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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임의 글 공장입니다.

싱글벙글 고시원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드라마

완결

홍차임
작품등록일 :
2015.10.23 23:35
최근연재일 :
2016.04.02 21:40
연재수 :
38 회
조회수 :
69,231
추천수 :
969
글자수 :
181,952

작성
15.10.2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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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글자
12쪽

2화. 미숙 씨의 열정.

DUMMY

이제 연습실은 사전답사를 마쳤으니 분홍은 노래 수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이미숙 씨에게 문자로 캐시 뮤직의 위치를 알려주기만 하면 된다.


분홍이 오래 전 주민 센터에서 가요 부르기 수업을 했을 때 이십여 명의 수강생들 가운데 유독 그녀를 잘 따르던 주부 이미숙 씨. 그녀는 성가대에서 노래를 더 잘 부르고 싶다며 분홍에게 개인적으로 레슨을 받고 싶다고 했다. 실용음악 전공자인 분홍은 사실 이미숙 씨가 개인 레슨을 청해왔을 때 수업을 맡을까 말까 고민을 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노래는 다 같은 것이라고 여기지만 두성을 많이 사용하는 성가대 노래법과 말하거나 외치듯이 노래하는 실용음악 보컬은 발성법에서 많이 다르다. 학생이 발성법의 차이 때문에 혼란에 빠지기 시작하면 강사는 두 배는 더 큰 혼란에 빠져버린다.


그러나 이미숙 씨의 집념은 강했다. 거의 화를 내듯 말하며 분홍의 휴대폰 번호를 알아갔다.


“연분홍 선생님. 안 잡아먹어. 안 잡아먹어. 저기 서예 선생님도 나랑 다 친하게 지내고, 수영 선생님도 나 빠지면 집까지 전화해서 이미숙 씨 왜 안오냐고~ 왜 안 오냐고~ 보고싶다고 다 그래. 내가 좀 분위기 메이커니까. 어허허.”


안 잡아먹는다니 전화번호를 깔 수밖에.


‘내 수업이 좋아서 그러는 걸까. 아니면 새로 선생님을 알아보기 싫어서 그러는 걸까.’


분홍 역시 무언가를 배울 때 배우던 선생님을 떠나서 새로운 선생님을 찾아가는 일이 힘들었다. ‘내가 뭐 얼마나 잘 한다고... 지금 배우는 선생님한테 더 배울 게 많은데...’ 라는 생각과 ‘아냐. 그래도 이건 너무 아니야. 이 선생님을 떠나야겠어.’ 라는 생각 가운데서 결정을 내리는 길은 무척이나 외롭다. 어찌되었건 선생님이란 존재는 배움에 있어서 절대 강자이므로 말이다.


이미숙 씨가 어느날 분홍의 일정을 묻기 시작했다. 자신의 일정을 타인이 아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분홍은 요리조리 답변을 피했으나 ‘열정의 아줌마’는 못하는 것이 없었다. 꼬치꼬치 캐묻더니 분홍이 수업을 하던 학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보름쯤 전이었다. 그날은 아버지가 약을 먹지 않겠다고 투정을 부리다가 버럭 화를 내어서 중국인 간병인의 연락을 받았던 날이었다.


분홍은 송과 함께 휴식 차원에서 인사동을 걷고 있었다. 아버지의 병원에서 딱히 하는 일도 없으면서 병원을 떠나지 못하는 분홍을 보다 못한 송이 그녀에게 잠깐의 일탈을 제안한 것이다. 아버지에겐 간병인이 있어 딱히 그녀가 할 일이 없는데도 분홍은 병원 복도에서, 병원 건물 커피숍에서, 병원 뜰에서, 두려움과 막막함에 쪄든 나날을 반복하고 있었다. 분홍의 가족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대상은 가족의 말을 잘 듣지 않으시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자신의 승용차로 쳤던 왕경자였다.


사죄를 하겠다면서 병원을 찾겠다는 왕경자가 진짜로 올까봐 두려워했다. 분홍의 어머니도, 분홍의 언니도, 분홍도. 말로는 왕경자가 미워서, 반성의 기미가 없어서, 라고 하지만, 반성의 기미가 있었다 한들, 자신의 가족을 차로 치고 큰 수술을 받게 한, 모든 가족들의 정신을 운전대 하나로 날아가버리게 한 그 할머니의 얼굴을 보는 것이 끔찍했다. 분홍의 언니는 왕경자를 이미 만나본 터라 그녀의 후안무치함에 대해서 다른 가족들앞에서 한바탕 성토하였다. 그녀는 왕경자가 반성하게 만들어주겠다고 벼르곤 했지만, 분홍은 ‘반성을 하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반성하게 한단 말이지?’라며 언니의 말에 회의적이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왕경자를 보는 것이 두려웠지만, 그렇다고 간병인만 있을 때 왕경자가 찾아와 아버지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것은 더 끔찍했다. 평생을 누군가를 쉽게 용서했던 아버지가 왕경자를 쉽게 용서해 버리면 고생이란 고생은 죄다 하고 있는 가족들은 아버지를 미워할 것이 분명했다. 그게 분홍으로 하여금 병원을 더욱 떠나지 못하게 했다.


‘내가 여기를 지켜야 해.’


그런 분홍을 병원 밖으로 빼낸 것이 송이었다.


“분홍. 병원에 오래 있으면 병 나는 건 환자보다 가족이야. 한 번씩 바깥 바람도 쐬는 게 좋아.”


그렇게 찾아온 인사동 까페. 그녀는 까페의 나무 의자에 앉자마자 눈을 감고 손을 모아 ‘주의 기도’를 외웠다. 곁에는 송이 있고 가족들도 있지만, 끝도 없는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잠시의 외출도 사치 같았고, 붙잡을 건 주님의 손길뿐이었다. 그렇게 기도를 하면 약간의 안정제가 몸에 들어간 듯 어느 정도의 평화가 오기도 했다.


그때 문자가 왔다.


[ 작은 딸. 얼른 와요. 아버지가 말을 들어지 안아요. ]


중국인 간병인은 문자를 보낼 때 한글자씩 틀리게 보내곤 했다.


둥그런 찻잔에 그득 남은 수정과와 바삭하고 쫄깃한 쌀강정을 아까워할 틈도 없이 송과 함께 병원으로 허겁지겁 달려가니, 간병인은 머리가 아픈 듯 손등으로 이마를 짚고 분홍의 아버지를 등지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가 도무지 약을 드시질 않는다는 것이다. 수술 후 아직 상처가 다 아문 것이 아니어서 다른 약은 안 먹더라도 항생제는 꼭 먹어야 하는데, 자꾸 약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분홍은 두 배의 부담을 느꼈다. 하나는 자식으로서의 부담이고, 또 하나는 컴플레인 하는 간병인에게 해결사 역할을 해줘야 하는 부담이었다. 그 부담을 이겨내지 못한 분홍은 고함을 쳤다.


“아빠, 왜 그래? 가족들 고생하는 거 안 보여? 지금 아빠 때문에 식구들 직장 일도 다 엉망이고 잠도 제대로 못자는 거 안보여? 약 먹는 게 그것보다 힘든 일이야? 어?!”


분홍은 간호사실로 달려갔다.


“의사 선생님이 항생제는 꼭 드셔야 한다고 했는데... 저렇게 약을 안 드시면 저희가 혼나요...”


간호사들에게는 의사의 권위가 왕이라는 말은 익히 들어 알고 있다. 주변의 분위기에 눌려 분홍은 간호사님들께 정말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다시 병실 안으로 돌아왔다. 그냥 가면 계속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 아버지의 마음을 풀어주고 가려고 고심한다. 그러나 마음이 선뜻 내키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병원의 뜰을 한 바퀴 돈다.


'에이. 풀어주면 얼마나 풀어주겠어. 간다고 인사나 하고 수업하러 가는 거지 뭐.'


“아빠. 나 수업하러 갈게. 수업이 너무 많아서 바쁘네.”

“그래, 알았다. 가라.”

“수업 잘 하란 말도 안 해?”

“뭘. 내가 말 안 해도 우리 딸이야 뭐든 잘 하겠지.”


옆에서 얼굴이 벌개져 있던 간병인은 분홍이 수업을 가야한다는 말에 바쁜 사람 불렀다는 미안함이 밀려왔던 것 같다.


“아버지가 다른 것은 다 협조를 잘 한단 말입니다. 하지만 약을 안 드시려고 하여 그게 고충이다. 작은 딸 어서 수업하러 가시오. 고맙습니다.”


그렇게 일을 수습하고 학원 앞에 도착할 때쯤 날은 슬슬 어두워지고 있다.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분홍에게 인사를 꾸벅한다. 자세히 보니 이미숙 씨였다. 주부임에도 생머리를 유지하는 미숙 씨는 어두운 데서 얼핏 보니 학생 같아 보이기도 한다.


“선생님이 워낙 바쁘시니 제가 그냥 학원으로 왔잖아요. 허허허.”


그녀의 중저음 목소리는 중성적으로 들린다. 그녀는 분홍에게 서류 봉투를 준다.


“미숙 씨. 날 찾아주는 건 고마운데요, 그때도 말했지만 저는 전공이 달라서... 노래 강사도 다 자기 전공이란 게...”

“전 그런거 몰라요.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미숙 씨. 허허. 허허허허.”


분홍의 목소리도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 같이 중저음으로 낮아진다.


“제가 수업도 많고요, 아니, 수업도 그렇지만, 아버지도 병원에 계시고, 또...”

“내가 밥을 사주려고 해도, 선생님이 워낙 바쁘신 분이고, 하도 잘 나가는 분이니까 내가 못 사주지. 그럼 연 선생님 바쁘니까 나 바로 가요. 편한 시간을 알려주세요. 내가 요즘 교회일도 한가하니까.”

"아이구, 미숙씨. 저... 연락 드릴게요. 제가 지금은 수업 때문에 바빠서요."

"알아요. 알아."


분홍은 황색 서류 봉투를 들고 학원 건물로 들어가며 생각한다.


‘나도 내가 잘 나가고 바쁜 사람이면 좋겠다.’


분홍이 처음 이 학원에서 보컬반을 열었을 때는 학생이 다섯 명이었다. 학생들은 일 주일에 두 번 학원에 오는데, 하루는 이론 수업 포함 단체 수업이고 다른 날은 개인 레슨을 받게 된다. 다들 처음 들어보는 노래 수업이 재미있다면서 친구도 데려오고 친한 직장 동료도 데려오겠다고 했다. 원장은 의외의 흥행에 분홍을 사랑 가득하게 바라보았다. 실제로 수강생의 소개로 한 명이 더 와서 여섯 명이 되었다. 하지만 학생들에게 ‘2개월 징크스’가 시작되었다. 노래를 잘 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첫 달에는 자신의 의외의 목소리에 감탄도 하고, 노래에 열정을 느낀다. 그러나 대체로 두 달이 되면 다음과 같은 회의가 밀려온다.


‘나는 노래에 재능이 없구나.’


또는 ‘이런 거 할 시간에 실속 있는 영어 공부 같은 거 해야지. 내가 가수 할 것도 아니잖아.’ 라는.


그렇게 한 명씩 떨어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두 사람을 가르치러 들어온 작은 강의실. 학생이 대여섯 명일 때는 제일 큰 강의실을 썼지만, 이제는 원장이 말을 안 해도 분홍이 알아서 작은 방에서 수업을 한다. 그나마 오늘은 한 명이 회사 회식이 있다며 빠졌다. 내성적이고 말을 천천히 하는 회사원 남학생 상연이 혼자서 분홍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조용한 성격의 그는 다른 사람이 빠져서 분홍과 일대일로 수업을 하게 되자 얼굴까지 빨개져서 안절부절한다. 학생들은 처음부터 개인레슨을 시작한 사람이 아니라면, 다른 학생 없이 혼자서 노래 수업을 받는 것을 부담스럽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다.


“상연 씨. 이번 주엔 완전 개인 레슨이네요! 노래 실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뭐니뭐니해도 개인 레슨이 최고예요. 좋게 생각해요, 알았죠?”


분홍은 오늘 하루의 무거움을 모두 떨쳐내려는듯 톤을 높여 경쾌하게 수업을 시작한다.


“어... 아... 네. 저는 노래를 잘 못해서... 방해만 되는 것 같기도 하고...”


한 장짜리 악보를 두 손으로 받쳐들고 더듬거려 하는 상연의 말에 분홍은 기운이 빠진다. 그때 문자 알림 소리가 난다.


[ 선생님. 악보 보셨어요? 형광펜으로 칠해 놓은 데가 제 파트예요. 혼자서는 잘 하려고 해도 안 되네요.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


겁박에 가까운 자세로 분홍을 밀어부치던 미숙 씨가 죄송하다는 말을 하자, 분홍의 마음이 약해진다. 수업을 한들 공짜로 해줄 것도 아닌데 미숙 씨한테서 죄송하다는 말까지 들으니 미안한 맘이 들었다.


‘근데, 악보, 무슨 악보? 아. 이 서류 봉투.’


내려다보니, 미숙이 준 황색 서류봉투가 분홍의 검은색 백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분홍은 이제는 미숙의 제안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한다. 학생이 떨어져나가서 작은 방에서 수업을 하고 있지만 분홍은 그 방의 오래된 업라이트 피아노가 마음에 든다. 전자 건반이 주지 못하는 무거운 터치감이 맘에 들어서이다. 건반에 양손을 올린다.


"자, 상연씨. 목을 좀 풀어볼까요?."

"..."

"힘내요. 상연씨, 노래 많이 늘었어요.”


- 월세 서바이벌 로맨스 <싱글벙글 고시원>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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