아 라흐마니노프 씨디를 넣고 이어폰을 귀에 꼽는다. 이제 봄이라고는 해도 아직은 밤이면 제법 춥기에 목도리와 두툼한 외투도 함께 챙겨 집을 나섰다. 교회는 집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에 있다.




아는 거리인데도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이 마치 오래된 흑백 슬라이드처럼 왠지 처연하게 느껴진다. 한결은 자신만이 이 세계에서 박리된 느낌이다. 도로 건너편으로 교회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보행신호를 기다리던 한결의 눈에선 불현듯 주루룩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하고 이내 모든 저항의지를 상실한 패잔병처럼 그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아 버리고 만다.




태풍이 몰아오는 거대한 파도와 맞닥뜨린 연약한 조각배처럼, 연이어 모든 기억의 파도가 일시에 되살아나 거대한 쓰나미처럼 밀려들고 있다. 드문드문 빠져있던 기억의 퍼즐조각이 비로소 모두 완성되면서 모든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마치 손안에 잡힐 듯 선명하게 유주의 밝게 웃는 목소리가 떠오른다.




(회상)




우와~ 멜로디언으로 라흐마노프라니! 대박.




이쪽에 건반이 모자라네




한결이 모자라는 건반 대신 유주의 허벅지 위로 건반 대신 피아노 치듯 지나가자 유주가 간지럽다고 한결의 손을 밀어내며 꺄르르 웃으며 피하는 모습이 선명하다.




'그럼 유주는...? 지금 유주는 어디 있는거지?'




문득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한결은 갑자기 방향을 바꿔 미친듯이 달리기 시작한다. 거진 30분여를 쉬지 않고 달려 도착한 곳은 허름한 주택가 옥탑방, 옥탑방 창은 불이 꺼져 있다. 안에 사람 인기척이 없다. 그러나 두번 생각할 틈도 없이 거칠게 문을 두르리며 유주를 찾는다.




유주야~ 유주야!!




한밤중의 난데없는 소란에 아래층 주인집 아주머니까지 옥탑으로 올라와서야 한결의 소동이 진정 되었다. 다행히도 주인집 아주머니가 한결을 기억하고 있어서 한결에게 옥탑방 문을 열어주며, 퉁명스럽게 그간 있었던 일을 소상히 알려 준다.




방안의 물건이나 가구는 곳곳에 거미줄과 뽀얗게 먼지가 내려 앉은 먼지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음을 알려 줄 뿐, 1년 8개월 전 그대로 시간이 멈춘 듯 한결과 유주가 함께 살던 그때 그모습 그대로 였다.




방도 안나가고 그래서 짐도 건드리지 않고 그냥 두고는 있었지만... 학생 사고나고 몇일 후 그 색시 말이야.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옷가지만 몇개 챙겨서 그날로 야반도주 한거 같더라구.... 뭐 그리고 여기 보증금은 아다시피 그동안의 월세로 다 까인건 알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한결이 사고로 혼수상태인 채로 두고 그대로 떠날 유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근데 대체 왜?




정말 해도해도 너무 한거지. 학생은 의식불명 상태인데 그렇게 떠나 버리다니, 평소에 그렇게 사이가 좋아보이더니 학생 다치니 그렇게 돌변할 수가 있어? 사람은 어려움이 닥쳐봐야 진짜를 알 수 있다더니 딱 그짝이지 뭐야~




닥쳐!




순식간에 야수처럼 돌변한 한결이 주인 여자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치는데, 한결의 눈빛은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다.




유주는 그런 아이가 아니야!!




주인 여자가 숨을 못 쉬고 컥컥 거리자 그제서야 한결은 정신을 차리고 주인여자를 놓아준다. 놓아주자마자 주인여자는 얼른 계단으로 몸을 피하면서 한소리를 하고 간다




그러니까.. 보증금 돌려달란 소린 하지 말라구! 얼른 떠나지 않으면 곧 경찰을 부를테니까




아직도 머리가 혼란스러운 한결은 이해 안되는 현재의 상황과 혼란스러움에 비틀거리면서 계단을 내려와 터벅터벅 집으로 향한다.




'유주야.. 어디로 가 버린거니? 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4장




코요테어글리






이태원 뒷골목 후미진 곳의 라이브 카페 '코요테어글리', 겨우 너댓명이 올라서면 꽉 찰거 같은 작은 무대와 20개도 안되는 테이블이 있는 작은 가게지만 손님들도 모두 수년간 단골일 정도로 가족같은 분위기인 곳이다. 금방 노래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가는 유주에게 이가게의 매니저인 에리카가 언제나 처럼 따뜻한 박수로 그녀를 맞아준다.




수고했어 자기~




고마워요 에리카




유주는 평상시처럼 에리카와 가벼운 프랑스식 볼키스를 하고 서둘러 대기실로 향한다. 에리카는 트랜스젠더인데 건장하고 키도 180에 가까운 장신으로 태어나기는 남자로 태어났지만 스스로 자신의 영혼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여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아직 외모는 누가봐도 남자의 모습이지만 진한화장과 화려하고 가장 여성스럽게 몸매가 드러나는 검정 원피스와 빨간 하이힐이 그, 아니 그녀의 아이덴티티다.




공연을 위해 풀었던 머릴 뒤로 바싹 당겨 묶으며 대기실로 돌아온 유주는 대기실 거울앞에 앉아 능숙하게 메이크업을 지우기 시작한다. 그때 대기실로 돌아온 혜경의 표정이 창백하다.




두통 아직도 심해?




응, 아침부터 계속 지끈거리네. 약 먹어도 듣지도 않고..




근데 혜경씨 오늘이 할머니 제사라고 하지 않았어? 일찍 들어가 봐야 하지 않아?



아빠한테 다음 스테이지까지만 하고 간다고 했어




몸도 안좋은데, 에리카 한테는 내가 얘기할테니 조퇴하는게 어때? 혜경씨 타임은 내가 봐줄게.




그럼.. 그래도 될까? 매니저한테는 내가 얘길할게. 유주씨 미안해.. 오늘 컨디션 최악이야.




두통이 너무 심해 구토가 나올 지경이라고 하면서도 지금까지 버틴 것도 그만큼 혜경이가 이 일을 좋아하고 또 책임감도 강하기 때문이다. 일어나려다 비틀거리며 쓰러질려는 혜경이의 팔을 잡아 부축해 주고 뒤에서 겨우 대기실을 나서는 혜경이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유주의 눈에 무언가 희미한 물체가 보이기 시작한다.




유주의 동공이 몇배로 확장되면서 혜경의 어깨위에 걸터 앉아 날카로운 송곳으로 연신 혜경의 머리를 내리 찍고 있는 남루한 소복차림의 삐쩍 마른 왜소한 모습에, 비녀를 꽂은 머리를 한 할머니 영가의 모습이 보인다. 유주는 본능적으로 그게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어린시절 자신을 찾아오곤 했던 아이들처럼 죽은 원혼이 혜경이에게 붙어 있다는 것을 직감한다.




그 순간 갑자기 유주가 자신을 본 것을 알아 챈 것처럼 유주쪽을 불쑥 돌아보는 할머니 영가, 유주는 침착하게 못본체 살짝 웃으면서 혜경이에게 손을 흔드는 제스처를 취하자 그 할머니 영가는 약간 미심쩍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동안 유주를 바라보다 다시 혜경이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다시 송곳같은 물건으로 혜경의 머리를 내리 찍기 시작한다.




에리카의 부축을 받으며 주차장까지 나온 혜경이 자기 차에 오르는데 유주는 왠지 불안한 마음이 점점 커진다.




혜경씨~ 오늘은 운전하지 말고 택시를 타고 가는게 어떨까




두통이 좀 심하지만 그럴 정도까지는 아니야. 신경 써 줘서 고마워~ 내일 보자




유주의 눈에는 혜경의 목뒤에 매달린 그 할머니 영가의 모습이 여전히 보인다. 아무래도 이대로 혜경이를 보내면 안될 거 같은 생각이 들지만 귀신이 보인다고 얘기해도 믿어줄리 없고, 어차피 다른 도리가 없다. 유주는 혜경이의 차가 멀어질 때까지 지켜보다 더이상 혜경의 차가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무거운 발길을 돌려 가게안으로 돌아간다.








5장




밀회






한결의 불꺼진 오피스텔 침대위로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알몸으로 잠들어 있고 한결은 컴퓨터 불빛만으로 헤드폰을 끼고 무언가 작업에 열중이다. 한결의 작업 소리에 잠이 깬 여자가 일어나 시트로 몸을 감싸고 한결에게 다가와 뒤에서 껴안고 한결의 머리와 목뒤에 연신 키스를 퍼붓는다. 여자는 종호가 있는 기획사 사장의 사모님, 아니 정부라고 표현하는게 더 맞을 듯 하다.




우리 이제 이러지 말고 같이 살자. 응? 자기가 다른 사람 이름으로 작곡해 주지 않고 당신 이름으로 곡 발표할 수 있게 내가 서포트 해줄테니, 알잖아. 나 생각보다 능력 있는거




하지만 한결은 여자가 뭘하건 시큰둥하게 하던일만 계속 하고 있다. 여자는 한결이 반응이 없자 더 애가 타는지 한결 무릎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돌려 한결과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만 한결은 일절 눈도 마주쳐 주지 않고 작업에만 열중한다.




한국 싫으면 미국이나 유럽 같은데 나가도 좋고




한결은 그런 여자의 스킨쉽을 되려 귀찮아 하며 그녀의 손길을 뿌리치며 계속 작업에 열중한다. 여자는 내심 서운해 하면서도 한결의 눈치를 살피며 한결의 기분을 맞춰줄려고 노력하는 모습이다.




그순간 갑자기 오피스텔 문이 요란스럽게 열리며 조명이 팍 켜지고 왜소한 남자가 들어선다. 갑자기 켜진 불에 미처 눈이 적응하지 못한 여자가 놀라 시트로 몸을 더 감싸며 비명을 지르는데 한결은 미리 알고 있었던듯 전혀 놀라지도 않는다.




뭐? 뭐야? 누구야? ..여..? 여보!?




들이닥친 남자는 아무말도 없이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여자의 옷가지를 정리해서 여자에게 대충 걸치게 하는 동안 한결은 퉁명스럽게 남자에게 불평까지 늘어 놓는다.




왜 이렇게 늦으셨어요? 연락한지 40분은 더 된거 같은데




뭐? 니가 이이한테 연락했다고?




이제 싫증 났는데, 이렇게 안하면 아줌마가 절대 안떨어 질거 같아서.




뭐? 아.. 아.. 아줌마? 너 그거 나보고 한 소리니?




이 여자가 뭘 잘했다고 큰소리야?




여자는 이 상황에서도 정부인 기획사 사장보다 한결에게 더 화가난 듯 남자에게 끌려 나가면서도 마지막으로 확인하려는 듯 소리친다.




야! 너~ 그럼 그동안 나 가지고 논거야?!



창피하니까 여기서 이러지 말고 집에 가서 나랑 얘기하자구!




그러게 지난 번에 그만 보자고 할 때 조용히 끝냈으면 이런 험한 일은 안당하잖아요. 다짜고짜 멋대로 찾아와서 계속 이러시면 곤란해서요.




너!! 이한결! 내가, 내가 너 죽여 버릴거야! 너 내가 누군지 모르지. 나 잘 못 건드렸어!




조용해! 바람피다 걸렸으면 나한테 미안한 척이라도 해야지! 이놈의 망할 마누라가!




기획사 사장이 여자에게 대충 옷을 걸친 후 여자의 손목을 붙잡고 밖으로 끌고 나간다. 여자는 안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치고 발악을 하며 가지 않으려고 버티지만 기획사 사장의 우악스러운 힘에 당하지 못해 질질 끌려 나가고 만다. 복도 밖에서도 여자와 기획사 사장의 실랑이 소리가 계속 들리지만 한결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헤드폰을 끼고 하던 작업을 계속 해 나간다.




혜경의 무대 대타까지 끝내고 대기실로 돌아온 밤 2시가 넘은 시간, 마지막으로 스테프들과 무대와 홀 청소까지 마친 후에야 대기실로 돌아와 자신의 짐을 챙기러 온 유주를 따라 에리카가 들어온다.




오늘 혜경씨 대타까지 해주느라 너무 고생했어. 늦었으니 오늘은 내 차로 집에 바래다 줄게. 옷갈아 입고 짐 챙겨서 주차장으로 나와




고마워 에리카! 나 이런건 사양 안하는거 알죠?




새벽의 도로는 막힘이 없어 가게에서 유주의 집까지는 15분도 걸리지 않는다. 에리카를 배웅하고 집안으로 들어온 유주는 급격히 피곤이 밀려와 옷도 갈아입지 않은채로 침대 구석에 누워서 마치 엄마 뱃속의 태아처럼 웅크리고 잠을 청해 본다. 하지만 죽을만큼 피곤한데도 쉽게 잠은 오지 않는다. 아니, 잠 들기가 겁이 난다. 고향을 떠나 온 그 날 이후 시작된 악몽 때문에 최근 몇년동안 제대로 잠든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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