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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죽재

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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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운
작품등록일 :
2019.06.28 09:02
최근연재일 :
2020.08.12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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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29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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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화. 학회의 밤은 길었다(3)

DUMMY

무언가 적혀있어 거뭇거뭇한 글자가 보이는 종이는 자연스럽게 현우의 눈길을 끌었다.

그가 편지임이 분명한 종이의 내용에 얕게나마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라이카는 이내 손을 구부리며 종이의 나머지 부분을 구겨버렸다.

손아귀에 든 종이를 읽어낼 방법은 현우에겐 없었다. 독심술을 쓰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내용을 알 수 있을까.

그래도 시도라도 해보고자 골똘히 생각에 잠겨 찌푸려진 현우의 미간을 바라본 그녀는 살짝 웃음망울을 터트리며 말했다.


"날개의 마법사, 저를 찾으신 건 아마 당신이 죄가 없다는 것을 증명해달라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겁니다. 맞나요?"

"그건 누구나 생각했을 법한 이야기죠. 그런데, 그걸 아시는 분께서는 여기서 무슨 일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혹시 저를 일부러 피하신 건가요? 아니지... 그럴 리는 없어."

"맞아요. 설마 그랬다면 제가 진에게 흔적을 부탁하지 않았겠지요. 그렇지, 진?"


라이카의 주변을 떠돌던 정령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그녀가 원했던 것은 그를 지키는 아드리안과 니암은 내버려두고, 오직 그와 독대하는 것이라.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들 자신과 독대를 원할 줄이야. 이것도 영광이라면 영광이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스스로의 몸값이 오르게 된 거냐, 장현우.'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짓는 그에게 라이카는 손을 내밀며 제안을 건넸다.


"여기서 계속 이야기를 하기에는 서로 서있는 것이 불편할 지도 모르니, 어디 앉을 곳에 들러 진득하게 얘기를 해봐도 괜찮겠습니까?"

"그건 혹시 제가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준다는 지지선언으로 받아들여도 괜찮을까요?"

"너무 직선적으로만, 핵심만 파고들려 하는 것이 항상 옳은 길은 아니랍니다. 때로는 돌아가는 것이 정론이자 더 빠를 수도 있음을 아시기를."

"그게 지금 일과 무슨 상관이 있는 건가요? 전혀 뜬 구름 잡는 소리 같은걸요."

"너무 속 보이는 직언을 해서야, 대화의 주도권은 바로 상대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제가 만약에 조금만 사사로운 마음을 먹었더라면, 당신은 그것을 위해 훨씬 더 많은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라이카는 그녀의 머리 위를 뱅뱅 돌고 있던 정령을 멈춰 세웠다.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돌돌 말려있던 얇은 종이를 꺼낸 그녀는 무언가를 빠르게 휘갈기더니, 긴 꼬리를 자랑하는 파랑새에의 입에 물게 하고선 편지를 전달해줄 것을 부탁했다.


"아마 그들은 내 숙소 주변에 있을 겁니다. 부탁해요, 진."

"너 정도의 실력을 가진 마법사들에게 전달해주면 되는 거지? 알았어."


휠릴리- 지저귀는 청아한 음과 함께 무지개 색의 긴 꼬리를 단 파랑새는 자취를 감췄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궁금해하는 한 명의 마법사와 한 마리의 황금새에게 라이카는 걱정 말라는 투로 입을 열었다.


"아드리안과 콜 탑주에게는 사정을 일러두었습니다. 진이 조금 칠칠치 못한 면이 있어도 편지 하나는 잘 전달할 수 있는 아이니까요."

"정령으로도... 그런 일이 가능했군요?"


현우는 데미안을 쓱 쳐다보았다.

그 또한 '내가 저런 것도 할 수 있냐'는 둥 전혀 몰랐다는 듯이 부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항변 아닌 항변을 하는데, 서로가 몰랐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서 결국 한 명과 한 마리는 다시 라이카에게 고개를 돌려 설명의 보충을 요구했다.


"정령계와 이곳과의 괴리를 생각했을 때 가능한 비기 중 하나입니다. 무릇 저희 엘리안의 가지들은 정령과의 소통을 타고난 이들, 정령과의 교류와 굳게 맺어진 신뢰를 통하여, 아무리 거리가 떨어져 있다고 해도 하늘을 나는 새들보다도 훨씬 빠르게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답니다."

"엘프들은 통신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 겁니까?"

"통신 마법은 서로 실시간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숲이 많은 데다가 여러 지형이 험하디 험한 저희 공화국에서는 사용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죠."


그녀의 말을 듣고 보니 학회의 주제가 갑자기 머리 속에서 떠오르는 것은 필시 현우 뿐만이 아니리라.

어쩌면 라이카 의장은 일부러 이런 전개를 노리고 학회의 주제를 이쪽으로 유도했을 지도 모르겠다는 의심이 현우에게 일어났지만, 그녀는 그것마저도 이미 눈치채고 있었는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태고의 바람, 이 대륙을 내달리는 가장 강렬한 질풍의 주인께서 그대를 깊게 바라보고 있나니. 날개의 마법사, 그대에게는 제피로스 님의 향기가 꽤나 짙게 배어있습니다. 볼티모어 전 탑주조차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그, 그건... 이런 저런 일들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아무튼, 그대에게는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될 일은 없을 겁니다."


어쩐지 조금 전에, 정확히 말하자면 아직도 따끔거리는 손목 쪽 화상을 얻기 전에 들었던 말과 비슷한 느낌이라고 현우는 생각했다.

과연 이 자를 믿어도 되는 것인가. 그런 의구심에 쉽사리 발을 떼지 못할 즈음 라이카는 도저히 현우로 하여금 그녀를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하는 미끼를 휙 던졌다.


"더불어, 마탑주 회의의 의장은 회의의 안건에 관하여 5년에 한 번씩, 거부권(Vito)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답니다. 그리고 올해까지 세었을 때, 아직 거부권은 사용하지 않았고요."

"...네, 알겠습니다. 알겠다고요!"


거부권이라 함은 무엇에 대한 거부인가.

단순히 현우가 저지른 위반 사항에 대한 처벌을 피하게 해주는 것만이 아니었다.

설사 현우 일행이 갖은 노력 끝에 처벌에 대한 불이행을 이끌어 내었어도, 그것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해버리면 단박에 모든 것들은 무위로 돌아가버린다.


동화에서 보던 엘프들에 관한 묘사는 분명히 옳은 것을 사랑하며 한결같이 선하다고 했거늘, 어째 마드라드에서 보던 친구나 여기 있는 학회장이나 모두들 실속에 밝으며 논리적이지 아닐 수 없었다.

결국 약간 책에 나오던 묘사와 이에 연관된 갖은 이야기들은 호사가들이 자신의 이야기가 널리 퍼지도록 흔히 집어넣는 과장에 불과한 것인가 싶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 모든 것들이 결국 라이카 님, 당신이 감추고자 했던 그 편지와 연관이 있는 건가는 물어볼 수 있겠죠?"

"하하, 글쎄요. 날개의 마법사, 그대는 상관하지 않아도 될 일, 아니, 어쩌면 반드시 들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겠어요. 어차피 모든 것은 어머니 나무의 인도 아래 이루어질 일."


아까 떠올렸던 생각을 현우는 취소하고 싶어졌다. 책에 써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은 아닌 듯 했다.

그러나 그는 더는 무언가 질문을 던져볼 생각을 접은 뒤, 그냥 묵묵히 그녀의 발자국을 쫓아 다시 아직도 입구에 마석등 불빛을 밝히고 있는 여러 천막들과 가건물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이름은 대륙 마법 학회. 하지만 정확히 마법학이라 그어진 학문만 대상으로 하는 학회는 아닙니다.. 명색이 대륙의 이름을 건 만큼 여러 학문과 부류의 마법들을 가지고 갖은 분회가 만들어져 있죠. 마치 마드라드, 대학의 이름 아래 분리된 학부와 학과처럼 말입니다."

"해외에서도 마드라드가 이 정도로 유명할 줄은 몰랐네요."


날개의 마법사는 순수한 감탄을 내뱉었다. 근원이 마탑에서 비롯된 지라 모두가 바람의 마탑만을 일컬을 때, 라이카 의장은 순수한 연구와 교육의 장으로서의 대학을 입에 담았던 것이었다.


"왜 마법의 나라, 마도왕국이라고 다른 나라에서 이오니아를 칭하겠습니까? 마법의 영역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학문의 영역으로 고정시킨 그 성과는 무시할 수 없는 마법사에서의 업적입니다. 엘리안에서도 체계적으로 이를 정리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으니 말은 다 한 셈이죠."

"그렇군요... 새로운 지식을 많이 얻어갑니다."


문득 마음 한 구석이 뿌듯함으로 채워지며 현우는 가슴이 찡해졌다. 절로 피어 오르는 환한 미소는 동행하는 라이카에게도 방울꽃 같이 수수한 미소를 짓게 하였다.


"그래서 설립된 분회라고 해야 할까요, 부설 학회라고 하는 것이 더 명확한 설명이 되겠지만... 아무튼 제가 가고자 하는 곳은 이번 학회의 취지에 맞게 지원을 받아 확장된 정령학회가 열리는 장소입니다."

"그곳에 저를 끌고 가는 이유는 정령사로서 후배에게 주는 어떤 특혜 같은 겁니까?"

"천만에요. 저는 모름지기 학회장이자 마탑주 회의의 의장으로서, 규약을 어겼다는 것이 분명한 용의를 받고 있는 그대에게 어떠한 특혜 같은 것은 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를 그곳에 데리고 가는 이유가 뭡니까, 라이카 의장님."

"그건 알아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확 달아나버릴까도 생각해보았지만, 조금 전 들었던 라이카의 엄포 아닌 엄포가 현우의 발목을 붙들었다.

수틀리면 5년에 한 번 있다는 거부권을 행사해버릴 수도 있다는 협박. 또다시 손목이 묶여 신체의 부자유를 겪는 고난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였기에, 어쩔 수 없는 결과로서 현우는 얌전히 그녀의 옆에 붙어 동행을 마쳤다.


"여기에요, 장."


날개의 마법사로 현우를 불렀던 그녀는 어떤 건물의 입구에 다다르자 그의 이름을 성으로 칭했다.


"두 분이 오셨네요. 뒤따르는 사람들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설마 학회장에서도 남의 뒤를 밟는 사람들이 있을까요. 다행이죠."


이 공간의 문지기임이 분명한 사내가 라이카와 현우를 향해 물었다.

로브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쓰고 있어, 정확한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아니, 사실 마석등 불빛에 의해 전신이 어디 가려진 곳 없이 드러나긴 했으나, 일부러 얼굴만 어둡게 보이는 듯 했다.


"마법? 얼굴을 인식하지 못하게 가리는 마법 쪽인가요?"

"정답입니다, 손님."


사내는 손으로 빙그레 미소를 그리며 현우의 말에 보충 설명을 더했다.


"마법의 범위를 한정된 영역으로만 보는 원리주의자들 중에서는 정령 마법을 고깝게 보는 이들도 있어, 이곳은 참여하는 마법사들의 정체를 숨기는 쪽으로 처음부터 학회의 규칙이 짜여져서 말입니다. 양해해주시길."

"특별한 능력을 타고났거나, 때로는 핏줄에서 그런 능력이 이어지는 만큼 아직 이종족 노예제를 유지하는 국가들의 경우에는 호시탐탐 정령사들을 노리는 경우가 없진 않으니까요."


도리아 제국의 일부, 그리고 모르비스 왕국 등지에서는 아직 인류를 제외한 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이종족들을 노예로 부리는 이들이 남아있다며 라이카가 말했다.

모르비스의 경우에는 마탑주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은 나라 중 하나였으나, 그들을 언급하는 것 만으로도 그녀는 소름 끼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어투 자체가 떨떠름한 느낌을 가득 안고 있었다.


"으음? 조금 전보다 목소리가 바뀐 듯한..."


정령학회의 모임 장소에 다다랐을 때부터 이미 모자를 뒤집어쓰고 있던 라이카는 슬쩍 현우를 향해 눈을 흘겼다.

모습을 서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예의. 그렇다는 건 역시나 익히 알려진 이들은 목소리도 숨겨야 함을 의미했다.

그제서야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현우는 고개를 찬찬히 끄덕이며 사과를 표했다.


"파랑새로 해줘요, 문지기 분."

"네. 알겠습니다, 파랑새 님. 그럼 옆에 계신 분은 무어라 불러드리면 될까요?"

"파랑새?"

"목소리와 얼굴도 숨기는 마당에, 이름을 굳이 드러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조금 전 보았던 그대의 정령 또한 새의 형상을 띠고 있어, 그것을 본 따 부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겁니다."


이를 테면 이곳에서만 쓰는 이명 같은 것이라.

갑작스레 불렀던 정령의 힘. 정령이 흩뿌리는 바람의 가호까지 더해가며 라이카를 찾느라 진이 빠져버린 덕분에 이미 정령계로 돌아간 황금의 새를 떠올렸다.

하지만 데미안은.


'눈에 많이 띄지. 색도 그런 데다가...'


음유시인들이 익히 부르는 데미안의 노래에서 이름을 본떴기 때문에, 그 원전을 아는 이라면 필시 현우의 출신을 알 수도 있었다.

이오니아의 지나간 영화를 그리는 시가를 아는 이라면 결국 그 출신은 뻔하지 않겠는가.

더군다나 자신의 정체를 숨기는 곳에서, 찬란히 빛나는 황금색 깃털을 가진 새라면 더군다나 역효과가 날 것이 분명했다.


"손님?"

"아, 결정했어요."


이미 정령사끼리는 특유의 향이 난다고 하지 않던가.

바람의 정령과 계약을 맺은 사이인 데다가, 라이카 의장 정도의 실력자라면 이미 제피로스가 현우와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았던 만큼, 이번에는 그것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티우, 티우라 불러주세요."


아무도 계약한 적이 없는, 오직 그만이 계약할 수 있는.

자신이 직접 빚어내 세상에 빛을 보게 해준 유일한 정령의 이름이라면 그 누구도 자신의 정체를 눈치챌 수 없으리라.

현우는 자신감에 찬 어투로 자신의 포석을 깔았다.


이 작품은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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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라드의 나비는 폭풍을 부른다 연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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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 217화. 학회의 밤은 길었다(2) 20.04.28 25 0 13쪽
216 216화. 학회의 밤은 길었다(1) 20.04.27 28 0 13쪽
215 215화. 마탑주 회의(2) 20.04.23 25 0 13쪽
214 214화. 마탑주 회의(1) 20.04.22 29 0 14쪽
213 213화. 용의 경고 20.04.21 26 0 13쪽
212 212화. 대륙 마법 학회(3) 20.04.20 23 0 14쪽
211 211화. 대륙 마법 학회(2) 20.04.17 29 0 14쪽
210 210화. 대륙 마법 학회(1) 20.04.16 24 0 14쪽
209 209화. 소환 명령(2) 20.04.15 24 0 14쪽
208 208화. 소환 명령(1) 20.04.14 25 0 13쪽
207 207화. 바람이 분다(5) 20.04.13 25 0 15쪽
206 206화. 바람이 분다(4) 20.04.10 23 0 13쪽
205 205화. 바람이 분다(3) 20.04.09 27 0 14쪽
204 204화. 바람이 분다(2) 20.04.07 29 0 13쪽
203 203화. 바람이 분다(1) 20.04.06 35 0 14쪽
202 202화. 융(3) +2 20.04.03 29 1 14쪽
201 201화. 융(2) 20.04.02 29 0 13쪽
200 200화. 융(1) +2 20.04.01 34 0 14쪽
199 199화. 폭풍은 두 번 몰아치나니(5) 20.03.31 27 0 14쪽
198 198화. 폭풍은 두 번 몰아치나니(4) 20.03.30 28 0 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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