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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임의 글 공장입니다.

싱글벙글 고시원

웹소설 > 일반연재 > 로맨스, 드라마

완결

홍차임
작품등록일 :
2015.10.23 23:35
최근연재일 :
2016.04.02 21:40
연재수 :
38 회
조회수 :
69,240
추천수 :
969
글자수 :
181,952

작성
15.10.25 01:14
조회
1,481
추천
30
글자
8쪽

3화. 보라색 쓰레빠.

DUMMY

“분홍아. 들어가서 자. 엄마 왔어.”

분홍은 안 떠지는 눈을 뜬다.


분홍은 지난 밤 엄마가 병원으로 오신다는 걸 오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후회했다. 하루종일 일을 하고 퇴근 후엔 병원으로 와서 주무셔야 하는 엄마의 처지를 생각하면 오지 말라고 한 게 잘 한 일이었지만, 아버지가 분홍을 기저귀 때문에 한 번, 배고프다고 한 번, 한밤 중에 깨우는 바람에 분홍은 오늘도 잠을 완전히 설치고 말았다. 날이 서서히 밝으려고 할 때쯤 까무룩 잠이 들었는데, 그런 분홍이 걱정된 그녀의 엄마가 일찍 병원에 온 것이다.


“몇 시야? 이렇게 일찍 왔어?”

“너 들어가서 자라구. 제대로 잠도 못 잤을 것 같은데. 언니 이따 온다니까 엄마는 그때 또 좀 쉬면 돼.”


분홍은 병원을 나서면서 묻는다.


“엄마, 내가 식사값좀 줄까?”

“괜찮아. 너도 아빠 사고 때문에 돈 많이 썼잖아. 돌아다닐 수 있는 사람 밥값은 쓰지 말자. 병원 식당에 미리 말하면 공기밥은 하나 더 주잖냐. 간식도 이것저것 좀 챙겨왔어.”


간병인을 구하는대로, 엄마의 고생도 분홍의 고생도 일단락되겠지만, 가족들이 직접 간병을 하고 있는 지금은 너무나 힘든 시간인 것은 틀림 없다. 간병이 필요한 환자를 가족이 간병하려면 가족 중 한 사람은 완전히 생업을 포기해야 한다. 아니면, 분홍처럼 직장을 다니지 않는 사람이 간병을 맡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24시간 간병은 일반 사람들에겐 쉬운 일이 아니기에, 다른 가족 누군가는 또 교대를 해주어야 한다.


분홍은 집으로 돌아와 익숙한 냄새가 나는 이불에 코를 박고 한 잠을 잔다. 병원의 딱딱한 보조 침대에서 자다가 집에서 잠을 자니 피로가 연기처럼 훨훨 풀린다. 한참을 자고나니 눈이 떠진다. 방 천장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한다.


‘누가 실크 벽지를 해달랬다고...’


분홍이 혼자 살면서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집을 구할 때 집의 크기보다, 집이 새 집이냐 오래된 집이냐 하는 것보다, 심지어 직장에서 얼마나 가까운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는 사실이었다. 바로 집주인이 사람 같은 사람이냐 하는 것이다. 이사 갈 때 집을 보러 다니면 안 되고, 집주인을 보러 다녀야 한다는 게 그녀가 뼈저리게 느낀 점이었다.


그렇게 분홍이 면접을 보아서 합격시킨 집주인이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집주인이었다. 두 달에 한 번 내야 하는 수도 요금도 젊은 사람들은 아침 잠이 많다면서 새벽에 와서는 조용히 문에 붙여 놓고 가는 성품의 노인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많다보니, 어두운 색의 천장 벽지를 해놓으시거나, 칙칙한 커튼을 걸어놓아 젊은 세입자를 난감하게 하는 면도 있었다.


누워서 올려다 보고 있는 천장 벽지는 어두운 회색인데, 처음 이사 올 때 주인 할아버지에게 너무 색이 어두우니 바꿔달라고 했더니 실크 벽지라서 비싸고 좋은 것이며 거의 새것이나 다름 없으니 그냥 쓰라고 했다. 주인집 할아버지를 생각하다보니, 캐시 뮤직 입구에 누워있던 심한 아줌마 파마의 할머니가 떠올랐다.


답사를 가서 위치는 알아 놓았지만 피아노를 직접 쳐보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미숙 씨 첫 수업 하는데 피아노가 잘 안 켜지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불안해졌다. 다시 시작하는 개인 레슨은 분홍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학원의 보컬반은 이제 학생이 두 명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나마도 그중 한 명은 회사일이 바쁘다고 우는 소리니 언제 폐강이 될지 모른다. 또 가끔 하는 출강도 일정치 않아 고정적인 수입이 되지 않는다.


다른 사람 뒤에서 코러스 하는 것도 자존심 상했고, 가수가 되지 못하고 강사로 살아가는 것도 때론 자존심 상했다. 주부 교실에서 트로트를 가르쳤던 일도 때론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 간병비를 보태야 하고, 헐렁한 바지를 입고 간병인 노릇을 하다보니, 벼랑 끝에 선 듯 분홍의 안에 찬밥 더운밥 가리지 않는 근성이 타오르게 되었다.


늘 답장만 겨우 해주었던 주부교실 미숙 씨에게 처음으로 분홍이 먼저 연락을 했다.


[ 미숙씨. 수업 시작해요. 이번 주도 괜찮아요. ]


개인 레슨은 학원이나 주민센터에서 수업하는 것보다 시간당 페이는 오히려 더 높다. 단, 연습실도 분홍이 직접 구해야 하고, 연습실 사용료도 부담해야 하며 (물론 학생의 수업료를 받아서 지출하는 것이지만) 학생들이 약속한 수업 시간을 자주 변경하기 때문에, 분홍의 생활이 다소 불규칙해지는 면이 있다는 것도 분홍은 알고 있다.


캐시 뮤직은 첫 번째 방문 때와는 달리 다소 활기가 있었다. 방 안에서 노래하는 소리도 들리고, 무엇보다 그때 보았던 할머니 곁에 또 한 명의 아주머니가 있었다. 같은 점은 할머니는 이번에도 팔을 배고 누워있다는 점이다.


“안녕하세요. 지난 번에 보고 갔던...”

“어? 그런가? 어... 본 것 같네.”


셀프로 운영되고 후불제라는 이 연습실은 어떻게 된 게 점점더 주인장의 수가 많아졌다. 그것도 연습실에 그닥 어울리지 않는 할머니와 아주머니. 처음 보는 아주머니는 다리를 꼬고 앉아 위에 얹혀진 다리를 까닥까닥 흔들고 있었고 발 끝에는 보라색 화장실용 벙어리 슬리퍼가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때 한 눈에 봐도 레슨 강사와 그녀의 제자로 보이는 두 사람이 방에서 나왔다.


‘어. 저 방이다.’


분홍은 냉큼 그 방으로 들어간다. 피아노를 이번에도 못 켠다면 낭패인 만큼 누가 썼던 방에 들어가서 그대로 사용하려는 것이다.


방으로 들어가서 가방을 내려놓고 피아노를 살피는데 슬리퍼를 까닥이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열린 문 틈으로 들려온다.


“만육천원. 그리고 아가씨. 기다리는 학생들은 여기, 밖에, 여기 소파에서 기다려야지, 다른 방에 척 들어가 있고 하면 안 돼.”


“네가 그랬어?”


강사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들린다.


“아뇨...”


기어들어가는 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내 두 사람이 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하이고. 싸가지가 저렇게 없어서야. 나참. 저 년은 나를 맨날 보면서 인사도 안 해. 나쁜 년. 아니, 지가 뭔데 방을 두 개나 써, 쓰기를.”


“그랬어? 나쁜 년이구먼.”


“할머니, 수업을 기다리면 밖에서 소파에서 기다리든가 학생이면 시간을 딱 맞춰서 오든가 해야되는 거 아니예요? 나는 고등학교 댕길 때 반에서 시간약속을 제일 잘 지켜서 우리 선생님이 나를 얼마나 이뻐라 했는지 몰라.”


“응. 지비가 똑부라지제.”


“내가 누구냐고 하니깐, 말도 싸가지가 없어. 선생이 인사도 안 하고 저렇게 못돼 먹으니깐, 응?! 학생이라는 것도 배우는 것도 그 모양이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얼굴에는 화장까지 떡칠을 해가지고 요로~케 꼬나보면서, 왜요? 수업 있는데요. 이러고 지랄이예요, 할머니.”


“못 된 년이구먼.”


‘아. 잘못 온 건가? 다른 연습실 가야 하나? 아, 그래도 여기가 병원에서 한 번에 오는 버스도 있고. 지하철 역 근처고, 좋은데...’


분홍은 전자 피아노 앞에 털썩 앉는다. 고민하면서 손가락을 움직이니 스피커를 통해 제법 맑은 소리가 흘러나온다. 방문을 닫으면서 생각한다.


‘아유. 난 몰라. 그냥 여기서 할래. 내가 지금 집주인 구하는 것도 아닌데 뭐.’


- 월세 서바이벌 로맨스 <싱글벙글 고시원> 다음 화로 이어집니다. 감사합니다. -

보라색.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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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8화. 반값 요금. +1 15.11.08 793 24 13쪽
7 7화. 첫 유혹. +1 15.11.07 1,104 23 7쪽
6 6화. 캐시 뮤직. 15.11.05 1,172 25 13쪽
5 5화. 나를 훔쳐보는 너의 둥근 눈. 15.10.27 1,301 26 9쪽
4 4화. 딸랑딸랑 자판기 커피. +1 15.10.25 1,502 29 12쪽
» 3화. 보라색 쓰레빠. +2 15.10.25 1,482 30 8쪽
2 2화. 미숙 씨의 열정. +2 15.10.24 2,457 32 12쪽
1 1화. 7만원의 경건함. +6 15.10.24 5,377 48 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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