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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임의 글 공장입니다.

싱글벙글 고시원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드라마

완결

홍차임
작품등록일 :
2015.10.23 23:35
최근연재일 :
2016.04.02 21:40
연재수 :
38 회
조회수 :
69,235
추천수 :
969
글자수 :
181,952

작성
16.02.07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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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7
추천
19
글자
11쪽

14화. 꽁지머리 남자와의 화해.

DUMMY

분홍은 콩나물이 몇 줄기 들어가 있는 김치국과 무말랭이 조림, 그리고 오뎅볶음을 철제 식판 위에 떠다가 밥을 먹고 있었다. 아주머니의 심사가 불편하거나 아주 바쁜 날인 게 분명하다. 아주머니의 자랑인 나물반찬도 보이지 않고, 분홍이 여기서 특히 좋아하는 두부부침이나 감자조림도 보이지 않는다.


“나, 아주 그 인간하고 오늘 대판 했어.”


아주머니는 분홍에게 해야할 이야기가 많은지 식탁에서 밥을 먹는 분홍 앞에 의자를 바짝 당겨와 앉는다. 아주머니의 벌건 얼굴과 까맣게 번뜩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분홍은 오늘은 밥을 먹어도 소화시키기는 글렀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외부의 적은 내부 결속을 강화하는 법이다. 남자가 나타난 이후로 아주머니는 분홍의 품에 쏘옥 안겨 버렸다. 분홍을 볼 때마다 첫 마디는 남자에 대한 고자질이다. 분홍은 엄마에게 고자질하는 애기와도 같아지는 그녀가 애처롭기마저 하다.


밥을 먹기 전에 분홍은 맨 끝에 있는 바이올린 방에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꽁지머리 남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안 쓰는 건반 하나를 바이올린 방에 좀 넣어놓겠다고 말했다.


“예, 그러세요.”


분홍은 남자의 얼굴을 본 김에 의견 조정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는 혼자 연습할 때는 피아노 소리가 잘 안 나는 방이라도 개의치 않았다. 단, 학생들을 가르칠 때는 고장난 건반에서 나는 지직- 하는 소리에 괜스레 무안하고 학생에게 미안했다.


“저, 아주머니한테 들으셨을 거는 같은데, 저는 여기 30만원 내고 아무 때나 쓸 수 있게 했는,”

“네, 알아요.”


그는 분홍의 말을 잘랐다.


“하하... 네. 그런데요, 여기 피아노 건반이 한두 개 소리가 안 나는 게 좀 있어요. 그래서, 제가 수업이 있을 때는 모차르트 방을 쓸 수 있으면 좋겠는데요,”

“그건 어렵겠는데요.”

“네?”


‘이 인간이?!’


분홍의 권한은 사실상 자신의 방도 정해져 있고 그 방을 언제든지 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양보하여 때로는 다른 손님에게 쓰던 방을 내어주기도 하고, 가끔은 아주머니의 일도 도와주면서 이만한 권한을 얻은 분홍이다. 물건도 방 안에 놓지 않고 밖에 있는 서랍에 두고 다닌다. 방을 독점하지 않는 분홍은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온 것은 냉대였다.


“다른 손님들도 모차르트 방을 좋아하시는데, 분홍 씨한테만 그 방을 쓸 수 있는 권한을 드릴 수는 없죠. 뭐, 그 방이 비어있다면 들어가시는 거야, 뭐, 그거야, 상관이 없지만, 제가 분홍 씨 수업이 언제인지를 미리 다 알고 그렇게 해드릴 수야 없는거죠. 개인 조교도 아닌데.”


분홍은 억울했다. 잠시 고민했다. 이 새로 나타난 남자에게 이제는 결정적 한 마디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지 않으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다.


“아, 저도 다른 연습실 가고 싶죠. 여기 이래저래 많이 바뀌는 것 같은데... 여기가 집에서도 가까워서 그냥 쓰기로 한 건데, 이거 저도 난처하네요.”


분홍은 캐시 뮤직이 얼마나 손님이 없는 연습실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어떤 날 보면 시끌벅적하지만 그것은 주말에나 한두 번 그럴뿐 평일 낮에는 도서관처럼 조용하다. 그런 상태에서 그 남자가 맺은 조건이 ‘400에 인센티브’라니... 400만원의 매출이 일어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 남자가 분홍이 내는 30만원이 얼마나 큰 돈인지 진짜로 알게 된다면, 분홍이 다른 연습실에 가는 건 막아야 할 것이다. 그걸 아는 분홍이 한 칼을 날린 것이다.


“뭐, 더 편한 데 있으시면 글로 가셔야죠.”


‘이게 뭐라는 거야? 나참, 기가 막혀.’


분홍의 한 칼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지만 캐시뮤직보다 더 좋은 데를 찾지 못한 분홍이다. 그것도 송이 여기저기 알아봐줘서 답사를 가본 것이지 분홍은 새로운 장소를 찾아나서는 일을 싫어한다. 인터넷을 통해서 무언가 알아보는 것도 딱 질색이다. 더군다나 가격표도 따로 없고 음악인들이 주먹구구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은 연습실의 경우는 더 그렇다. 이용 가격을 알아보는 것도, 손님 편한 시간에 답사를 가는 것도 쉽지 않다. 아버지가 병원을 옮기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교통사고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병원을 찾아서 옮겨야 했다. 그때는 분홍도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인터넷을 뒤졌다. 하지만 그때마저도 송이 병원 열 개를 찾으면 분홍은 한두 개 찾을까 말까였다. 캐시 뮤직이 완벽한 연습실은 아니지만, 다른 데를 가봐도 여기보다 좋지는 않았다. 더군다나 여기엔 밥이 있다!


‘그래, 조삼모사고, 아 다르고 어 다른 거야.’


“아, 그러시구나. 근데 사장님, 너무 걱정은 마세요.”


분홍의 부드러운 말투와 ‘사장님’이라는 호칭에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풀린다. 이내 꽁지머리 남자 얼굴에 물음표가 뜬다.


“제가 학생이 많지가 않아요. 하하하하."

"...?"

"다시 레슨을 시작한지가 얼마 안 됐거든요. 아마 수업이 많아봤자 일 주일에 서너 시간밖에 안 될 거예요. 사장님 장사하는 데 지장이 될 정도가 아니예요. 저도 학생좀 많았으면 좋겠는데 그게 쉽게 안 되네요. 호호호.”


각자의 요구 조건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지만, 분홍의 목소리가 완전히 부드러워지자, 마치 두 사람은 요구 조건이 이제야 서로 잘 맞게 되었다는듯이 태도를 바꿨다.


“아휴, 뭐, 서너 시간 정도면, 문제가 없지요. 그리고 제 입장도 좀 이해해 주셔야 되는 게, 손님이 한두 명이 아니고, 또, 여기가 은근 머리가 아파요...... 여자들이 한두 마디씩 하는데......"


남자는 자기가 이런 말을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얼른 함구한다.


"모차르트 방을 다른 손님이 들어가셨는데, 연 선생님 쓰셔야 된다고 제가 다른 손님 나오라고 강제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고요.”

“네, 그렇죠...”

“바하 방 피아노는 괜찮던데, 연 선생님 수업 있으실 때는 거기 쓰시는 것도...”


분홍은 바하 방 피아노 역시 ‘시’ 음이 안 나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저렇게 적군이 화해 제스쳐를 취해 올 때 굳이 입 바른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았다.


“네, 그러지요, 뭐. 하하.”


분홍은 이렇게 분위기 좋을 때 한 가지 더 편의를 확보하고 싶었다. 가끔 급하게 악보를 복사해야 할 때 문방구까지 다녀오는 것이 늘 불편했다.


“저, 그러면 복사기 쓰시던데, 저도 급할 때만 좀 써도 될까요?”


사실, 복사기는 처음부터 캐시 뮤직에 있었지만 슬리퍼 아주머니는 복사기를 사용했던 고시원생의 험담을 자주 했다.


“아니, 양심이 있어야지. 정, 뭐, 꼭 필요할 때는 한 장정도, 뭐, 그러면, 싸비스로 봐주고 할 수 있는 거지만, 그때 남학생 하나가, 여기서 몇십 장을 복사하고 있는 거야. 내가 발견 안 했으면 큰 일 날 뻔했어. 그래서 내가 말했지. 너 여기서 뭐하냐? 아무말도 못하드라고. 지가 양심이 있으면 무슨 할 말이 있겠어. 고시원은 고시원이고, 음악실은 음악실이지, 그러면 되겠어? 장사는 어디 흙 파서 하냐고. 사모님도 그래. 이모, 한 장 정도는 몰라도, 그건 아니야. 그러시더라고.”


고시원생이 지하 연습실에 복사기가 있는 걸 알고 내려와서 쓴 모양인데, 복사기가 보일 때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분홍은 얼어붙어 그 복사기를 쓰기는커녕 손도 대기가 무서워 고개도 복사기 쪽으로 안 돌릴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새로 나타난 꽁지머리 남자가 자주 그 복사기를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내심 그가 부러웠던 것이다. 바로 지금, 꽁지머리 남자가 한결 부드럽게 말을 해오니, 이때다, 싶어 허락을 구한 것이다.


“아, 그리고 저, 에이포 용지는 제가 갖고 있는 걸로 쓸게요. 저 그렇게 염치 없는 부탁은 안 하는 사람이예요.”


남자는 분홍이 센스 있게 말한다 싶어, 흔쾌히 허락한다.


“그러세요, 쓰세요. 뭐, 제 복사기도 아니고...”


그렇다. 분홍은 물론이고, 슬리퍼 아주머니에게도, 그리고 이 남자에게도 이 연습실에 ‘내 것’은 없다. 다 사장님의 것이다. 그리고 분홍은 그 사장님의 얼굴도 모른다. 분홍의 한 칸짜리 서랍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아서 남자를 미워했지만, 내 것이 아닌 것을 사용하고 관리하면서 힘들어하는 처지들만큼은 모두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병상련의 연민이 느껴졌다. 또한, 기왕 여기 캐시 뮤직을 계속 이용할 거라면, 주인장과 잘 지내야겠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짧은 시간의 대화였지만, 분홍은 그가 위축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 캐시 뮤직을 접수하던 날은 위풍당당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남자의 키마저도 첫날에 비해 작아보인다.


분홍이 남자에게 동병상련의 연민을 느끼고 복사기 사용이라는 편의도 한 가지 따낸 지금, 아주머니는 남자 때문에 눈에서 레이저가 나오려고 한다. 분홍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른다.


대체로 아주머니가 증오하는 사람들은 고시원에 머무르는 고시원생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그녀의 남편. 모두들 분홍과는 아무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주머니가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을 욕할 때 분홍은 인간이라는 보편적 존재로서 마음에 상처를 입긴 했지만, 자신의 이익이 크게 침해되는 점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다른다. 분홍은 남자의 파일 만행을 용서하고 화해했으며 이참에 작은 편의까지 확보했는데, 아주머니의 눈은 분홍이 자신의 편이 되어 남자에게 함께 맞서길 요구하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남자였다. 분홍은 아주머니의 시선에 얼굴이 마치 난로에 가열되는 것 같았다.


“아, 네, 지금은 제가 밥을 먹는 중이라서요. 조금 이따가 가서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요.”


분홍은 남자가 과연 무슨 말을 할지 가슴이 쿵쾅거렸다. 오늘 남자와 한판 했다는 아주머니도 예리하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 리얼리즘 코미디, 월세 서바이벌 로맨스 <싱글벙글 고시원>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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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9화. 감자조림. 15.11.29 757 20 12쪽
8 8화. 반값 요금. +1 15.11.08 793 24 13쪽
7 7화. 첫 유혹. +1 15.11.07 1,103 23 7쪽
6 6화. 캐시 뮤직. 15.11.05 1,171 25 1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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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화. 딸랑딸랑 자판기 커피. +1 15.10.25 1,501 29 12쪽
3 3화. 보라색 쓰레빠. +2 15.10.25 1,481 30 8쪽
2 2화. 미숙 씨의 열정. +2 15.10.24 2,457 32 12쪽
1 1화. 7만원의 경건함. +6 15.10.24 5,377 4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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