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바

최고길동 님의 서재입니다.

죽은 줄 알았지?

무료웹소설 > 일반연재 > 퓨전

새글

최고길동
작품등록일 :
2023.06.10 19:32
최근연재일 :
2024.09.12 04:29
연재수 :
257 회
조회수 :
27,745
추천수 :
567
글자수 :
1,096,876

작성
24.03.28 22:39
조회
42
추천
1
글자
12쪽

웬도버의 봄 (15)

DUMMY

176화


“이 병신들이 병력의 부족함을 핑계 삼을까 봐, 무려 열세 개 주를 뒤져서, 팔백여 명에 달하는 잔당들까지 내 손수 잡아다 주었소. 그대들도 다 보지 않았소? 사지 멀쩡한 상태로 놈들과 합류하도록 보내 주었던 것을. 그러면 뭘 하겠소? 삼천이 훌쩍 넘는 대병력이 제대로 된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박살이 나 버리지 않았소. 병신 같은 것들.”

“공의 말이 옳소!”

“돼지 같은 것들이 궁정 생활에 찌들어, 전혀 심신이 단련돼 있지 않았소! 전사로서 보기가 심히 민망할 정도였소!”

“맞소! 우리가 변경에서 괴물들과 피땀 흘려 가면서 드잡이질을 할 동안, 이 돼지들은 그저 궁에 처박혀서는 협잡질이나 하느라 세월을 허비하고 있었소!”


솔직히 하지운의 말에 아무도 공감하진 않았지만, 노회한 변경의 제후들은 그딴 것에 별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여 가며 리액션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대들의 뜻도 그러하니, 내 이번 기회에 왕성을 한번 깨끗이 청소해 볼까 하오! 아머릭이나 그 옆에 빌붙어 있던 벌레들이나 너무 오랜 시간 동안 썩어 문드러져 있었소. 이는 변경에서의 고달픔을 이유로, 왕성의 일에 무관심해 왔던 우리의 책임도 크오. 내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려 하는 마당에, 귀공들도 팔을 걷어붙이고 힘들을 보태야 하지 않겠소?”

“로저 공의 말이 지극히 옳소!”

“그대가 솔선해서 궁정의 쇄신을 이끌겠다는데, 우리가 어찌 모른 척할 수 있다는 말이오? 우리도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소!”

“과연! 명망 높은 드레이시 가문의 장자답구나! 그대의 말에 크게 감명을 받았소!”

“맞소! 그대가 나서 주겠다니,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오!”


자식들까지 불구가 된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꼴을 보고, 정신이 완전히 망가지기 직전까지 몰린 비운의 왕 험프리였다.

아머릭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 기록될 전직 매제를, 사려 깊은, 하지운이 부드럽게 정수리를 발로 토닥여 주면서 다정하게 위로해 주었다.

그러고는 간교한 선동질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최후의 공증인을 출석시켰다.


“주임 신부께서는 안으로 드시지요!”


대지진으로 인해 제국이 소멸된 후, 십 왕국의 성직자들은 자진해서 고위 성직자의 직함들을 내던져 버렸었다.

감히 ‘그분’의 분노를 감당할 수가 없어, 성직자들 스스로 기약 없는 자숙의 시간에 돌입했던 것이다.


대주교와 대수도원장의 직함이 사라진 후, 성직자들의 실질적인 수장 역할은 대대로 웬도버 교구의 본당 주임 신부가 맡아 왔다.

물론 대관식을 주관하는 것도 주임 신부의 고유한 책무이자 권한이었다.

따라서 험프리의 폐위에 앞서, 놈의 대갈통에 금관을 씌워 주었던, 주임 신부의 의견까지 첨가하는 건 매우 요긴한 행위라 할 수 있다.


“예하께서는 그간 별고 없으셨는지요?”

“왕성에서 편히 지내는 이 몸이 별고라 할 게 무에 있겠소... 그... 잘 지내셨소, 백작?”


다소 복잡한 심경을 감출 수가 없던 초로의 사제가 착잡한 표정으로 응대를 하였다.


“제가 감히 예하를 들라 마라 하는 것이 불경한 일인 줄은 아오나, 사안이 워낙 엄중한지라 실례를 범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그런 말씀 마시오, 백작! 그래, 내게서 듣고 싶으신 말씀이 무엇이오?”

“예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그분’의 은총을 받고 잠시나마 이곳으로 되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이 자리에서 험프리 왕에게, 저와 제 가문이 당한, 부당한 억압에 대한 책임을 묻고 있나이다.”

“......”

“혹여나 예하와 사제들께서는 이 일에 대해 하교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오! 그대의 부활과 그에 따른 일은 오로지 ‘그분’의 의지가 깃든 일일진대, 그분의 종에 불과한 우리가 어찌 감히 간섭할 수 있다는 말이오! 이번 일에 대해서만큼은 사제단이 나서는 일은 결단코 없을 것이오. 백작께서 알아서 잘 마무리하도록 하시구려.”

“그러시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예하.”

“그럼 저는 이만 예배당으로 돌아가 보겠소. 오늘... 그분의 곁으로 떠난 이들이 워낙 많은 터라... 내 밤새도록 기도라도 올려야 할 것 같소...”


겨우 뼈 있는 말 한마디를 토해 낸 주임 신부가 식은땀을 흘리며 황급히 홀을 빠져나가 버렸다.

싱긋이 웃은 하지운이 험프리의 볼을 툭툭 차면서 상큼한 한마디를 던졌다.


“야, 다 끝났다. 이젠 나가서 뒈지는 일만 남았어, 이 병신아.”

“이, 이럴 순 없어... 난 왕이야... 네, 네놈이 내게 이래서는 아니 돼! 여봐라! 경들은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네놈들도 모두 내 신하들이 아니더냐? 어찌 보고만 있는 것이냐? 이, 이놈을 죽여라! 너희 모두 공작의 작위와 수백 개에 이르는 장원을 내려 주마!”


영주들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불과 사 년 전에 이 자리에서 선왕 스티븐이 비슷한 대사를 외치며 울음을 터뜨렸었다.

그리고 그런 조카를 내려다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던 험프리다.

아무리 콩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러 달려온 야심가들이라 해도, 기분이 착잡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지랄 염병하네. 너한테 그럴 땅이 남아 있기는 하냐? 네 땅 대부분을 내가 털어먹었을 텐데. 아니야, 영감?”

“맞다. 남아 있는 왕령지가 본래의 삼 할도 안 된다.”

“저런... 들었어? 너 거지 다 됐다는데. 그리고 이 병신아... 크큭... 여기 순수한 복수심으로 온 건 우리 가문 애들뿐이야. 다른 놈들은, 굳이 여기까지, 뭐 하러 귀찮게 따라왔을 듯싶으냐?”

“......”

“너랑 네 졸개들 뒈지고 나면 생길 공백을 생각해 봐라. 쟤들 눈에 얼마나 먹음직스럽게 보이겠냐? 여기서 네가 뒈지길 조금이라도 더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게 과연 누구일 거 같아? 나일까? 아니면 저놈들일까? 왜 이래? 반역의 대가께서... 볼썽사납게... 쯧쯧. 아이, 진짜! 못 보고 있겠다! 안쓰러워서!”


오로지 험프리의 피붙이들과 한 줌밖에 안 남은 중신들만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릴 뿐이었다.

변경의 영주들은 ‘어머, 들켜 버렸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며, 피식피식 웃느라 말씀들이 없으셨다.


왕족들과 중신들을 둘러보며 히죽거리던 소시오패스가 갑자기 움찔하더니 금세 얼굴이 일그러져 버렸다.


“아이씨... 쟤를 까맣게 잊고 있었네... 야, 이도니아. 잠깐만 이리 나와 봐. 우리 얘기 좀 하자.”


덜덜 떨고 있던 왕족들 사이에서 홀로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태자비가 순간,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하지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순순히 걸어 나와서는 상냥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야, 이 콘체스터의 촌놈아! 넌 예의를 콧구멍으로 배웠니? 난 아직도 엄연히 태자비야! 법도 좀 지켜, 이 촌구석의 살인마야!”

“성질은 여전하구나. 아, 됐고. 넌 어떡할래? 이 버러지들 따라서 죽을래? 아니면 저 집구석으로 개가해서 태자비 계속할래? 너라면 저 집구석에 정통성을 안겨 줄 수도 있고. 무엇보다... 난 네가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줬으면 좋겠는데...”


하지운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에는, 당황해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 개레스 먼틸리와 그의 장남 레지널드가 눈을 뒤룩거리고 있었다.


“허... 너 죽었다가 살아 돌아왔다더니... 사람 흉내를 다 내려고 하는구나! 왜? 네가 이러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감사 인사라도 하실 것 같아?”

“나 따위가 감사는 무슨... 그냥 얼른 대답이나 해. 이것들 따라서 죽을 거냐고?”

“내가? 내가 왜? 내가 미쳤어? 그런데 저 집안 얘기도 들어 봐야 하는 거 아냐? 먼틸리 가문에서 날 며느리로 받아 주겠대? 표정들 보니까, 저들도 생판 처음 듣는 얘기인 거 같은데?”


이도니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개레스 먼틸리가 튀어나와서는 두 팔 벌려 환영의 뜻을 밝혔다.


“태자비께서는 염려치 마시오! 본인은 대환영이오! 아름다운 태자비를 며느리로 맞게 되다니, 우리 가문으로서는 참으로 영광이 아닐 수 없소!”

“아! 이도니아, 너 혹시 임신 중인 건 아니지?”

“푸흡... 그건 걱정 마, 살인마야! 친애하는 서방님이자 사촌 오라버님인 웨더비의 로버트는 사실... 듬직한 사내들을 더 좋아하거든. 그래서 날 쭉 멀리해 왔어. 얼마나 다행이니? 정말... 불행 중 다행이야...”

“씨발! 존나 다행이네! 정말 잘됐다!”


이도니아의 부친 레이먼드는 전대 테인브리지의 백작이자 선왕 스티븐의 숙부였다.

즉 험프리의 친동생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선왕 스티븐의 마지막 수호자들 중 한 명이었다.


사 년 전, 스티븐 왕을 지키기 위해, 검을 꼬나 쥐고 이 자리에 섰던 마지막 충신들 중 한 사람이었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로저 드레이시의 망치에 머리통이 박살 나고 말았었다.


자신을 정면으로 거스른 친동생에게 극도로 격분한 험프리 놈은 골육의 목숨을 빼앗아 놓고도 결코 만족하질 못했다.

그래서 괘씸한 친형제의 유일한 피붙이, 즉 질녀를 잡아 와서는 강제로 며느리를 삼는 독특한 기행까지 벌였었던 것이다.


그래도 험프리의 그 지랄 덕에 이도니아는 놈의 조카 중, 목숨을 부지한, 유일한 생존자가 될 수 있었다.

험프리의 조카로 살아남는다는 건 이토록 모질고 험난한 일이었던 것이다.


어찌 되었든, 하지운으로서는 로저에게서 물려받은 원한 중에서도 가장 지독한 원한 중 하나를 대면해 버린 상황이다.


“이도니아, 지금이라도 레이먼드 공에 대해... 네게 사죄하고 싶다.”

“하아... 지금 네가 이 역겨운 험프... 아니... 폐하에게 하고 있는 짓거리를 봐서는... 변한 게 하나도 없는 예전의 네놈 그대로인데... 그럼 그때도 완전히 미쳤던 건 아니었나 보네? 그런데 이제 와서? 하아... 망자가 되고 나서야? 됐다! 됐어! 이미 죽은 너에게 원한은 무슨 원한! 그리고 사실 나... 너희 집안이 망했다는 얘길 듣고 많이 행복해했었어. 그러니 뭐...”

“그건 자식으로서 아비를 살해한 원수에게 당연히 품을 수밖에 없는 심정이 아니냐. 그걸 굳이 가져다가 원한과 같이 저울질할 수는 없다.”

“됐다니까! 사과를 받는다고 내가 더 행복해질 리가 없잖아! 오히려 네 마음이 더 편해지면 모를까! 정 홀가분한 마음으로 저승에 돌아가고 싶거든, 로킹엄 성이나 한번 들러. 벨펀트 공이 편찮다더라. 네놈에게 사람의 마음이 손톱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한 번은 찾아가서 고개를 조아려야지.”


아머릭 가문 사람이라 해도, 마구잡이로, 죽일 수 없는 존재가 남아 있다는 걸 그동안 완전히 망각하고 있던 하지운이다.

정보 길드 노인네들에게 다가간 하지운이 낮게 뇌까렸다.


“영감들한테는 미안한 말인데... 난 쟤 못 죽여. 레이먼드의 딸내미는 건들지 마. 내가 쟤를 잊어 먹고 있었어. 우리 약속이 어찌 되었든 간에 쟤는 예외야. 쟬 건드리면 아무리 영감들이라도 재미없을 거야.”


하지운의 협박에 노인네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버럭 짜증을 내 버렸다.


“우리가 언제 네놈에게 테인브리지 백작의 후손을 남김없이 죽여야 한다고 애원이라도 했느냐?”

“그러니까! 좋은 말로 시작할 것이지! 이놈의 주둥이에서는 왜 항상 협박부터 튀어나오는 거야?”


여섯 노인들의 입장에서도 테인브리지 백작은, 아머릭 왕가의 사람이기 이전에, 동병상련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아, 그래? 잘됐네. 그럼 이제 더 이상 신경 쓸 것이... 없네. 없어. 자, 일단 우리 만찬부터 즐깁시다. 당장 식사 준비해!!”


뱃가죽이 등에 붙은 하지운이, 인간 방석 험프리의 양 무릎을 밟아 버리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숨어 있던 왕성의 요리사들이 부리나케 달려 나와 불을 지펴야 했다.

불청객들의 맛 평가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결정될 게 불을 보듯 뻔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어때요?

< >

Comment ' 0


댓글쓰기
0 / 3000
회원가입

죽은 줄 알았지? 연재란
제목날짜 조회 추천 글자수
199 즐거운 훈련 (4) 24.05.14 27 1 10쪽
198 즐거운 훈련 (3) 24.05.11 33 1 10쪽
197 즐거운 훈련 (2) 24.05.09 27 1 9쪽
196 즐거운 훈련 (1) 24.05.08 27 1 10쪽
195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7) 24.05.06 31 1 10쪽
194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6) 24.05.04 28 1 10쪽
193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5) 24.05.02 26 1 10쪽
192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4) 24.04.30 29 1 10쪽
191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3) 24.04.28 39 1 10쪽
190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2) 24.04.25 31 2 9쪽
189 보복에 임하는 그의 자세 (1) 24.04.23 31 1 10쪽
188 새 역사 창조의 건아 (11) 24.04.21 28 1 9쪽
187 새 역사 창조의 건아 (10) 24.04.19 31 1 10쪽
186 새 역사 창조의 건아 (9) 24.04.17 32 1 9쪽
185 새 역사 창조의 건아 (8) 24.04.16 38 1 10쪽
184 새 역사 창조의 건아 (7) 24.04.13 36 1 10쪽
183 새 역사 창조의 건아 (6) 24.04.11 35 1 9쪽
182 새 역사 창조의 건아 (5) 24.04.09 33 1 9쪽
181 새 역사 창조의 건아 (4) 24.04.07 41 1 9쪽
180 새 역사 창조의 건아 (3) 24.04.05 38 1 10쪽
179 새 역사 창조의 건아 (2) 24.04.03 36 1 10쪽
178 새 역사 창조의 건아 (1) 24.04.02 38 1 11쪽
» 웬도버의 봄 (15) 24.03.28 43 1 12쪽
176 웬도버의 봄 (14) 24.03.26 41 1 10쪽
175 웬도버의 봄 (13) 24.03.25 43 2 10쪽
174 웬도버의 봄 (12) 24.03.22 39 1 10쪽
173 웬도버의 봄 (11) 24.03.21 37 1 10쪽
172 웬도버의 봄 (10) 24.03.18 43 1 10쪽
171 웬도버의 봄 (9) 24.03.17 45 1 10쪽
170 웬도버의 봄 (8) 24.03.15 39 1 9쪽

구독자 통계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장난 또는 허위 신고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며,
작품 신고의 경우 저작권자에게 익명으로 신고 내용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신고
비밀번호 입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