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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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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최근연재일 :
2024.06.22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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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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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3,051

작성
23.09.21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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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쪽

인연 (12)

DUMMY

84화


홀 안에선 오로지 장작 타들어가는 소리만 요란했다.

바닥에 엎드려 있던, 네 명의 남녀노소들은 숨소리조차 제대로 낼 수가 없었다.


정보 장사를 업으로 삼아, 남들의 온갖 추잡스러운 비밀을 다 꿰고 있던 그들이다.

세상에 자신들이 모르는 비밀 따위는, 엔간해서는 없을 거라고 믿어 왔다.

그런데 실상은 “전혀 아니올시다.”였다.


왕국 내 위험인물들 중에서도 군계일학의 폭력배인 로저 드레이시에 대해, 자신들이 몰라도 너무 모르고 있었다.


길드의 실세 중 하나인 대장장이 노인은 수십 년 만에 느껴 보는, 신선하기 짝이 없는, 무기력함에 전신의 진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고개를 살짝 들어, 하지운의 바뀐 외모를 찬찬히 훑어 내렸다.


이곳 할링튼으로 다급하게 말을 달리는 도중에, 관측 요원들로부터 ‘로저의 외모가 바뀌었다.’는 전갈을 받은 상태였다.

이미 알고서 놈과 마주쳤음에도, 노인은 순간이나마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네의 연식을 감안하면, 짧은 간격으로 연달아 겪은 충격에, 염통 걱정을 해야 할 판이었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서 풍기는 그의 초탈함과, 반백 년 동안의 정보 장사질로 연마된, 두꺼운 낯짝이 순간 눈부신 활약을 펼쳐 냈다.

그 덕에 놀란 기색을 가까스로 감출 수 있었던 것이다.


방금 놈이 무심한 듯 선보인 위대한 업적을 접하고, 놈의 외모를 다시 목도하니, 갈 날도 얼마 안 남은 노인네가 또다시 심장 질환을 우려할 상황이 되었다.


‘인간의 외모가 그냥 바뀔 리가 있나... 이 괴수 놈이 대습지에서 뭔가 특별한 경험을 한 모양이구나... 미리 염두에 두었어야 했거늘... 내가 너무 성급했다... 너무 경솔했어... 일이 이렇게 꼬여 버리다니...’


늙은 여우 같은 그도 이 순간만은 어떻게 타개해 나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영특하고 재기 발랄한 증손녀가, 자신을 염려한 나머지, 이런 어리석은 실수를 저지를 것도 응당 예측하고 단속해 뒀어야 했다.


‘내가 너무 늙었구나. 오래전에 손을 놨어야 하는 것을... 노욕이었다... 저 사랑스러운 것을... 어떻게든 떼어 놓고 왔어야 했는데... 저 어린것을 어이할꼬...’


“영감, 너무 늙어서 본인 이름도 기억 안 나? 그러면 친구들 이름도 다 까먹었겠네? 도로 기억나게 내가 도와줘야 하는 건가? 그건 진짜 싫을 텐데... 내가 뭔가를 도와준다고 했을 때, 안 우는 연놈을 본 적이 없거든. 증손녀랑 같이 끌어안고 울고 싶어서 그래?”

“......”

“너희같이 남의 약점을 파먹고 사는 것들의 문제가 뭔지 아느냐? 상대가 무기력하게 굴복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본다는 거다. 그러다 보니 자신은 과대평가하고, 타인은 과소평가하는 치명적인 습성이 대가리에 밴다는 거지. 이건 비슷한 입장에 있어 본 내가 잘 알아. 나도 방심하다가, 지금은 무일푼의 대역죄인이 되지 않았느냐.”

“......”

“봐라. 지금의 내가 약점이랄 게 있느냐? 인질 잡을 피붙이가 남아 있기를 하나? 내 부재 시에 털릴 근거지가 존재하기를 하나? 고작 내 몸뚱어리 하나 남았는데, 네놈들의 역량으로 날 제압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느냐? 네놈들이 내게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편의’밖에 없지 않느냐? 내가 만약... 귀찮음을 감수하겠다면 말이다. 네놈들이 굳이 이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나?”

“......”

“뱃속에 칼을 품고 웃는 낯으로 상대를 대한다느니 하는 짓은 말이다. 네놈들 따위나 해야 하는 짓이지, 내가 굳이 왜 그래야 하나? 그냥 웃는 낯으로 다 때려죽이면 그만인 것을. 복잡한 놈들 다 죽이고, 상놈들과 농노들만 남겨 두어도 난 별지장 없을 것 같은데... 그때 가서 농노들 징발해 광산에 집어넣어도 별문제 없을 것 같은데, 안 그런가?”

“......”

“거래를 하려면 내 입장에서 상대를 볼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상대를 헤아려야지. 장사한다는 놈들이... 그게 기본 아닌가? 이제 네놈들이 내 입장이 되어서, 날 한번 헤아려 보아라.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최선일지 답이 나오지 않겠느냐.”


잠시 후 대장장이 노인이 긴 한숨을 쉬며, 흐느적흐느적 몸을 일으켰다.

노구를 찬 돌바닥에 눕혀 놓고 있어서 그런지, 일어서는 움직임이 굼벵이가 따로 없었다.


물끄러미 하지운을 바라보던 노인이 허리를 두드리며 벽난로 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타들어 가는 장작을 멍하니 들여다보던 하지운이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노인을 눈으로 반겼다.


“실례가 많았소, 백작. 워낙 오랫동안 잊고 있던 이름인지라, 얼른 떠오르지가 않더군. 니콜러스 롱그레이요.”

“저런... 실례는 내가 저질렀군. 콜린이란 이름이 가명인 줄 알았더니 애칭이었군요. 예상보다 더 지체 높은 분이셨군. 방금까지 늘어놓은 막말들은 모르고 지껄인 것이니 잊어 주시오.”

“물론이오. 몰락한 지 육십 년이 넘은 가문이오. 나는 오히려 젊은 그대가 알고 있는 것이 신기하군.”

“칼질이나 하고 다니던 놈이라고, 지나치게 무시하시는군. 영광스러운 우리 가문의 늙은이들이 차기 가주가, 그 정도로, 무식한 상태로 커 가는 것을 용납했을 것 같으시오?”

“저런... 피곤하셨겠군.”

“거기 롱그레이 가문의 영애께서도 일어나시오. 찬 데서 계속 엎드려 있다가 입 돌아가겠소.”

“저 아이의 허물을 덮어 주시려는 거요? 참으로 감사하오.”

“증손녀가 이름은 어떻게 되오? 간단히 인사나 나누고, 자리를 피해 줬으면 하는데. 이제는 굳이 인질이 필요 없으니 말이오.”

“로히즈, 어서 백작께 감사의 인사를 올리거라.”

“각하, 진실로 감사드리옵니다. 응당 목이 잘릴 거라 생각하고 많이 두려웠사온데, 자비를 베푸실 거라고는 생각 못 했나이다. 저희가 알고 있던 것 중, 잘못된 것들이 생각보다 많은 것 같아 심히 부끄럽사옵니다.”

“나야말로 실례가 많았소. 귀한 집안 따님이신데, 내가 미처 모르고 무례를 저질렀군. 이만 저 친구들을 데리고 외성으로 가서, 쉬고 계시오. 그대가 걱정하는 것처럼, 그대의 증조부에게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는 일은, 내 결코 없을 것이오.”

“다시 한번 사죄와 감사의 말씀을 올리옵니다. 다음에 제대로 인사를 올리도록 하겠나이다. 그럼 말씀들 나누소서. 소녀는 이만 나가 보겠나이다.”


세 젊은이가 예를 표한 후 재빨리 자리를 피했다.

그들을 응시하고 있던 하지운이 고개를 돌려, 니콜러스 경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건넸다.


“저 아이들 아직 한참 멀었소. 은신 능력이랍시고 기운 감추는 훈련만 잔뜩 시킨 모양인데, 어설픈 놈들에게나 통할 잔재주요. 나는 말할 것도 없고 거버스 정도만 되어도, 저 아이들은 대번에 목이 잘릴 것이오. 아니, 대번에 죽으면 다행인 건가? 놈의 별명이 북부의 색마인데, 그대의 증손녀 정도의 외모면, 차라리 바로 죽는 것이 행운이겠군.”

“정말 감사한 말씀이오. 조직 내에 무예가 출중한 자들이 부족해, 아이들이 제 놈들의 역량을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있소. 한 마디로... 주제 파악을 못하고 있어, 통제하느라 참으로 골치가 아프오. 그대의 짐작이 맞소. 우리도 머리 위에 얼굴도 모르는 상전을 모시고 있으려니, 이제는 지긋지긋하고 거추장스럽소.”

“왜 아니 그렇겠소? 이해하오. 무엇보다 그대 정도의 인물이, 비록 가문이 역도로 몰려서 몰락했다고는 하나, 신분이 동등할 것으로 예측되는 인물을 상전으로 모시고 사는데 짜증이 안 날 수가 있겠소?”

“허허. 솔직히 그건 상관없소. 망한 지가 언제인데... 다만 우리가 일을 꾸밈에 있어, 해도 되는 일과 안 되는 일을 구별할 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요. 아니, 주군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미리 조심할 것 아니요! 난데없이 이유도 모르고, 목이 떨어지는 일이 생긴다는 말이오.”

“푸흑... 정말 그렇군... 크흑. 누군지도 모르는 놈의 심기를 읽어야 하다니, 그대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겠군.”

“차기 권력이 정해지면, 상층부의 누군가와 직거래를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오. 상전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동등한 입장에서 하는 거래 말이오. 그 망할 놈의 전언을 받겠다고 노심초사 기다리는 짓도, 짜증이 나서 못 해 먹겠소!”

“그런데 애초에 자금을 대고, 그대 같은 이들을 불러 모아, 조직을 꾸리도록 지시한 것이 그 상전 놈 아니오?”

“그건... 맞소. 하지만, 무려 오십 년이오. 반백 년을 충성했더니 이제는 정말 지치는구려.”

“솔직한 대답 감사하오. 그런데, 롱그레이 공. 그대는 친우들과의 의리를 위해 목숨이라도 거실 작정이오? 아니, 그대의 이름은 쉽게 털어놓고, 동료들의 이름은 말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뭐요?”

“아니, 나야말로 묻겠소! 그들의 이름을 듣는다고, 그대의 가문에 죄를 지은 놈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안다는 것이오? 그놈의 이름을 듣는다고!”

“명단이 있소.”

“... 뭐, 뭐요? 너... 정말로 악마와 계약한 것이냐?”


순간 하지운이 짜증이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럴 리가 있겠소? 당신 정도 되는 사람이 뭐 그딴 질문을 하고 있는 거요? 이곳은 ‘그분’의 진정한 권능이 뒤덮고 있는 곳인데, 고작 악마 따위가 어떻게 설친다는 것이오?”

“악마 타령은 그대가 시작한 것이 아닌가!”

“그 네 놈이 하루도 못 버티고, 영감네 졸개들에게 납치될 줄 누가 알았나? 정보 장사를 하는 양반이 역정보질도 모르오? 다른 놈들을 엿 먹이려고 한 짓 아니오!”

“아니! 이 어린 친구야! 누가 역정보질을 그렇게 무식하게 해? 악마라니! 화형당하고 싶어? 각지의 예배당에서 눈이 뒤집힌 신부들이, 당장 자네를 불태워 죽여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꼴을 보고 싶은 건가? 농노들까지 쇠스랑을 들고나와, 자네를 쫓겠다고 설치는 꼴을 보고 싶은가? 진정 그들을 다 때려죽일 작정인가?”

“어, 그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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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정진 (9) 23.10.12 57 3 9쪽
95 정진 (8) 23.10.10 62 3 10쪽
94 정진 (7) +3 23.10.08 67 3 9쪽
93 정진 (6) 23.10.06 63 4 9쪽
92 정진 (5) 23.10.04 62 3 9쪽
91 정진 (4) 23.10.02 60 4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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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 정진 (2) 23.09.29 67 3 9쪽
88 정진 (1) 23.09.27 75 3 9쪽
87 인연 (14) 23.09.25 75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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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인연 (5) 23.09.09 88 2 9쪽
77 인연 (4) 23.09.08 87 3 9쪽
76 인연 (3) 23.09.06 87 3 9쪽
75 인연 (2) +2 23.09.05 93 3 9쪽
74 인연 (1) 23.09.03 93 3 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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