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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임의 글 공장입니다.

싱글벙글 고시원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드라마

완결

홍차임
작품등록일 :
2015.10.23 23:35
최근연재일 :
2016.04.02 21:40
연재수 :
38 회
조회수 :
69,232
추천수 :
969
글자수 :
181,952

작성
15.11.29 04:48
조회
756
추천
20
글자
12쪽

9화. 감자조림.

DUMMY

분홍은 걱정이다.


미숙 씨한테 어제 문자를 보냈는데 하루종일 답장이 없더니, 오늘 아침엔 가타부타 다른 말 없이 답장이 ‘네’ 한 글자다.


‘네~’도 아니고, ‘알겠습니다’도 아니고.


늘 ‘내일 뵐게요, 분홍 선생님’ 이라고 먼저 연락을 하던 미숙 씨가 아무 말이 없어서 분홍이 먼저 문자를 보냈던 것이다.


[미숙씨^^ 내일 우리 보는 거지요?]


미숙 씨는 늘 수업 전날 내일 보자며, 먼저 연락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단체 수업이라면 학생 한 명이 빠져도 수업 진행 자체엔 지장이 없지만, 일대일 개인수업인지라 학생이 갑자기 안 오기라도 하면,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된다. 또, 연습실 주인에게도 무안해진다. 그래서 하루 전이나, 당일날 아침엔 수업에 약속대로 오는지 확인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답장이 얼마나 빨리 오느냐 하는 것은 학생이 수업을 빠질 확률이 높으냐 낮으냐 하는 것도 가늠하게 해준다.


답장이 빨리 오면 예정대로 수업이 진행될 확률이 높고, 답장이 한참 있다가 오거나 안 온다면, 강사는 이런 문자를 받게 될 확률이 높다.


[선생님, 죄송해요. 오늘은 빠질 것 같아요. 제가 아무리 바빠도 노래 수업은 안 빠질려구 하는데, 오늘은 시어머님 제사고 집에도 일이 좀 있어서... 다음주에는 연습 많이 해갈게요.]


개인 레슨인데 ‘빠진다’는 표현은 사실 맞지 않다. 단체수업처럼 학생이 여러 사람이어야 빠진다고 표현하는 것이지, 한 명 가르치는 개인레슨에서 빠진다는 것은 사실상 수업을 취소하는 것이다. 그리고 약속한 날짜를 어긴다는 미안함 때문에 학생들은 그 사실을 미리 말해주지 않고 수업 당일에 때론 수업시간이 다 되어 연락을 주기도 한다.


분홍의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미숙 씨는 오늘 어쩐지 ‘수상’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노래를 배우고 싶다면서 분홍을 ‘스토킹’하던 그녀의 열정을 생각하면, 아무리 그래도 수업에 오긴 올 거라는 믿음이 들기도 한다.


손님이 들어오면 어김없이 뒤이어 들어오는 보라색 슬리퍼 아주머니는 오늘도 분홍이 들어선 뒤 얼마 안 되어 나타난다.


“안녕하세요.”

“어, 지비구나!”


아주머니는 마치 분홍임을 추측했다는 톤으로 말한다. 분홍은 아주머니의 말에서 절반의 가식을 느낀다. 그녀는 분명히 분홍임을 알고 뒤따라 내려왔을 거라 생각한다.


분홍은 오늘은 그녀의 잡담을 들어주고 싶지가 않다. 방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지만 미숙 씨도 올지 안 올지 웬지 불안한데 미리 방에 들어가 있다가는 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을 경우 방을 안 쓰게 된 이유를 말하는 것도 민망하고 부담스럽다. 하는 수 없이 검은색 소파에 둘은 나랁히 앉는다.


분홍은 선수를 친다.


“아휴. 오늘 수업 준비를 하나도 안 해서 큰 일이예요. 악보를 좀 봐야겠어요.”


분홍은 수업할 악보를 펼친다. 아주머니는 악보를 힐끔 쳐다본다.


“... 콩나물 대가리!”

"......"

"나는 콩나물 대가리라고 불러."

"하하...... 콩나물 대가리, 맞지요."


분홍은 애써 웃음을 짓는다.


악보는 '콩나물 대가리'로 수놓아져 있지만, 책처럼 읽을 수도 있다. 첫 번째로는 가사를 읽을 수 있다. 노래로 부를 때와 가사로 대할 때 같은 곡이라도 다른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빠른 비트에 신나기만 했던 곡이 가사로 낭독해보면 애절하고 슬플 때가 있다. 또 그저그런 노래도 가사만 따로 읽어보면 명시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학생들한테 이번에는 노래를 부르지 말고 가사로 읽어보라고 말하면, 생전처음 연기를 하라고 시킨 것처럼 당황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이 노래를 잘 못해서 그런다고 생각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하지만 분홍의 경험 상 가사의 뜻을 가슴으로 느끼기 전에 부르는 노래는 어딘지 선명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또, ‘콩나물 대가리’를 읽기도 한다. 분홍은 자주 들어본 노래일수록 부를 때 음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냐면 슬리퍼 아주머니 말마따나 콩나물 대가리, 즉 음표를 신경써서 보지 않고 '그냥 들은대로' 부르기 때문이다.


“기집애들이 문제야.”

“...... 왜요?”


이번에도 분홍은 슬리퍼 아주머니한테 확실히 붙들렸다.


“어휴~ 웬 머리카락을 흘려들 대?! 그리고 막 이불에 묻혀놓으면 역겨워서 원.”

“이불이요?”

“생리 말야!”

“언니가 이불을 다 빨아주세요?”

“미쳤어?! 내가 혼자서 그걸 다 어떻게 빨아줘? 한두 명도 아닌데. 자기가 쓴 건 그동안 고맙습니다아~ 하는 맘으루다가 쫌 빨아서 주면 되는데, 그것도 피나 안 묻었으면 내 말을 않지. 피를 쩌억~ 묻혀설랑은. 쯧쯧쯧.

집에서 배운 거나 고 모양 고 꼴이면, 내 장담을 한다. 어느 집으루다가 시집을 가도 이쁨 못 받어. 우리 어머님은 다른 며느리는 오나가나 아는 체두 안해두, 이제나 저제나 내 편이야, 내 편.”


분홍은 아주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중에도 미숙 씨의 문자 메시지가 맘에 걸린다.


그런 사람이 아닌데, 답장에 고작 ‘네’ 한 글자라니.


그래도 올 거라고 믿고 있다.


'아냐, 오늘은 진짜 안 올 것 같아...'


걱정이 스물스물 마음을 괴롭히고 옆에 앉은 아주머니는 피 묻은 이불 때문에 여학생들을 욕하고 있으니 정신이 사나워진다.


“언니, 학생 올 시간이 다 돼가지고. 죄송해요. 방으로 들어가야겠어요.” 하고 일어선다.


“그래? ...... 나 무지허게 바뻐. 오늘도 3층에 누가 방을 보러 와가지고는 하루 생각해 보고 올게요, 하고 간다. 내가 그치가 다시 안 오면 손에 장을 지지지. 이 동네에서 아무리 뒤져봐. 나물 반찬 해주는 고시원은 여기 하나니까. 아우, 바뻐. 하루가 그냥 지나가지를 않아.” 하며 아주머니는 사라진다.


전자 피아노 앞에 앉아 다시 한번 휴대폰 전원을 눌러 시간을 확인한다. 미숙 씨는 수업 시간이 다 되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분홍은 5분을 기다려보고 전화를 하겠다고 다짐한다.


분홍은 개인레슨은 마치 연애 같다고 생각한다.


학생이 오느냐 안 오느냐에 따라, 그리고 사전에 못 온다고 말을 해주느냐 안 해 주느냐에 따라, 강사인 자신이 바람을 맞느냐 안 맞느냐, 하는 것이 결정이 되기 때문이다.


분홍은 철썩같이 믿었던 미숙 씨한테 ‘바람’을 맞는다.


전화를 두 번 걸었으나 받지 않는다. 잠깐 화가 난다. 그러다가 미숙이 워낙 노래를 배우는 일에 열렬한 사람이라서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갑자기 걱정이 된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아주머니가 늘 이야기하는 밥을 한 번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분홍에게 그렇게 이야기를 많이 하는 것은 한 번 자기가 한 밥을 먹어보라는 제안이 아니겠느냐고 분홍은 강하게 짐작한다.


분홍의 휴대폰에는 보라색 슬리퍼 아주머니의 휴대폰 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캐시 뮤직의 문이 안 열려 있을 때는 그 번호로 전화를 하면 화난듯한 얼굴로 내려와서 열어주곤 했다.


“언니, 저 학생한테 바람 맞았어요.”

“허허... 올라와. 올라와서 밥 먹어.”

“식당이... 몇 층이예요?”


식당 문을 여니 노란색 테이블이 세 개가 놓여 있다. 자세히 보면 노란색 테이블은 서로 조금씩 다른 모양이고 자연히 색깔도 각각 다 다르다. 노란색이지만 서로 같지 않은 노란색.


부조화스러운 모습이 불안한 기분을 준다. 그래도 분홍은 이내 그렇게라도 깔맞춤을 한 고시원 주인의 행동이 정성스러운 것 같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밥을 사먹으로 온 사람들의 식당이 아니다, 여긴. 이 건물에 숙식하는 학생들이 밥을 먹는, 그냥 공용 공간일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곳은 아주머니의 성격대로 아주 깔끔한 곳임엔 틀림이 없었다. 슬리퍼 아주머니는 자신만의 공간에 낯선 이방인이 온 것이 신경이 쓰였는지 이제껏 본적없는 아주 조용한 모습이었다.


“앉어, 거기.”


평소보다 차분한 목소리다.


아주머니는 분홍이 그녀의 반찬을 보지 못했을 때는 식재료를 다듬는 것부터 고시원의 아무개가 어떤 반찬을 많이 먹는지까지 반찬과 고시원생들에 대한 이야기를 끊임없이 하였다. 그러나 막상 ‘손님’의 눈에 자신의 반찬들이 전시되자, 말이 없어졌다.


분홍은 처음 들어와보는 식당이지만, 어떻게 무엇을 담아 먹어야할지 모든 것을 알 것만 같았다. 그녀는 철제 식판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배열된 몇 가지의 반찬을 담았다. 특히 고춧가루를 넣지 않고 간장에만 조린 걸로 보이는, 거무잡잡한 쏘스에 담긴 누런 감자 조림을 많이 담았다.


분홍이 늘 듣던 바에 의하면 여기엔 국도 있어야 했다. 그런데 국은 보이지 않았다.


“밥 옆에 있는 게 국이야.”


그녀는 많은 고시원생들을 관찰한 사람답게 분홍의 마음을 읽었다. 분홍은 얼핏 보고 밥솥이 하나 더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그 밥솥이 국솥이었다.


늘 어떻게 만드는지, 만들려면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듣던 음식을 실제로 입에 넣자니, 분홍은 신성한 의식을 치르는 듯 감개무량했다.


아주머니의 강조 사항은 보통 나물에 있었다. 그게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고시원에 나물 반찬이 있다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런데 분홍에게 감동을 준 건 나물반찬이 아니라 감자 조림이었다.


혼자 해먹는 음식에서 감자란, 자주 먹을 수도 없는 것일뿐더러, 만든다고 한들 감자 볶음이다. 식용유에 감자를 바짝 익히는 것. 감자 조림은 대체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지 분홍에게는 감이 오지 않았다. 시도를 한다고 한들 다 태울 것 같았고, 시간 조절은 어떻게 하는지, 그리고 간장 외에 또 무얼 넣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주머니의 감자조림은 짜지도 않고 단맛도 살짝 어우러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감자가 알맞게 익어 있었다. 설익어 딱딱하지도, 너무 푹 익어 힘이 없지도 않았으며, 무엇보다 만든지 얼마 안 돼서 미끈미끈한 불쾌한 느낌이 전혀 없고 포근포근했다.


분홍의 식판은 거의다 비워졌다. 특히 밥과 감자조림은 싹싹 비워졌다. 조금더 가져다 먹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나 분홍을 쳐다보는 아주머니의 눈빛이 너무나 간절하고 집요하여 그녀는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얼음땡 놀이처럼 그 시간을 '땡' 해 줄 수 있는 말은 하나였다.


“맛있네요.”


아주머니는 그 말을 듣고 마치 어이가 없는 사람처럼 “쳇.”이라고 말했다.


'뭐가 쳇, 이라는 거지?'


긴장이 풀려서 나온 말일 거라고 생각했다. 아니면, 칭찬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 특유의 칭찬에 대한 거부감이거나.


아주머니는 고민꺼리가 있는 표정이었다.

분홍은 그 고민꺼리가 무엇인지 궁금했다.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웠던 아주머니는 다시 식당으로 들어와서 말했다.


“요번 껀 내가 먹으라고 했으니까 그냥 먹어. 그런데, 나도 이게 내 장사 아니니깐 담부턴 이천원씩 내.”


분홍은 맛있어하는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당황했고, 당황한 만큼 얼른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죠, 당연히... 내야죠.”


아주머니는 벽의 한 구석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손끝이 가리키는 데를 보니 [외부인 식사 금지. 단, 가족이 먹을 경우 2천원을 내시요]라고 써붙여 있었다.


믿었던 미숙 씨에게 바람을 맞은 분홍이었지만 감자조림의 맛에 빠져 시간이 아깝지 않았다.


- 월세 서바이벌 로맨스 <싱글벙글 고시원>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고맙습니다. -

분홍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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