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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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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최근연재일 :
2024.06.22 23:40
연재수 :
21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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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7
글자수 :
933,051

작성
23.10.10 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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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정진 (8)

DUMMY

94화


아무리 하지운이 정숙한 환경을 조성하려 노력했다 해도 분명 한계가 있었다.

괴물의 피를 먹고 초인적인 힘을 얻은 불굴의 용사들이 지극히 본능에 충실한 효과음을 쉬지 않고 방출 중이었다.


다시 말해, 덩치가 산만 한 것들이 겁먹고 질질 짜는 마당에, 윽박지른다고 완벽하게 조용해질 리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겁을 주면 줄수록 데시벨이 올라가 버렸다.

상큼한 미소와 다정한 속삭임으로 달래 주려 해도, 하지운의 소름 끼치도록 요사스러운 낯짝이 열정적으로 전방 압박을 하였다.


그들의 지척에서 진입 중이던 용사 무리가 죄다 청각에 이상이 있는 놈들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결국 좌우에서 움직이던 두 무리가 확인을 위해 접근해 왔다.

그러고는 한 마리의 거대한 마귀와 스물한 그루의 아가리가 뚫린 식물들을 발견했다.


아름드리나무들 뒤에 숨은 채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던 용사들의 귓구녕에 하지운의 명백한 조롱이 날아와 꽂혀 버렸다.

긍지가 높은 고결한 전사들이 순간 참지 못하고 결연히 떨쳐 나갔다.


검, 도끼, 철퇴 등 다양한 흉기를 휘두르며 달려드는 전사들을 바라보며, 간담이 서늘해진 하지운이 다급히 마법을 시전하였다.


왼손을 우측 어깨 위로 들어 올린 후, 치명적인 표정을 지으며, 바람의 원소를 맹렬하게 끌어 모았다.

마흔 명이나 되는 용맹한 전사들의 살기등등한 돌격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하지운이 정성을 다해 바람의 칼날을 발동시킨 채로 수평으로 그어 버렸다.


좌우 양쪽에서 몰려온 상황이라, 각기 다른 방향에서 스무 명씩 동시에 덮쳐 오는 중이었다.

하지운을 기준으로 열 시 방향과 두 시 방향에서 넓게 간격을 벌린 상태로 달려드는 적들을, 최단 시간에 가장 작은 소음을 일으키며, 제압하려면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선택한 정성을 다한 바람의 칼날 공격이었는데, 상황이 완전히 좆돼 버렸다.

하지운의 전면으로, 백사십 도 정도 되는 범위 안의, 모든 것이 이등분되어 옆으로 자빠졌다.

심지어 바람의 칼날이 날아간 거리가 삼백 미터가 넘었다.


하지운을 중심으로 반지름 삼백 미터의 원을 그려 놓고, 대충 그 안에 있는 물체 삼분의 일 정도가 반으로 썰렸다고 보면 된다.


족히 아파트 단지 하나는 들어갈 만한 면적의 임야가 단숨에 훤해졌다.

이 숲에서 수백 년을 자라온, 백 그루는 됨직한, 아름드리나무들이 밑동이 썰린 채 엄청난 굉음을 내며 좌우로 쓰러져 갔다.


수백 마리의 놀란 새들이 일제히 퍼드덕거리며 솟아올랐고, 숨죽이며 웅크리고 있던 짐승들이 괴성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도망 다녔다.

사방에서 다발적으로 발생하는 소음들에 하지운의 고막이 운명하실 지경이었다.


솔직히 감각이 극도로 발달한 전사들을 상대로, 각개 격파가 끝까지 가능할 것이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동네방네 자랑을 하면서 싸우려는 생각은 결코 없었다.


하체가 썰린 것도 부족해 거대한 나무 기둥들에 깔려 버린 마흔 명의 전사들이 지옥에서나 들을 법한 고통의 심포니를 선사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하지운조차도 딸꾹질을 그치려, 수납장에서 급하게 꺼낸 물을 유리병째로 들이켜고 있었다.

이 리터 용량의 생수를 원 샷 때린 하지운이 통한의 자기반성을 시작했다.


“아오, 이 씨발! 밥 처먹을 시간에 딱 한 번이라도 연습해 보고 나올걸! 환골탈태를 두 번이나 했는데! 위력이 같을 수가 있나! 아오, 이 병신! 힘 조절하는 연습을 했어야지! 씨발! 나라는 새끼는 어떻게 돼먹은 게! 아니, 씨발! 여기 와서 몇 달을 굴렀는데 발전이 없어! 발전이! 이러니까 승아가 올 때마다, 불안하다고 잘하자고 신신당부를 하지!”


다음 주에 그녀가 오면, 또 얼마나 매섭게 혼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하지운 군의 여자 친구는 몸과 마음이 성숙한 초미녀 귀신이라, 애처럼 괜한 트집 잡고, 남친의 잘못을 부풀리는 떼쟁이가 아니다.

혼낼 만할 때만 혼내는 합리적인 엘프녀다.

그래서 성질이 지랄 같은 하지운도 찍소리 못하고, 고분고분하고 진지하게 혼이 나곤 하는 것이다.


이번에도 충분히 혼낼 만해 보인다.

하지운 자신 같아도 한 소리 할 것 같다.

결국 그는 일주일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반성문을 쓰기로 작정했다.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손 편지를 작성해서, 자신의 뉘우치는 마음을 절절하게 표현할 생각이다.


일단 반성문은 손님들 다 치우고 나서 써도 늦지 않다.

승아에게 용서받을 방도를 마련하고 난 후에야, 뻔뻔한 하지운의 눈에 마흔 명의 용사님들이 들어왔다.


이렇게까지 할 의도는 없었는데, 미안해서라도 빨리 천당으로 보내 드려야 할 상황이었다.

아비규환의 지옥 속에서 몸부림치던 용사들에게 양 손등을 내민 하지운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미안해요! 모두들 금방 편하게 해 드릴게요! 잠깐만 따끔하면 금세 죽어요! 고통 없이 보내 드릴 테니까 잠시만 참아요! 정말,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하지운이 급하게 가시를 세웠다.

마흔의 전사들이 애간장이 타들어 가는 듯한 비명을 지르며,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 이 미친 악마야! 하지 말라고! 저리 가란 말야!”

“으아아아악! 이 마귀는 대체 뭐야? 로저는 어디 가고 이런 마귀가 지랄이야?”

“으허어억! 으아악! 죽고 싶지 않아! 악마와 싸운다는 얘기는 없었잖아! 말이 다르잖아!”

“험프리 이 미친 새끼! 악마와도 원수를 진 거야? 도대체 이 악마는 우리한테 왜 이러는 거야?”

“어윽... 어흑... 엄마... 보고 싶어... 어흑... 죽고 싶지 않아... 빌어먹을... 로저만 죽이면 된다고 했잖아... 마족이랑 싸울 줄 알았으면, 여기 안 왔어... 집에 가고 싶어... 흐흑...”

“으아아아악! 이 빌어먹을 영감탱이! 날 죽이고 첩년 새끼한테 한 재산 다 물려주려고! 다 알면서! 이럴 줄 알면서 날 속인 거야! 빌어먹을 그 늙은이는 인간도 아니야! 저 마귀나 그 늙은이나 다 똑같은 흉물이야! 아아악! 난 속았어! 원통해! 죽어서도 저주하겠다! 늙은이! 첩년! 첩년 새끼! 다 죽어 버려!”

“빌어먹을! 그런 거였구나! 우리 집도 첩년이 새끼를 깠어! 으아아아악! 쓰레기 같은 늙다리가 조강지처가 낳은 날 버렸어! 이럴 수는 없어! 어머니! 왜 절 버리고 먼저 가셨나요? 조금만 더 오래 살아 주시지! 왜! 아아악!”

“험프리! 이 매스꺼운 패륜아 놈이 우리까지 버리다니! 우리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거야! 조카를 죽이고 처남까지 버릴 때, 알아봤어야 하는 건데! 내가 어리석었어! 저주받을 험프리 이 망할 놈아! 뒈져 버려!”


하지운은 펑펑 울고 싶었다.

이분들의 오해도 다 풀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부질없는 짓 같아 보였다.

누가 봐도 지금 이분들과는 차분한 대화가 될 성싶어 보이지를 않았다.


조용히 가시를 꽂아 드리고 쪽 뽑아 먹었다.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가루들이 허공에 어지러이 흩날렸다.

악을 쓰며 울부짖던 마흔이나 되는 용사들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시장 바닥 같던 숲속이 섬뜩하고 소름 끼치는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 쓴 주사 바늘을 본모습으로 되돌려 바닥에 털어 버린 하지운이 고개를 돌렸다.

스무 그루의 묘목들이 머리를 땅에 처박고 숨죽여 울고 있었다.

성깔이 보통이 넘을 것 같던 변신 청년조차 시선을 땅바닥에 고정한 채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있었다.


“야, 너. 변신해서 도망치려고 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안 했구나. 바보는 아니었네. 네가 하찮은 수작을 부린다고 놓쳐 버릴 흙의 원소들이 아니지. 너도 그 정도는 느낀 모양이네. 너 눈치가 빠른 놈이구나. 그럼 내가 묻는 말에 고분고분 대답하는 게, 널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는 것도 알고 있겠네.”

“물론이오. 빨리 물어볼 거 물어보고... 단칼에 죽여 주시오. 부탁하오.”

“그래, 나도 그게 젤 좋다.”


하지운도 청년과의 대화를 서둘러 마치고, 일분일초라도 더 빨리 죽여 주고 싶었다.


눈앞의 청년이 소유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신체 변형’ 능력이나, 저승의 ‘권능 목록’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투명화’ 능력 같은 경우 치명적인 제약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운이 차마 선택하지 못하고 넘긴 이유가 명확히 존재했던 것이다.


그 제약은 바로 능력을 제대로 사용하려면 옷을 벗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개선의 여지조차 없다.

전생에 왜소한 멸치였던 하지운이 어찌 감히 고를 엄두를 낼 수 있었겠는가.


지금 이 순간 청년의 처절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다.

의연하고 매서운 청년의 기백을 보고도 스무 명의 거친 남정네들을 이용할 아이디어가 퍼뜩 떠오른 것에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곳 시간으로 오늘은 시월 이십 일이다.

비록 이곳의 기후가 온난한 편이라 해도, 원래 숲속은 상대적으로 체감 기온이 낮다.

가을 날씨에 숲 한가운데서, 알몸의 청년을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다.


필요한 질문만 짧게 하고 청년을 보내 주려던 하지운이 순간 움찔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자신 때문에 훤히 뚫려 버린, 전방을 바라보니 멀리서 조심스럽게 접근해 오는 백사십 인의 용사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안 되겠다. 넌 좀 이따가 보자.”


한숨을 쉬며 청년을 머리만 남기고 땅에 묻어 버렸다.

백사십 인의 전사 중 대충 열 명 정도가 여성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야비함조차 인간의 굴레를 벗어나고 있던 하지운도, 차마 이 순간만은, 같은 남자로서 더 이상의 수치를 줄 순 없었던 것이다.

눈빛이 냉혹한 청년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고, 고맙다...”


작가의말


 오늘은 겨우 자기 전에 올리네요.

 행복합니다. 다들 안녕히 주무세요.^^


 [수정] 중간에 날짜 고쳤습니다.

 마지막 부분을 새벽에 쓰느라 실수가 있었네요.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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